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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오프사이드]‘조광래 만화축구’, 한국 축구의 근대성을 넘어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입력 : 2011-01-24 21:23:14ㅣ수정 : 2011-01-24 21:23:19

“조광래 감독의 수는 읽을 수가 없다.”

누구의 말인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차범근 해설위원이 지난 일요일 새벽 이란과 맞붙은 운명의 아시안컵 8강전을 중계하면서 한 말이다. 그 순간, 숨가쁘게 전술 지휘를 해야 했던 조 감독으로서는 차 위원의 이 찬사를 들을 수가 없었겠지만 나중에라도 한 번쯤 인사를 해도 좋을 일이다. 왜 그런가? 차 위원의 이 찬사는 지난 30여년 동안 선수와 감독으로 협력과 경쟁의 길을 걸어온 입장에서 건넬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평가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찬사가 경기 시작 초반에 나왔다는 점이다. 전·후반에 연장전을 더하여 120분을 다 치르고 나서 덕담으로 건넨 것이 아니라 경기 초반에 차 위원은, 그야말로 바둑의 <현현기경>이나 <관자보>에서나 나올 법한 조 감독의 현묘한 판세 형성을 상찬하였으되 실제 경기에서 조 감독은 거의 1분 단위로 천변만화의 사활진법을 펼쳐 결국 1 대 0의 끝내기를 이뤘다. 윤빛가람의 골이 터지는 순간 차 위원은 “선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조 감독의 골”이라고 말했다.

“아니, 이것은 만화영화에서나 가능한 전술이잖아요?”

누구의 말인가? 현 대표팀의 최고 테크니션으로 통하는 이청용이 지난해 10월 파주트레이닝센터에서 한 말이다. 조 감독이 세밀하고 복잡한 도상학을 설명한 후 그것을 실전에 흡사한 훈련으로 담금질을 하였고, 그 전술의 핵심이 되는 이청용은 어렵사리 고난도의 새 진법을 몸으로 익힌 후에 “이것은 만화축구에서나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화축구가 실현되고 있다. 예컨대 ‘미들라이커’ 기성용이나 이용래가 볼을 잡았을 때 지동원과 구자철이 순간적으로 선후관계를 바꾸고 동시에 이청용과 박지성이 좌우의 대각선으로 X자를 그리며 빠져나간다. 물론 이것은 상대 수비수와의 역학관계 그러니까 위치, 거리, 높이, 볼스피드, 체력, 오프사이드 여부 등에 따라 역으로 움직이거나 절반만 가동될 수도 있다. 유효한 전술적 상황에서 대여섯 명이 공간을 찾아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게다가 좌우 측면으로 이영표와 차두리까지 오버래핑으로 가담한다. 이를 두고 이청용은 ‘톱니바퀴’라고 표현했다. 상대 공격 시 이 진법은 데칼코마니가 되어 탄탄한 수비진용으로 역회전한다. 만화영화도 이런 수준의 만화영화가 달리 없다. 더욱이 실전이라니!

조 감독은 2010년 7월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세밀한 패스워크에 따른 공간의 확장’이라는 개념을 천명했다. 아시안컵 첫 경기 바레인전에서 한국이 시도한 패스는 321번이었고 바레인은 145번이다. 두 배가 넘는데, 그 성공률 또한 79%이다. 이는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우승한 스페인의 평균 패스 성공률 80%에 육박한다.

이러한 유기적 플레이는 공격 전술의 다변화라는 일차적 목표에 더하여 시너지 효과를 창출한다. 우선 심리적인 안정감이다. 유효 패스각을 확보하기 위해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다 보니 설령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더라도 어김없이 달려와 구출해 줄 동료가 반경 5m 안에 있다. 긴급상황이 발생하여 하는 수 없이 텅 빈 공간으로 내질러도 반드시 그 공허한 지점으로 누군가 달려간다. 그라운드를 효율적으로 안배하며 선점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조 감독의 그라운드는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확장된 지평이 된다.

다음으로 섬세한 패스워크에 따라 경기 전체의 밸런스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이란과의 8강전에서 놀라웠던 것은 연장 종료 때까지 우리 선수들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후반 지나 연장에 들어가면 눈앞의 공을 보면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던 안타까운 일이 많았다. 그런데 달라졌다. “힘으로 안되면 악으로 깡으로?” 아니다. 그와 같은 한국 축구의 근대성을 반드시 넘어서야 하고 그것을 조 감독이 기술(볼키핑, 패스, 밸런스)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공의 주체가 되어 달리는 것과 그것을 뒤쫓아서 뛰는 것은 체력 저하에 현격한 차이로 나타난다.

오늘 밤, 일본과의 준결승전이 펼쳐진다. 아마도 우리는 패러다임 혁신을 완성해가는 조광래 축구를 오늘 밤이 아니라 결승전이 펼쳐지는 주말까지 만끽하게 될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현현기경> 수준의 ‘조광래 만화축구’는 체력과 근성이 지배하던 한국 축구의 근대성을 뛰어넘는 비범한 도전으로 반드시 기억될 것이다.

이상한 모자

2011.01.24 23: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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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친구들과 만나면 할 수 없이 축구 얘기를 하게 된다. 허정무 이후에 '배PD'라는 별명의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일이 있다. 이 친구가 나름 스포츠광이라 차기 국대 감독에 대한 얘길 안 할 수가 없었는데, 그때가 김호니 차범근이니 익숙한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을 때다. 배PD왈, '조광래가 해야돼.' 나는 조광래가 누군지도 몰랐다. '조광래가 누군데?', '경남 감독인데 똘아이 기질이 있어.' 그 말을 듣고 집에 와서 기사를 검색해보니 조광래 유치원이니 뭐니 참 재미있는 인물인것 같더라. 머리는 좋은 양반인데 그동안 좀 비주류의 길을 걸어서 피해의식이 있는듯 보였다. 하여튼 뭐, 지금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으니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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