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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한윤형의 '안티조선운동사'를 읽고

조회 수 2592 추천 수 0 2011.02.17 00: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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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험을 공유하는 시대에 일어났던 가장 뜻깊은 정치적 사건은 아마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이었을 것이다. 노무현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우리는 노무현이라는 커다란 기준에 의해 재단당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노무현 세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87년의 유산을 왜곡된 형태로 끌어안고 386세대가 만들어 놓은 운동질서 안에서 방황하는 세대였던것 같다.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세대 구분의 중심에는 늘 그 핵심을 관통하는 담론이 있었다. 386세대의 담론은 아마 NL, PD로 대표되는 소위 사회구성체론이었을 것이다. 이 논쟁을 통해 생산된 여러 논리들이 그들의 삶과 운동을 규정했다.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친일행위에 대한 비판이나 통일의 당위를 신념으로 삼는 부분 등이 그렇다. 담론은 역사를 관통하는 것이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눈 앞에서 당장 존재하지 않는 논의들은 그저 짐작하거나 열심히 추리를 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386세대가 자기 이전 세대들의 논의를 자기들 식으로 비틀었듯이 우리 세대 역시 87년을 그저 상상할 뿐이었다.

안티조선운동은 87년의 유산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세대의 담론이기도 했다. 386세대는 제각기 놓여진 입장에 따라 안티조선운동을 달리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세대가 안티조선운동을 대했던 태도와의 어떤 간극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안티조선운동을 판단할만한 어떠한 경험적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안티조선운동이라는 담론에 그냥 내던져졌다. 이를테면 어느날 갑자기 손석춘의 '신문읽기의 혁명'이 필독 교양서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후의 상황은 우리가 알아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노무현 지지자'가 되었다. 나처럼 우연치않게 진보정당운동의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 경우에, 혹은 87년 담론의 역사를 끈덕지게 쫓아가 올라가다가 어떤 의구심을 스스로 발견한 사람들의 경우에야 흔히 말하는 진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한윤형이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과 같이, 안티조선운동의 정치적 결실은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이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안티조선운동은 실패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운동에 있어서 최초의 실패는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어떤 급진적 시도들이 전 시대 담론의 흔적으로만 존재하고 이후 나타난 운동 주체들에게 올바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386세대들은 우리에게 어떤 담론의 맥락도 성실히 제공해주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들의 논의를 활자의 형태로 만드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를 통과하고, 자신들의 이념을 스스로 부정하고 폐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를 겪고 나서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를 전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들이 철저하게 실패했노라고,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남겨줄 것은 이런 것밖에 없다고 고백해야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똑같은 입장에 처했을 것이다. 노무현이 실패했다는 것, 자신들이 지지했던 친노세력이 '폐족'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언론개혁운동에 부끄러운 상처만이 남고 말았다는 것을 어떻게 그리 쉽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역사는 발전해야 하고 운동은 전진해야 한다. 민주-개혁 세력의 어떤 '확신범'들은 자기 갈 길을 가야 하겠지만 운동의 담론 속에서 형성된 가엾은 주체들은 그들도 모르는 그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여전히 앞으로의 한 발짝을 내딛어야 한다. 되풀이 되는 실패는 냉소와 무기력만을 재생산할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2008년의 촛불시위를 통하여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찾게 되었다. 무기력과 냉소에 젖어 눈을 감고 있었던 정치적 주체들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동안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세대도 광장에 등장했다. 이들에 대한 많은 의미부여가 있었지만 실상은 이들도 우리가 안티조선운동의 맥락 속에 어느날 내던져졌던 것과 마찬가지의 처지일 것이다. 아마도 386세대에게 1987년의 경험이 그러했듯, 그리고 우리 세대에게 2002년의 경험이 그러했듯, 그들의 삶을 규정할 촛불의 경험은 안티조선운동의 맥락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운동의 어떤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한윤형의 작업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마치 노무현의 실패를 보상받으려는듯 민주-개혁 정부의 수립에 끝없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노무현의 실패를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노무현 세대의 담론이 무엇이었는지, 이 운동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디서 실패했는지, 남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의 친구이기도 한 저자 한윤형이 안티조선운동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였을 때의 나이가 열 아홉이었다. 그리고, 이제 10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안티조선운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한윤형은 홀로 이 운동을 기록하고 평가하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그는 안티조선운동의 당사자의 일원으로서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 시선으로 최대한의 합리적 근거들을 활용하여 이 운동의 흐름을 성공적으로 정리해냈다. 부디 이 책이 이전 세대에게는 어떤 반성적 기록으로, 새로운 세대에게는 잘못된 길을 가지 않기 위한 길잡이로 올바르게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잊지 말아야 한다.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과거를 잊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첫번째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말이다.

이상한 모자

2011.02.17 01:43:39
*.208.114.70

리뷰를 썼는데 반응이 안 좋군요. 오늘부터 이 홈페이지 이름은 안티조선운동사는 언제나 시기상조 입니다.

고타소

2011.02.17 01:45:09
*.74.234.238

책 읽어봐야겠네요

고르고18

2011.02.17 11:28:10
*.140.196.49

글 좋네요.

cimen7

2011.02.17 12:38:01
*.108.137.173

홈피가 느려서 그래요. 공감합니다.

조갑제의회개

2011.03.14 18:37:00
*.149.40.249

깔끔하고 좋은 리뷰네요. 한윤형씨는 정말 정리의 신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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