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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이딸리아 좌익의 재결집
사회주의자와 생태주의자의 정당을 향해

2007년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 열린 이딸리아 피렌쩨에서 열린 '좌파민주주의자Democratici di Sinistra: DS'의 제4회 전당대회는 중도우파와 통합해 '민주당Partito Democratico: PD'을 건설할 것을 압도적인 다수당원의 지지로 결정했다. 이로서 서구에서 가장 거대한 공산당이었던 '이딸리아공산당Partito Comunista Italiano: PCI'은 그 명맥이 완전히 끊기게 됐다.

모든 당원이 참여한 총투표에서 193,784명(75.5%)은 민주당 건설에 합류하자는 다수파의 안을 지지했다. 민주당으로의 합류를 거부한 좌파연합은 당원 38,757명(15.1%)의 지지에 그쳤다. 민주당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신당이 반드시 '유럽사회당PES'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중도파는 24,148명(9.4%)의 지지를 얻었다.

민주당은 같은 해 10월 14일 옛 올리브동맹을 구성하던 8개 정당이 모여 건설됐다. 참여한 정파들은 중도우파, 자유주의자, 사민주의자들로 좌파민주주의자는 이들 중 가장 왼쪽의 정파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당의 모델은 다름 아닌 '미국 민주당'이다.

모스크바에서 워싱턴까지

잘 알려져 있듯이 이딸리아공산당은 1991년 '좌파민주당Partito Democratico della Sinistra: PDS'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현대화된 노선을 채택했다. 전성기보다 많이 축소됐다고 하지만 좌파민주당 첫해의 당원수는 989,708명이었다. 후에 '재건공산당Partito della Rifondazione Comunista: PRC'을 만들게 되는 좌익반대파 당원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그러나 한번 발동이 걸린 우경화의 흐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좌파민주당'은 1998년 2월 소규모 중도좌파정당을 통합해 '좌파민주주의자'로 이름을 바꿨다. 1991년 공산당이라는 이름은 버려도 당의 상징에는 남겨두었던 옛 공산당의 문장, 낫과 망치도 이 때 장미로 교체했다.

결국 '좌파민주주의자'는 2007년 '민주당'으로의 변신을 통해 이름으로만 남아있던 '좌파'라는 정체성을 포기했다. 공산주의자로서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미국민주당에 대한 이딸리아 좌파의 짝사랑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었다. 민주당의 서기장으로 선출된 발터 벨트로니Walter Veltroni는 15살에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면서 당에 투신한 고참공산주의자였다. 1992년 좌파민주당의 기관지 루니따L'Unità의 편집장으로 취임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케네디주의자'라고 답했다.

좌파민주당 서기장으로서 좌파민주주의자 건설을 주도했던 마시모 달레마Massimo D'Alema는 민주당 구상이 현실화되기 이전인 90년대부터 이미 이딸리아 정치가 중도우파-중도좌파의 양당제 구도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당' 건설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벨트로니, 달레마, 안또니오 바졸리노Antonio Bassolino같은 좌파민주당 우파지도부는 90년대 내내 같은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 소속인 영국의 블레어 총리보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에 더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로마노 프로디Romano Prodi 전총리는 2005년 중도좌파선거동맹인 '연합L'Unione'의 총리 후보 선출을 위해 미국식 예비선거제도를 도입했다. 또 그가 만들었던 정당 '민주주의자I Democratici'는 아예 대놓고 당나귀를 당의 상징으로 사용했을 정도다.

민주당은 아직 유럽의회내 정당그룹과 국제연대조직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좌파민주주의자의 마지막 당대회는 민주당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할 가능성을 이미 배제했다. 다정파가 모인 구도상 쉽게 국제조직을 선택하지는 못하겠지만 결국 '유럽민주당PDE-EDP'에 참여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유럽민주당은 지난 프랑스 대선에 출마했던 중도 우파 프랑소와 바이루François Bayrou가 만든 정당 '민주운동Mouvement Démocrate: MoDem'이 주도하는 연합체로 국제적으로는 '민주동맹Alliance of Democrats'이라는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민주동맹에는 미국 민주당의 '신민주당연합New Democrat Coalition'이라는 정파가 동참하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92년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제3의 길' 그룹이다.

코민테른에 기원을 둔 공산당 중 자본주의 진영 안에서 가장 강대한 조직을 건설했던 당의 후예들이 찾은 탈출구는 다름 아닌 미국식 정치모델이었다.

민주당에 반대한 좌파의 이탈

좌파민주주의자의 피렌쩨 당대회에서 민주당 합류에 반대했던 좌파연합은 대회가 끝난 직후 탈당해 2007년 5월 5일 새로운 정당인 '민주좌파Sinistra Democratica: SD'를 건설했다. 좌파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을 거부했던 이들의 주장에 동조했던 당원들이 함께했으며 1명의 장관, 12명의 상원의원, 21명의 하원의원, 4명의 유럽의원이 동참했다.

당의 대표는 프로디 내각에서 장관을 지냈던 파비노 뭇시Fabio Mussi가 맡았다. 이외에도 옛 공산당의 유명한 서기장이었던 엔리꼬 베를링게르Enrico Berlinguer의 동생인 죠반니 베를링게르Giovanni Berlinguer도 동참하고 있다.

창당대회에서 발표된 신당의 강령을 보면 민주좌파는 완성된 정당이 아니라 정치운동으로 정의되며 목표는 모든 이딸리아 좌파의 결집이다. 민주좌파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도기로서 정의된다.

이는 공산당이 좌파민주당으로 전환할 당시 이에 반대하면서 떨어져 나온 재건공산당의 초기 목표와 유사하다. 재건공산당도 초기에는 자신들을 완성된 정당이 아니라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세력의 규합보다 자기 스스로의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결국 이름에 '당'을 덧붙였다.

하지만 민주좌파가 재건공산당과 같은 길을 걸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재건공산당이 목표와 달리 외로운 길을 오랫동안 걸어야 했던 것과 달리 민주좌파는 다가오는 총선에 대응하기 위한 좌익신당 결성에 성공했다.

'무지개좌파'당의 결성

2007년 12월 8일과 9일 로마에서는 민주좌파, 재건공산당, '이딸리아의공산당Partito dei Comunisti Italiani: PdCI', '녹색당Federazione dei Verdi: Verdi'이 모여 연합정당 '무지개좌파La Sinistra-l'Arcobaleno'를 출범시켰다.

다양한 정파가 모인 좌파-무지개는 에스빠냐의 '통일좌파Izquierda Unida: IU'와 같은 '당들의 당' 수준의 통일성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다가오는 선거를 위한 연합체 성격이 짙지만 연합을 주도하고 있는 민주좌파와 재건공산당은 통합정당 건설의 의지가 높다.

신당은 46명의 상원의원, 93명의 하원의원, 13명의 유럽의원이 소속돼 있으며 창당대회는 특이하게 "좌파와 생태주의자들의 대회L'Assemblea della Sinistra e degli Ecologisti"라고 이름 붙여졌다. 대회장에는 이딸리아 좌익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고참공산주의자 삐에뜨로 잉그라오Pietro Ingrao가 9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또한 이딸리아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좌파민주당의 초대 서기장으로 한동안 정계를 떠나있던 아킬레 옷케또Achille Occhetto가 지지와 입당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지도부는 각 정당의 대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재건공산당의 지도자였으며 지금은 하원의장을 맡고 있는 파우스또 베르띠놋띠Fausto Bertinotti는 뿔리아주지사인 니키 벤돌라Nichi Vendola가 신당의 통합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벤돌라는 강경한 공산주의자이며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에 성실한 카톨릭신자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정치인이다.

당의 상징은 이름에 맞게 무지개를 형상화하고 좌파는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적색으로, 무지개는 생태주의를 상징하는 녹색으로 처리했다. 상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공산당들은 이딸리아 좌익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낫과 망치를 넣을 것을 요구했고, 녹색당은 '생태주의'라는 문구를 넣을 것을 요구해 대회 3일전까지 결정을 못하다가 무지개로 최종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무지개빛 미래가 펼쳐질까

그러나 신당의 앞길에 무지개빛 양탄자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모여든 정당들의 색깔이 너무 다양하다.

기원을 따지면 재건공산당, 이딸리아의공산당, 민주좌파 모두 옛 공산당에 뿌리를 둔 정당이지만 벌써 20년 전 이야기이다. 지도부를 구성하는 고참들은 옛 공산당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젊은 활동가들이나 의원들은 역사책을 통해서만 배웠을 뿐이다.

유럽의 정치세력들이 중시하는 유럽정당 가입문제도 걸림돌이다. 재건공산당과 이딸리아의공산당은 '유럽좌파당Party of the European Left'에 가입해 있다. 민주좌파는 '유럽사회당PES'소속이며 녹색당은 당연히 '유럽녹색당European Green Party' 소속이다. 에스빠냐 통일좌파IU가 여러 정당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유럽좌파당에 소속되어 있는 것과 달리 무지개좌파는 국내에서는 통합을 이룰 수도 있겠지만 유럽의회 안에서는 당 소속의원들이 서로 다른 교섭단체에 몸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정책의 통일성이다. 이미 창당대회 때부터 몇 가지 쟁점사안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유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적인 정책뿐만 아니라 정치현안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2008년 1월 프로디 정권이 위기에 몰렸을 때 정권에 대한 지지 여부를 놓고 민주좌파와 재건공산당은 다른 입장을 제출했었다.

무지개좌파 내부의 최대주주인 재건공산당은 최근 당의 우경화 문제를 놓고 분열을 겪었다. 중도좌파 진영 내부에서 민주당 구상이 논의된 것은 길게는 10여년 전이지만 통합이 현실화 된 것은 2006년 4월 총선 이후다.

토론과정에서 민주당 건설 문제를 놓고 좌파민주주의자 당내부의좌우파가 격돌하면서 분열의 가능성이 점차 고조됐다. 베르띠놋띠와 재건공산당의 다수파는 좌파민주주의자 당내 좌파가 떨어져 나올 경우 오랜 숙원이었던 '좌파통합'을 성사시킬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통합을 위한 사전정지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당 정책을 보다 오른쪽으로 옮겨서 좌파민주주의자 이탈파와의 접점을 만들고 공동활동의 기회를 늘리기 위해 프로디의 중도좌파정권에 참여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후자를 위해서는 이라크전쟁에 대한 당의 일관된 입장을 수정하기도 했다.

당 내부에서는 베르띠놋띠의 다수파에 대항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롯한 좌파들이 1년이 넘게 지도부에 대해 논쟁을 제기하고 당내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당권파는 밀어붙이기를 통해 무지개좌파를 탄생시켰다. 결국 좌파 내 최대 그룹인 '비판적 좌파Sinistra Critica'는 1월 전국총회를 개최해 재건공산당 탈당과 반자본주의좌파의 광범위한 결집을 위한 운동을 선언했다.

좌파와 우파의 득표율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딸리아 정치구조도 문제다. 무지개좌파가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면서 중도좌파를 압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우파정권의 출현을 막기 위해 무지개좌파가 민주당과 연합할 것을 당 안팎으로 강요받을 것이다. 이는 재건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반신자유주의 정책과 사회대안들을 끊임없이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길이다.

인민의 상상력을 모아 만드는 '제헌 회의'

1991년 옛 공산당의 전환 이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진행된 이딸리아 좌익운동은 이제 무지개좌파와 비판적 좌파 두 개의 흐름으로 정리됐다. 물론 민주당을 더 이상 좌파정당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무지개좌파는 사민주의자부터 공산주의자까지 모든 좌파정당을 통합한다는 오랜 꿈을 실현하는 출발점이다. 반면 이름그대로 비판적 좌파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흐름을 대변한다.

1월 창립총회에서 비판적 좌파는 재건공산당의 경험과 다양한 사회운동의 영역을 결합해, 무지개좌파의 왼쪽에 반자본주의 좌파연합을 재건할 것과 함께 반자본주의 제헌회의l'assemblea costituente를 제안했다.

대회 결의문에 따르면 제헌회의는 민중의 평의회로 다음 세가지 목표를 가진다.
1) 노사협조주의를 거부하는 노조 활동가 급진적인 여성주의자, 생태주의 운동, 청년운동 같은 사회운동의 주체와 그들의 역동성을 상호 연결한다.
2) 중도좌파정부로터 독립성을 유지하고 민주당에 반대하는 가운데 우익에 대응하는 사회적 대안을 제시한다.
3) 선거에 불참하지는 않지만 제도화된 정치활동으로부터 자주성을 견지한다.

제헌회의라는 이름으로 인해 레닌주의의 단순 반복으로 오해받을 수 있겠지만, 이들의 주장은 반신자유주의 운동정당모델을 정립하고 이를 가장 잘 실천했다고 평가받았던 재건공산당의 경험과 유럽사회포럼의 교훈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아직은 선언 단계인 만큼 구체성보다는 추상성이 더 강하지만 인민의 집Casa del Popolo 운동 같은 창의적인 활동이나 전설적인 공장평의회 운동처럼 기층대중운동이 다른 유럽 보다 활발했던 이딸리아인 만큼 전세계적으로 정체상태에 있는 반세계화운동에 새로운 탈출구가 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이딸리아의 좌익들은 이제 새로운 실험의 길에 올라섰다. 그 출발에 박수만 보낼 것이 아니라 한국의 좌익들은 지구 반대편의 동지들에게 무엇으로 화답할지 고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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