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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원작성자 : 장석준 
번역자 :  
게재 : 이론과 실천 2002년 8월 
변방에서 미래를 준비하다 - 1912~14년의 볼셰비키
                                                                     
이제는 레닌과 볼셰비키 이야기만 나오면 다들 “그 정도는 예전에 다 뗐다”는 분위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레닌과 볼셰비키의 역사는 더 이상 되씹을 필요가 없을 만큼 우리 몸의 영양분으로 이미 다 흡수되어 있는 걸까? 이 글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결코 레닌도, 볼셰비키도 “다 뗀 게” 아니다. “의회를 선전·선동의 연단으로 활용한다”는 익숙한 명제조차도 1912년~1214년 사이에 볼셰비키가 실제 보였던 역동적인 실천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의회 참여’를 촉구한 혁명가 레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초기 발전 과정과 멘셰비키(소수파), 볼셰비키(다수파)로의 분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가장 좋은 정리로는, 토니 클리프, 『레닌1: 당 건설을 향하여』, 책갈피. 가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1905년 혁명의 한 복판에서 시작된다. 혁명의 물결이 파고를 높여가던 1905년 5월, 불리긴 수상은 타협책으로 의회의 신설을 공표했다. 그것은 서유럽 수준의 대의기구가 아니라 짜르의 자문기구에 불과한, 극히 제한되고 왜곡된 형태의 의회였다. 자유주의 정당인 카데츠(입헌민주당)와 보조를 같이 하던 멘셰비키는 이 의회가 설립될 경우 이에 참여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적극적인 보이콧을 주장했다. 혁명이 노도와 같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전술이었다. 하지만, 1906년 4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레닌은 태도를 바꾼다. 그는 선거와 의회에 참여하자는 멘셰비키안을 지지했다. 이는 그가 속한 볼셰비키 분파의 대다수 대의원들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 때쯤에는 이미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레닌은 이런 상황에서는 대중이 관심을 갖는 정치 영역에 참여하여 대중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긴요한 과제라고 보았고, 그래서 보이콧 전술에서 참여 전술로 선회한 것이었다. 간접 선거에다 신분별로 꾸리야(선거구)를 따로 꾸려서 지주 한 사람의 표가 노동자 45명의 표와 같은 비중을 가지는 지극히 반민주적인 선거 제도(우리 나라의 유신 국회와 가까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06년 4월에 열린 초대 두마(러시아의 의회) 선거에 대한 사회민주노동당의 최종 결정은 ‘불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 방침에도 불구하고 당원 일부가 개별적으로 선거에 참여하여 14명이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명맥한 당 규율 위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이들이 의회에 남아 당 의원단으로서 활동할 것을 지지했다. 이후 1910년대 초반까지 레닌은 볼셰비키 내에서 선거·의회에 대한 불참과 의원단의 해체를 주장하는 극좌적 흐름과 투쟁하는 데 거의 모든 활동을 바쳤다.  1907년 3월의 제2대 두마에서는 사회주의혁명당(러시아의 독특한 농촌사회주의자들의 당), 사회민주노동당, 트루도비키(농촌에 기반을 둔 혁명적 민주주의파 의원 블럭) 등 광범한 좌파가 대거 진출해 전체 의석의 35%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자 스톨리핀 수상은 그 해 6월 3일, 돌연 의회 해산을 공표하고 더욱 개악된 선거법 아래서 제3대 두마 선거를 실시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3대 두마는 전제군주정의 강화를 주장하는 극우 10월당이 지배하는, 반동파 다수의 의회가 되었다. 1912년에 3대 두마가 5년의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두마 선거가 닥쳐왔을 때, 사회민주노동당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각자 자신의 중앙위원회를 갖는, 사실상 두 개의 서로 다른 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개의 지역에서는 아직 같은 지역위원회(광역지부)에 혼재해 있었지만, 수도인 페체르스부르크에서는 각각 독자적인 지역위원회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볼셰비키는 최초로 자신의 전략 구상에 따라 의식적으로 제도권 진출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 정당의 후보를 의회로!

마침 러시아에서는 1909년 불황이 종식되고 호황이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억눌려 있던 노동자·민중이 새로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10년 반체제의 상징이 되어 있던 대작가 톨스토이가 사망하자 짜르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는 다음해 초 동맹휴업으로 발전했다. 1911년부터는 노동자 파업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12년 4월 4일 시베리아의 레나 금광에서 헌병대가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5백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새로운 파업 물결의 도화선이 되었다. 레나 학살에 대한 항의 파업에만 40만 노동자가 참여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4차 두마 선거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1912년 1월의 프라하 회의에서 볼셰비키는 당 선거 강령과 방침을 확정했다. 볼셰비키는 당 강령에 명시된 “민주공화제”, “8시간 노동”, “지주 토지의 완전 몰수”를 선거 공간에서 가감 없이 주장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카데츠 등과의 협력을 위해 선거 강령의 수준을 낮추려 한 멘셰비키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새로운 합법대중신문의 창간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그 해 4월, <프라우다(진실)>가 창간됐다. 이 신문은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비록 8번이나 이름을 바꾸어야 했지만, 1914년 7월에 폐간되기까지 꾸준히 발간돼 지령 645호를 채웠다. 레닌은 이 신문의 창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이 신문의 편집을 위해 원래의 망명지 파리에서 러시아 국경에 인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크라코우로 이사했다. 당은 이외에도 <프로베쉬치이녜(계몽)>와 <소치알 데모크라치(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이론지를 따로 발간했고, 합법 출판사도 운영했다. 1905년 혁명 당시 사회민주노동당은 한때 15만명 규모의 대중정당으로 성장했었으나, 혁명의 실패 이후 다시 전반적인 비합법 상태에 내몰리면서 당원수가 줄었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경우, 이탈한 당원이 주로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원수의 절대적 감소는 노동자 당원의 상대적 증가라는 결과를 낳았다. 지식인이 주도하던 1905년 이전의 볼셰비키가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A.바다예프가 회고하는 것처럼 “당에 지식인이 너무 없어서 일하기 힘들다”고 불평해야 할 정도로 볼셰비키는 명실상부한 노동자 정당이었다. 4차 두마 선거는 당국의 유례없는 감시와 기만 속에 진행되었다. 물론 애초에 지주 꾸리야, 도시 꾸리야, 농민 꾸리야, 노동자 꾸리야를 나눠서 지주 꾸리야나 도시 꾸리야에서는 수백명의 의원들을 뽑는 반면 노동자 꾸리야에서는 전국에 걸쳐 단지 6명의 의원만 뽑게 되어 있는 선거 제도 자체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더구나 선거인단을 뽑으면 이 선거인단에서 곧바로 의원을 선출하는 다른 꾸리야들과는 달리 유독 노동자 꾸리야에서만 공장·직장별로 대표자를 뽑고 다시 이 대표자 가운데에서 선거인단을 뽑는 2중 간선제를 실시했다. 이는 공장 단위로 노동자들을 쉽게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예로, 현재의 공장에 입사한 지 6개월이 넘지 않은 노동자에게는 대표자 선출권을 주지 않았다. 또한, 도시 꾸리야에서도 일정 액수 이상의 재산세를 내는 부르주아지만 자동으로 유권자 명부에 등록되고, 나머지 계급은 자신이 직접 관청을 방문해 유권자 명부에 등록해야 했다. 그리고, 경찰에서 자의적으로 요주의 인물 명단을 작성하여 여기에 기재된 사람들은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이로 인해 95%의 유대인들(대개 사회민주노동당 지지)이 배제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볼셰비키는 모든 노동자 꾸리야에 독자 후보를 내었다. 그리고, 다른 꾸리야에서는 극우파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한 경우에 한해 트루도비키나 카데츠와의 협력을 허용했다. 당이 비합법인 상태에서 <프라우다> 사무실은 사실상 합법정당의 중앙당 사무실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이 쉽게 찾아와 논쟁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했으며, 선거운동 기간에는 선거본부 사무실로 쓰였다. <프라우다>는 선거 기간 내내 기권방지운동을 벌여, 도시 꾸리야의 민중들로 하여금 반드시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고 주위의 친지들에게도 등록을 권유할 것을 호소했다. 노동자 꾸리야의 선거운동 과정은 노동자 대중 사이에서 벌어진 좌파의 격렬한 논쟁, 그것이었다. 우선 사회주의혁명당은 선거 보이콧을 주장하면서 사회민주노동당과 싸웠다. 다음으로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도 멘셰비키는 인물 중심의 선거 전략을 내세운 반면 볼셰비키는 당의 통제에 충실히 따르는 노동자 후보를 주장하여 논쟁을 벌였다. 또한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는 무소속 후보들에 대해서 사회민주노동당 후보들은, 노동계급의 강령을 주장하고 노동자들의 집단적 통제 아래 놓이는 노동자 정당의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대중에게 설득했다. 선거일인 10월 5일의 아침은 파업 투쟁과 함께 시작됐다. 당국이 각 공장에서 선출된 상당수 대표자들의 자격을 박탈하자 페체르스부르크의 거대 제철공장인 푸틸로프 공장에서 1만4천명의 노동자 전원이 파업에 돌입하고 여기에 네프스키 조선소의 6만5천 노동자가 합류하여 페체르스부르크 전역에 총파업이 벌어진 것이다. 이 파업이 열흘간 계속되자 정부는 일단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10월 14일 20개 공장에서 대표자를 재선출하게 했다. 러시아 정부의 극악한 탄압이 선거와 대중행동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양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볼셰비키 후보의 당선에 유리한 영향을 미쳤다. 4대 두마의 구성 자체는 3대 두마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전체 442 의석 중 10월당의 의석은 102석에서 120석으로 오히려 늘었고, 카데츠도 제2세력의 지위를 유지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12석에서 단지 2석만이 늘어 14석이었고, 사회민주노동당의 주요 동맹 세력인 트루도비키는 14석에서 오히려 10석으로 줄었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전국의 6개 노동자 꾸리야에서 당선자 전원이 볼셰비키였다. 노동계급이 250만인 나라에서 볼셰비키는 114만 4천명의 노동자 유권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멘셰비키는 14인의 사회민주노동당 의원 중 7인을 배출함으로써 의원단 구성상으로는 다수였지만, 도시 꾸리야에 속한 13만 6천명의 노동자 유권자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군다나 볼셰비키는 페체르스부르크의 중화학공업과 모스크바 섬유공업의 신흥 산업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반면, 멘셰비키는 전통적인 숙련노동자들의 지지에 기반했다. 6인의 볼셰비키 의원 전원이 산업노동자들로서, 4명이 금속노동자였고, 2명이 섬유노동자였다. 수도 페체르스부르크의 당선자인 바다예프도 기관차정비공장의 노동자였다.(모스크바 노동자 출신 당선자인 R.말리노프스키는 후에 비밀경찰의 첩자임이 드러났으나, 볼셰비키의 의원단 통제가 워낙 엄격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당활동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제4차 두마에서의 볼셰비키 의원단의 활동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당선자들은 일단 사회민주노동당 통합 의원단을 구성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볼셰비키 의원들은 원내 활동과 대중 투쟁을 긴밀히 결합해야 하다는 레닌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당대 서유럽의 노동자 정당들과는 달리 볼셰비키는 원내 활동이 대중 투쟁에 오히려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당조직에 대한 의원단의 철저한 종속, 기관지와 의원단 활동의 결합, 원내 연설과 당 기층조직의 대중 선동의 결합 등을 강조했다. 더군다나 당시는 노동자 투쟁이 부활하는 중이었다. 페체르스부르크 의사당 내의 활동과, 의사당으로부터 불과 몇㎞ 떨어진 이 도시의 대공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쉽게 절묘한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시절이었다. 4차 두마 개원일인 1912년 11월 15일에도 흑해 선단 선원들의 사형선고에 항의하는 3만 노동자의 일일파업이 벌어졌다. 두마 안에서 노동자 의원들은 기득권 계급의 거만한 유력 인사, 현학자들 사이에 포위된 느낌이었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 앞에서 노동자들의 열망과 의지를 제대로 대변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너무도 컸다. 독자적인 법안의 관철은 애당초 불가능했고, 유일한 연설의 기회는 대정부 질의뿐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대정부 질의를 하려면 33인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트루도비키뿐만 아니라 일부 자유주의 의원들의 협력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들은 원내 활동과 <프라우다>, 그리고 활발한 노동자 투쟁을 결합해서 효과적인 정치활동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회보험(의료보험) 투쟁이었다. 러시아에서는 1912년 6월에 사회보험이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는 전체 노동자의 20%만을 포괄하는 것이었고, 보험위원회에 대한 노동자 대표의 참여도 극히 제한적인 수준에서만 인정됐다. <프라우다>는 사회보험의 확대와 완전한 노동자 통제권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이를 1912년 12월 14일의 대정부 질의에서 주장하기로 하고, 각 공장에 지지 파업을 호소했다. 과연, 대정부 질의일에 6만6천명의 노동자들이 지지 결의를 발표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볼셰비키는 이후에도 사회보험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1913년 10월부터는 <보프로시 스트라호바니야(보험의 문제들)>라는 전문지를 따로 발간했다. 그리고 보험위원회에 다수의 볼셰비키 지지 노동자들을 노동자 대표로 진출시켰다. 전쟁 이후 당 의원단조차 비합법화된 상황에서도 70인의 보험위원 중에 39인이 <보프로시 스트라호바니야>를 지지함으로써 사회보험기구는 당의 합법 공간으로 기능했다. 당의 3대 선거 강령으로 내세운 8시간 노동제의 경우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프라우다>와 그 사무실을 매개로 노동자 조직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이를 통해 현장 노동자들의 여망을 담아 8시간 노동 입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물론 이는 보나마나 부결될 게 뻔했지만, 부결 자체가 보수세력의 실상에 대한 살아 있는 폭로이고 선동이었다. 1912년부터 계속 고양된 자발적 노동자 투쟁들에 대한 결합은 수도 없었다. 1913년 여름 장장 102일간 지속된 레쓰네르 공장의 노동자 스트론긴의 의문사 진상규명 요구 파업을 비롯해서 수많은 해고 반대·산재 항의 파업들에 노동자 의원들이 연대했다. 의원들은 대정부 질의에서 노동 탄압에 항의하거나 장관 항의 면담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공장 정문 앞 연설, 가두연설을 통해 투쟁 상황을 알리고 파업기금을 모금했다. 아마도 <프라우다>라는 매체가 없었다면, 이런 효과적인 정치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수 신문들은 노동자 의원들의 활동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라우다>가 있었기 때문에 원내에서의 노동자 의원들의 발언과 폭로, 장관 면담 결과는 곧장 노동자들에게 알려지고 전파될 수 있었다. <프라우다>는 절반 가량이 신문팔이 소년에 의해 가두 판매되었고, 절반은 공장에서 팔렸다. 하루 4만~6만부가 판매되었고, 매일 35개 정도의 노동자 투고가 들어왔다. 이는 그야말로 “노동자들의 살아 있는 토론 광장”(레닌)이었다. 이제까지 당이나 노동조합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노동자들이 <프라우다>의 기사를 보고 사무실에 찾아와 노동자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각종 조직에 가입했다. 또한 <프라우다>는 정기구독자 조직, 후원회원 조직을 만들었고, 이들 조직은 사실상 합법대중정당의 기능을 했다. 후원 조직 면에서 멘셰비키의 신문 <루취(빛)>는 <프라우다>의 비교가 될 수 없었다. 페체르스부르크의 노동조합 18개 중 15개, 모스크바의 노동조합 13개 중 10개가 <프라우다>에 대한 적극 지원을 통해 볼셰비키와 연결됐다. <프라우다>의 영향력을 놓고 보면, 당시 볼셰비키는 250만의 노동계급 중 수천명의 간부와 3만~5만의 당원을 거느린 대중정당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볼셰비키는 또한 노동자 의원들의 지역구 활동을 강조했다. 의회 휴회 기간 동안은 반드시 지역구를 순회하면서 공장과 지역에서 의정 활동을 설명하고 지방 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보내는 게 당의 방침이었다. 노동자 의원들이 방문한 후에는 대개 파업 투쟁이 분출하고, <프라우다> 구독자가 늘고, 당조직이 강화되었다. 페체르스부르크가 지역구였던 바다예프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나를 종종 방문했다. 특히 월급날에는 파업유지기금을 가지고 왔다. 방문객을 접대하는 일 외에도 나는 …(중략)… 파업기간 중에 해고된 사람들을 위해서 일자리를 찾는 일, 체포된 사람을 위해서 장관에게 청원하는 일, 추방생활을 위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조직을 꾸리는 일 등을 해야 했다. 파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에는 활력을 불어 넣어주어야 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도움을 주어야 했으며 소책자를 인쇄하고 배포해야 했다. 무엇보다 나는 노동자들과 개인적인 문제를 상담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종종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중략)… 열을 지어 계단에서 기다려야 했다. 투쟁의 모든 성공단계, 새로운 모든 파업은 노동자와 의원단 간의 더욱 밀착된 연대와 대중조직의 발전을 상징해주는 이 대열의 길이를 늘려놓았다."

- A. 바다예프, 『볼셰비키는 의회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 116쪽


전쟁으로 ‘잠시 중단된’ 1914년 7월의 파업투쟁

카데츠와의 협력에 목매달던 멘셰비키 의원들은 이러한 활동들을 이해하거나 여기에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결국 1913년 가을,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는 의원단까지 따로 꾸리게 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이제 완전히 두 개의 당으로 분열된 셈이었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일고 논쟁이 벌어졌지만, 적어도 페체르스부르크의 선진노동자들은 대체로 볼셰비키 의원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멘셰비키 의원단이 지리멸렬하다가 결국 1914년 1월 자진 해체한 것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행동의 자유를 확보한 볼셰비키는 1914년을 힘찬 도전으로 시작했다. 3월에 볼셰비키 의원단이 유럽의 다른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군비를 증강하려던 원내 보수세력간의 비밀협상을 폭로하자, 3만명의 노동자들이 항의 파업을 벌였다. 4월에는 멘셰비키 츠헤이드제 의원이 원내 발언 때문에 기소될 위기에 처한 사건을 계기로, 볼셰비키, 멘셰비키, 트루도비키 의원들이 서로 연대해 의원 면책 특권을 지키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좌파 의원들은 이 법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예산 심사의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전술을 펼쳤다. 마침 당시는 <프라우다> 창간 2주년 기념호가 13만부 팔려 나가는 등 파업 물결이 한창 고양되던 무렵이었다. 예산 심사를 막던 좌파 의원들이 의회에서 강제 퇴장 당하자 4월 23일 항의파업이 벌어졌고, 이는 다시 5월 1일 메이데이 파업으로 발전해 페체르스부르크에서만 25만명이 참여했다. 그 해 여름에 시국은 1905년 혁명 당시의 대중파업을 방불케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론』에서 관찰했던 것처럼, 파업 투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면 투쟁은 빠르게 지역 차원의 총파업으로 발전했고, 이는 정치투쟁으로까지 발전했다. 7월 1일, 바쿠 유전 파업에 대한 무력 진압 항의 집회를 벌이던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2명이 경찰의 발포로 숨졌다. 7월 7일, 이에 항의해 13만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이 벌어졌고 수도는 마비됐다. 이 날은 유럽에 드리운 전쟁 위기 속에서 프랑스 대통령 포앵카레가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의 동맹 관계를 과시하기 위해 러시아의 수도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이틀 후인 9일에는 9년 전의 바리케이트가 페체르스부르크 거리에 다시 등장했다. 흔히 ‘혁명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었다고 평가되는 1914년 7월 파업투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열흘 후 러시아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마저도 이 전쟁은 일단 파업투쟁의 느닷없는 중단을 가져왔다. 이미 7월 8일, 경찰은 <프라우다> 사무실을 급습하여 강제 폐간시켰다. 그러나 7월 파업투쟁의 돌연한 중단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의원단의 반응은 대부분의 서유럽 노동자정당 의원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전시동원령이 선포되자마자 의원단은 곧 반전성명서를 채택했고, 전쟁예산 투표에 반대해 전원 퇴장했다. 세르비아 사회당과 함께 이는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의 의원단이 전쟁에 반대한 단 두 개의 예외였다. 볼셰비키 의원단은 이후 원외 투쟁에 주력하다가, 그 해 11월 결국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형에 처해진다. 볼셰비키당의 합법 투쟁은 일단 정지되었다. 하지만, 과연 이게 끝이었을까? 레닌은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할 것이다. <프라우다>로부터 교육받은 수천명의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집단을, 새로운 러시아 중앙위원회를 일으킬 것이다."

- 위의 책, 278쪽


투쟁의 파고 속에서 전쟁을 맞았던 이 나라는 불과 3년만에, 단순히 당중앙위원회를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세계 전쟁을 끝마칠 세계 혁명을 잉태하고야 만다.

변방에서 준비된 미래 - ‘혁명적 의회주의’ 

의회민주주의가 뒤늦게 제한된 형태로 도입된 러시아에서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는 제도권 정치에 붙박인 서유럽의 노동자 정당들과는 다른 정치활동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는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또한 러시아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들 한다.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이 허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파업이 쉽게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수도에 대규모 공단이 형성되어 있어서 원내 투쟁과 파업 투쟁이 지리적으로 쉽게 결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노동자 정당들이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에 손을 들어주고 1차 대전 후의 세계자본주의의 불안정 속에서 무력함을 드러내자, 볼셰비키의 실천은 서유럽에서도 하나의 대안으로 대두됐다. 국제사회주의 운동은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로 양분됐고, 서유럽 사회민주당의 좌파들은 우파와 분리하거나 탈당해 공산당을 새로 건설했다. 세계자본주의의 변방에서 노동계급 정치운동의 새 시대가 준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유럽이 주목해야 할 변방의 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당시부터도 커다란 이견이 있었다. 많은 서유럽 극좌파들이 1905년 혁명 이전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무엇을 할 것인가?』)을 역사적 맥락에 관계없이 도입하여 소규모 선전주의 정파로 자족하는 데 대해, 레닌은 이미 1920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에서 따끔한 비판을 가했다. 그 때 그가 주로 제시한 볼셰비키의 역사적 경험은 바로 1912~1914년 연간의 그 실천, 즉 제도권 정치활동과 대중 매체, 대중 투쟁을 결합시켜 대중이 변화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거대한 과정을 촉진했던 그 실천이었다. 

"만일 1908~1914년에 합법 투쟁형태와 비합법 투쟁형태를 결합해야만 한다는 관점, 그리고 심지어 가장 반동적인 의회와, 반동적인 법률로 포위된 숱한 다른 기구들(보험금고 등)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관점을 가장 강력한 투쟁 속에서 고수하지 않았더라면 볼셰비키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핵심을 (강화, 발전시키기는커녕) 보존할 수도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32쪽


1920년 당시 코민테른은 이를 ‘혁명적 의회주의’ 노선으로 정리하여 제시했다(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2회 대회, 「공산당과 의회주의에 관한 테제」, 부하린 기초, 편집부 편역, 『코민테른 자료선집 1』, 동녘, 1989. 307-9쪽). 하지만, 선거·의회 투쟁과 대중 투쟁의 결합이 러시아에서보다는 미국과 유럽에서 훨씬 더 어려운 과제임에 분명하다는 레닌의 선견지명처럼,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셰비키 실천의 진정한 혁신 지점을 제대로 구현해낸 노동자 정당의 사례는 흔하지 않았다. 왼쪽(극좌 선전 집단으로의 길)과 오른쪽(제도권 내 활동에 함몰되는 길)의 함정은 결코 머리와 종이 위에서 극복될 수 있는 무엇은 아니었던 것이다. ―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1912~1914년의 레닌과 볼셰비키’는 ‘이미 넘어선 과거’는 아니다. 서구와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새롭고 범상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이지 않으며 출세주의적이지 않은 의회정치를 만들어낼 줄 알아야만 한다. …(중략)… 이런 작업을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하기란 아주 어렵다. 너무나,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그 작업은 수행할 수 있고 또 수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인용자] 노력 없이는 공산주의의 과제 일반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용자] 갈수록 다양해지고 사회 생활의 모든 부문과 갈수록 더 밀접해지고 있으며 한 부문씩 한 분야씩 부르주아지로부터 빼앗아와야 하는 실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위의 책, 110~111쪽)

주로 참고한 책들 

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김남섭 옮김, 돌베개, 1989. 
V. I. 레닌, 不破哲三(후와 데츠지, 일본공산당 전 서기장) 엮음, 『레닌의 선거와 의회전술』 Ⅰ,Ⅱ, 편집부 옮김, 백두, 1988. 
A. 바다예프, 『볼셰비키는 의회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 이덕렬 옮김, 들녘, 1990.
토니 클리프, 『레닌1: 당 건설을 향하여』, 이태섭 옮김, 책갈피,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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