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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원작성자 : 진보정치연구소 
번역자 :  
게재 :  
당직공직분리제 검토 보고서 

이 보고서는 대안적인 진보정당 모델을 수립하기 위한 진보정치연구소의 2005년 연구 작업의 한 부분으로서, 민주노동당의 현행 당직공직분리제에 대해 평가하고 이후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굳이 당직공직분리제에 대한 부분을 미리 다루기로 한 것은 마침 당 조직 재편의 일환으로 당직공직분리제에 대한 검토와 논의가 요구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 안팎에서는, 특히 언론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의 당직공직분리제 제정 취지와 과정, 그리고 현재 민주노동당의 문제들과 그것의 관련성에 대해 일정한 오해가 나타나고 있다. 이 보고서는 특정한 대안을 권하기보다는 당직공직분리제에 대한 논의가 보다 건설적인 방향에서 이뤄지도록 오해를 불식하고 풍부한 자료와 논점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한국 정당사 초유의 실험 - 당직공직분리 

1) 당직공직분리제의 근본 배경 

당원 토론을 통한 당 제도 설계. 민주노동당은 2003년 중앙위원회 산하에 당발전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임박한 원내 진출에 대비해 당의 노선과 사업방향, 각종 제도에 대한 당내 토론을 시작했다. 국회의원이 선출직 집행 당직(최고위원, 광역시도당 위원장 등)을 겸직하지 못한다는 당직공직분리제는 이 과정에서 기성 보수정당과는 다른 진보정당의 원칙과 지향을 펼치기 위한 여러 방안 중 하나로 제안된 것이었다. 당발전특별위원회의 보고서와 그에 입각한 당헌 개정안은 2003년 11월 1일 임시당대회에서 채택되었다. 다만, 당직공직분리제는 당규 개정과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에 이후 중앙위원회 안건으로 이월되었다. 2003년 당발전특별위원회의 활동은 당원들의 아래로부터의 토론을 통해 당 제도를 설계하고 결정했다는 점에서 한국 정당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구나 원외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정당이 원내 진출을 목전에 두고 원내 진출 이후의 활동 방향과 당내 제도를 의식적으로 토론·결정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원외 생성 정당의 원내 진출로부터 비롯되는 요청.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순수하게 원외의 사회적 토대로부터 탄생한 정당이 원내로 진출한 것은 한국 정당사상 민주노동당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원외의 사회적 토대를 원내의 활동과 괴리시키지 않고 원외 정당 시절의 장점을 계속 확대·발전시키는 방안들이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일정한 시사를 던져준 것 중 하나가 바로 독일 녹색당이 창당 때부터 최근까지 20년 넘게 실시한 당직공직분리제였다. 독일 녹색당 역시 민주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원외의 사회운동으로부터 탄생하여 사회운동의 쟁점들을 핵심 정책으로 내걸며 원내에 진출한 정당이라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중요한 참고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7대 총선의 특성. 17대 총선 구도를 결정한 것은 16대 국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투표 가결과 이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반대·적극적 저항이었다. 여기에는 대의제의 본질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깔려 있었다. 탄핵 절차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정치 엘리트들은 헌법기관으로서 국회·국회의원의 자율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국회·국회의원이 대의기관으로서 국민의 의사를 정확히 반영해야 한다는 명령적 위임(imperative mandate)의 원칙을 더 중요시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7대 총선 과정에서 거의 모든 정당들이 국회의원 국민소환제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이지 않을 없었던 것은 당시의 이러한 여론 때문이었다.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더욱 강했다. 그래서 당직·공직자에 대한 당원소환제를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했고, 당 소속 공직자들이 당·당원의 지휘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거듭 강조되었다. 17대 총선 이후 중앙위원회에서 당직공직분리제가 가장 엄격한 형태로 채택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2) 당직공직분리 제정 과정에서의 논란 

당직공직분리 제안에 대해서는 2003년 당발전특별위원회 토론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17대 총선 직후까지도 찬성 입장과 반대 입장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각 입장의 주요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① 당직공직분리제 찬성 

①-1. 원외의 원내 통제론: 원외 지도부가 의원단을 지휘·통제해야 한다. 


진보정당은 평당원과 사회운동 중심의 정당이어야 한다.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에도 원외의 평당원과 노동자·민중운동이 당 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평당원과 노동자·민중운동의 입장을 대변하는 원외 지도부가 의원단을 지휘하고 통제해야 한다. 

의원단의 과도한 권력 집중을 견제해야 한다. 당이 원내에 진출하고 나면 국회의원에게 급속히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의 1기 국회의원이 소수이기 때문에 이러한 권력 집중은 더욱 더 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이 조기에 원내정당화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당 지도부와 의원단을 분리하고 원외 지도부가 우위에 서게 해야 한다. 

의석이 소수인 상황에서는 대중운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의석이 소수일 수밖에 없는 17대 국회 상황에서 당이 자신의 공약을 실현하려면 대중운동을 통한 원외로부터의 압박이 중요하다. 원외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가 이 과제를 맡아야 한다. 

①-2. 원내·원외의 분업론: 원외 지도부와 의원단이 생산적인 분업 관계를 이뤄야 한다. 


의석이 소수인 상황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의정 활동에 전념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의석이 소수일 수밖에 없는 17대 국회 상황에서 그 소수의 의원들이 당무까지 겸직하게 되면 그 부담이 너무 커서 의정 활동도 기대에 못 미치게 되고 당무도 공동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의석이 제한되어 있는 당분간은 의원들이 의정 활동에 전념하는 게 바람직하다.  

의원단은 현안 대응을 맡고, 중장기 전략의 수립과 집행은 원외 지도부가 맡아야 한다. 의원단 활동은 급박한 현안들에 대한 대응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초기 성장 과정에 있는 민주노동당이 자칫 이러한 현안 대응에만 매몰되다 보면 2006-2007-2008년으로 이어지는 선거들에 대한 대응을 비롯해서 당의 중장기 발전과 한국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위한 전망 제시와 그 실천을 등한시할 수 있다. 이 과제는 원외 지도부가 책임져야 한다. 

①-3. 새로운 지도력 형성론: 새로운 지도자군을 의식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집권가능세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 지도자들을 성장시켜야 한다. 1기 의원단에 포함된, 이미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계속 의존한다면 비록 단기적으로는 미디어 접촉면을 늘리고 일시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수의 훌륭한 지도자군을 보유한 참다운 수권·변혁 정당으로 성장할 수는 없다. 특히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크게 불리한 지역구 선거에 당 후보로 나서서 정당투표 득표에 기여한 각 지역조직의 역량들을 중앙 지도부로 진출시켜 차기 지도자군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② 당직공직분리제 반대 

②-1. 대중정치인 역할론: 명망성이 높은 국회의원들이 대중정치인으로서 당 활동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 


진보정당이라 하더라도 국회의원 등 대중정치인이 중심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주류 미디어가 정치에 접근하는 태도로 보나 정치에 대한 대중의 일반적 정서로 보나 대중적 명망성을 지닌 국회의원들이 현실정치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적절히 적응해야만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지도부를 겸직할 수 있어야 한다. 

원내에 진출한 현재의 당 지도자군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17대 국회에 진출한 의원들이 현재 민주노동당 지도력의 핵심이다. 당장은 이들을 적극 활용하는 게 당 발전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다. 이들이 당 활동의 전면에 포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력의 낭비다. 이들에 비해 지도력이 검증되지 않았고 후배 세대인 간부들이 원외 지도부를 구성한다 하더라도 의원단을 제대로 지휘·통제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1기 의원단 내의 주요 지도자들이 지도부를 겸직할 수 있어야 한다.   

②-2. 지도력 집중론: 효율적인 당 운영을 위해서는 당의 지도력이 일원화되는 게 바람직하다.


원외 지도부와 의원단의 분업보다는 일원적 지도부의 구성이 당 운영에 더 효율적이다. 당 지도력이 원외·원내로 이원화되면 원외와 원외 사이의 긴장과 마찰이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고 이는 당 활동의 통일성과 효율성을 깨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지도부를 겸직할 수 있게 하여 당 지도력을 최대한 집중시켜야 한다.  

②-3. 원내·원외 소통론: 원내와 원외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도 국회의원들이 당 지도부를 겸직하는 게 바람직하다. 


원내와 원외의 유기적인 소통을 위해서도 오히려 의원들이 당 지도부에 진출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야 중앙당이 원내의 풍부한 정보에 기반해 기동적으로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정치 실천을 벌일 수 있다.  

3) 총선 직후 당직공직분리제에 대한 당 내 의견 분포 

2004년 5월 6일 중앙위원회에서 당직공직분리제가 당규로 채택되기 직전인 2004. 4. 29~5. 3 사이에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주최로 당직공직분리(안)에 대한 당원들의 의견을 묻는 인터넷 여론조사가 있었다. 이 조사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당원들만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나 4천7백42명이라는 상당수의 당원이 응답했다는 점에서 당시 당 내 의견 분포에 대해 신뢰할만한 정보를 제공한다.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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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조사 결과는 17대 총선 직후 시점에서 당원들이 대체로 당직공직분리제의 취지에는 공감하나 그 현실적 운용에 대해서는 견해차를 나타냈음을 시사한다. 

2. 외국 진보정당의 사례
- 당직공직분리제나 그와 유사한 제도를 실시한 외국 진보정당들의 사례를 살펴본다. 

1) 프랑스 사회당 (1905~1914)

프랑스 사회당은 1905년 창당 때부터 1914년까지 당직공직분리제를 실시했다. 

프랑스 사회당이 이런 제도를 채택하는 데는 소위 밀르랑 논쟁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90년대에 프랑스 의회에는 여러 개의 군소 좌파정당들이 난립했고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무소속 의원들도 여럿 있었다. 이들은 1896년부터 단일한 사회주의 정당의 건설을 추진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적 역할을 맡았던 무소속 밀르랑 의원이 1899년 갑자기 중도우파 급진공화당 내각에 노동부장관으로 입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좌파 의원이 우파 정부에 참여한 역사상 최초의 사례인 이 사건에 대해 프랑스 좌파 내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더구나 밀르랑은 입각 뒤에 정치적 입장을 바꿔 노동운동의 탄압에 앞장섰다. 이 때부터 프랑스 좌파 내에서는 당이 국회의원들의 활동을 지휘·통제해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확산되었다. 그래서 결국 1905년 통합 사회당이 창당되었을 때 당직공직분리제가 도입된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의 당직공직분리제는 1914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98명이라는 다수의 의원을 배출하자 폐지된다.   

2) 초기 이탈리아 사회당 

1차 대전 전, 이탈리아 사회당도 당직공직분리제를 실시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에서는 최고위원 중 다만 기관지편집위원장에 한해 의원이 겸직할 수 있도록 했다. 

당직공직분리제로 인해 이탈리아 사회당의 지도부는 의원단이 아니라 당 지역조직이나 기관지, 노동조합이나 청년 조직에서 성장한 지도자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대개 의원단의 평균적 이념 성향보다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1912년 당대회를 통해 등장한 세라티 지도부였다. 세라티는 당 기관지 <전진>의 편집위원장 출신으로 당 내 ‘최대강령파’의 지도자였다. 이탈리아 사회당이 유럽 여러 나라의 다른 좌파정당들과는 달리 1차 대전에 대해 줄곧 참전반대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사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반전 입장을 견지한 원외 지도부가 의원단의 결정을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사회당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반전 입장을 꿋꿋이 견지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경우는 1912년 총선에서 79석으로 의석을 획기적으로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당직공직분리제를 계속 실시했다. 

<반대 사례: 독일 사회민주당>  

세계 최초의 진보정당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은 일찍부터 연방의원들이 당 지도부를 차지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자탄압법'의 영향이 컸다. 1878년에 제정된 사회주의자탄압법은 “사회주의”를 내건 사회민주당의 모든 일상 조직, 집회, 출판물을 금지했다. 단, 사회민주당의 선거 참여와 원내 활동에 대해서는 자유를 보장했다. 이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연방의원들이 당 지도부를 맡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리고 1891년 사회주의자탄압법이 결국 폐기된 뒤에도 이런 양상은 계속 유지됐다. 

연방의원들이 당 지도부를 맡았기 때문에 발생한 최초의 당 내 긴장은 1884년의 증기선 보조금 논쟁이었다. 당시 독일 정부는 동아시아(조선을 포함)와 태평양을 운항하는 증기선 사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독일 생산품 시장을 확보하려는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이었다.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는 당 강령에 따른다면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이 법안을 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의원단 내에서 증기선 보조금 법안에 대한 반대 입장은 베벨 등의 소수 의원에 그쳤다. 

아우어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 의원은 법안에 호의적이었다. 그 주된 이유는 이 법안이 조선산업 경기를 활성화시켜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많은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조선산업의 근거지인 함부르크 등의 항구도시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자기 지역구 유권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가장 중요한 판단 준거로 삼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각지의 당원들이 당 기관지에 의원단 다수파를 반대하는 결의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의원단 다수파는 당 기관지가 당 지도부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규율 문제를 들어 역공을 감행했다. 그러자 다시 각 지역 조직들이 당내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의원단의 월권을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885년 4월에 들어서서야 두 세력은 타협에 도달했다. 타협안의 내용은, 식민정책과 직결되는 항로는 반대하고 그렇지 않은 항로는 보조금 규모를 줄이는 한에서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평당원들의 비판이 받아들여졌지만,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권력은 점점 더 의원단에 집중되어갔다. 그리고 연방의원들의 판단과 행동에는 항상 당의 이념보다는 현실정치의 요구가 우선시되었다.  

 

3) 독일 녹색당 

독일 녹색당은 1980년 창당 때부터 2003년까지 23년에 걸쳐 당직공직분리제를 유지했다. 녹색당 창당대회에서 통과된 칼스루에 당헌의 제10조는 녹색당의 최고 집행기관인 연방간부회에 대해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못박았다. 

제10조 연방간부회 
① 연방간부회의는 17명의 성원으로 구성된다. 
③ 연방간부회의는 동등한 권한을 갖는 3명의 당대표와 연방재정담당관, 연방사무총장 그리고 12명의 간부들로 구성된다. 
⑤ 유럽의회, 연방의회 그리고 주의회의 의원은 간부회의의 성원이 될 수 없다. 


이 제도는 녹색당의 근본 이념인 ‘바닥(Basis) 민주주의’(‘풀뿌리 민주주의’, ‘기층 민주주의’로도 번역될 수 있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바닥’이란 녹색당의 평당원이나 당 창당의 기반이 된 사회운동(반핵·평화·생태주의 운동)을 의미한다. 녹색당은 당의 연방의원들(모두 지역구 당선자가 아니라 비례대표였다)이 평당원이나 사회운동으로부터 ‘명령적 위임’(imperative mandate)을 받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의원들의 활동이 당 이념과 노선에 기반해 당의 엄격한 지휘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원외 지도부가 유럽의회 의원, 연방의원, 주의원을 지휘·통제한다는 당직공직분리제는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한 장치였다. 

또한 녹색당이 처음으로 5.5%의 득표를 하여 연방의회에 진출한 1983년 총선 당시의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선거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추진하던 유럽 내 핵무기 증강 계획이었다. 사회민주당 소속의 헬무트 슈미트 수상은 전임 수상인 빌리 브란트를 비롯한 다수의 사회민주당 당원들과 진보적 유권자들이 서독 내 핵무기 증강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선거 이외의 시기에 과연 누가 어떻게 정치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고, 녹색당은 당직공직분리제를 통해 그 한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녹색당의 당직공직분리제는 지난 2003년 당대회에서 폐기되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당직공직분리제가 결국 실패한 것 아니냐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주관적인 평가다. 차라리 당직공직분리제가 지난 20여 년 간의 녹색당의 발전 과정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게 더 정확한 평가다. 다만 현재 녹색당이 처한 조건이 이제 더 이상 당직공직분리제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녹색당이 당직공직분리제를 실시하는 동안 당직은 대개 당 내 좌파인 ‘푼디스’(Fundis, 근본주의) 분파와 ‘생태사회주의’ 분파가 장악했다. 반면 의원직은 우파인 ‘레알로’(Realo, 현실주의) 분파와 ‘생태자유주의’ 분파가 다수였다. 지난 1998년 사회민주당과 함께 적녹연정을 구성하기 전까지 녹색당의 주된 역할은 기성 양대 정당(기독교민주당, 사회민주당)이 지배하는 정치 구조 내에 사회운동의 쟁점들을 제기하여 정치적 관심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당직공직분리제는 녹색당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는 데 기여했다.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성향의 원외 지도부가 의원단으로 하여금 문제제기자이자 사회운동의 대변자로서 활동하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8년에 녹색당이 사회민주당과 함께 적녹연정을 구성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당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근본적 문제제기자가 아니라 이제는 집권당 중의 하나다. 내각에 참여한 저명한 연방의원들(요슈카 피셔 등)이 당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됐고 원외 지도부는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했다. 그래서 결국 2003년 당대회에서 당직공직분리제를 폐지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독일 녹색당의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그 대가로 핵발전소 폐기 일정에 대한 타협, 독일군 해외 파견 허용, 사회복지 감축 등 녹색당의 창당 이념과 정체성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4) 영국 노동당 

영국 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전면적인 당직공직분리제는 아니지만 원외 부분이 당 내 최고 집행기관인 전국집행위원회(National Executive Committee, NEC)의 다수를 이루는 제도를 유지해왔다. 

토니 블레어가 당수가 되기 전까지 NEC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매년 당대회에서 27명의 전국집행위원을 선출한다. 이 중 12명은 노동조합 할당이고, 7명은 지구당 할당이며, 5명은 여성 할당, 5명은 의원단 할당이다. 이들 각 부문에 대해 따로 투표가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NEC에서 공직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5/27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장치에도 불구하고 당의 일상 활동, 특히 정책을 결정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한 것은 의원단 내의 내각(집권 시) 혹은 그림자 내각(야당일 경우)이었다. 실제로 의원단 대표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의원단 바깥에서 별도의 선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당수’로 인정되어왔다. 

그렇다고 해서 원외 지도부가 그저 요식적인 기능만 맡아왔던 것은 아니다. 원외 지도부는 노동당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마다 그 방향타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 첫 번째 사례는 1931년에 노동당 소속의 램지 맥도널드 수상이 당과의 아무런 상의 없이 보수당·자유당과 거국연립정부를 구성하기로 밀약을 한 사건이다. 이 때 NEC는 신속하게 맥도널드와 그를 따르는 공직자들을 출당시켜 버렸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노동당은 그 해 11월의 총선에서 288석에서 52석으로 의석 수가 급락하는 대패배를 맛보지만, 이 경험은 노동당이 적극적인 사회변혁의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는 전기(轉機)가 되어주었다. 

두 번째 사례는 1945년 노동당이 집권하는 데 기여한 선거 공약의 채택 과정이다. 정치학자 헤럴드 라스키(지구당 부문으로 뽑힌 집행위원)가 주도하던 NEC는 2차 대전 종전 후 대대적인 국유화를 포함한 급진적 사회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준비했다. 하지만 보수당과의 거국연립정부(전시 내각)에 참여하고 있던 의원단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1944년 당대회에서 NEC 측의 선거 공약이 통과되자 다수의 의원들은 “총선에서 지게 됐다”고 한탄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노동당 측의 압승이었다. 이 때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선거 공약의 구상을 바탕으로 무상공공의료(NHS)의 도입 등 과감한 사회개혁에 나서게 된다. 

세 번째 사례는 1979년부터 노동당을 들썩이게 만든 당 내 민주화 운동이다. 1974년에 노동당은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 등 급진적인 선거 공약을 내걸고 집권했다. 그러나 헤럴드 윌슨을 수상으로 한 노동당 내각은 NEC의 주도로 당대회에서 통과된 이러한 공약 내용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1979년 노동당이 결국 대처의 보수당에게 선거에서 패배하고 권좌에서 물러나자 평당원들은 의원단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이 때 노동당 평당원들이 내건 주된 요구는 NEC의 권한을 강화해 내각이나 그림자 내각이 당 정책을 좌우하는 관행을 막자는 것이었고, 현직 의원에 대해서도 반드시 지구당에서 차기 선거 후보 선출 절차를 거치게 만들어서 평당원들의 의사를 원내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의원은 과감히 교체해 버리자는 것이었다. 모두 비슷한 시기에 독일 녹색당이 제시한 ‘바닥 민주주의’의 원칙과 잇닿는 요구들이었다. 이러한 요구들은 80년, 81년의 당대회에서 실제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블레어의 ‘신노동당’(New Labour) 체제에서도 NEC는 여전히 최고 집행기관으로서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는 그 구성이 다르다. 현재 NEC는 당수 1인, 부당수 1인, 재정위원장 1인, 각료 3인, 유럽의회 의원단 대표 1인, 청년조직 1인, 노동조합 11인, 사회주의 단체 1인, 지구당 6인, 지방의원단 2인, 의원단/유럽의회 의원단 3인, 사무총장 1인 등 총 32인으로 이뤄진다. 결과적으로 공직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보다 높아졌다. 블레어 세력은 이를 통해 NEC의 원외 지도부적 성격을 감소시켰다. 이것은 그만큼 NEC 내의 노동조합이나 지구당 부문이 블레어 세력의 우경화된 노선에 대해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3. 원내 진출 후 1년 동안 당직공직분리제에 대한 평가  

당직공직분리제의 공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원내 진출 후 당의 문제들 중에서 과연 어느 부분이 어느 정도나 당직공직분리제로 인한 것인지 냉정하게 짚어보아야 한다. 특히 다음의 지점들에 주의하여 분석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① 원내 진출 후 나타난 당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은 과연 ‘제도’의 문제인가 아니면 ‘역사적 상황’이나 ‘구조’의 문제인가? 전자라면 제도의 변경으로 개선할 수 있지만, 후자라면 제도의 변경은 미봉책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불필요한 혼란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더 근본적인 진단과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② 원내 진출 후 나타난 당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의 주요한 원인이 과연 당직공직분리제인가? 아니면 다른 제도들의 문제, 제도 운영의 문제, 개인의 역량 문제인가? 혹은 당직공직분리제와 다른 문제들이 서로 중첩되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인가? 

1) 비판적 평가들 
- 원내 진출 후 당직공직분리제에 대해 주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과연 ‘구조적으로’ 원외 지도부가 의원단을 지휘·통제할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각 정치 세력이 각축하는 현장에서 각종 고급 정보를 접하며 풍부한 정책 보좌 역량으로부터 일상적으로 도움을 받는 국회의원들을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최고위원들이 과연 지휘·통제할 수 있겠는가? 

과연 ‘현재의’ 원외 지도부가 의원단을 지휘·통제할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민주노동당의 핵심 지도력이 국회의원으로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이들보다 정치적 경험도 미숙하고 후배 세대인 최고위원들이 의원단에 대한 지휘·통제의 능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것은 불가능한 게 아닌가?  

과연 의원단과 최고위원회 사이의 긴장이 바람직한가? 이해찬 총리 인준 문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전술 문제, 일본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조례 통과에 대한 대응 문제 등을 놓고 의원단과 최고위원회 사이에 이견이 나타났고, 이것이 언론에 당 내 분란으로 비쳐졌다. 또한 이견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당론 결정의 비효율성도 나타났다. 과연 이러한 구조적인 긴장의 가능성을 계속 감내해야 하는가?    

결국 명망성 있는 국회의원들을 당 지도부로 전면에 배치해야 당이 활력을 얻지 않겠는가? 이것은 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미디어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는 비판이다. 유권자들이 알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얼굴’은 국회의원들인데 이들이 지도부를 맡지 않는 것은 비상식적이라는 것이다.  TV가 민주노동당 소식을 전할 때 최고위원회의 회의 모습보다는 의원단의 회의 모습을 배경 화면으로 삼는 것은 그 전형적인 예다.  

2) 위의 비판들에 대한 반비판  
- 위의 비판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비판이 가능하다. 

공직자들에게 정보와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정당의 과제가 아닌가? 국회의원들에게 다양한 수준의 권한과 역량이 집중되는 것은 원내 진출 전부터 이미 예견했던 바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당발전특별위원회 토론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제안들이 나왔던 것이다. 당직공직분리제는 사실 이 여러 제안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정보 접근과 정책 판단 능력에서 이미 원내와 원외 사이의 격차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의원단과 원외 지도부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다. 의원단과 중앙당 사이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원내와 나머지 당 전체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손 봐야 할 것은 당직공직분리제라기보다는 당 전체의 정보 소통 및 의견 형성 체계다.  

원외 지도부가 의원단을 ‘지휘·통제’한다고 할 때 그 ‘지휘·통제’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의 모든 활동에 최고위원회가 개입하고 지시를 내린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최고위원회의 개입 지점은 보다 거시적이고 선별적인 것이어야 한다. 당 강령이나 당대회 결정 사항과 관련된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에 대해서는 물론 사전적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최고위원회가 직접 나서서 입법안의 세부 내용 하나하나를 검토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문제는 원외 지도부가 과연 의원단을 지휘·통제할 능력을 구조적으로 확보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현재의 최고위원회가 그 ‘지휘·통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다. 

‘현재의’ 원외 지도력의 미숙성은 우회보다는 오히려 정면 대결로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현 단계 당 지도력의 한계는 민주노동당 전체가 안고 있는 숙명적 과제다. 민주노동당의 당 활동 기간은 아직 5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다시 4년 동안은 원외 정당으로서 보냈다. 민주노동당에 지금 대중정치 속에 단련된 지도자군이 부족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7대 총선으로 민주노동당이 제3당으로 부상했고 그래서 당 안팎으로부터 당장 그에 걸맞는 지도력의 행사를 요구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결국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시간 격차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향후의 당 활동을 통해 후속 지도자군을 의식적으로 육성하는 것으로 풀 수밖에 없다. 원내에 진출해 있는 소수의 지도자군에게만 계속 전적으로 의존하려 한다면 이는 민주노동당의 장기 발전 가능성을 저해할 뿐이다. 사회적 토대가 민주노동당보다 훨씬 더 튼튼한 브라질 노동자당조차도 룰라라는 지도자 개인에 대한 과잉 의존 때문에 여러 문제점에 부딪쳤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당 내 긴장이 꼭 당 발전에 부정적인 요인인가? 최고위원회와 의원단이 서로 이견을 나타내고 논쟁을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당 내 토론이 활발히 벌어지는 모습이 더 신선한 정치적 광경일 수 있다. 문제는 논쟁의 쟁점이 얼마나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가에 있지 결코 논쟁 자체에 있지 않다.

현 상황에서 의원들이 당 지도부로 포진한다면 오히려 더 커다란 문제들에 갑자기 봉착하게 되지 않겠는가? 의원 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나마 당무를 겸하는 의원들의 경우 의정 활동의 질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반대로 의원들이 역량을 초과하는 업무 하중을 받아서 당무의 질이 떨어지지는 않겠는가? 지난 2년간 새로운 제도로 인한 학습과 조정 기간을 거쳤는데 이제 다시 또 다른 제도의 도입으로 17대 국회 임기의 남은 2년간을 새로운 학습과 조정 기간으로 허비해야 하지는 않겠는가? 더구나 올해부터 사실상 대권 경쟁 기간에 돌입하는데 민주노동당도 의원들이 당권을 쥐게 되면 대권 주자들 사이의 경쟁이 당 활동을 지배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지금의 당 내 정파 구도보다도 더 퇴행적인 보수정당식 계파 구도가 등장할 염려는 없는가? 미디어의 요구에 맞추려다 미디어의 기준이 진보정치의 기준을 압도하게 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의원단 활동에 대한 냉철한 평가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고위원회가 활발한 평가와 비판의 대상이 된 데 반해 의원단은 이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현재 당의 심각한 문제들 중 과연 의원단에서 비롯된 것은 없는지 정확히 진단되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 원외 지도부에 있는 것으로 쉽게 치부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올해 당대회에서 비판적인 평가를 받은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에 대한 대응만 해도 그 첫 단추는 의원단에서 잘못 꿴 것이었다. 의원단이 열린우리당과의 협상에서 보여준 4대 개혁입법에 대한 상대적 집중과 비정규직 개악법안에 대한 상대적 경시야말로 2005년 당대회의 비판의 대상인 이 두 사안에 대한 편향된 접근의 출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직공직분리제의 폐지가 곧바로 당 지도력의 질적 강화로 이어지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4. 민주노동당의 선택과 그 각각의 기회 요소·위험 요소·보완책 

당직공직분리제는 유지될 수도 있고 폐지될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원들이 선택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유지냐 폐지냐 여부보다는 오히려 각각의 선택이 당에 어떠한 기회를 부여하고 어떠한 위험을 제기하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그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보완책을 적절히 강구하는 것이다. 

1) 선택1: 당직공직분리제 유지  

○ 기회 요소 

당 활동의 연속성을 높이면서 제도의 점진적 진화를 꾀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이제까지 2년에 한 번 꼴로 최고 집행기관의 기본 구조를 바꿔 왔다. 2000~2001년에는 전국집행위원회였고, 2002~2003년에는 전국집행위원회와 상무집행위원회의 이원 구조 그리고 2004년부터는 최고위원회였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급속하게 성장해왔기 때문에 지속적인 제도 변경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당 활동이 일정한 궤도에 오른 지금은 제도의 잠재적 장점들을 극대화하면서 약점들을 보완해 가는 점진적 진화를 꾀하는 방식이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다. 이 점에서 당직공직분리제를 유지하면서 그 보완책을 추구하는 게 바람직할 수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당직공직분리제의 장점이 부각될 수 있다. 당직공직분리제가 애초의 기대대로 작동하려면 의원단 바깥에 다양하고 풍부한 지도력이 형성돼 있어야 한다. 아마도 민주노동당이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한 의석(20석 이상) 수준으로 성장해 있을 단계에서 당직공직분리제가 가장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녹색당에서 당직공직분리제가 실시되던 당시의 원내외 당 규모가 대략 이 수준이었다.

2006년부터 2008에 이르는 ‘선거의 해들’에 원내외의 생산적인 분업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2006년 지방선거부터 2007년 대통령선거를 거쳐 2008년 총선에 이르기까지 내리 3년 동안 선거가 연달아 실시된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가 앞으로 상당 기간 한국의 정치 구도를 결정할 것이다. 이 시기에 의원단은 최대한 대중정치의 선두에 서고 최고위원회는 전반적인 전략 수립 및 주요 공약 결정, 대중운동과의 결합에 주력하는 분업 관계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소수에 불과한 국회의원들이 당무까지 겸직하게 되면 한편으로는 의정 활동에 차질을 빚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 전반의 전략적 대응도 흔들릴 수 있다. 또한 당이 정책적 내용보다는 인물 중심의 대선·총선 대응에 쏠릴 수 있다. 

○ 위험 요소 

원외의 지도력이 형성되기까지 시간 격차의 문제는 계속 남는다. 원외 지도부의 지도력이 당원이나 지지 대중의 기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 격차가 최소화될 수 있을지 혹은 당원이나 지지 대중이 이 시간 격차를 관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디어 환경과는 계속 괴리를 빚을 수밖에 없다. 소위 스타급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디어의 생리와 당의 기본 구조 사이의 괴리가 계속될 것이다. 이 문제에 어떻게 지혜롭게 대응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는다. 

당의 성장 과정에서 당직공직분리제는 어쨌든 지속적으로 변경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성장 정도에 따라 당직공직분리제의 존속 여부,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시 형태는 끊임없이 재론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당이 제도 정치 내에서 예상 외의 약진을 하게 되면 또 한 번의 급진적인 제도 개편이 필요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당직공직분리제를 민주노동당의 항구적인 체계로 볼 수는 없다.  

○ 필수적 보완책 

최고위원회의 구성과 선출 방식을 개선하고 의원단의 참여 부분을 확대해야 한다. 최고위원회의 권위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최고위원회의 구성 및 선출 방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개선의 핵심 방향은 구성 및 선출 방식을 최대한 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당직공직분리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최고위원회와 의원단 사이의 일상적인 소통 및 의견 조율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최고위원회에 대한 의원단의 당연직 참여 비율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최고위원회 구성이 적절하다 판단한다. 이 경우 선출 방식은 각 부문(의원단은 제외) 당 1인1표제가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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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위원회와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중앙당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현재의 중앙당은 사무총국 체계와 각 최고위원이 맡는 사업 체계로 서로 이원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외협력실은 사무총국 산하면서 동시에 민중운동 담당 최고위원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다. 조직 관리와 각종 부문위원회들을 중심으로 경직되고 방만하게 구성되어 있는 현재의 중앙당 구조를 몇 개의 전략적 과제를 중심으로 하는 사업 중심 체계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각 최고위원들이 각각의 전략적 과제를 맡아 그 지휘 업무를 수행해야 하며 임기 중에 그 과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중앙당 인력에 대한 인사권은 계속 대표와 사무총장이 갖되 중앙당의 사업 체계는 이런 방식으로 최고위원회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최고위원회의 역할에 대한 분명한 규정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의원단과의 관계에서 최고위원회의 지휘·통제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또한 당대회·중앙위원회와의 관계에서 최고위원회의 활동이 당대회·중앙위원회로부터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평가받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 지휘’의 영역과 ‘행정적 사무’의 영역을 분명히 나눠 후자는 사무총국으로 집중·효율화하고 최고위원회는 전자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쉽게 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당 활동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재논의·재검증되어야 한다.  

2) 선택2: 당직공직분리제 폐지 

○ 기회 요소 

책임 단위가 일원화될 수 있다. 현재 사실상 최고위원회와 의원단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정책 결정 및 일상 사업의 책임 단위가 최고위원회 한 곳으로 집중될 것이다. 따라서 중앙당의 결정과 사업에 대한 각종 당 기관 및 평당원들의 비판과 평가가 보다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정치적 책임 소재를 묻는 과정도 보다 단순해질 수 있다.  

지도부의 대중성이 강화될 수 있다. 원내외를 아울러 가장 대중성이 높은 지도자들이 최고위원회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당 안팎에서 명망성이 가장 높은 인물들이 당의 얼굴로 전면에 나서게 될 것이다. 

원내 현안에 대한 대응이 보다 신속해질 수 있다. 최고위원회 내에 일정 수의 국회의원들이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의원단 총회에서 현안을 다루기 전에 최고위원회 내에서 대응 방안의 가이드라인을 설정할 수 있다. 따라서 당의 대응 속도가 예전보다 빠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 전략이 보다 원활해질 수 있다. 미디어의 요구에 쉽게 부응할 수 있는 지도부의 구조를 갖추게 된다.  

○ 위험 요소 

의정 활동과 당무의 동시 공동화가 발생할 수 있다. 국회의원들이 최고위원직을 겸직하게 되면 자칫 의정 활동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 반대로 최고위원직을 겸직한 의원들이 의정 활동에 더 무게를 두게 되면 당무의 공백 상태를 야기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 수가 10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급속한 제도 변경으로 인한 조정 기간이 필요할 수 있다. 국회의원들이 최고위원직을 겸직하게 되면 중앙당과 각 의원실의 인력 재배치가 필요할 것이다. 최고위원직을 겸직한 국회의원이 중앙 당무를 상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보좌할 중앙당 상근자의 업무 내용과 권한도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민주노동당은 중앙당 제도 개편 때마다 상당히 긴 조정 기간을 요구해왔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는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둔 상당히 중요한 시기에 값비싼 시간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 

대권 주자들 사이의 경쟁이 당을 지배할 수 있다. 대권 경쟁 국면은 사실상 올해부터 시작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에서도 차기 대통령선거 후보를 놓고 주요 지도자들 사이에 경쟁이 나타날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이 당 조직 내에 곧바로 반영돼 당 공식 체계를 전적으로 지배하게 된다면 이것은 진보정당의 발전에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당직공직분리제가 폐지되어 소위 스타급 의원들이 당직 선거에 뛰어들고 최고위원회 내에서 서로 경쟁하게 된다면 이런 구도를 피하기 쉽지 않아진다. 특히 그 나마 이념·노선을 중심으로 배열돼 있던 당 내 정파가 이제는 대권 주자를 중심으로 한 보수정당식의 계파 구도로 더욱 퇴행할 수도 있다. 

원내정당화 경향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결국 애초에 당직공직분리제 도입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원내정당화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당 활동의 중심은 구조적으로, 그리고 급속히 당의 출발점인 평당원과 노동자·민중운동으로부터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로 이동할 것이다. 

○ 필수적 보완책 

당직공직분리제의 기본 정신은 지속적으로 다른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살려나가야 한다. 당직공직분리제 자체는 폐지되더라도 그 근저에 있었던 ‘평당원과 노동자·민중운동 중심의 정당’이라는 기본 정신은 다른 방식을 통해서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 오히려 당직공직분리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더욱 의식적으로 이 정신을 강조하고 그 구현 방안을 강구해야만 한다. 

(덧붙여) 
당직공직분리제를 폐지한 상황에서 원외 부분의 최고 집행기관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최고위원회 내에 비공직자 부문을 할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난점이 있다. 당헌에 규정된 30% 이상 여성할당 원칙과 중첩되기 때문이다. 두 개의 할당제가 중첩되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한 선출 방식이 요구되는데 이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영국 노동당의 전국집행위원회(NEC)처럼 다수의 부문을 둔 수십 인 규모의 집행위원회를 구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노동당이 상당한 의석과 보다 대규모의 사회적 토대를 확보한 상황에서는 당론 결정 기관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나 현재의 민주노동당 상황에서는 덩치만 큰 형식적 기구가 되기 쉽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2000년~2001년에 이와 비슷한 방식의 전국집행위원회 제도를 실시해본 사례가 있다.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영국 노동당의 사례는 아마도 현재보다는 미래의 참고 대상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중앙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실질화해야 한다. 당직공직분리제의 기본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앙위원회의 혁신이 중요하다. 최고위원회가 지금보다도 더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제할 기관으로서 중앙위원회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위원회는 당헌상 의원단에 대한 통제의 책임을 지닌 기관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기마다 1회씩 회의를 가질 뿐더러 그 회의도 결코 하루를 넘지 않는 현재의 중앙위원회 운영 방식으로는 중앙위원회가 이런 역할을 실질적으로 해내길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중앙위원회 내에도 국회처럼 상임위원회(혹은 상임분과)를 두어야 한다. 특히 ‘의정활동평가위원회’를 상임위원회로 두어서 중앙위원회 회기 사이의 일상 시기에 의정 활동을 평가하고 그 보고서를 일상적으로 당원들에게 공표하거나 중앙위원회 매 회의마다 제출하여 원내 활동에 대한 실질적 평가와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만약 당직공직분리제가 폐기된다면 반드시 중앙위원회의 대대적 혁신을 동시에 추진하여 그 권한을 강화·실질화해야 한다.    

당 내 정보 소통과 의견 형성 체계의 획기적 혁신이 필요하다. 원내정당화 경향을 지속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 당의 원외 부분에 정보가 원활히 소통되고 기층으로부터 의견이 형성되도록 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가일층 요구된다. 2003년 당발전특별위원회 보고서에서 제시되고 임시당대회에서 채택되었으나 현재까지 추진되지 않고 있는 제안들, 가령 ‘정책당원대회’, ‘온라인정책투표’, ‘분회 등을 통한 전 당원 토론운동’, ‘전 당원 공동실천’, ‘의원단에 대한 당원 온라인 보좌관제’, ‘대안 미디어 센터의 구축’ 등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제도 변경으로 인한 조정 기간과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최고위원회와 의원단의 관계가 바뀌면서 발생하는 중앙당-의원실 사이의 인력 재배치와 권한 재설정의 조정 기간과 비용을 최소로 줄여야 한다. 

5. 결론을 대신하여 - 논쟁보다는 축제가 필요하다 

만약 당직공직분리제의 존폐를 놓고 토론이 벌어진다면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결론에 이르냐 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에서의 논쟁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문제가 결코 중요하지 않다거나 당원들 사이의 토론이 필요 없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2005년이 민주노동당의 정치 실천에 너무도 중요한 한 해이기 때문이다. 

만약 민주노동당이 ‘부유세·무상의료·무상교육 쟁취’,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한반도 평화 실현’ 등의 전략적 과제들에 대해 제대로 된 실천과 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2006년을 맞는다면 그 때부터 이어지는 선거들에서 과연 당의 새로운 도약이 가능할지 의심된다. 이런 점에서 2005년을 다시 당 내 제도 문제에 대한 논란으로 허비한다는 것은 민주노동당에게는 최악의 선택이다.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가장 중요한 것은 차기 최고위원 선출 과정이 또 다른 당력 소진 과정이 아니라 당의 활력을 되찾고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축제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요청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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