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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원작성자 : 힐라리 웨인라이트 
번역자 : 홍원표 
게재 : 읽을꺼리 5호 
해설 : ‘제 3의 길’ 비판으로 <읽을꺼리> 4호에 소개된 바 있는 힐라리 웨인라이트는 E.P. 톰슨과 R. 윌리암스의 전통을 잇는 신좌파 활동가로서, 현재 "Socialist Movement"라는 좌파 정치조직과 그 저널인 Red Pepper에서 활동하고 있다. 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쟁과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저항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된 웨인라이트는 60년대 이후의 새로운 사회운동으로부터 새로운 좌파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미 <파편을 넘어서>라는 저서를 통해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과 전통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 바 있는 웨인라이트는 이 글을 통해 새로운 사회운동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정당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아래에 번역된 글은 좌파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비판을 신좌파적 입장에서 재비판하는 그의 저서 Auguments for a New Left; Answering the Free-Market Right의 7장을 완역한 것이다. 지식과 권력의 배타적 원천으로서 국가를 상정하는 정통사회주의에 대해 하이예크는 중앙에서 통제될 수 없는 실천적 지식이라는 개념으로 도전한다. 이러한 도전은 통제된 사회주의[를 표명하는] 국가를 경험하였던 동구의 많은 활동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웨인라이트는 집중화될 수 없는 지식의 속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지식이 ‘사회적인 것’과 상반되는 것으로, 그리고 공유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하이예크의 ‘지식론’에 대해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전통 좌파정당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권력의 독점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사회적 기능을 모두 시장에 떠넘기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자주관리의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1) 조직적 측면에 있어 이는 레닌의 민주집중제 이후 좌파 조직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신좌파정당이 취해야할 운동의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1. 서문

앞에서 우리는 사회적 경제적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의 중요성에 대해 논해 왔다. 한편으로는 이론적 차원에서 그것을 민주화할 수 있는 방안을,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적 차원에서 그것을 공유할 방안을 찾고 그에 대해 평가했다. 5장과 6장에서 우리는 60년대 말, 70년대, 그리고 80년대의 여러 운동에서 발생한 민주적 연합체(association)라는 혁신적 형태가, 경험에서 나온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집단적 수단을 제공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들의 경험은 시장과 국가 양자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자율적인, 그러한 새로운 조직형태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비(非)국가적 형태의 대중행동이 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효과적인 수행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정치권력을 지지하면서도 독립적인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 역시 살펴보았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주의라는 스웨덴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이 아니었다면, 괴테보리(Gothenbrug) 대학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6장에서 정치적 동맹을 결여한 경제적 저항 네트워크는 [그 세력이] 취약하다는 것을 보았다. 

문제는 정치적 대표자들로 하여금 민주주의 운동의 지식 및 권력이 상이한 원천을 갖는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운동’의 성격이 다르듯이 상황 역시 매우 다르기는 했지만, 서구의 여러 사회운동 활동가들과 동구의 시민운동을 이끌었던 반대파 인사들(oppositionists)은 직업 정치가들과 정치 정당에 대해 경멸과 적대가 뒤섞인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80년대 초반에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범유럽 운동(아마, 네트워크라는 말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이 성장함에 따라, 동유럽 지식인의 반(反)정치 관련 저작들은 정치적 홈리스인 서구 신좌파들의 심금을 울렸다. 철의 장막 양쪽 모두의 [사회]운동 활동가들은 상상력과 실천 속에서, 개별적 완전성(individual integrity)에 기반하여 정치적 권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찾고 있었다.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Obcanske Forum, ‘시민포럼’)와 동독(Neues Forum, ‘신포럼’)에서 변혁을 이끌어냈던 대중운동은 특히나 어떤 모델을 제공할 것처럼 보였다.2) 이 운동의 지도자들 중 많은 수는 자신들이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믿었다. 반정치는 자신의 권력원천을 지닌 하나의 정치 세력이 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 반정치의 옹호자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운동을 통해 새로운 정치 형태를 만들고 있다고 너무나 굳건히 믿고 있었기에, 운동을 정당으로 전화시키거나 해소시키라는 압력 모두에 저항했다.

역설적으로, 민주적 시민사회의 옹호자들은 바로 그러한 연합체의 부재 때문에 패배했다. 민주적 변혁을 위해 일하는 자발적인 대중조직의 강력한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억압적인 일당 체제를 극복하고자 했던 시민운동은 선거정치에 모든 우선권을 부여하는 서구의 관습적인 의회정당에게 급속도로 압도당했다. 그들이 어렵게 단결을 유지하면서 운동에 전념하고 있을 때, 다른 세력들은 정당을 조직하고 있었으며, 이 정당들은 ‘운동의 정치(movement politics)’의 옹호자들을 슬로바키아와 체코 공화국의 잔당들, 그리고 구동독의 일개 소수파로 축소시켜 버렸다.3)

운동 정치가들은 모순적 상황에 처했다. 그들은 민주적 시민사회의 재건을 통한 사회 변화를 열렬히 옹호하면서도 정당에 대해 심한 의구심을 갖고 있는 동시에, 일종의 다원적 의회정치의 형태를 원했다. 놀라운 것도 아닌 것이, 그들은 이 둘 간의 가능한 관계에 대해 거의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1990년 10월 헬싱키 시민회의(Helsinki Citizen's Assembly)4)의 개회식에서 반정치 저술가로 유명한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 이 문제를 거론했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편으로 그는 극작가이자 보일러공으로서 89년 이전에 그가 저술했던 대다수의 저작에 드러난 주제를 되풀이 하였다. “결과와 상관없이 진정한 사회적 효과는 진실이라는 단어의 힘 속에, 사물을 실제 이름으로 불러낼 용기를 지닌 사람 속에 존재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정당이 없이도 가능하며, 사실 정당이 없다면 더욱 쉬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상위 정치 세계(world of high politics)’에 진입한 이래로 자신이 ‘권력의 기술자(technologist of power)’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이러한 모순을 “새로운,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서 자신을 변호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간단히 말해, 상위 정치에 속한 사람은 대립되는 다양한 이해들을, 다양한 열망들을, 그리고 상이한 집단들이 대표하고 있는 권력의 균형을, 고려하고 조정해야만 한다. 그 사람은 외교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현재 상이한 전장(arena)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단호하게 “우리가 잠정적으로 ‘비정치적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가능성을 확고하게 믿고 있으며, 지지한다”5)고 말하였다. 

이 연설에서의 하벨의 언어(‘상위 정치 세계’를 묘사할 때는 명확하고 생동감있는 반면에 시민운동의 민주주의 정치를 묘사할 때의 특색없이 모호한)은 혁명의 도취감이 가라앉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두 종류의 정치 사이에 긍정적인 연관이라고는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관계의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었다. 현존 국가기구(machinery of state)를 통치할 대안적 권력기술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긍정적 연관처럼 보이는 명확한 모델이 서구에 존재한다고 암시하는 독선적인 처사일 것이다. 정치와 시민운동간의 관계에 있어서 지배적인 역사적 모델은 노동당 및 공산당과 노동조합을 통해 조직된 노동계급간의 관계다. 제2, 제3 인터내셔널 정당들 내부에서의 운동들, 즉 거의 노조운동이 지배적이었던 운동들은 명백히 정치 정당의 대표성과 지도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최근 서구에서 여러 운동들은 그들과 교감이 있는 정치적 대표자들과 보다 평등한 관계를 만들고자 노력해 왔다. 때때로, 이 운동들은 정치적 대변이란 단순히 ‘목소리(voice)’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의회 체제에 대한 그들의 지향은 동구 활동가들의 그것과 다르다. 동구의 운동은 부득이하게 단일정당 정치체제의 외부에서 성장했다. 그들은 의회민주주의를 하나의 목적으로 삼았다. 서구에서는 의회가 민주적 의사결정에 효과적인 체제가 아님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운동들은 의회정치체제의 외부에 그들의 베이스 캠프를 조직하기로 선택하였다. 역설적이게도, 경험으로부터 나온 교훈이 이 두 집단의 관점을 근접하게 만들었다.

동구의 반대파인사들은 하룻밤 사이에 활발한 시민사회가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뒤늦게나마 깨닫고는 허둥지둥 의회로 달려가곤 했다. 반면에, 서구 운동의 활동가들은 그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공직에 대한 접근까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구 사회운동들에게 문제는, 정치적 대표성이 집합적인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대체하고 점차 질식시키기보다는 그러한 활동을 확장시키고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관계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2. 운동과 다양한 종류의 정당들

최근 25년간, 서유럽에서의 사회운동은 전통적인 좌파정당 -- 사민당, 노동당, 공산당 -- 들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어 왔다. 그들은 공통의 룰을 가지고 경쟁하는 똑같은 경기에서의 경쟁자가 아니라 인접한 장에서 다소 독립적인 경기(engrossing game)를 펼치고 있는 그런 경쟁자이다. 때로는 세련된 안목으로, 때로는 혼란 속에서, 때로는 담장 너머에 있는 선수를 비아냥거리며, 때로는 전술적 동맹을 맺으면서 말이다. 명백히 사회운동을 뒷받침하고 있는 정당들은 독일의 녹색당이나 네덜란드의 녹색좌파와 같이 [기존 정당들에 대한] 선거 경쟁자 이상으로 훨씬 근본적인 경쟁자이다. 서유럽에서 진행중인 사건들은 정치정당들 사이의 단순한 경쟁관계가 아니라 정치적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경쟁관계라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45년 이후 탈관습적(unconventional) (비정당) 정치활동에의 직접 참여와 정당의 행동주의 및 당원 수 모두를 측정한, 민중의 정치적 관심에 대한 몇몇 서유럽 국가의 여론조사에서 이 경쟁관계가 드러났다. 청원이나 캠페인같은 탈관습적인 활동참여와 정치에 대한 관심은 뚜렷한 상승을 보여준 반면 전통 좌파정당(그리고 우파정당)의 활동적 당원층은 지난 25년간 하락해 왔다 -- 중간에 한번 혹은 두번 정도의 파동이 있었다.6) 전통 정당으로부터 빠져나온 썰물, 특히 젊은이들의 이탈이, 사회운동을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새로운 정당의 당원(선거에서의 뚜렷한 지지같은)으로 곧장 흘러 들어가지는 않았다. (신좌파 정당의 뚜렷한 특징은 선거에서의 지지 규모에 비해 -- 그리고 아마도 이들 투표자들의 비정당적 행동의 규모에 비해서도 -- 당원 수가 적다는 점이다.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각각 녹색당, 녹색좌파, 사회주의민중당 그리고 좌파사회주의당에서의 당원/투표자 비율은 기성의 주류 좌우파 정당들에 비해 매우 낮다.7)

지난 25년간의 사회운동, 그리고 이 운동이 만들어냈던 조각조각의 프로젝트와 캠페인들은 -- 그들 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대한 전통 좌파 정당의 지도권 독점에 대해 도전해 왔다.8) 여성들이 운영하는 강간상담센터, 거주지를 위한 불법입주(squatters) 캠페인,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동조합의 파업, 군사기지 주변에서의 평화 운동가들의 캠페인 등이 [전통] 정당에 대한 지지를 일축한 것은 아니었지만(그들은 종종 정치적 연대를 위해 압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미 사회 변혁 프로젝트에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들은 그런 상태로 존속해 오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정당에 속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정치적 활동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종종 훨씬 즉각적인 효과를 거두면서도 말이다. 활동가들은 또한 선거라는 명분으로 [지도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당에 대해서도 신중하다. 그들은 동조하는 정당을, 그들 스스로가 활력이 되고 있는 정치적 변화 동학의 잠재적인 지지자로서 이해한다.

3. 도취감이 고조되고 권력구조가 조정될 때

그러나 완고한(persistent)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자부심은 점차 정치적 현실주의와 결합되어갔다. 사회운동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거의 이겼다는 도취감, 또는 최소한 진정한 승리를 맛봤다는 도취감의 순간이다. 특히 혼자서 시작해서 하나의 운동을 만들어내게 되면 더욱 그러하다. 때때로 운동의 창출 바로 그것이 패배에 대한 인식을 완화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패배의 순간은, 그것이 얼마나 가까이 있건간에, 운이 좋은(successful) 적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교육, 재결합, 재정비하여 미래의 언젠가 싸울 준비를 하거나, 또는 갈등을 흡수해 버렸을 때이다. 프랑스에서는 68에서 살아남은 드골주의자들이 중앙집중화된 프랑스 국가를 현대화했다. 독일 교육체계는 덜 파괴적인 요구들을 선택적으로 수정, 흡수하면서 학생운동의 도전으로부터 회복되었다. 이탈리아에선, 1969년의 ‘뜨거운 가을’을 버텨낸 피아트가 70년대를 거치면서 노동자들의 행동에 덜 타격을 받을 수 있도록 생산을 [재]조직하면서 반격해 왔다. 대지진 뒤에 건설기술이 발전하여 건물들이 오히려 더 강하고 유연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처럼, 60년대의 저항과 73년의 오일 쇼크를 겪은 전후 서유럽의 국가와 사기업들은 자신의 조직에 새로운 유연성을 불어넣었으며, 동시에 복잡한 전체(complex whole)를 통제할 중앙집중화된 능력을 강화하였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의 언어를 표절하였다 -- ‘느슨한 구조’로부터 ‘네트워크’와 ‘써클’을 거쳐 ‘지도력의 공유’에 이르기까지(from 'loose structures' through 'networks' and 'circles' to 'sharing leadership').

때때로 여러 운동들이 한때, 그리고 한 영역에서 거둔 성공의 중요성이 과대평가되어 왔다. 영국의 보수당과 미국의 공화당 우파는, 경제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정치적으로, 광산노동자와의 싸움에서의 패배(영국, 70년대)와 베트남에서의 패배(미국)로부터 회복했으며, 새로운 공격무기를 획득하였다 -- 특히, 사회부조(social provision)와 산업보조(industrial support)로부터 정부가 자유로워졌다. 정보기술 덕분에, 이러한 과정은 더 잘 조정되고, 전지구적으로 상호연결된, 그리고 보다 정교화된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질서가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반복되는 경기후퇴와 새로운 초국적 지역경제블럭 간의 경쟁이라는 모순이 첨예해지고 있다.

경제팽창, 사회보장, 그리고 대중정치적 자기확신이라는 환경에 뿌리를 두고 형성된 사회운동 정치는, 70년대 후반 및 80년대 들어서 서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국가와 산업[지배계급]의 새로운 전략 아래서 심한 타격을 입었다. 실업 증가라는 배경이, 불가능한 일에도 도전하곤 했던 초기의 자기 확신의 활력을 앗아갔다. 이는 특히 영국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두드러졌다. 게다가 이들은 실패를 자초하기도 하였다.9) 

다양한 전선에서 공적인 전장으로부터 후퇴하는 듯이 보였다. 교육과 산업은 더 이상 영원한 극적 투쟁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4년의 독일 금속노동자 파업과 85년 영국 광원 파업, 그리고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전투성 -- 이 모두는 70년대의 혁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조직형태와 요구들을 보여주었다 -- 은 고용주들의 선택지가 확장되었을지라도, 아직 그들이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직접적인 정치적 문제 -- 예를 들어 핵발전소, 미사일 배치, 보다 최근의 것으로는 반인종주의 -- 에 대해서 지난 십 년 동안 형성된 운동 네트워크는 국제적 수준에서 강력한 대중 동원의 인프라스트럭춰를 제공해 왔다.

게릴라 군대와 다소 유사한 사회운동의 힘은 대부분 그들이 기층 민중과 함께 행동할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캠페인과 조직화는 전통적인 좌파 정당의 일회적인 정치적 민중주의보다는 대다수 민중의 일상에 보다 밀접하게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게릴라 군대와 마찬가지로 사회운동과 이를 지지하는 정당들은 중앙집중화된 강력한 적군과 직면하게 된다. 그들의 기반과 권력의 원천은 지역(즉 민중들이 노동하고, 사회화되고, 살아가는 곳)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 운동이 국가 권력, 그리고 점점 더 초국적 권력을 획득해가는 기업이나 무책임한 정치 관료를 상대로 지역의 힘을 사용하고 동원할 수 있을 때에만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게다가 어떤 목적들 -- 경제적 평등, 생태적 안전과 지속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필요를 위한 [사회]보장(provision) -- 은 그 자체가 구속력 있는 일국 및 국제적 권한을 갖춘 민주적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10)
 
이 운동들이 처음 출현했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일정 정도의 중앙집중화와 응집력이 생겨났다. 자기조직화하는 힘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실천을 통해 상이한 문제들 간의 상호관계를 드러내고 하는 것들이 에너지의 갑작스런 폭발을 가져왔다. 새롭게 급진화된 활동가들은 정신없이 연계를 만들고, 회의에 참석하고 뉴스레터를 만들고 하면서 사실상 대안적인 정치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활동이 특별한 대안적 정치제도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유럽의 대다수 주요도시(베를린의 크로이쯔부르크[Kreuzburg], 암스테르담의 스타츠리덴부르트[Staatsliedenburt] 등등)에서 이 운동의 문화적 산물들은, 때로는 자주적인(self-reliant) 흑인 문화, 또는 기타 소수 공동체 문화에 의해 강화되기도 하며, 생존의 수단으로 어느 정도 상업화되기도 하면서 여전히 존속되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러한 문화적 오아시스들은 한때 그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가졌었고 광범위한 전국적, 국제적인 문화적 표현 혹은 조직화된 네트워크를 가졌던 곳에서 점차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예외가 되어 왔다.

운동 프로젝트와 조직들이 정기적인 간행물을 발행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활동을 상호연계시키고 협동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활동가들은 지속적인 물리적 현존과 비공식적 응집력을 좌파 운동에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센터를 설립하고 있다. 좀 더 조직화되고 통찰력있는(far-sighted) 조직은 끈기를 가지고, 그들의 자원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사용해 국제적 네트워크를 창출해내고 있다.11) 하지만 운동 활동가들은 영구적인 포럼과 운동간의 연계 메카니즘을 어떻게 창출해내야 할지에 대해 거의 신경쓰지 못했다.

대신에, 프랑스에서처럼, 그들은 서로 이질적인 채로 남아 있다. 혹은 영국에서처럼, 주요한 노동계급의 정당 내부에 존재하는 지역적 또는 전국적 좌파안에서 우연적인 결집점(focus)을 발견하기도 한다. 선거제도가 소수정당에게 우호적인 곳에서는, 일종의 불안정한 통일체에 대한 자극으로서 직접적인 정치적 대표자의 가능성을 찾아내기도 한다.

국가통제를 획득하기 위한 공적인 경쟁이 얼마나 괴물같은지 혹은 실제 권력의 원천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있든지 간에, 이러한 경쟁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굉장히 강력한 중앙집중적인 힘(concentrating force)이다. 국가기관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거나 운영에 관한 암묵적인 합의정도라도 이끌어내지 못하다면, 사회적 실천들은 주변화되기 십상이다. 초의회적(extra-parliamentary) 운동 및 투쟁은 종종 강력하고 일치된 노력에 의해 질적 도약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들의 힘은 자신의 일상을 단절할 수 있는 수천 민중들의 초의회적 활동에 의존한다. 돌봐야 할 피부양자가 있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주제를 공적인 논쟁으로 끌어올리고 헤드라인을 장식할 수 있을 정도의 운동에 지치지 않고 참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국가기구들과 관습적인 정당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정치권력과 공직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최근의 좌파운동은 그들의 네트워크와 프로젝트를 계속 생명력있게 유지하는 것 그 자체, 즉 지속적으로 공적 영역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집중력, 대중적 기반, 그리고 자원 -- 이것들은 대다수의 서유럽 의회민주주의에서 국회, 광역의회, 그리고 지방의회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다 -- 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초의회적 운동에서 곧바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던 사례들(독일 녹색당이 아마 가장 주목할 만한 예일 것이다), 현존하는 급진좌파정당에 공동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노르웨이와 덴마크, 네덜란드에서의 발전이 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지방 권력을 위해 우연한 기회를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사례(80년대 초 런던시의회(GLC)의 경우에서처럼)가 이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12) 
 
문제는 국가로부터 자원을 지원받는 표면상의 정치적 종복인 그들보다, 그들의 주인이라고 상정되는 사람들이 실제에 있어 더욱 취약한, 그러한 운동 속에서 대의제가 어떻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를 보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긴장, 즉 양면적 관계가 존재한다. 정당은 변혁의 임무(agency)를 독점해서는 안된다.13) 
 
최근의 좌파운동이 만들거나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이 정당들은 외양에서는 다양하지만, 사회변혁과정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 최소한 이론상으로나마 -- 겸손함을 보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그들이 의회에서 거둘 수 있는 승리가 [사회운동의 목적을] 얼마나 달성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주의가 깔려 있다. 즉, 이 정당들은 급진적 변화가 입법부에서만 배타적으로 가능하다거나 혹은 가장 우선적인 변화인 것처럼 활동하기보다는 시민들의 독립적인 활동을 가능케 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국가제도를 사용하는 것을 자기목표로 삼곤 한다.14) 
 
국가제도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하다는 사실에 직면한 그룹들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자치조직(self-organization)을 발전시키고 이를 위해 국가제도에 대한 통제를 사용하고자 시도했던 사례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런던시의회의 여성위원회 및 소수민족위원회(Women's and Ethnic Minority Committees)와 [다니 콩방디(Danny Cohn-Bendit, 프랑스 68혁명 당시 학생 지도자였고 현재는 독일 및 프랑스 녹색당의 지도자]가 설립한) 프랑크푸르트 시정부의 외국인위원회(Foreigner's Committee)의 경우이다. 코펜하겐과 서베를린 같은 여타의 경우에, 연정에 참여하거나 특정 부서를 담당하는 급진좌파 정당들은 정책을 형성하고 수행하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사회운동 프로젝트와의 공동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비록 똑같은 대중적 영향은 아닐지라도 비슷한 효과를 이루었다. 이 운동 대의제(movement representation)는, 국가를 통해 작동하는 정당들은 그들이 헌신하고자 하는 변혁을 수행할 내적 지식과 권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는 정당이 그러한 지식과 그 지식의 이면에 놓여 있는 사회적 추동세력을 적절히 대변할 수 없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당과 자율적인 운동 간의 파트너쉽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이 장에서는 그 중 몇 가지를 논의할 것이다. 그 주안점은 이 파트너쉽이, 국가의 포섭이 운동의 자율성을 갉아먹고 이들을 단일한 정치체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코포라티즘적 관계나, 단체들이 민주적으로 보다 광범위하게 합의된 정책과는 상관없이 단지 분파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제로섬 배타주의(zero-sum  particularism)로 빠져들 수 있는 방식들이다.15) 이 책의 논의에서 파트너쉽이 중요한 이유는, 특히 지역, 지방의 수준에서, 민중들이 자신의 필요에 대한 해결책을 규정하고 찾아냄으로써 축적되고 공유되는 실천적 지식이 정치권력의 행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길을 바로 이것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지식과 권력의 상이한 원천 간의 관계, 즉 사회로부터 나오는 것과 국가로부터 나오는 것 간의 어떤 관계이다. 코포라티즘은 사회단체가 국가의 일부가 됨으로써 자신의 이해를 추구하게 되는 상황으로 귀착되는 경향이 있다. 

4. 새로운 정당들

1) 독일 녹색당

1979년 3월 프랑크푸르트 대학 강당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이한 조직들에서 파견된 500명의 대의원들은 68년 이후 시민운동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창당될 어떤 단체를 목도하였다. ‘진전된 정치연합(Further Political Association, FPA)’, 즉 녹색당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양한 지지 조직들 혹은 운동들이 그들의 비전의 총체성(totality)을 수용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자신들의 활동을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조직명이 암시하듯이, 제한된 목적 -- 핵없는 유럽과 탈중심화된 ‘지역들의 유럽’을 위한 선거 캠페인 -- 을 위한 연합체라는 생각이었다. 동시에, 여타 사회운동과 초의회 조직들이 시선거 및 주선거를 위한 유사한 선거 동맹을 결성하였다. 대안적 후보단(Alternative List)나 무지개연합 후보단(Multicolored List) 같은 독특한 선거명을 가지고 정치적 목적에 있어서 최소한의 특성을 공유하였다.

다음해 1월, 이 다양한 동맹들이 녹색당(Die Grünen) 창당을 목적으로 첫번째 당규회합(constitutional convention)을 칼스루에(Karlsruhe)에서 열었다. ‘사회운동의 의회 내 발언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 당시에 이는 매우 자명한 것으로 보였다 -- 이었다. 가장 극적이었던 반핵운동을 포함해, 어마어마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운동들이, 마치 그들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연방의회와 주의회에서는 철저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SPD)-자유민주당(FDP) 연정은 반핵 운동을 주변화시키기 위해 단지 자신들의 의회 지위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수상이었던 헬무트 슈미트는 서독 노총(DGB)에게 새로운 핵발전소 [건설] 유예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철회하도록 강렬하고 성공적인 압력을 행사하였다. 다소 관용적이고 진보적인 빌리 브란트의 재임 하에서 무성했던 내부반대 탄압의 일부분으로서, SPD의 지도자들은 SPD 내부에서 점차 증가하는 급진적 청년 운동이었던 ‘청년사회주의자들’(Jusos)의 모든 출판물이 당의 지도부로부터 동의를 받을 것을 요구했던 ‘함구령’을 통과시켰다.

SPD 연정 -- 1966-9년에 CDU와의 연정에서부터 슈미트 하에서 이루어진 1974-82년의 연정까지 -- 이 초의회적 항변에 대응해 쌓아올린 정치적인 철의 장벽은 광범위한 정치운동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당만이 서독의 입법기관들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16)의 계산된 정치적 폭력이 대중의 정치적 욕구를 일정 정도 충족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력감과 고립이 존재했고, 많은 이들은 합법적인 전국적 발언권의 획득만이 이를 해결할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50년대 중반부터 그들이 녹색당을 통해 선거경쟁에 참여했다고 생각하는 85년까지(브란트가 지배했던 잠깐의 예외를 제외하고), SPD는 유럽의 어떤 사민주의 정당보다 더 폐쇄적이고, 더욱 격렬하게 반공주의적이었으며 보다 광적으로 냉전주의적이었다. SPD 서베를린 시장은 68년 당대회에서 APO(Ausserparlamentaricshe Opposition, ‘초의회적 반대파’. 60년대 사회민주당이 기민당과 대연정을 이룬 것에 반대해 결성된 원외 좌파들의 조직. 서독 신좌파의 기원에 해당)에 대한 언급 가운데 이러한 문화를 가장 히스테릭하게 보여주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들을 가까이서 주의깊게 살펴봐야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유로운 정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17)

합의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은 뒤로 제쳐버리는 정치적 편집증이라는 장벽에 맞서,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이 통일의 움직임을 진전시켰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리고 다시 칼스루에에서 회합을 가진 사람들은 상이한 여러 정치적 신념들을 따르고 있었다. 소규모 우파 자연보호론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곧 녹색당이 자신들의 적절한 대변인(mouthpiece)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난 10여년간의 반권위주의 학생운동, 페미니스트 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환경운동의 활동가로서, 그들의 이야기와 주장, 때로는 절규마저도 정치적 공백으로 사라져버린 여러 시기를 보낸 이후 하나의 정치적 발언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중요한 소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K그룹(K-Gruppen, K는 독일어로 ‘공산주의’ 첫 글자를 의미), 즉 SPD 내외의 다양한 마오주의적 맑스주의 그룹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정부와 당에 대한 슈미트의 지도력은 무의식중에 단일한 정치세력의 형성을 도와주었는데, 후에 선거 라이벌이 된 이 세력은 슈미트가 무참하게 억압하던 내부의 반대파들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SPD가 좌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초기 녹색당의 보수파를 제외하고는 가치와 비전에 대한 의미있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작부터, 녹색당은 반자본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정통적인 의미의 반자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고삐풀린 성장이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민중들에 대한 착취를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고갈성 자원을 착취(이에 대한 대가는 미래의 세대들이 치뤄야만 한다)한다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조합국가(capitalist/corporate state)에 의문을 가졌던 초기 학생운동의 문제의식으로부터 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경제적 진보를 의미한다는 관념에 대한 단호한 거부로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소련 맑시즘의 영향 하에서 대다수 좌파의 정통이 되었던 가정, 즉 생산력의 발전이 진보의 추동력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이탈하는 중요한 단절이었다.18)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분파투쟁으로 심화된 첫번째 불화는 전략 문제, 즉 녹색당 국회의원의 역할과 SPD와의 연정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니까 79년과 녹색당이 예상치 못한 선전을 벌인 83년의 선거 사이에, 공적 정치에의 참여와 발언권에 대한 필요성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발언권의 입지점, 누가 발언하는지, 다른 발언과의 관계 등등에 관한 문제제기는 훗날로 미루어졌다.19)
 
녹색당 12년에 대한 대차대조표는 단지 잠정적인 것일 뿐이다. 한편으로 통독 이전 녹색당의 선거참여가 SPD로 하여금 유럽의 가장 보수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부터 사회운동의 정책에 대해 지면으로나마 가장 책임있는 정당으로 전환하게끔 도와주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SPD는 핵무기와 핵발전에 반대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녹색당이 제기한 환경 문제와 페미니즘 의제의 대부분을 위원회의 논의에 부쳤다. 경제정책과 산업정책에 관해서는 제2 인터내셔널의 잔재를 싹 쓸어버린 통화주의 전통(monetary orthodoxy)에 기울기보다는 여전히 코포라티즘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좌파로의 이 온건한 이동이 정부 내에서 시도되지는 않았다.20) 콜 수상은 독일 민중 내에서 보수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감수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통일의 과정을 지휘할 수 있었다.

녹색당의 지속적인 압력에 대한 요구가 막 표면화될 즈음에, 통일에 대한 그들의 우유부단한 태도가 연방 수준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극적으로 약화시켰다. 갑작스런 통일의 움직임에 대해 그들은 최소한 세 가지 상이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통일에 대한 회의론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취급받았다. 독일 민중의 반 이상이 콜이 주도한 통일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으며, 확실한 태도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연방 녹색당은 내부 싸움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회의론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투표자들에게 정치적 전환의 계기를 제공할 수가 없었다.

SPD의 냉전적 태도가 녹기 시작하고, 따라서 단일화하고자 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외적 압력이 용해되면서, 녹색당 내부의 전략적, 전술적 분열은 당의 발전에 대해 분명한 지속적 방해물이 되었다. 전후 최초의 독일 전국 선거에서 서독의 모든 하원 의석을 잃은 녹색당의 충격이(4.9%를 획득한 그들은 5%룰에 의해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거꾸로 그들로 하여금 분파주의에 대해 새로운 평정을 찾게 하였다. 연정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들과 어떠한 형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심한 적대를 보여주는 사람들 모두 [당의 새로운] 출발을 용이하게 만들어주었던 세력들이었다. 91년 주선거 및 시선거에서 녹색당은 상대적인 약진을 보였다. 예를 들어 헤센주와 니더작센(Lower Saxony)주에서 그들은 8% 이상을 득표하여 SPD와 연정을 꾸렸으며, 브레멘에서는 FDP, SDP와 함께 연정을 꾸린 반면, 뮌헨시에서는 SPD와 새로운 연정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지역적 강세는 녹색당이 연방정당으로서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안정성을 주는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 덴마크 사회주의민중당

최근 사회운동에 정치적 발언권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가진 정당들은 또한 일찌감치 이루어진 전통 좌파정당으로부터의 탈퇴의 산물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사회주의민중당(Socialistisk Folkeparti, SF) 역시 그러하다.21) 이 정당은 덴마크 공산당 다수파의 탈당으로부터 비롯됐다. 이 분당은 헝가리 봉기에 대한 소련의 진압과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소련의 적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대립은 탈당파로 하여금 소련 공산당의 정치적 수단 -- 민주집중제로 대표되며 오직 공산당만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지도할 수 있다는 가정 -- 에 대해서까지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변혁에 대한 관심과 함께, 사회 세력들에 대한 공산당의 협소한 노동자주의적 정의까지 버렸다.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결정론적, 과학적, 기술적 관점이라는 근본적인 철학을 뿌리채 뽑아 버렸다.

이러한 일은 1959년과 60년에 일어났다. 유럽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덴마크에서도 1956년[소련의 헝가리혁명 진압]에 대한 반발과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논쟁이 신좌파의 수많은 지적인 기초를 세워 놓았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급진적 변혁 운동과 정당의 자율성은 매우 빈약한 지반위에 놓여 있었다. 덴마크 SF의 새로운 당강령은 노조와 노동계급 투쟁의 지지에 대해 매우 모호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초기 십 년간 이 정당은 급진적인 것이기는 하였지만 우선은 의회정당이었다. 사회변혁을 위한 근본적인 전략은 사민당과 연정을 꾸릴 수 있는 협상력을 만들어가는 것이었으며 이는 곧 의회 협상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67년 연정에 참여했을 때, 이 정당은 연금과 사회보장급여의 물가연동제를 지켜낼 협상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원의 일부는 탈퇴를 선언하고, 이른바 좌파 사회주의당(Left Socialists)을 형성하여 선거에서 6석을 획득했으며, 어떤 문제들에 관해서는 SF가 좌로 움직이도록 선거에서 견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이후 많은 당원들이 SF로 복귀했으며, 좌파 사회주의당은 이제 의석을 갖고 있지 않다.

70년대 초, 중반을 거쳐 사회운동(특히 여성운동, 반핵 운동) 활동가들과 노조의 급진적인 소수파들이 양당에 가입하였다. 하긴 11%의 득표율과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구조가 더욱 매력적이었다(좌파 사회주의당은 다소 레닌주의적인 모델에 입각해 조직을 꾸려나갔다). 이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은 SF의 공개성을 민주화 심화과정을 이끄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들은 당의 활동을 사회운동 지향으로 이끌고, 이러한 운동과 당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채널을 만들어내며, 모든 정당의 위원회에 여성 40% 참여를 획득해 내면서 정치체계와 당의 관계를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68-74년 의장이었던 오만(Omann)을 포함해 구(舊)지도세력을 거의 대체하였다. 오만은 후에 몇몇의 당원을 데리고 사민당에 참여하였다. 주로 사회운동가이거나 혹은 전(前)사회운동가들인 새로운 활동가들은 선거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동시에, 주로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한 캠페인과 프로젝트를 급진적인 노조운동과 밀접히 연계시키는 정당을 만들어 냈다.

지속적으로 연정에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서도 오직 기존 정당들과 대등한 입장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경우에만 참여를 선택하는 것이 연정에 대한 이 정당의 새로운 태도이다. 이들은 의회를 통한 세력균형에 집착하기보다는 오직 그들이 급진적 노동조합운동을 포함한 ‘기층 운동 혹은 풀뿌리 운동’과 밀접한 연계를 가질 때만 힘의 동등함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이 덴마크 공산당원이었으며 74년부터 90년까지 이 당의 당수를 지낸 게르트 페데르센(Gert Pedersen)은 ‘구공산당원이 했던 것처럼 그들을 끌어들이지는 말도록’ 경고하였다. 당 활동가 내의 균형은 당연히 이 운동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 전국적 수준에서 이 운동들과 이룬 협동작업의 수위는 반핵운동 및 평화운동들[의 수위]과 함께 하였다. 하지만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이 일상적 삶의 일부분인 덴마크 지방정부에서, 이 운동들은 SF와의 협동을 통해 지방정부의 결정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SF는 덴마크 지방정부의 3분의 2정도의 지역에서 권력균형을 유지하거나 혹은 ‘적색’ 연정(사민당과 SF)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가장 최근의 지방선거에서 이 당의 득표율은 11%였으며, 이는 최근 총선거에서의 득표율보다 4% 높은 것이었다.

전투적 초의회 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는 의회 및 자치정부 전략을 결합시키는 데 있어 SF가 보여준 효율성은, 70년대까지 모스크바(혹은 민주집중제)와 조직적으로 절연하지 못했던 이탈리아 공산당과는 달리, 그들이 스스로를 합법화하고 주목받도록 해야 한다는 압력에 취약하지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탈리아와 영국 공산당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해보건대, 의회적 관심과 관습의 지배에 압도당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압력이었다. SF 창당 멤버와 일찌감치 철저하게 절연함으로써 그들이 모스크바의 대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입증하지 않고서도 여전히 급진적 좌파로 남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의회주의 그룹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과 운동에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덴마크 사회주의민중당은 실천적인 면에 있어 여전히 이들의 지배를 받는 경향이 있다. 후보들이 전국의 모든 당지부에서 유세를 했던 혹독한 민주주의 선거 캠페인을 거쳐, 최근 새로운 지도자 -- 40세의 홀거 닐손(Holger Nielson) -- 가 선출되었다. 68년 당시 학생으로 급진화됐으며, 80년대 이후 국회의원인 홀거는 이 정당의 창립자이고 무엇보다 사회주의적 의회주의자이면서도 새로운 운동의 이념에 매우 개방적인 거트 페더센의 후임자가 됐다. 이 정당은 [의회가 아니라] 노조와 초의회적 활동을 통한 변화로 강조점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압력에 매우 개방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가로부터 중요한 자원을 지원받음으로써 뒷받침되고 있는 기존의 정치 관행이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지속적인 초의회적 압력이 현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3) 네덜란드 녹색좌파(Green Left)

사회운동의 정치를 대변하기 위해 출현한 세번째 형태의 정당은 몇몇 정당이 합병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 정당들은 새로운 운동에 공동으로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이념이 수렴하는 것을 발견한다. 네덜란드 녹색좌파가 대표적 사례다. 89년 봄에 급진정치당(Radical Political Party, PPR), 평화-사회주의당(Pacifist-Socialist Party, PSP), 네덜란드 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e Netherlands), 복음주의민중당(Evangelical People's Party)은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였다. 녹색좌파의 기치아래서 캠페인을 함께 함으로써 각자 따로 노력했을 때보다 전국적으로 훨씬 큰 영향을 미쳐 보다 많은 의석을 획득하였다(3석에서 6석으로). 게다가 그 어느 기존 정당에도 참여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활동가들이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새로운 국회의원 중 로테르담에서 온 급진적 항만노동자 지도자인 파울 로젠묄러(Paul Rosenmöller)는 어떠한 당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비슷하게, 다른 주요 후보들 중 한 명은 이민자들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그녀는 당원이 아니었다. 당적이 없는 사회운동가들도 녹색좌파 위원회에서 대표권을 가질 수 있었다. 당언론인 <녹색 좌파(Green Left)>의 편집자인 빌 에베르스(Wil Evers)는 이를 “녹색좌파의 추동력은 사회운동으로부터 나온다”22)라고 표현하였다. 

현재 녹색좌파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들은 하나의 정당으로 자신의 이론과 실천의 발전을 위해 [사회]운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었다. 상이한 조직을 융합시켜 나감에 따라, 그들은 네덜란드 녹색좌파의 국제서기장(International Secretary) 요스트 라겐디잌(Joost Lagendijk)이 주목하고 있는 사실, 즉 ‘대부분의 당원과 미래의 당원들은 다양한 사회운동과 캠페인에 매우 실천적인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으며, 당에 깊숙히 연루되기를 원하는 것은 단지 특별한 경우일 것’이라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의식적으로 조직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녹색좌파의 정책입안은 의도적으로 사회운동 캠페인과 연구 프로젝트에서 축적된 지식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논쟁을 위한 포럼을 창출해내고, 사회운동 간 공동 활동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는 정당뿐만 아니라 그 운동에도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독일 녹색당, SF, 그리고 네덜란드 녹색좌파, 이 세 당들 중에서 녹색좌파가 사회운동 조직과 공식적인 관계를 수립하려는 데 있어 자의식(self-conscious)이 가장 강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네덜란드의 다른 자생적 조직과 마찬가지로 사회운동 조직도 그 어떤 곳보다 제도화가 가장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이 운동조직들, 특히 사회복지와 소수자권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조직들은 지자체 의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 -- 그리고 이 경향은 지자체의 수준에서 녹색좌파의 영향력이 성장해감에 따라 더욱 강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그들 중 몇몇은 국가위원회들(state commissions)에 정당을 끌어들이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정당과 협상하는 데 익숙해 있는데, 이 위원회들은 상당한 보고서를 작성해내지만 거의 실천적 결과를 보지는 못한다. (국가권력의 심장부에 표적을 두고 있는 평화운동 및 반핵운동은 모두 이 온정주의적 포섭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80년대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전투적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 역시 네덜란드 국가위원회에 끼여들지 못하였다.)

요스트 라겐디잌은 사회운동과 정기적인 협력 관계를 만들기 위한 녹색좌파의 의식적인 노력에 대해 또 다른, 보다 내적인 이유를 들고 있다. ‘우리 모두는 구정당의 습관과 이해를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조심스럽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독일 녹색당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요스트는 독일 녹색당 회의에 여러 번 참여하였으며, 국제 서기장으로서 서유럽 전반의 신좌파와 새로운 녹색당의 점차 늘어나는 고통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녹색좌파는 여전히 매우 소규모이며, 특히 네덜란드 사회운동의 세력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최근 유럽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녹색좌파의 득표율은 7%를 넘었을 뿐이다. 녹색좌파에는 400명의 시의원, (150명의 국회의원 중) 6명의 국회의원, 그리고 13,000명의 당원이 속해 있다. 게다가 이 새 정당이 사민주의의 사망으로 인한 네덜란드 내의 최대 수혜자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급진적 야당으로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당은 선거에서 가장 큰 진전을 보여준 급진자유주의 정당인 (D66으로 알려진) 민주주의66(Democracy 66)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새로운 구조에도 불구하고, [구공산당 출신의] 이전의 실패한 지도자들의 면면이 녹색좌파의 이미지를 표상하고 있다. 이것이 네덜란드 노동당의 보수성에 대한 하나의 대안제시라는 명확한 욕망으로부터 왜 그들이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될 것이다. 또다른 요소는 경제적 문제에 대해 D66이 신자유주의 조류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 경제학이 결과적으로 반민주주의적임이 점차 드러남에 따라, 녹색좌파는 새로운 지도부와 더불어 가지고 자신의 기회를 찾게될 것이다.

5. 섬나라라는 예외

북부 유럽에서, 영국은 하나의 예외를 보여준다. 영국에는 광범위한 정치적 대변을 보장하는 신좌파 혹은 신좌파 영향을 받은 정당이 존재하지 않았다.23) 좌파의 정치적 대변은 노동당에 의해 독점되어 왔으며, 좌파 사회운동은 몇몇 생명력이 짧은 성공만으로 끊임없이 문을 두드려야만 했다. 닐 키녹(Neil Kinnock)의 지도 아래, 일반적으로 지방의 수준에서 이루어진 돌파만이 효과적인 진지강화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24)

그러나 영국이 삐걱거리며 붕괴하기 시작하자, 노동당은 최소한 스코틀랜드 및 웨일즈와 관련된 문제에 한해서는 자신의 입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웨일즈민족당(Plaid Cymru)과 스코틀랜드민족당(Scottish National Party) 모두 중요한 급진적 좌파 소수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25) 그들에 대한 지지가 지정학적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방의회에서뿐만 아니라 영국 의회에서도 의원을 갖고 있다. 게다가 소선거구제(first-past-the-post) 덕택으로 성공한 보수당은 노동당을 그들의 근거지인 북부 잉글랜드로 후퇴시키면서 선거개혁이라는 미끼를 통해 유인했다. 점점 더 많은 노동당 정치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정치적] 독점 없이 노동당이 전국적 정당으로 재건될 수 있기 위해서는 비례대표제만이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의 예외주의(exceptionalism)는 이 나라의 의회체제가 갖는 독특한 비민주적 특성 -- 웨스트민스터 행정부에 집중된 권력, 소선거구제, 일정부분 상속의 원리에 입각한 상원제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보호하는 불문헌법이라는 특성과 그 한가운데서 귀족적 특권을 통해 이 권력을 휘두르는 수상 -- 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자신들이 통치하고자 했던 이 국가의 비민주적 특성에 대해 광범위한 이해관계를 발전시킨 노동계급측의 기본적인 정치제도가 영국의 예외주의를 형성시키기도 하였다. 영국 노동당은 결코 완전한 의미의 사민주의 정당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운동의 하나가 창조한 당으로서, 이 당은 이중적인 때로는 키메라적[사자의 머리, 염소의 몸, 뱀의 꼬리를 한 괴물, 즉 삼중(三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공식적인 ‘노동자계급의 정당’으로서, 노동당은 급진적 개혁--노동자 조직과 직접적 연계가 없는 대륙의 사민당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개혁--을 이룰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이는 특히 노동계급이 전투적인 시기에 더 그래 보인다. 이 가능성이 언젠가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좌파들은 이 정당에 대해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연계의 특성(특히 권력이 작업장 조직, 지역 지구당과 지역 의원들보다는 노동조합과 정당의 지도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문자 그대로 노조의 의회정치위원회(Representation Committee)26)라는 기원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것이 노동당으로 하여금 현존하는 경제적 정치적 틀 내에서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방어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취하게 만들고 있다. 이 당의 수사와, 때때로는 공적으로 천명된 많은 정책들이 그들 자신의 시각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하지만 예외없이 모든 노동당의 지도자들은 자신들과 당의 통치 능력을 증명하고자 했다. 즉 현존 국가기구들을 가지고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는 현재의 의회적 관습과 실천에 위협이 되는 행동들을 신속하게 억압하는 속류적(philistine) 정치문화와 중앙집권화된 제도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노동당은 소선거구제를 견고하게 지켜냄으로써 선거를 통한 좌파들의 도전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왔다.27) 이 선거제도는 의석을 얻기 위해 소수당이 획득하기에는 힘든 득표수 규정(arithmetic)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을 중도로 끌어당기는 방식을 통해 소수 좌파들의 도전을 저지한다. 영국 녹색당 내에서의 분열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압력의 산물이다. 이 정당은 결코 독일 녹색당이나 네덜란드 녹색좌파만큼이나 명백하게 좌파운동을 대변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당의 기원은 정치적으로 훨씬 더 잡다한 것이었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선거제도가, 확신있는 정치적 정체성을 수립할 이 정당의 능력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28)

노동당이 보기에 그들의 즉각적인 이해관계에 들어맞는 것 -- 즉 대중적 위임(popular mandate)이 무엇이건간에 일단 정부로 들어가는 것 -- 은 바로 이 선거제도였다. 노동당은 관직을 차지함으로써만 공약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때는, 특히 45년에서 47년 사이에, 노동당은 중요한 개혁을 -- 물론 나중에 치명적인 압박이 되는 한계(즉 당은 런던 금융가의 작동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의 개혁이라는 한도 내에 자신을 묶어두려 노력하였다)내에서이긴 하지만 -- 관철시켰다. 어떤 개혁들은 진정으로 대중적 위임을 요구했을 것이며, 이것 없이는 재정적 산업적 이해가 언제나 노동당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었다.29)

사기칠 권한을 가지고 있는 부당한 선수처럼, 노동당은 언제나 지름길을 통해 결승점에 도달하였다. 그것은 전반적인 다수의 지지를 획득할 필요는 없었다. 또는 일단 집권한 경우, 노동당은 급진적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집권을 이용해서 대중의 위임과 주도권를 만들어내는 대중적 동맹 전략 -- 1982년 GLC처럼 -- 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유럽대륙 서쪽 섬나라의 이러한 독특한 사례는 사회운동에 의해 형성된 좌파 정치 내부의 변화 지도에 함의를 던져준다. 이는 영국 내의 여러 민족들(nations)과 지역들에서 이 좌파들이 두 가지 임무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들의 독립적인 목소리를 만들어내야 하며, 이의 조건인 민주적 헌법을 만들기 위해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88 헌장(Charter 88)은 선거개혁, 권리장전(bill of rights), 그리고 세습적 상원제도와 특권 귀족층 및 웨스트민스터의 중앙집권화된 통치의 종결 등이 포함된 민주적인 성문법을 만들 수 있는 매우 기초적인 동맹의 결집점(focus)을 제공해 왔다. 또한 급진적 녹색좌파의 많은 활동가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는 동시에, 직접적인 정치적 대변에 대한 충동없이 초의회적 운동의 자원을 활용해 급진좌파의 인프라스트럭쳐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비정당 급진좌파들은 중첩되는 다양한 네트워크와 정치적 결사체를 통해 조직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공공서비스를 지켜내기 위해 단지 지역적 수준에서만 함께 하는가 하면, 지난 십 년간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처럼 전국적 혹은 국제적 문제에 관해 공동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크루즈미사일 반대 운동, 84년의 광산 파업, 걸프 전쟁 반대, 92-93년의 폐광에 대한 저항, 스코틀랜드 지방자치를 위한 운동 등이 그것이다. 토니 벤의 체스터필드 [노동당] 지부나 북부 잉글랜드의 여타 지역에서 개최되는 정규적인 ‘사회주의자 대회(Socialist Conference)’는 수백의 활동가들에게 최소의 결집지를 제공해 왔다. 

6. 공산주의 사후(死後)

새로운 정치 형태의 이와 같은 예들은 북서유럽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나라들 --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베네룩스 국가들(Low Countries), 독일, 그리고 영어권 국가들 -- 에서는 사민당이 지배적으로 노동운동을 대변해 왔다.30) 독특한 특성을 가진 의미있는 신좌파 정당들은 남부 유럽에서는 형성중에 있는데, 그곳에서는 노동자의 정치적 충성이 사민주의와 공산주의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다. 특히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 내부 분열로 두 개의 조직이 나타났고, 이들은 적-녹(Red-Green) 및 평화운동 조직과 함께 팀을 이루어 현재 각각 통합좌파(United Left)와 공산주의재건당(Refundazione Communista)이라고 불리우는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들의 성격은 여전히 유동적이다. 현재, 그들은 앞서 소개한 정당들과 뿐만 아니라 그들 간에도 서로 매우 다르다. 그 둘 모두 최근 공산당 내부의 전략 변화와 분열의 산물이다.31)  
 
스페인 공산당은 득표율이 반 이상 떨어지고 그들의 국회의원이 23명에서 4명으로 줄어들었던 1982년 선거 이후 동시에 두 번의 중요한 분열을 경험하였다. 한편으로는 친모스크바 강경분파가 당을 떠나 자신들의 당을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 정당 모델과 결연하고 관습적인 의회정당으로 스페인 공산당을 이끌었던 산티아고 까리요가 자신의 정당을 만들고 많은 그의 지지자들이 결과적으로 사민주의 정당인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PSOE)에 합류하였다. 정당에 남아 있던 사람들(여전히 상당한 숫자였는데, 왜냐하면 86년 선거에서 부분적으로 득표율이 증가했으며, 의석이 7석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은 나중에 강력한 좌파정당 동맹 -- PSOE의 소수파를 포함하는 -- 이 될 조직의 건설과 스페인의 나토가입을 반대하는 지역의 독립적인 여러 평화운동에 당의 전력을 집중하였다. 카탈루냐와 바스크 주는 ‘반대’ 표를 던졌지만, 대중들의 투표는 [나토 가입에] 우호적이었다(곤잘레스는 나토 가입을 EC 가입 문제와, 그리고 스페인 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 및 민주화 문제와 성공적으로 관련지었다). 그러나 캠페인 그 자체는 새로운 단계의 조직을 건설하고 사민당 좌파들과 접촉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국민투표 직후, 공산당은 이 동맹에 기초하여 몇몇의 소규모 좌파 민족주의 정당, (역시 소규모의) 친모스크바 공산당, 그리고 적은 숫자의 독립적 활동가들이 결합하는 선거용 동맹인 통합좌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당원은 약 4만명 정도이며, 대략 70% 정도가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가장 최근의 선거에서 그들의 특표율은 8%가 넘었으며, 이는 공산당이 스스로 획득한 득표로서는 의미있는 증가였다. 광범위한 좌파활동가의 스펙트럼은 선거에서의 득표로 이어졌지만, 다양한 지역의 집단들, 협동조합 -- 스페인에는 이러한 운동의 풍부한 전통이 존재한다 -- 에 개입하고 있는 대다수의 독립적인 ‘운동’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공산당의 지배에 대해 신중을 기하고 있다. 이는 통합좌파의 기본적 강령이 북유럽 신좌파정당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수단과 정책수립 수단이 아직은 사회운동의 영향력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향이, 특히 (카탈루냐와 바스크 주의) 급진적인 민족주의의 영향력 아래서는, 바뀌고 있다는 몇 가지 조짐이 보인다.

카탈루냐 당원들은 최근에, 통합좌파는 조직의 후보단을 선출하기 위해 통합좌파 지지자들간의 예비선거를 개최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지금까지 후보단은 중앙집권적으로 선택되었으며, 후보단 목록의 상위에 적힌 거의 모든 이들은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공산당은 통합좌파로 자신들을 해소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면 철저한 민주화의 과정을 앞당길 것이며, 그런 가운데 독립적인 급진적 집단과 네트워크는 그들이 진정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될지는 불분명하다.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의 완만한 자살(slow suicide)이 전혀 반대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PCI의 다수는 명망성을 동경하는 당 지도자들을 따랐고, 정부의 잠재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자신의 명칭에서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적인 단어를 삭제해 버렸다. 소수자 혹은 다양한 소수자들간의 다소 불경스러운 동맹관계는 자신들의 공산주의 전통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PCI의 활동적 노동계급 기반에 터하여 새로운 정당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이는 급진 좌파와 녹색 좌파에 기반한 비공산주의 그룹에도 호감을 샀으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공산주의재건당은,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하면서 PCI를 떠났던 (하지만 84년에 입당한) 루치오 마그리, 루치아나 카르텔리나32) 같은 과거의 <선언(Il Manifesto)>지 지지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당에는 또한 이러저러한 소련 정책 중에서도 특히 프라하의 봄에 대한 진압을 지지했던 소규모 친모스크바 집단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상이한 정치적 경향이 공통 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리고 이 당이 페미니즘과 작업장 노조운동, 그리고 특히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이탈리아의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의 통찰로부터 이끌어낸 원칙을 수용하는 형태를 택할 것인지는 여전히 두고 볼 일이다. 몇 가지 징후들은 고무적이다. 새로운 정당은 1991년의 소련 보수파 쿠데타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대를 표명했다. 이 정당은 비공산주의 활동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 선거에서 이들은 8%의 득표율을 보였다. 그리고 오늘날 친모스크바적 정책들은 희미한 기억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탈리아 정치체제의 후견주의적(clientelist) 특성과 뒤얽혀 있는 부패는 반(反)정당 정치에 생명을 주고 있다. 재건당은 사회적, 경제적 문제 때문에 그리고 사회운동과의 긴밀한 제휴와 인권 및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점점 더 급진화되고 있는, 좌파 카톨릭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 부패반대 정당인 La Rete(‘연결망’)와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다. PCI의 유산인, 재건당에 지배적인 전통적 조직화 방식은 보다 자유주의적 정치 문화를 가지고 들어온 사회운동 활동가들에 의해 뒤흔들리기 십상이다.

공산주의의 붕괴와 다양한 형태를 지닌 정당들의 몰락 및 환생은 서유럽의 모든 사회운동 정당들에 얼마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에서는 이 경험은 그 자체로 매우 다양하고, 그들의 초기 특성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남유럽의 반파시스트 저항과 공산당의 연합은 그들에게 지속적인 도덕적 신뢰성과 대중적 지지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 나라에서 공산당이 어느 정도 통일되는한, 대중적으로 지지받는 대안으로서 사민당 좌파를 위한 정치적 공간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모두 소규모의 녹색당과 급진적 좌파정당이 존재하기는 했었지만, 선거에서 1-2% 이상 득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앙트완 와슈테(Antoine Waechter)가 이끄는 프랑스 녹색당(Les Verts)는 초기에 약간의 성공, 즉 88년 대통령 선거에서 단지 3.8%만을 획득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 정당은 초기에 스스로를 좌파와는 독립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사회당의 붕괴(미테랑 정부가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와 -- 전통 좌파의 붕괴의 한 결과로서 -- 르팽(Le Pen)의 국민전선(National Front)의 부상은 정치 지형을 극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이것은 녹색당이 좌파의 한 부분으로서 재정립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놓았으며, 그들에게 스스로를 우파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과거에 이 정당의 입장은 영국 녹색당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좌도, 우도 아닌 전진(neither right nor left, But ahead)’이었다.

사회당은 결코 대중 당원을 가졌던 정당은 아니다. 1970년 미테랑에 의해 창당된 이 정당은 항상 ‘명망가 정당(parti des notables)’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정당은 ‘분파들(des frations)의’ 정당, 혹은 클럽(들로르(Delors)는 자신의 Witness 클럽을 소유하고 있다)이나 ‘운동들’(예를 들면, 로카르(Rocard)가 주도하는 새로운 중도좌파 운동)의 정당에 가깝다. 새로운 녹색당은 이미 사회주의라는 대건축물을 붕괴시키면서 분리되었다. 전에 사회당 환경장관이었던 브리스 라롱드(Brice Lalonde)는 90년에 녹색 세대(Génération Ecologie)를 창당했다. 이 당은 녹색당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는데, ‘녹색 유권자’들은 두 당을 모두 합쳐 92년 지방선거에서 전부 14%를 넘지 못했다. 92년 11월 이 두 개의 녹색 조직은 93년 5월에 있을 의회선거을 위한 일시적인 선거 연합을 결성하였다. 이 선거에서 그들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녹색당은 보다 명백하게 녹색 스펙트럼의 왼쪽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앞서 묘사한 북유럽의 신좌파정당이나 새로운 녹색좌파 정당과는 달리, 이 정당은 좌파의 초의회적 운동 참여의 오랜 역사가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다. 사실 68의 진원지인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운동의 지속적인 유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당은 매우 엘리트주의적이며, 지금은 매우 부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가 하면 프랑스 공산당은 매우 전통주의적이고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이는 대안적 신좌파가 지속되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안이 지속적인 뿌리를 내려 대다수 북유럽 국가들에서처럼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프랑스 정치 제도의 특성들 -- 특히, 중앙집권적이고 동시에 역사적으로 비정당 시민 결사체에 대해 적대적인 -- 이다. 심지어 신사회운동이 추진력을 갖고 있을 때조차도, 간단히 말해 원자력 발전소에 관한 운동처럼, 프랑스의 선거제도는 이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정치적 발판을 획득하기 어렵게 만든다.33) 

7. 개혁도 혁명도 아닌

서유럽에서의 사회적, 급진적 노조운동의 정치적 혁신에 대한 나의 지도그리기는 아마 세 가지 차원으로 정리가 될 것이다. 나는 상이한 국가의 대조적인 영역과 각기 다른 새로운 형성체들의 규모와 지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의 윤곽을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정당의 포부 및 정치적 특성의 독특함을 지적하였다.

남유럽과 영국에서 사회운동 좌파가 처한 정치적으로 취약한 지위와 대조함으로써 나의 지도 그리기는 북부의 사회운동의 수단과 열망에 책임을 가진 정당의 출현이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모두의 성취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러므로 매우 다양한 형태로 수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암묵적으로 사회운동이 방어해내려 하고 사실상 확장시키고자 하는 현존 국가의 특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국가의 사회부조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이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정당들을 정통 ‘혁명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동시에, 정책과 실천 측면에서 그들은 자본주의 축적에 의해 추동되는 경제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그들은 이 경제의 변혁을 원하지, 개량(amelioration)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량주의자’로 묘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북유럽의 신좌파 정당들--위에서 내가 묘사한 세 가지 중에 하나 혹은 그 밖의 것과 유사한 다른 나라의 정당들, 즉 노르웨이34)나 핀란드35) 등을 포함해서--이 지속적인 독특한 정치 세력으로서 그들 스스로를 만들어 갈 수 있을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만약 그들이 이를 이루어낸다면, 그리고 여기에 이름이 필요하다면, 그들은 아마 ‘[구조]변혁적(transformational)’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물론 이는 분명 대중적인 모토에 사용되는 용어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지도그리기 과정에서 또 다른 특징, 즉 녹색당의 다양한 패턴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경우, 신좌파 정당은 그들의 명칭에 ‘녹색’을 포함하고 있다. 덴마크와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는 신좌파의 영향을 받은 여타 정당들이 좌파적 녹색(left green)의 견해를 자신들의 정책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다양한 정도의 성과를 보여주면서 녹색좌파 활동가들의 집결지가 되어 왔다. 이 나라들에서 녹색당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매우 소규모이다. 이 다양한 패턴들은 환경운동이나 여타 운동들의 특징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환경운동은 신좌파의 발전에 핵심이었으며, 그 반대이기도 했다. 환경문제에 관한 집합행동이 항상 평등주의적 혹은 급진적 민주주의의 틀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우파 환경론자들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며,36) 몇몇은 신좌파의 절충안에 의해 지배되는 현재의 녹색당에 잠시 머무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우리 시대의 환경운동은 좌파로 기우는 경향이 있어 왔다. 부분적으로 이는 서구에서 60년대 이후 자연에 대한 도구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의 수단이 거의 실증과학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그리고 좌파로부터 나왔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녹색운동 활동가들에게 지구행성에 대한 위협은,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들의 상업적 혹은 정치적 목적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이 받아들인 방법의 결과에 무지한 그런 인간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반면에, 모든 새로운 기술의 도덕 및 정치에 대한 도전과 함께, 녹색운동은 신좌파와 정통 ‘생산주의적’ 맑시즘과의 절연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평등주의적이며 민주적인 목적을 공유하면서 인간과 자연간의 프로메테우스적 관계(지배와 착취)를 거부하고 둘 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현대의 녹색운동은 신좌파로 하여금 그들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경제적 수단을 지배하기보다는 협동적이 되려고 하는 기세를 재강화하게 만들었다.

각각의 새로운 운동들(예를 들어 페미니즘과 성해방 운동)은 신좌파의 형성에 비슷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환경운동은 총체적인 관점(totalizing vision)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정당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관여하는 문제들의 범위 내에서 총체화를 행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정당의 적절한 틀거리가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생태주의적 관점이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접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마치 스칸디나비아의 신좌파 정당들이 증명했던 것처럼 기존의 정당이 생태적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증명된 곳에서는, 환경운동의 좌파들에게 특별히 녹색당을 창당하거나 가입해야겠다는 충동을 주지 않는다.

8. 정치적 영향력을 위한 조건들

가장 성공적일 경우, 이 정당들의 수단은 좌파의 전통적인 공산당이나 사민당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변화를 가능케하는 권력의 다양한 원천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 이 원천은 재생산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 제도를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회운동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두번째 원칙은 사회적 필요에 대한 지식의 원천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며 가능한 해결책이 국가나 정당 지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에 갇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식과 권력은 사회변화의 과정이나 그것의 효율적인 담지자들에게 밀접하게 관련된 도구들이다. 이 정당들은 조직화의 새로운 방법을 경험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바라는 변화를 위해서 지식과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탈중앙집중화, 풀뿌리 권력 등등에 대한 보다 규범적인 개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당이나 운동의 효율성을 위한 어떤 방법들의 중요성에 대해 언제나 자의식적인(self-consciousness)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좌파 정당들의 성공은, 우선 그들이 각자의 독특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적 변혁을 이루어내도록 운동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데 달려 있다. 다음으로 이는 운동의 독특한 전문적 기술과 네트워크(혹은 그들이 발전시킨 프로젝트)를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정책을 발전시키는 데 달려 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의 제도나 지배의 한 부분이기도 하면서 분명 그들 문화의 한 부분인, 여러 운동의 역량과 한계에 적당한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전통적 좌파 정당이 간직하고 있는, 또는 아로새기고 있는 대다수의 수단들과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것을 포함한다. 

9. 전통 정당들의 방법론

한편의 사민당과 노동당, 다른 한편의 공산당이 지니고 있는 오래된 방법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으며, 역사적으로 각각 다양한 변종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양쪽 모두의 성격을 규정짓는 공통된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두 종류의 정당 모두 전통적으로 사회운동을 그들의 수하에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우리의 여성/평화/세입자 운동’, ‘우리의 위대한 운동’이라는 표현이 그러하며, 그 운동이 너무 반항적이어서 포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그들에 대해 나병환자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들을 ‘우리 운동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취급하며 운이 다한 것으로 가정한다. 전통적 노동자 정당이 자연스럽게 빠져 들어가는 구식 아버지 역할은 권력에 대한 그들의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는 변화를 위한 권력이 배타적으로 국가에 놓여 있다는, 따라서 사회주의자나 노동조합, 그리고 운동활동가들에 대해 모두 똑같이 이에 대한 접근을 그들 자신이 통제해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유일한 (남성) 부양자(breadwinner)의 정치적 체현과 다소 비슷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빵/권력을 시끄럽게 요구하는 이들은 그들의 아이이거나 혹은 종속적인 주부다. 이 정당은 그들에게 무엇이 좋은지 알고 있다.

로버트 미헬스는 그가 ‘과두제 철칙’ -- 심지어 가장 민주적이고자 하는 포부를 가진 정당에서조차 발견되는 -- 이라고 묘사한 것을 연구하면서, 이 정당의 근본적인 속성을 묘사하였다. 그의 사례는 초기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기 전에 작업을 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공산당은 주로 사민당으로부터의 분리였으며, 사민당의 기본적 조직 가정이 양쪽 모두에게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그가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에 대해 언급했던 것들 중 대다수는 제3 인터내셔널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가 정치조직에서 피할 수 없는 ‘테일러리즘’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즉 직업적 엘리트들이 소유하는 일정 정도의 특수화된 전문기술은, 형식적 민주주의 과정이 어떻든 간에, ‘대중’, 기층, 풀뿌리부터 자율적이게 될 것이다. 후자[대중]는 획일적으로 그들의 이해관계에 갇혀 있으며, 지적인 영역에서 소극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미헬스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어떤 엘리트에게 달려 있는지는 알 수는 있지만, 이 이해들이 어떻게 달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 수 없다고 가정한다.

미헬스는 동시대에 (다른 대륙에서) 정치적 경영이라기보다는 산업 경영에 대해 저서를 남긴 테일러를 참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정치학에서 비슷한 원칙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있는데, 그의 가정 속에서 이 원칙이란 효율적인 목적 지향적 조직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테일러가 효율적 산업 경영의 원칙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을, 미헬스는 ‘모든 형태에서 엘리트에 대해 투쟁하기를 주장하는’ 정당 내에서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직에 관련된 지식의 특성에 대해 테일러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가정, 즉 조직은 그 속의 사람들이 훈육되어야만 하는 전문적인 과학 지식 -- 규격화된 법칙(codified laws)과 전문적 기술이라는 실증적 의미에서의 -- 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는 대중들은 근본적으로 비창조적인 속성을 갖고 있으며 조직은 통일된 목적(국가 권력 장악)을 갖는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테일러가 <과학적 경영의 원칙>에서 기계적이고 규격화된 노동자의 기술과 기업의 이윤극대화 목적에 대해 서술했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특화된 엘리트가 가능한한 규격화되고 조직적으로 지배해야 한다. 마치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이 기업을 뿌리채 흔들어 놓는 것처럼 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중앙집중화는 정당이나 기업이나 마찬가지로 수고를 절약하게 해준다.

그가 묘사한 근본적인 정치 문화 속에서는 과두제의 철칙이 아마 십중팔구 실제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문화 내에서 저서를 쓰고 있었다. 그는 훈련받은 회의론자의 객관성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대다수의 당 간부들이 자신들의 민주주의적 수사를 굳게 믿으면서 거의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정당의 근본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특징을 대중정당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10. 단일한 권력 중심을 향한 집합 의지

전통 좌파의 과두제에 대한 미헬스의 묘사 속에 ‘주어진’ 첫 번째 핵심은 단일한 권력중심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국가의 조종간을 잡고서 사회주의로 방향을 선회하기 위해서는 집합의지가 바람직하다는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 조직은 ‘집합의지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수단’이다. 또 미헬스에게 조직은 ‘최소 노력의 원칙, 즉 가장 가능성있는 절약경제(economy of energy)’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가정 위에 서 있는 정당의 메타포는 당연히 군사적이고 기계적이다. 이 정당은 ‘기층’과 ‘관료’로 나뉜다--또한 효율적인 정당은 효과적인 ‘선거기계’이기도 하다. 미헬스는 자신의 관찰로부터 “사회주의 언론의 주된 기사들에서 군사용어나 군대 전략, 전술의 표현이 계속해서 반복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주요 사민당과 공산당은 집합의지보다 토론 및 공통의 경험에 의한 발전과 자율적 주도권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정당이 아니라, 각각의 사회적 권력의 원천에서 나오는 상이한 의지들의 수렴과 합의를 중시하는 정당이었다.

이전의 정치적 수단에 대한 중대한 도전은 역사적인 이유로 본질상 이질적인 여러 의지들로 구성된 정당이었다. 영국 노동당이 그 좋은 예이다. 상이한 정치 조직과 노조로부터의 형성이라는 이 당의 역사는 전통적인 관점, 철지난 도구라는 너저분한 유산들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가는 대군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정당의 전략가들은 군사적 엄정함으로 도전에 대처했다. 마치 단일한 집합의지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인 양, 정당의 권력--좌파에 대해 선거 독점권을 가지고 있고, 노조로부터 자동적으로 기금을 받는--이 한결같이 작동한다고 인정하는 당헌이 성립되었다. 여러 이견들은 그것들이 자신의 운명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지라도 주변화되었다. 리차드 크로스만(Richard Crossman)의 말을 빌면, “웹 부부(Sidney and Beatrice Webb)가 작성한 이 당헌은 ‘당의 투사들을 실제 권력에서 배제함으로써 하나의 완변한 정당 민주주를 만들어냈다.37) 

11. 지식의 전문적 속성과 대중의 무능력

20세기 초반의 조직문화에서 형성된 좌파 정당의 골간을 이루는 두 번째 공리는 과학적, 전문적 지식의 배타적 중요성과 대중의 무능력 혹은 무지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가정한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결정을 수행하는 모든 노력에는 전문화된 지식이 필수적이다... 일정한 독재는 반드시 허용되어야 하며, 따라서 순수한 민주주의로부터의 이탈도 허용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아마도 하나의 죄악일 것이지만, 이것은 필요악이다. 사회주의는 모든 것을 민중에게 맡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몇 가지 중요한 가정들 때문에 미헬스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첫 번째 가정은 정당의 실효성(efficacy)에 관련된 유일한 지식은 기술적이며 실증주의적 의미에서 과학적인 지식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평당원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이고, 당 간부들 역시 습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그녀를 당원으로부터 분리시키게 된다. 미헬스의 개념 속에서 지식의 소유는 “대중으로부터... [간부들을] 해방시키고... 대중의 통제로부터 독립적이 될 수 있게 한다.”

두 번째, 사실과 가치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즉 당원들은 당의 가치만을 규정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당은 적절한 사실들(이는 전적으로 기술적인 문제로 상상된다)을 수집할 관료를 지명하거나 선출하고 전문적인 지식에 의존한다. 이러한 가정에 기반한 정당은 원칙의 결정에만 당원을 포함하는 구조를 가졌는데, 이 원칙이란 전적으로 실행과는 분리된 것으로 가정된다. 이 정당들은 또한 결정된 정책을 정교화하고 실행하는 집행부(executive)를 운영하는 행정 간부(staff)를 가지고 있다. 당원은 그들이 신뢰하는 원칙의 기준으로 행정부의 작업이 적절한 것인가를 평가할 기초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당원과 지도자 간의 골이 깊어진다. 당원들은 집행부가 틀렸다고 생각되는 점에 대해 대안을 토론할 만한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사실 정치적으로 탈숙련화되어 있다.

새로운 정당에 내재된 방법론은 이것들과 얼마나 다른가? 위의 가정들은 종종 새로운 정당에도 여전히 내재하다. 실천적 결과들은 이 정당으로 하여금 그들의 유용성(effectiveness) -- 상이한 의지들을 제멋대로 뒤섞기보다는 조정함을 통해 권력의 여러 원천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필요, 그리고 또한 일상의 암묵적 지식을 이론에 기반한 근본 구조에 대한 지식과 결합시키는 능력 -- 을 위한 조건을 실현하지 못하게 만든다. 기존의 방식은 조직의 혁신이라는 것을 강고한 구래의 틀 속으로 다시 끌고들어가는 미묘하고도 무의식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 조직들의 목표가 공직을 획득하는 것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특히 서독과 같은 의회구조를 가지고 있는 경우 -- 이들은 막대한 자원을 등에 업고 있다 -- 에는 더욱 더, 기존의 수단들이 훨씬 쉬운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관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속임수가 급진적인 사회운동으로 하여금 위원회 밀실 책략에 전념토록 유혹하는 영국의 경우에도 그렇다. 이러한 관례적 수단들은 새로운 운동과 급진적 노조 세력의 창조적 잠재성을 발전시키는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운영된다. 

12. 공동의 목표, 권력의 상이한 원천

한 정당의 내적/외적 관계의 특성은 의회와 초의회적 권력 간의 관계, 그리고 이 둘을 연결시키고 활성화시키는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그들의 이해 수준을 반영한다. 1986년에서 90년 사이에 서베를린에서 SPD와 동맹을 맺었던 독일 녹색당의 두 번의 경험은 독일 녹색당 내부에서 이 새로운 정당에 대해, 자기조직의 작업, 그리고 권력에 대해 전혀 다른 이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녹색당의 주류는 합법적 공간이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중요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사회적 변화는 [시민]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권력의 원천들을 동원하는 데 달려 있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당의 활동가들이 이를 해석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첫 번째 사례는 합법성의 한계와 사회변화를 위한 차별적인 권력의 원천이라는 개념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경우 -- 이 사례에서처럼 합법적 활동이 요구되는 경우에조차도 -- 의 전략과 조직방식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관습적인 의회의 압력에 굴복하도록 녹색당에 가해지는 여러 압력들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주도권을 행사할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오직 지도력에 대한 통제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당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자멸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들이 얽혀 당의 사회운동 기반을 뿌리채 흔들고, 따라서 선거뿐만 아니라 당의 사회적 역량마저 갉아먹는 일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가 역시 볼 수 있다.

첫 번째 사례는 이민자들과 ‘외국인 노동자(guest worker)’의 권리에 대해 녹색당 의원단의 대변인인 하이디 비숍 플란츠(Heidi Bischoff Pflanz)가 행했던 작업에서 볼 수 있다. SPD는 이민자들에게 독일 시민권과 직결되는 투표권을 포함해 모든 권리를 부여하자는 녹색당의 정책에 반대하였다. 연정 내부에서 SPD의 [이민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적대감에 반대하는 녹색당의 입장을 밝힌 후에, 플란츠는 당분간 정부를 통해 할 수 있는 작업이 더 이상 없다고 결정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의회의 대중적 기반과 정부 내의 그녀의 입지를 활용하여 이민자들에 대한 녹색당의 지속적인 지지와 SPD의 반대, 그리고 녹색당이 연정 내에서 마침내 다다른 막다른 골목에 대해 공론화하였다. 그녀는 이민자 조직들을 찾아갔고, 그들은 거리에서 투쟁을 벌였다. 이민자 조직들과 녹색당은 SPD를 도덕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포스터와 선동 캠페인을 공동으로 벌였다. 이러한 작업은 서베를린에서 노동운동과 좌파 지식인 계층에 반향을 일으켰고, SPD 내의 분열을 유발시켰다. 그후 플란츠와 그의 의회 동료들은 이 문제를 다시 의회로 재상정했고, 이민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에 대한 1차 독회(讀會)를 가졌다. 의회 밖에서의 정당의 역할은 이 문제에 관한 녹색당의 정책 입안과 관련하여 이민자 조직들에 의해 주로 조직된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결국 대법원은 베를린의 결과를 파기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이는 다양하면서 협동적인 지도력 밑에 놓여 있는 상이한 권력의 원천을 한 가지 정책에 대해 동원했던 전략의 승리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육아방(유치원)[정책]에도 중책을 맡고 있는 녹색당 여성 의원과 관련된 것이다. 1990년 1월 유치원 노동자들은 임금을 인상하고 교사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파업에 들어갔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모두 녹색당이 지지하는 것이었다. 유치원 노동자들은 대체로 녹색당을 지지하는 공공 부문 노동자들이었다. SPD는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에 반대하였다. 녹색당 여성 의원 지명자인 안나 클라인(Anna Klein) -- 그녀는 녹색당 당원이 아니라 녹색당에 우호적인 지도적 페미니스트였다 -- 은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했지만, SPD의 입장에 반대하거나 이민자들에 대해 플란츠가 그랬던 것처럼 당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한 독립적인 전략을 발전시키도록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략은 유치원 노동자들(이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노동자 집단이다)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동원해내고 SPD의 내분을 확장시키는 것을 포함시켰어야 했다. 녹색당 집행부는 주도권을 획득하거나 지지를 동원해내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마치 그 상원의원이 이 문제를 해결할 전능한 힘을 갖고 있는 듯이 그녀에게 모든 걸 위임해 버렸다. 안나 클라인이 해명을 요구받았던 집행부 모임에서, 그리고 그 도시 시청에 있는 녹색당 회랑의 주변에 돌아다니고 있던 가쉽에서 모든 에너지는 그녀에 대한 비판으로 집중되었다. 아마 이 상원의원에게 압력을 가해 그녀 자신의 입장을 보다 대담하게 만들고, 나아가 SPD를 분열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를, 유치원 노동자들에 대한 의회밖 지지 동맹을 만들어야 하는 이 당의 독립적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주목도 없었다. 그 결과는 유치원 노동자들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고, 대중적 캠페인 한 번 없이 SPD에게 주어진 많은 양보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삽화적 사건이 아마도 녹색당의 전통적 토대에서 꾸준히 지지가 감소해 가는 -- 물론 베를린의 보다 온건한 시민들로부터 표를 더 획득하게 된 것도 아니다 --, 그래서 결국 90년에 정부에서 쫓겨날 정도로 득표율이 떨어진 이유일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녹색당 좌파의 요새로서의 정당, 또는 최소한 시 집행부는 권력의 여타 자원을 동원하는 당의 역할보다는 의회나 상원에서 진행되는 바에 고착되기 십상이다. ‘기층 민주주의’에 대한 당헌상의 책임은 실제로는 당 집행부나 활동가들이 배타적으로 의회를 통제하고자 함을 의미하기 쉽다. 하이디 비숍 플란츠가 즉흥적으로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정당이 대중적 압력을 활성화하기 위해 여타 조직들과 협력했던,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의회 내부에서의, 상부에서의 권력균형을 변화시키는 그런 생기 있는 부가적 차원이 대안이 되었어야 했다.

연방의회로의 첫 번째 입성을 포함한 대다수의 녹색당 선거승리가 그랬던 것처럼, 놀랍게도 베를린에서의 적녹 동맹의 가능성이 녹색당의 발목을 잡았다. 의회에서의 섣부른 타협, 그리고 캠페인을 하기보다는 통제권에 대해 집착하는 양태 등등 몇몇 이런 실수는 어떻게 ‘기층민주주의’가 사회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의 상이한 균형들에 따라 적용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층민주주의 이론의] 추상적 적용은, 정당이 독립적 활동을 통해 관료들 내부의 권력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원칙으로 사용되기보다는 매우 형식적인 방식으로 이론을 사용하거나 혹은 실천 활동의 수단을 포기하고 과거의 정치적 패턴으로 빠져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38) 

13. 상이한 전문가들 

사회운동은 단지 의회정당이 갖지 못한 권력의 원천인 것만이 아니라, 위로부터는 발견될 수 없는 지식과 전문적 기술의 원천이라는 것 역시 증명돼 왔다. 뿐만 아니라 지난 25년여 간의 경험은 미헬스가 묘사한 전통적 노동자 정당의 또 다른 ‘주어진’ 특징 -- 정당 지도부의 기술적 우위성과 대중의 무능력 -- 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독일 녹색당 좌파의 작업은 가장 자의식적인 대비점을 매우 극명하게 보여준다. 녹색당은 의회대변인을 통해, 그리고 다른 조직과 함께 하는 대중적 캠페인을 통해 그들이 제안한 경제정책의 핵심적 부분으로 기초보장소득(basic income) 문제를 내걸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정당이 자신들의 정책을 발전시키는 방식이 드러난다. 이는 노동과 노동시장에 관한 몇 가지 원칙에서 출발하였다. 그 원칙이란, 사람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노동시간대에 대한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가정이라는 사생활 영역 속에서 여성에 의해 행해지는 부불 노동에 대한 인식, 그리고 노동을 상품의 지위로 떨어뜨리지 않도록 노동하는 사람들의 존엄성을 증진시키는 것 등이다. 그들은 정당이 이러한 원칙을 믿을만한 정책과 행동을 위한 전략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지식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관해서도 그들의 접근방식은 당 외부의 ‘지식과 의견, 비전과 끊임없이 상충’하게 될 것이다. 당 집행부와 간부진들의 일은 ‘작업공간(working space)’(예를 들어, 기초보장소득의 문제에 관한 작업공간)을 창출하고, 이 문제에 관심이 있으며 녹색당과 일종의 협동작업을 벌이고 있는 모든 조직들과 접촉하는 것이다.

90년에 녹색좌파는 고용된 여성노동자와 실업중인 여성노동자들이 함께 조직돼 있는 네덜란드 여성노조(이 노조는 -- 금세기 초에 설립되어 여전히 상당한 부흥을 유지하고 있으며 하나의 강력한 세력인 -- 네덜란드 노동조합총연맹(TUC)에 가입되어 있다)와 정기적인 모임을 위한 여러 가지 편의 -- 실업자 조직과 노동시장 문제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들 -- 를 제공하였다. 이 그룹은 경제적 안정에 대한 권리에 대해 세부적인 전략을 생산해냈으며, 이 전략이 작업팀 -- 기초보장소득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가진 것은 아니다 -- 을 통해서 만들어졌든 아니든 간에 녹색좌파 당대회의 지지를 받았다.

미헬스는 [만약 살아서 봤다면]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좌파 정당을 과거의 좌파정당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핵심은 세 가지 암묵적인 전제다. 첫째, 당 안팎의 ‘대중’은 획일적이고 활력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지도부와는 독립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당원과 지지자들은 지식과 경험의 원천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지식과 경험의 보다 광범위한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두 번째, 정책입안의 세부과정은 중립적인 전문가에게 맡겨질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과정이며 이해관계와 가치가 자리잡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어떤 그룹이 ‘작업공간’에 포함될 것인가에서부터 어디에서 정책 캠페인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권력 원천을 조직할 것인지의 문제까지, 이 모든 것은 가치와 사실이 뒤엉켜 있는 문제로, 따라서 민주주의 논쟁의 주제로 취급되었다. 마지막으로, 당 지도부의 역할은 우수한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과 독립적인 활동을 통해 근본적인 변혁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거나 혹은 강화할 수 있도록, 선출된 정치 제도 내의 참여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과 결정에 달렸다.

또한, ‘작업공간’이라는 생각은 녹색좌파라는 정당이 변혁과정을, 혹은 지도력을 독점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정당의 지도력이 성공적인가 아닌가는 의지의 통일(멤버쉽에 대한 지도부의 통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목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달려 있으며, 정당정치 체제 내에서의 입지를 이용해 이 사람들에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권력을 더해줄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이를 위해 행동의 통일이 필요하기도 하다. 어떤 때는 상이하지만 보완적인 활동을 벌일 수 있는 [시민] 사회에서의 다양한 수준의 동맹이 필요하기도 하다.

일단 말은 그럴듯하지만, 자신들이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 변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종종 모순되는 이해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상반된 인식을 갖고 있기도 하다. 독립적 운동의 지식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불확실한 일일 수 있다. 연구소를 차리고 보다 똑똑한 젊은 석학들로 하여금 인상적인 문건들을 만들어내도록 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임금 수준에 관한 덴마크 사회주의민중당의 경험을 예로 들어보자. 이 정당은 노동시간단축을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하지만 1985년에 이 정당의 페미니즘 지지자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어떤 정책이 도입되어야 하며 어느 정도의 임금 수준이 되어야하는가에 대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여성운동으로부터 아이디어와 연구를 이끌어내고 노조에서 활동중인 여성 그룹들을 포함시키면서, 그들은 노동시간단축의 실행이 노동시장과 자유로운 단체협상에 맡겨져서는 안 된다고 제안하였다. 대신에 그들은 노동자의 교섭력과 상관없이 노동시간단축이 도입될 수 있도록 노동시간단축이 입법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임금수준은 연대와 생활 임금의 원칙에 기반해서 결정되어야 하며, 이는 [임금] 차별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사회주의민중당 소속 대다수 남성노동자들의 성미에 맞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임금체계 및 교섭력과 관련된 전략을 선호했으며, 과거에 이러한 투쟁은 성차별을 철폐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논쟁 끝에 이 정당의 당대회는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한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정당의 노조협의회(trade union conference)는 여전히 교섭 중심의 대안책을 뒤받침하는 해결책을 가결시켰다. 이 정당은 처음부터 민주집중제를 거부하였으며, 따라서 노조협의회는 여전히 이견을 가질 권리가 있고, 자신이 강하게 거부하는 당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 아래 놓여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노조협의회가 자신들의 거부권을 일정 기간 유보한 가운데, 당은 당의 다수가 동의한 입장에 대한 지지캠페인을 벌였다. 결국 실제 대다수의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다수파의 캠페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를] 취약함의 신호, 즉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혁에 대한 이 정당의 인식은 대중운동의 압력에 기초해 있으며, 따라서 이 운동들과 공유된 당의 정책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당원들에게 원칙을 강요함으로써 이 정당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당내 의견불일치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논쟁을 반영한다. 하나의 입장을 갖는 동시에 공개적으로 논쟁을 지속시키는 정당은 당원들이 자신들이 공유하지 못한 노선을 그대로 되뇌이는 그런 정당보다 운동의 의식을 자극하기가 훨씬 쉽다. 네덜란드 녹색좌파와 마찬가지로 덴마크 SF 역시 지도자들이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관습적 전제--모든 사람의 지식이 부분적으로 들어가 있는 논쟁을 통해 생산된 입장을 전지(全知)한 집합적 브레인의 정언명령으로 전환시키는 전제--로부터 절연하였다.

모든 사람의 지식이 갖는 부분적이고 오류에 빠지기 쉬운 특성을 인식하는 것은 상이한 경험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지식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경험과 새로운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정책을 실험하는 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전자에 의해 제기되는 한계를 후자에 대한 인식으로 극복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신좌파 정당들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지식을 발전시키고 공유한다. 그러나 정당은 연구기관이 아니다. 그들은 행동을 위한 조직이다. 따라서 그들 지식의 범위에는 실천을 통해 학습하는(learning by doing) 과정이 포함되어야만 한다.

이에 관한 예는 바덴 뷔르템부르크(Baden Württemburg) 문제에서의 독일 녹색당에서 볼 수 있다. 바덴 뷔르템부르크에서 녹색당은 유독성 폐기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바덴 뷔르템부르크에는 20만 톤의 유독성 폐기물이 있었으며, 이를 처리할만한 장소, 즉 이를 소각할 소각로가 없었다. 과거에는 언제나 동독(GDR)으로 수출하였다. 90년 이후로는 프랑스로 가져갔다. 91년 초에 연방정부는 바덴 뷔르템부르크에 두 개의 소각로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이미 유해 배출물로 심각히 손상된 라인강 연안의 한 도시인 켈(Kehl)이었다. 녹색당이 참여하는 켈에서의 [소각로]공장건설 반대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원들과 지역 시민운동의 활동가들 사이에는 몇 가지 상반되는 입장이 존재하였다. 한편으로 녹색당은 전반적으로 소각공장이 유독성 물질을 생산하는 기업들에 면죄부를 준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다. 이 당의 관점에서 필요한 것은 애초에 유독성 물질이 생산되는 것을 금지하도록 만들 규제와 [사회 세력들로부터의] 도움이었다. 다른 이들은 무작정 바덴 뷔르템부르크에 소각공장이 건설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 지역이 자신의 폐기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새로운 소각로 건설반대 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캠페인 내부와 당의 내부에서 논쟁이 지속되었다. 결국 연방정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진전된, 그것도 매우 성공적인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 바덴 뷔르템부르크의 지방정부는 [연방] 정부와 회사가 유독성 폐기물을 감소시키기 위해 상당한 조치를 취할 경우에만 바덴 뷔르템부르크 소각로 건설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아직도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녹색당은 SPD와 FDP, 그리고 지역 캠페인을 이러한 입장을 중심으로 통일시킬 수 있었으며, 소각로 건설을 연기시킬 수 있었다. 캠페인 그 자체의 경험은, 그리고 타인의 경험과 지식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이 당의 의지는 이 전략의 고안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14. 상반되는 압력들

독일 녹색당의 경험은 과거의 모델--위험과 불확실성을 포함하는 정치적 수단에서 떨어져 나와 특권과 책임의 위치로 끌어들이는 압력--을 강화하는 문화적이고 제도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다. 어떤 이에게는 이 정당이, 좌파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보수적인 세력과 해방의 세력이 함께 일하면서 동시에 서로 투쟁하고 있는 하나의 박람회로 보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내부의 논쟁과 분쟁, 곤혹스러움과 실패를 숨기려하지 않는다. 독일 연방정부가 의회그룹에 미치는 중도적 영향력은 특히 강하다. 높은 임금과 수당, 미디어의 주목, 그리고 많은 간부들은 녹색당의 순환보직제도, 정보공유 및 책임의 체계만으로는 완전히 저지할 수 없는 상당한 개인적인 세력강화의 여지를 제공한다. 반면에, 당의 근저에서는, 지역 활동가들이 그들 고유의 세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들은 연방 기구로부터의 지역적 자율성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으며, 이는 강령과 주도권의 독립성을 핵심적 원칙의 하나로 삼고 있는 당의 제도와 문화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이는 녹색당이 실현하고자 하는 급진적 민주주의 전통의 실천적 힘의 원천임이 증명되었다. 사실 지난 20여년간 그들이 전국적으로보다는 지역적으로 더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신좌파 정당의 현저한 특징이었다. 지방의회나 국회 외부에서의 사회변화를 위한 투쟁과 그들 사이의 뚜렷한 관계는, 사회운동 조직이 널리 알려져 있고 이해받고 있는, 그리고 그들과의 협동이 일반적으로 매우 실천적이고 가시적인 지역에서 보다 확실한 의미를 획득하였다. 또한 독일 녹색당의 급진적 민주주의 전통에 대한 지지는 냉전 정책 시대의 첫번째 전후 세대, 즉 그들의 부모 혹은 형 세대과 근본적으로 단절한 세대라는 지속적인 유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독일 녹색당의, 눈에 띠는 강렬한 분파 투쟁은 지역 캠페인과 연방 캠페인, 그리고 정책 입안 사이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 정당의 정책입안은 아주 최근까지, 이 분파주의 때문에 점점 더 주변으로 밀려났다. 모든 쟁점들과 모든 그룹들이 분파 투쟁에 매달렸다. 이는 정당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졌으며, 그러한 이유로 최근의 어떤 회합에서는 --마치 협상이나 축구시합처럼-- 상이한 분파들이 탈퇴하고 그들의 다음 행보를 토론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이러한 분파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지만, 한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양쪽의 지도부 모두 70년대 초반의 마오주의 그룹에서 연유했으며, 이 그룹에서 배웠던 어떤 진리에 대해 똑같은 전제와 경직성을 갖고 새로운 정치적 대의를 추구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반되는 압력의 조합이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각각의 요소들이 다른 곳에서는 개별적으로 드러난다. 즉 반란의 정신을 길들일 수 있는 영국 정치제도의 능력은 점점 갱신되고 있다. 그들은 중앙집중적이고 전제적인 정부 체제에 의해 강화되고, 이로 인해 행정부는 신성한 기밀 속에서 통치하고 야당을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다. 그 결과 이 국민 내부에서, 그들의 운동과 조직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대표체 사이에서 [영국만의] 독특한 큰 간극이 생겨났다. 하지만 독일에서와는 다르게, 지역에 기반한 강력한 저항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거나 소수자들이 선거를 통해 자신들을 드러낼만한 선거제도가 마련되어 있지는 않다. 
반면에 신좌파 정당이 건설된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에서는 의회가 내부성원을 민중으로부터 그토록 강력하게 떼어놓지는 않는다.39) 초의회적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당은 독일에서처럼, 혹은 더 심한 영국에서처럼 성에 차지 않을만큼 그렇게 직접적으로 마찰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다 이상적인 경우에 조차도 의회 활동 및 의원을 향한 구심력이 작용한다. 사회운동과 노조운동에 대한 코포라티즘적 인력(引力)이 이를 강화시킨다. 이들 정당에는 분열과 지속적인 논쟁이 존재하지만, 최근 전국 정당(federal party)으로서의 녹색당을 분열시키고 있는 그러한 영구적인 분파주의때문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정통 좌파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는 전통적 정치 수단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단절할 수 있는 새로운 좌파의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단지 외적인 정치권력구조뿐만 아니라 또 다른 두 개의 요소가 있다. (1) 이러한 정당의 창당을 가져오거나 최소한 이들의 특성에 영향을 미칠 사회운동의 발전과 세력, (2) 이 정당의 조직과 제도, 그리고 그들이 성공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양한 권력의 원천과 상이한 형태의 지식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15. 사회운동의 흥망성쇠

신좌파정당이, 새로이 만들어졌든 기존 정당의 변화의 산물이든 간에, 변화와 시작을 자극하는 -- 일반적으로 좌파가 일단 옹호했던 가치를 위해 --, 이전에는 무시되었던 대중 부분들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운동을 조직화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운동들은 의회국가에 대한 주된 저항세력이었으며, 과거의 정치적 수단을 유지하고 있던 공산당과 사민당의 제도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모든 사회운동이 새로운 수단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68년 이전에,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소 질질 끌면서, 몇몇의 운동은 사민당이나 노동당의 수단 -- 모든 집행 권력을 갖춘 전국위원회와 집행부, 중앙 연구소, 조직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전문가를 둔 감시 하에서 전국위원회의 의지를 실행하는 지역지부들(branches) -- 을 개조하여 이용하였다. 영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핵무장 철폐 캠페인이 대표적 예인데, 특히 -- 크루즈 반대 운동의 독립적 활성화와 특히 그린햄 여성(Greenham Women)의 직접행동이 이러한 수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강제하기 전까지의 -- 일상 활동의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새로운 운동이 영원히 지속되거나, 혹은 똑같은 형태로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세력과 특징은 정치체계의 내부에서, 그리고 정치체계로부터 그들이 갖는 책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이전에 강력했던 반핵운동과 독립적인 평화운동이 거의 사라지고, 페미니즘 운동과 동성애자 운동 역시 심각한 하락세를 그리고 있다. 전자는 그들이 정치체제 내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갖지 못했거나 혹은 목소리를 창조할 만한 기회를 못 가졌으며 그들의 요구가 거절당했기 때문에, 후자는 그들의 요구가 참여를 통해 이념을 발전시키고 실현하는 그런 방식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쇠퇴하였다. 네덜란드와 독일에서는 대조적으로, 노조 내부에서, 공적 자금지원을 따내는 프로젝트와 서비스에서, 그리고 지역 및 지방 정부에서 상당한 제도화와 공고화를 이뤄낸 전후 가장 거대한 사회운동의 조직화가 80년대에 이루어 졌다. 신좌파 정당이 어떻게 이러한 변화에 적응했으며, 산산히 흩어져 있는 운동들과의 상호 관계를 여전히 유지해 왔는가?

16.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와 문화

모든 사회제도와 마찬가지로, 정당은 그들의 출현 배경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일반적으로 주요한 특징의 변화에는 어떤 중요한 충격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때조차 변화의 가능성은 당내 민주주의의 민감성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덴마크 사회주의민중당은 반의회주의 제3인터내셔널로부터의 이탈로 창당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의회를 강조한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의 사회운동과 새로운 노조의 전투성이 의회사회주의의 실패를 폭로함에 따라, 변화를 위한 초의회적이고 독립적인 세력에 보다 가까운 정치적 목소리를 요구하는 압력이 나타났다. 의회에 대한 그들의 회의주의는 공산주의 전통으로부터 비롯된 이데올로기적 반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용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덴마크에서는, 이 방향[의회주의]으로 당을 이동시켰던 대다수 SF 초기 지도부의 실패와 그들과의 단절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변화를 위한 의회적 전략과 초의회적 전략 간의 매우 민감하고 유동적인 균형을 이룬 정당이 만들어졌다. 대조적으로 독일 녹색당은 사회운동의 정점에서 창당하였다. 당연히, 이는 초의회적 활동이 다양한 운동으로 하여금 당을 창당하도록 자극하기에는 부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들이 당을 통해 하고자 한 모든 것은 하나의 목소리였다. 독일 녹색당이 지닌 문제는, 사회운동이 그들의 첫번째이자 가장 왕성한 국면에서 이뤄낸 적절한 조직적 실천을 정당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다소 경직된 형태를 취했던 한계를 반영한다.

‘하나의 목소리’라는 인식에 포함된 함의는, 전달되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와 [이 메시지] 확산의 주도권이 의회체계 밖에서 생겨났으며 계속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이러한 전제는 ‘기층민주주의’라는 이념과 함께 녹색당의 주요한 뼈대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당의 기층 조직이 지도부를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지도부와 대표자들은 기층과의 접촉을 놓쳐서는 안되며, 기층은 완전한 정보를 보장받고 원칙적으로 정당의 모든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 입안은 당의 기층 및 사회운동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의원의 역할은 사회운동의 주장을 공론화시키고, 정부가 은폐시키고자 하는 정보를 폭로하는 것이며, 사회운동의 요구에 맞춰 정치적 활동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녹색당의 ‘기층민주주의’ 이론에는 종종 실제로 당의 기층이 사회운동을 대변한다는 함축적인 가정이 존재한다. 때때로, 이 전제는 당의 지도부로 하여금 운동에 그들을 종속시키도록 만든다. 이민자들의 투표권과 유치원 파업에서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당의 활동이 보여주는 것처럼, 당 자체의 기층과 광범위한 사회운동 간의 관계에 대해서 매우 모호한 점이 존재한다. 때때로 당 활동가가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운동을 대변하고 따라서 당에 대한 책임감이 사회운동에, 혹은 투쟁하는 민중에 봉사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라고 가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함축적인 전제는 유치원 파업에 관한 논쟁에 영향을 미쳤다. 선명한 입장을 가졌던 베를린 적-녹 동맹 내에서 녹색당이 보여주었던 모호함은 이 당에 매우 해롭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문제는 당분간 반추해볼 가치가 있다. 어느 신좌파 정당에도 있을 수 있는 ‘전문화’의 압력이 독일 녹색당에 가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의회정당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초기의 원칙들을 보전해야 하며, 관습적인 정치의 기준이 아니라 바로 ‘이’ 원칙에 입각해 그들의 조직을 진전시켜야 한다는 처방책이 그들에게 필요하다. 결국, 그들이 전자[관습적 정치 기준]를 수용한다면, 그들은 사실상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상실하는 것이며, 지지층(constituency)을 잃는 것이다. 중요한 대중부문이 그들을 지지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관습과 단절했기 때문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보장하기 위해 창당과정에서 씌어진 녹색당의 당헌은 대부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중기적으로 실행하기로 한 순환보직제는 각 의원들의 의회 임기가 끝난 후 실행되기로 한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중단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공직에 재직 중인 사람들은 종종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가기도 한다. 따라서 녹색당의 성원들이 관습적 정당만큼이나 오랫 동안 한 가지 업무에 종사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당에는 전문적 엘리트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당내 참여는 기층민주주의 이념이 함축하는 만큼 높은 것은 아니다. 이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으며, 당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지역에서조차도 마찬가지다.

‘기층민주주의’가 독일 녹색당의 약속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당과 독립적 사회운동 간의 실제 정치적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당내 과정, 특히 정치적 공직자와 당원 간의 과정에 너무 많은 비중이 놓여있다는 점이다. 이 정당은 마치 여러 운동의 활동가와 당 활동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듯이 조직되었다. 그들[사회운동의 활동가와 당내 활동가]은 사실상 똑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북유럽의 다른 신좌파 정당들은 보다 안정적이고 여러 측면에서 성공적임이 증명되었는데, 이는 책임감있는 대표성을 만들면서 그들의 지배는 피하고자 하는 원칙과, 사회운동의 역할에 보조적이면서 동시에 당만의 특수한 역할을 공식화하는 원칙 모두를 조직화의 방식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원칙은 네덜란드 녹색좌파의 ‘작업공간’처럼 여타 운동들과 공동작업할 수 있는 명백하고 투명한 기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정당들은 여러 운동의 기대와 자신들의 원칙 -- 정치적 생명력의 근본적 원천으로서 당 외부의 민중들과 함께 해야 하며, 외향적이어야 한다(look outward)는 원칙 -- 모두로부터 항상 압력을 받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논쟁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분파주의가 번영하지는 못한다. 분파주의는 정당을 내향적으로 만드는 원칙의 산물이다.

이러한 분석에 입각해 볼 때, 선거 합의 --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필요성, 자극적이지 않은 메시지 등등 -- 에 의해 규정되는 전문가주의가 아니라, 당이 동맹을 유지하고 다양한 권력의 원천을 연계시키는 과정에서 그 일부로 참여하는 독특한 캠페인 동맹에 필요한 기술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전문가주의인 것이다. 

17. 동구의 회의주의에 대한 유럽의 반응?

이 정당들의 경험이 정당에 대한 동구 민주주의자들의 회의에 대한 답변이 되거나, 혹은 관습적 서구 모델에 마지못해 묵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경험이 정치적 공직에 책임을 지는 것과 강력한 시민운동을 만들고자 하는 관심의 추구 사이에서 그들이 강요받는 선택을 피할 수 있게 하는가?

사회운동의 급진적 영향을 받은 서구의 정당들은 무미건조한 대안 모델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다양하며 완전히 중앙집중화될 수 없는 사회적 것으로서의 지식이라는 이 운동들의 이해에 기반하여 그들은 대안수립의 몇 가지 근본적 원칙만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는 특정한 환경에 따라 적용가능하다. 실용적 관점에서 그들은 생태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에 따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자신들을 인식하고자 하며, 따라서 의도적으로 경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외부의 영향에 열려 있고자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거나, 알고자 한다고 주장하지 않지만, 중도파와 우파가 진척시키는 이해나 목적의식적인 정당권력에 대항하여 민주적이고 평등한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똑같이 목적의식적인 방식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몇몇 서유럽 국가에서 전통 좌파정당에 대한 급진적 도전으로 출현한 새로운 정당들을 살펴 보는 과정에서, 나는 그들이 민주적 시민운동이나 네트워크와 밀접하고 개별적인 관계를 이루기 위해 시도한 변혁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즉, 선거 정치를 위주로 해서 조직되지는 않는 정치적 담당자(agency)이라는 형태로서의 정당 말이다.

유럽통합이 진행시키고 있으며 국제적 시장 세력이 끌어당기고 있는 지금의 형태는,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무책임한 집중에 반대하여 민주적 원칙과 사회적 필요들을 주장하는 정치인이나 공적으로 활동하는 시민 모두에게 정치적 대리인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유럽역사의 현 시점에서 이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좌파는 국가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창출하는 데 관심을 가진 좌파이다. 그러한 좌파는 어떤 불변의 정치권력이라는 차원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묘사한 그런 종류의 수많은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뚜렷한 정치적 임무는 시민의 조직을 통해 권력을 창출해내고 모든 수준의 정치구조로부터 지지를 얻어내고자 하는 관심이다. 수많은 실천 속에 함축된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관점은 냉전 이후 유럽에서 민주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열망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 몇 가지 수단들을 제공하고 있다.

민주적 구조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기보다는 새롭게 창조해야된다고 생각되는 환경 속에서 사회운동 조직의 중요성 --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가능성 -- 은 이 책의 논쟁을 통해 주목했던 몇 가지 특성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정당을 대신하는 것으로서의 대안이 아니라, 정당과 정부가 도달할 수 없는 사회의 어떤 부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안이다. 이 장에서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처럼, 그들은 어떠한 급진적 변혁 프로젝트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정당조직의 필수적인 보충인 것이다.

이 책의 소주제(sub-theme)는 사회운동 네트워크와 프로젝트 안에 존재하는 활동가들이 그들의 편에서 활동할 다른 주체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의 활동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몇몇은 여전히 특별한 개혁의 과정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대다수는 일상적 삶이 풀어내고 있는 실마리를 따라 실천적이고 지적인 연계를 항상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즉, 그들은 정당이 단일한 구조 속에서 집중하고 있는 기능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인 네트워크를 통해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 대표체와 동맹에 대해 실용적인 관점을 취하게 된다.

녹색당과 사회주의자 그룹, 그리고 전(前)공산주의자 그룹 내에는 사회운동 단체들이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의 대표자라고 생각하는 일련의 유럽의회 의원들이 있다. 어떤 경우, 이 유럽의회의원그룹은 활동가와 저술가들이 그들의 네트워크와 캠페인을 반영할 수 있는 회합을 개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활동가들은 자신의 거주지나 지방, 그리고 국가에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대표들과 각기 다른 동맹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우리는 아마 이를 메뉴별 대표제(representation à la carte)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보다 포괄적 이해에 도달하고 광범위한 연계를 창출해야 하는 항상적 필요성을 부정하는 분파이기주의(bounded particularism)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정당만으로는 각 운동의 급진적 활동가들이 염두해 두고있는 다양한 변화를 적절히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이미 단일한 정치적 대리인이 필요치 않은 변화들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변화의 속도는 대륙을 가로질러 급진적 좌파정당과 녹색당들을 통합하고자 하는 두 개의 지속적인 시도를 자극했다. 93년 6월, 다뉴브강 양안의 국가들에서 26개의 녹색당이 헬싱키에 모여 ‘유럽녹색연합(European Green Co-ordination)’을 형성하였다. 이 느슨한 연합체는 지난 2년 간의 토론 결과를 공고화시킨 새로운 상황들과, 원칙의 합의에 대한 선언에 기반하고 있다. 같은 달 조금 늦게, ‘신좌파세력포럼(Forum of New Left Forces)’이 코펜하겐에서 대회를 가졌다. 이 포럼은 중부유럽과 동유럽에서는 현저한 대표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장에서 논의된 서구 신좌파/녹색좌파 정당들 대부분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들 역시 유럽 녹색 연합과 거의 유사한 기본적 원칙에 동의하였다. 두 모임의 원칙을 관통하는 주제는 그들이 원하는 종류의 사회변화에 대해서 순수한 정부 차원의 합법적 전략이 여러 가지 한계점을 지닌다는 인식, 서유럽 ‘통합’의 특성이 굳혀놓은 전반적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유럽통합의 과정은 경제적, 사회적 삶이 공적 입법 논쟁 영역의 외부에 위치함을 의미한다. 경제에 있어 이는 특히 부의 산출에 관련된 문제, 생산의 문제를 제기한다. 다국적 기업의 투자전략은 정부의 영향력을 넘어서고 있으며, 유럽의회에서 정당은 개입을 강제할 권력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생산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일정하게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통화통합 -- 경제발전이 야기하고 정치 제도가 강화시킨 하나의 현실 -- 은 일국 화폐를,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재정정책적 수단들까지도 둔감한 경제정책 도구들로 만든다. 이러한 압박이 극복될 수 있기 전에 경제적 변화는 생산 자체 내의 새로운 관계 창출(어떤 경우는 국제적으로 조직된 저항을 통해, 어떤 경우는 현존 경제 내부에서 민주적 형태를 위한 틈새를 찾아냄으로써 만들어진)을 요구할 것이다.

자동차 산업과 섬유 산업에서의 다양한 활동들에서처럼, 생산 영역 내부에 기반한 운동은 경제 제도 자체 내에 권력의 원천을 갖고 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직접적인 생존의 위협이 그들로 하여금 그 권력을 동원해내고 실행할 방법을 찾도록 만든다. 기업이 의존하고 있는 시장과 금융기구를 통제할 입법적 혹은 정부 차원의 활동없이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활동이 오로지 국가적 수준에서만 가장 효과적인 것일 수는 없으며, 이러한 이유로 신좌파 정당의 주도적 분파들이 거대한 연합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 사회운동이 자신들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강화해감에 따라 그들에 대한 지지작업과 함께 이루어진다.

사회운동은, 그들이 풀뿌리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개혁적 노조 조직이건 혹은 공동체에 기반한 운동이건 간에, 잠재적으로 의사소통과 접촉에 독특한 이동성과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원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국가 연결장치에 참호를 두른다고 해도 크루즈 미사일 감시단이나 유럽 가사노동자 네트워크 같은 초국적정보교환(TIE)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감소시킬 수는 없다. 그들은 냉전에 따른 분할이 여전히 좌파들의 마인드를 유지하고 있었던 [운동] 초기부터 적대적 기구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예를 들어 핵무장철폐운동(CND)은 때때로 동구의 독립적 평화운동과 접촉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냉전 시기의 국제노동조합조직에 회원이었던 영국 노동조합의 간부들은 그들의 성원이 이탈리아나 스페인, 혹은 프랑스의 공산주의 노조의 노조원과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의 지향과 흐름은 일국적 경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사회운동의 유연성의 핵심은 지식에 대한 암묵적이지만 뚜렷한 입장 -- 이 책의 주된 주제인 -- 이다. 그들의 정치가 갖는 개혁적 특성은, 그들이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과학의 이용에 전념하였던 사민주의 정부에 대한 환멸 속에서 성장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일상 생활의 모든 곳, 공장에서 가정(fireside)까지 모든 곳에서 이 환멸이 퍼져나갔다. 자신들의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들은 과학을 옹호하는 신앙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의 접근방식은 현실적이다. 그들은 물질적인 문제나 물질적 결과를 가져올 문제들에 대응해 왔으며, 따라서 그들의 본능은 문제의 뿌리 -- 권위있는 사람들은 관심없는 -- 까지 분석해 들어가는 것이다.

새로운 국제화의 이면에 놓인 추동력의 일부는 강제로 국제화된 일련의 공통의 문제와 이슈들에 대한 (다소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식의 사회화’이다. 코코아 생산 회로를 가로지르는 생산노동자와 플랜테이션노동자의 만남, 임시직 노동자들에서 여성의 조직화, 이주 노동자들의 조직화, 군수산업에서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의 만남. 이 모든 것들과 그 이상의 것들의 중심에는 정보의 교환이 놓여 있다. 종종 이 모임들을 통해서만 정보가 사용 가능해진다.40) 대조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삶의 유순한 변수들을 알고 있으며 국가를 통해 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일국 정당들(national parties)의 전통적 가정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의 지렛대에 필수적인 정보의 산개성(the diffuse)에 부적응하고만다.

민주적 사회운동의 직접적인 중요성에 대한 마지막 주장은 새로운 유럽(동, 서 모두)에서 나타나는 분열과 반동의 원천이 가지는 특성에 주목한다. 민중은 사회적 결사체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형성해내는 권력과, 타인에 대한 증오로는 규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원천을 획득하는데, 정당은 아무리 그들의 목적이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결사체들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유럽의 정치적 삶과 공적 삶을 병들게 하는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증이 제거되어야 한다면, 사회의 가장 무력하고 절망적인 부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주적 시민운동의 가시적 성장이 가장 근본적인 과제일 것이다. 


* Hilary Wainwright,  “Political Parties of a New Kind?”, Arguments for a New Left: Answering the Free-Market Right, Blackwell, 1994, 190-236쪽.

주1) 이러한 맥락에서 웨인라이트는 만델의 계획경제 모델과 그리 멀리 떨어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에르네스트 만델, 「사회주의적 계획의 방어」, <읽을꺼리> 1호를 보라.

주2) 이 두 가지 운동을 살펴보려면, Wolchik, Czechslovakia in Transition (London, 1990); G. Munnerup, “The Octorber Revolution in East Germany”, Labour Focus on Eastern Europe, 3 (1989)을 볼 것. 그리고 (독일어로 된) 신포럼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Kohl Hijack East German Revolution”, 1 (1990). DDR Almanch, ed. G. Fishbach를 볼 것. B. Einhorn, Cinderella Goes to Market(London, 1993)은 이 운동 내부의, 그리고 이 운동과는 독립적인 여성의 역할 및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3) M. Waller, B. Coppieters, K. Deschouwer ed. Social Democracy in a Post Communist Europe (London, 1993), 특히 Waller가 쓴 글을 볼 것. 동유럽에서의 환경정치에 대한 저서로는 P. Jehlička and Tomáš Kostelecky, “Developments in the Czechoslovak Green Party Since the 1990 Elections”, in Environmental Politics, 1, no. 1 (1992); M. Waller and F. Millard, “Environmental Politics in Easter Europe”, Environmental Politics, 1, no. 2 (1992).

주4) 역주 - 유럽의 민주적 통합을 위한 국제적 시민 조직. 체코 프라하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유럽 각국과 북미에도 연락소가 있다.

주5) 헬싱키 시민회의에서 행한 하벨의 연설은 Mary Kaldor ed., Europe from Below,  (London, 1991)에 실려있다.

주6) Russell J. Dalton, Citizen Politics in Western Democracies (Chatham, New Jersey, 1988); Samuel Barnes, Max Kaase et al., Political Action (Beverly Hills, Calif., 1979).

주7) Alan Ware ed., Political Parties (Oxford, 1987) 8장과 W. Paterson and A. Thomas ed., The Future of Social Democracy 5장을 보라. 투표자/당원 비율은 이러한 새로운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정치적 수동성의 지표가 아니라, 그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정치적 에너지를 정당 정치 외곽의 캠페인과 프로젝트에 쏟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다.

주8) 냉전기간 동안 몇몇 전통좌파정당은 변화에 대한 열망조차 갖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독일의 사민당(SPD)다. 이 당은 단순히 지배적인 합의 안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대변을 독점하였을 뿐이다.

주9) 아마 가장 폐해가 심했던 곳은 [한때 이중권력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가 좌파 자신의 실책으로 사회변화에 실패한] 포르투갈이었을 것이다.

주10) 반국가권력으로서의 권력 수립이라는 문제에 대한 논의로는 C. Offe, Contrdictions of the Welfare State (London, 1984)를 볼 것. 

주11) 사회운동 활동가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전자게시판이 무수히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그린넷(GreenNet, http://www.gn.apc.org/)’과 ‘폽텔(Poptel, http://www.poptel.org.uk/)’이 있다(풀뿌리 노동 조직들은 거의 폽텔을 이용하고 있다).

주12) 역주 - <읽을꺼리> 본호의 「영국 노동당의 경험」 참고.

주13) 네덜란드 평화운동에 대해 급진 좌파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에 대한 분석으로는 H. Kriesi, “The Political Opportunity Structure of the Dutch Peace Movement”, West European Politics, 11, no. 3 을 보라.

주14) 결과적으로, 그들이 어느 수준 -- 일반적으로 지역수준, 혹은 지방수준 -- 에서 공직을 얻건 간에, 입법과 행정 모두에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를 통해 초의회적 운동과 프로젝트는 관습적으로 선출된 지방의원/국회의원과 나란히 대표성을 획득하거나, 혹은 정책수행에서 파트너로 포함된다.

주15) 코포라티즘에 대한 유용한 논의를 보려면, P. Schmitter and G. Lehmbruch (eds) Trends Towards Corporatist Intermediation (London, 1979)과 A. Cawson, Corporatism and Political Theory (Oxford, 1976)를 보라.

주16) 역주 - 70년대에 서독 지배체제의 완고함에 절망한 일부 학생운동 좌파들이 결성한 극좌 테러조직. 바더와 마인호프라는 남, 녀 지도자에 의해 주도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이 두 지도자는 각각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통독 이후에야 정식으로 해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17) Democracy form Below: New Social Movement and the Political System in West Germany (미간, Ruud Koopmans, 1994) 3장에서 인용.

주18) 맑스의 저서와 후자, 특히 소비에트 공식화를 대조시키고 있는 맑스와 자연에 대한 유용한 논쟁에 대해서는 E. Altvater, The Future of the Market: An Essay on the Regulation of Money and Nature after the Collapse of 'Actually Existing Socialism' (London, 1993)을 보라.

주19) 세세한 독일 녹색당 역사를 보려면, W. Hulsberg, The German Greens (London, 1988); G. Langath, The Green Factors in German Politics (Boulder, USA, 1984); E. G. Frankland and D. SchoonMaker, Between Protest and Power: The Green Party in Germany (Boulder, USA, 1992) 참조. 

주20) T. Poguntke, Alternative Politics: The German Green Party (Edinburgh, 1993)는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러한 변화에 대해 회의적인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 

주21) John Logeu, Socialism and Abundance: Radical Sodialism in the Danish Welfare State (Minneapolis, 1982).

주22) <녹색 좌파> 팜플렛. 네덜란드 녹색좌파의 역사와 특히 합병에 대한 유용한 고찰로는 H. Voerman, “Changing Colours: The Dutch Small Left”, in R. Richardson and C. Roots (eds) The Green Challenge (London, forthcoming 1994). <녹색 좌파> 팜플렛은 Groen Links(Green Left) c/o Green in the European Parliament, Belliard Street 97-113, 1047 Brussels, Belgium에서 얻을 수 있다. 

주23) 하지만,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전례가 있다. 2차대전 종결을 목적으로 의회 밖에서 진행된 급진화의 정치적 표현이었던 Commonwealth Party는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의 사회운동 좌파의 예시를 보여주었던 급진적 평등주의의 내용을 담은 경제 강령과 정치 강령을 가지고 있었으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주24) 잠깐 동안의 이 단절에 대한 묘사 및 분석을 보려면, K. Livingston, If Voting Changed Anything They Would Abolish It (London, 1987)과 H. Wainwright, Labour, A Tale of Two Parties (London, 1987)을 볼 것. 키녹 지도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R. Hefferman and M. Marquesee, Defeat from the Jaws of Victory (London, 1992)를 볼 것.

주25) 사실, SNP에 대해 스코틀랜드 사회주의자들은 이 당이 스코틀랜드 사민당과 보다 급진적인 적녹당으로 나뉘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소수는 우익 민족정당으로 가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주26) 역주 - 영국 노동당의 전신은 1900년에 창립된 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LRC)인데, LRC의 경우 노동자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린 법원에 압력을 넣기 위한 한 수단으로 의회에서 노동자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할 목적으로 창립한 단체다. 여기서 웨인라이트가 노동당의 한 특성이 그 기원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의회 내 압력수단으로서 정당이라는 노동당의 기원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주27) 독일 녹색당의 성공이 SPD 내부 좌파의 영향력을 강화했던 것처럼, 이런 도전은 항상 내부좌파의 입지 외부로부터 강화될 역설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베를린 SPD 좌파는 당이 Alternative List(서베를린 녹색당)와 연정 중인 80년대 중반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녹색당의 압력은 SPD가 보다 급진적인 공약을 수행한다 -- 이는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 는 것을 의미한다고 매우 확고하게 이야기하였다. 

주28) Richardson and Roots, The Green Challenge를 보라. 영국 녹색당과 전세계의 여타 녹색당에 대한 지도적 녹색 정치인의 초기 분석을 보려면, S. Parkins, Green Parties: An International Guide (London, 1989)를 보라. 

주29) 예를 들어, 45년 정부의 보다 급진적인 산업 정책, 64/65년 Harold Wilson 행정부의 국가계획(National Plan), 그리고 75년의 산업 근대화 정책에 관한 것. 

주30) 북유럽의 사회운동이 직면한 문제는 남유럽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나의 일반화는 매우 불확실한 것이며, 따라서 배경에 대한 고려일 뿐이다. 북유럽의 운동은 사민주의정부가 확장되던 시기에 성장하였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처럼, 이들 국가의 노동계급 역시 대륙에서 산업상 가장 강력하였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농촌인구와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었다(페리 앤더슨의 “The Singular and the Pliural”, English Questions을 보라). 북구의 신좌파 정당은 기원과 특성이 가지각색이지만, 사민주의 정부를 경험했다는 것--전쟁 직후의 개혁과 증대하는 국제적 산업과 통화 질서의 강요를 수용했다는 점 모두--이 중요한 공통적 특징을 만들어냈다.
첫번째,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당에 의한 의회적 지배의 번창은 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북구의 사회주의자와 사회운동 활동가들에게 만병통치라는 지위를 상실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대조적으로, 사민주의 정부가 선출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사회혁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환영하며 거리에서 춤을 추었다. 이와 유사하게, 이탈리아의 많은 활동가들은, 북유럽 좌파들이 새로운 정당에서 발견했을 만한 것들을, PCI에서 발견하였다. 그들은 전후 재건의 한 부분으로 약속되어진, 하지만 사실상 깨지지 않은 보수적 지배의 과정에서 결코 이행된 적이 없는 사회적 민주적 개혁을 정부에 들어선 PCI가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파시스트에 저항했던 공산주의에 대한 기억이 이 희망에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두번째, 강력한 사민당의 존재는 [전후] 호황의 후반기에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유연화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도전에 직면한 사용주들의 복수를 완화시키는 데 이바지 하였다. 스칸디나비아와 베네룩스 국가들, 그리고 독일에서의 사회운동은 70년대와 80년대에 상대적으로 강력하게 존속된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통해 일정한 안정성과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이탈리아에서는 특히 피아트를 포함해 사용자들이 단 한 번의 강력한 공격으로 70년대 건설된 작업장 조직을 사실상 붕괴시킬 수 있었다. 이 조직들은 60년대 후반에 발전된 급진 정치의 중요한 노동자계급 토대였다. 
세번째로, 사민주의의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개혁은 사회운동의 정치적 요구와 실천에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천과 정책에 있어 북구의 신좌파 정당들은 지방정부 구성, 산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 그리고 공공부조의 민주적 운영에 대한 풍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은 남부에서는 거의 예외적이거나, 이탈리아 에밀리아 지방의 볼로냐처럼 공산주의나 여타 급진세력이 장기 집권한 지자체 지역에만 한정된 것들이었다. 아니면 스페인의 몬드라곤 같이 독특한 지역경제 발전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광범위한 사회부조에 의존한다. 그들은 이러한 부조의 질적인 향상과 확장, 그리고 민주화에 관심을 쏟아 왔다. 질적으로 더 나은 공공부조에 대한 그들의 캠페인은 지속적인 지역 주도권과 대륙의 광범위한 네트워크,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공적 개입에 대한 압력을 진행시키도록 하는 로비를 이끌어 냈다. 

주31) 89년의 충격 이전 서유럽 공산당의 최근 역사를 살펴보려면, M. Waller and M. Fennema (eds) Communist Parties in Western Europe: Decline or Adaption (Oxford, 1988)을 보라. C. Boggs and D. Plotke (eds) The Politics of Eurocommunism (London, 1980)은 유로코뮤니즘의 출현에 대한 초기 분석을 제공한다. 구질서의 위기가 진행되고 있을 당시의 이탈리아 좌파들에 대한 분석은 Tobias Abse, “How Italians Have Been Cheated”, New Left Review 199 (1993 5/6월)를, 재건당에 관한 글로는 Dialogue for European Alternatives에서 구할 수 있는, 당주간지 <해방(Liberazionae)> 편집자 루치아나 카스텔리나의 인터뷰를 보라. 

주32) 역주 - <일 마니페스토>와 그 그룹에 대해서는 <읽을꺼리> 본호의 이탈리아 관련 글들을 참고.

주33) 프랑스 녹색당에 대한 검토로는, A. Cole and B. Doherty, “Les Verts”, in Richardson and Roots, The Green Challenge를 볼 것. 

주34)나는 전통 좌파 정당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조직된 덴마크 사회주의민중당과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한 노르웨이의 좌파 사회주의당(Left Socialists)을 염두해 두고 있다(이들의 경우, 공산당보다는 노동당이 전통 좌파 정당이었다).

주35) 핀란드에서는 (네덜란드와는 달리) 독립적인 중도우파 녹색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핀란드 좌익동맹(Leftwing Alliance)은 여러 사민주의 좌파들의 통합의 결과이며 사회운동 정책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네덜란드 녹색좌파와 여러가지 유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핀란드 좌익동맹은 핀란드 공산당, 핀란드 민중민주동맹(People' Democratic Alliance), 핀란드 민주여성조직(Democratic Women's Organization)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덜란드 녹색좌파와는 달리, 공산당이 핀란드 좌파에서 지배적이다. 지난 선거에서는 10.1%를 획득하였다. 

주36) A. Dobson, Green Political Thought, London, 1990 [국역 : 앤드류 돕슨, <녹색정치사상>, 민음사] 를 보라. 

주37) ” Richard Crossman, The Engligh Constitution (London, 1963) 서문.

주38) 논쟁과 분열, 시행착오를 통해 덴마크 사회주의민중당은 의회주의 집단과 자율적인 운동 간의 효율적인 협동을 -- 최소한 전국적 수준에서 사회운동이 강력했던 시기 동안에 한정시키더라도 -- 이끌어냈다. 79년에서 80년 사이의 성공적인 반핵 캠페인은 보다 심오한 협동 모델을 제공하였다. 초의회적 반핵 운동과 SF는 공동으로 더 이상의 핵발전소 건설이 없는 덴마크를 만들어 왔다. 직접행동과 교육캠페인을 통해 반핵 캠페인은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획득했고, SF는 의회에서 정부의 친핵 법안에 대한 세부적인 수정안을 제출하였으며, 국회의원 반대동맹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반핵운동과의 친밀한 협조를 이끌어내면서, 사실상 법안 자체를 폐지시키는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수정안에 따르면, 핵발전 관련 법안의 상정 이전에 이에 관한 의회 내 토론이 있어야 하며, 해당 지역의 주민투표 없이는 어떠한 핵발전소도 건설될 수 없다. 이 이후로 정부는 핵발전 프로그램을 철회하였다. 이 캠페인 기간 동안 SF의 국회의원과 반핵운동의 대표자들은 매우 자주 모임을 가졌으며, 때때로는 날마다 모임을 가졌다. 이와 비슷한 공동활동이 1981년 크루즈 미사일 개발에 반대하는 독립적 평화운동에서도 이루어졌다. 덴마크는 미사일 배치국이 아니었지만, 덴마크 정부는 나토 핵계획그룹(NATO Nuclear Planning Group) 회원국으로서 나토의 미사일 배치를 지지하였다. SF는 덴마크 평화운동 캠페인의 성과를 의회 내에서 거두어 들였다. 분열된 사민당은 크루즈 미사일에 대한 지지를 보류하였고, SSP 및 급진민주당과 연합하여 일련의 반크루즈 해결책이 덴마크 의회(Danish Folketung)에서 통과되었다. 이는 보수당의 원내 소수파 정부, 그리고 물론 나토의 희망에 반하는 것이었다. 

주39) 영국 정치제도에 대한 비슷한 경멓과 비교할 때 나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의회에서의 인터뷰 경험으로부터 이들 나라에는 상대적으로 의회와 사람들(이를테면 중간계금 사람들) 간에 거리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된다. 덴마크 의회에서, 수상은 영국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규적인 기자회견을 갖는다. 나같은 하층민(riff-raff)을 포함해서 아무나 입장이 허용된다. 수상의 브리핑과 질의응답이 있기 전에, 모든 사람은 긴장을 풀고 국회의원과 나머지 사람들이 구분되지 않는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 앉아 기자에게 담배불을 빌리고, 농담을 주고 받는다. 나는 국회의원 폴 쉬터(Paul Schuter)가 마가렛 대처의 언론홍보관(Press Secretary) 버나드 잉햄(Bernard Ingham)보다 더 진실하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주목할 만한 것은 뜻밖의 문화다. 노르웨이에서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89년 페미니스트 외무장관(Foreign minister) 헬가 헤르네스(Helga Hernes)와의 인터뷰 후에, 역시 헤르네스 여사를 만나러 온 다소 거구의 여성과 함께 승강기에 올랐다. 나는 그녀가 내게 외무장관에 대해 다른 각도의 정보를 제공할 어떤 종류의 수석보좌관(senior assistant)일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헬가 헤르네스를 위해 일하는가를 물었다. “아니요”, 그녀가 말하길, “저는 미국 대사인데요”. 최고위직 여성에 관한 몇가지 우스개 소리를 나눈 뒤, 그녀는 대사관으로 가는 리무진에 올랐다.

주40) 국제적인 자발적 조직에 대해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차대전 이후, 민족주의가 또 다시 유해한 세력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긴급함이 수천의 서유럽 사람들로 하여금 초국적 네트워크를 만들도록 만들었다. 지자체간 자매결연(municipal twinning), 문화 교류, 초국적 회의 등등. 동서우애협회(Society of Friends)는 항상 다양한 종류의 동-서간 대화를 지지하였다. UN과 EC 모두 국제적인 ‘비정부조직(NGO)’이 그들의 업무에 자문 역할을 수행하고 예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특별한 조치를 제공하였다.
유럽의 자발적 조직에 근접한 한 관찰자의 말에 의하면, 80년대는 ‘국제적인 자발적 운동의 폭발적 성장의 시기’였다. 하지만 이 말은 숫적인 성장--이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또한 사회적 목적 성취, 즉 증대하는 국제적 시장의 지배적인 상업적 강요에 맞서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 필요를 주장하는 정책에 있어서의 그들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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