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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원작성자 : 장석준 
번역자 :  
게재 : 이론과 실천 
사회민주주의 정당 이외의 주요한 좌파정당으로는 무엇이 있는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과연 공세적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정당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현실 정치세력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필자는 <이론과 실천> 지난 호에서 세계 좌파정치의 이념·노선의 지도(地圖)를 살펴본다는 차원에서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강령을 소개한 바 있다(「민주노동당 강령과 함께 읽는 스웨덴 사회민주당 강령」). 그 후속 편으로 이 글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보다 왼쪽에 있는 유럽의 급진좌파정당들의 강령과 정책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정당의 강령을 읽으면서 우리는 민주노동당이 세계 좌파정치의 우주에서 과연 어떤 성좌(星座)에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해 상당한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사회민주주의 왼쪽의 양대 세력 - 녹색당과 급진좌파정당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전에 사회민주주의의 왼쪽에 있는 좌파정당이라고 하면 대개 코민테른의 전통을 잇는 정당들, 즉 공산당을 말하는 것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와 함께 등장한 제3인터내셔널(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약칭 코민테른)은 세계혁명을 먼 미래의 꿈이 아닌 당면 과제로 제시했다. 따라서 코민테른에 속한 모든 노동자정당은 곧 도래할 혁명의 실현에 당의 모든 활동을 집중했다. 

그러나 이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자본주의의 격렬한 위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이 위기가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극우 파시즘 세력의 승리로 귀결되자 코민테른과 그 소속 정당들의 노선도 바뀌게 된다. 혁명을 당면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전진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2차 대전 후 프랑스 공산당이나 이탈리아 공산당, 혹은 아옌데 정부에서 칠레 공산당이 취한 길이 결국 이런 것이었다. 다만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는 달리 당 안에서 궁극 목표와 당면 과제 사이의 관계, 제도 정치와 대중운동의 변증법이 계속 진지하게 고민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제는 과거의 역사일 뿐이다. 사회민주주의의 왼쪽 하면 자연스럽게 공산당을 떠올리던 시대는 지났다. 물론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유의미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는 정당들이 아직도 여럿 있지만, 이들이 사회민주주의 왼쪽 공간을 독점하고 있지는 않다. 특히 유럽 각국에는 과거의 공산당, 신좌파운동, 트로츠키주의 그룹, 마오주의 그룹 등에 뿌리를 둔 다양한 급진좌파 정치세력들이 존재한다. 

이번의 유럽의회 선거를 보면 급진좌파 내의 다양한 흐름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외에 유럽 차원의 국제정당을 구성해서 선거에 대응한 좌파 세력이 여럿 있는데, 이 중에서 우선 녹색당/유럽자유연합(EFA)이 눈에 띈다. 이들은 전통적인 노동계급운동에 뿌리박고 있지는 못하지만 정책적인 측면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보다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독일 녹색당의 경우는 우경화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민주당에 비해서는 급진적인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이번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유럽의회 내 교섭단체인 유럽사회주의당(ESP)이 총 199석을 얻은 데 반해, 녹색당/EFA(EFA는 각국의 지역분리주의 정당들의 연합이며, 유럽의회에서는 녹색당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41석을 얻어 좌파의 제2세력이라는 지위를 점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녹색당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보다는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다른 급진좌파정당들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겠다. 

그 첫 번째로 소개할만한 것이 ‘유럽 좌파당’(EUL)이다. EUL은 동서 유럽의 공산당과 그 후신들이 조직한 국제정당으로서, 주요 가입 정당들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재건당, 프랑스 공산당, 스페인의 통합좌파(공산당이 주도하여 만든 통일전선적 정치조직), 그리스의 연합(Synaspismos, 스페인 통합좌파와 비슷한 통일전선적 정치조직), 독일의 민주사회주의당 등. 특히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공산주의재건당으로서, 이 당의 사무총장인 파우스토 베르티노티가 EUL의 사무총장도 겸하고 있다. EUL은 「유럽 좌파당 선언」에서 최근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제3의 길’ 노선을 분명히 비판하면서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환경주의, 여성주의의 이상”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내걸고 있다. 또한 과거 유럽공산주의와의 연속성보다는 최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두 번째로는 ‘북유럽 녹색좌파연합’(NGL)이 있다. 북유럽의 급진좌파정당들이 EUL에 직접 가입하지 않고 따로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마도 북유럽 국가들 특유의 역사적 친밀성 때문일 것이다. NGL에 속한 주요 정당들은 다음과 같다. 스웨덴의 좌파당,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좌파당, 덴마크의 사회주의민중당, 핀란드의 좌파연합 등. 이 중에서 스웨덴의 좌파당과 핀란드의 좌파연합은 공산당이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확대하면서 만들어졌다. 반면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좌파당과 덴마크의 사회주의민중당의 창당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 좌파들의 이탈이 중요한 몫을 했다. 「NGL 정치 강령」은 자신들의 원칙을 “국제연대, 사회 정의, 부의 평등한 분배, 성 평등,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위의 EUL과 NGL은 유럽의회 내에서는 녹색당/EFA와 마찬가지로 EUL/NGL이라는 하나의 교섭단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 사회주의당처럼 EUL, NGL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은 정당의 유럽의회 의원도 유럽의회 내에서 이 교섭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EUL/NGL이 확보한 의석은 녹색당/EFA보다 2석이 적은 39석이다. 

이들과는 전혀 다른 흐름으로 ‘유럽 반(反)자본주의 좌파’가 더 있다. 이 흐름의 주축은 트로츠키주의의 양대 정파라 할 수 있는 제4인터내셔널과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다. 그 주요 가입 조직들은 스코틀랜드 사회주의당, 프랑스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 덴마크의 적녹연합, 포르투갈의 좌파블럭 등이다. 2000년~2004년의 유럽의회에서는 이 경향에 속한 유럽의회 의원들이 EUL/NGL에 속해 활동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독립적인 흐름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당선자는 내지 못했다. 이들은 「유럽 반자본주의 좌파 선언」에서 최근의 사회민주주의 경향을 ‘사회자유주의’로 규정하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지구를 위협하는 ‘성장 모델’에 반대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반하며 노동의 착취나 여성의 억압이 없는, 아래로부터 자주관리되는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세 번째 세대의 좌파? 

유럽의 급진좌파정당들은 당 강령에서 자신의 이념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물론 사회주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회주의의 내용이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나 과거 현실사회주의의 ‘사회주의’와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사회주의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확대를 의미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 좌파당 강령은 이렇게 규정한다. “사회주의는 경제와 정치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억압으로부터 인류가 해방되는 것이다.”  NGL 강령은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한때 사회주의라고 불렸던 소련과 그 밖의 나라들의 전체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체제에 반대한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사회의 모든 부문으로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에서 각자의 자유는 만인의 자유의 전제조건이 된다.” 한편 네덜란드 사회주의당은 사회주의의 핵심 가치로 “인간의 존엄성, 재산의 평등, 연대”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1주(株) 1표’ 원칙을 대신해 민주주의의 ‘1인 1표’ 원칙을 경제 영역으로까지 확장한 것이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이러한 대목은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의 계승”을 말하면서 동시에 “현실사회주의의 오류의 극복”을 주장하는 민주노동당 강령과 그 기본 정신이 잇닿는 것이다.

그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사회주의’와 급진좌파의 그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점을 짚어보기 전에 먼저 핀란드 좌파연합의 강령에 나타나는 특이한 역사 인식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좌파연합은 강령 말미에서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역사적으로 세 세대의 좌파가 존재해왔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세대의 좌파는 봉건 질서를 폐지하고 대의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도입한 자유주의 세력이다. 지금이야 우파로 분류되는 것이 온당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들은 ‘자코뱅’이라는 이름 아래 좌파의 표준형으로 이해되었었다. 우리가 흔히 ‘좌파’라고 부르는 사회주의 세력은, 좌파연합의 강령에 따르면, 두 번째 세대의 좌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은 노동운동에 뿌리를 두었고 평등을 추구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세대의 좌파는 누구인가? 좌파연합은 자신들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뿌리는 1960년대의 신좌파운동과 급진적 여성운동·환경운동에 있다고 한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로 두 번째 세대 좌파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면서 이제는 제3세대의 좌파정치를 펼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핵심은 민주주의의 강조이고,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특히 경제에 대해서 좌파연합은 이제 제1세대 좌파의 시장 경제와 제2세대 좌파의 중앙집중형 계획경제 모두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 좌파연합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장을 폐지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사회의 다른 부분들의 민주주의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더 이상 어떠한 사회주의 좌파도 시장 경제의 폐지를 장기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로조차 여기지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시장에 자본과 화폐의 자본주의적 헤게모니를 지속시키는 측면들을 제거하고 시장 경제를 민주적 방향의 사회 발전과 만인의 번영에 복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핀란드 좌파연합의 이러한 역사 인식은 사뭇 흥미로운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이 도식에 따라 규정한다면 과연 어느 세대에 속할까? 여전히 노동과 분배의 문제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 제2세대 좌파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미 20세기 사회주의의 문제점들이 극명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제3세대의 성격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좌파운동의 세 세대라는 도식 자체가 지나치게 기계적인 것일 수 있다. 특히 경제 대안의 측면에서 핀란드 좌파연합의 주장이 사회민주주의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불분명하다. 물론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우파적 형태인 ‘제3의 길’에 견주어보면 그 차이가 뚜렷하지만, 정통 사회민주주의의 많은 내용을 계승하고 있는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강령과 비교해보면 쉽게 차이를 확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직접적 경쟁자인 좌파당의 강령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민주적 사회주의’의 또 다른 판본 - 사회적 소유와 계획이 여전히 중요하다 

스웨덴 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좌파당도 자기 당의 이념을 ‘민주적 사회주의’라 부른다.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듯이 사회민주당과 좌파당도 둘 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이야기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서로 다르다. 특히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경제 대안 부분이다. 

한 마디로 좌파당은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소유권 문제를 중요시한다. 사회민주당도 자본주의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굳이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추진하지 않아도 그 민주적 통제만으로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2000년에 채택된 좌파당의 강령 「연대의 세계를 위하여」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지적한다. “사회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폐지되어야 하며 사회의 자원이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생산수단에 대한 권력이 수립되어야 한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경제는 민주화되어야 하고 소유권은 제한되어야 한다. 의회와 정부가 경제 결정권을 쥐어야 한다. 하지만 경제와 사회 전체에 대한 권력 행사에서 관건적인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와 통제이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잉여의 분배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중요한 부분은 공적으로 소유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 나라의 경제 공동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원과 기업이 민주적으로 소유되고 공동선을 위해 경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게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중심 과제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좌파당의 「2002년 총선 정책」은 이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우리는 단기적인 투기 자본에 대항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전 사회적으로 공적 소유를 늘릴 것을 주장합니다. 우리는 사유화와, 공공 서비스를 시장 경쟁에 개방하는 것을 중단할 것을 원합니다. 특정한 전략적 영역에서는 국가 소유가 확대되어야 합니다.” 

이런 지점들에서 좌파당의 경제 강령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극복”을 지향하는 민주노동당의 경제 강령과 여러 모로 유사하다. 민주노동당 경제 강령 역시 사회적 소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만 이러한 사회적 소유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 점은 좌파당도 마찬가지다. “은행 부문과 신용 시장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공적 소유가 지배해야 한다. (중략) 국영 기업, 지자체 기업, 협동조합, 노동자 소유 기업, 사적 기업 등 다양한 형태의 기업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좌파당은 시장의 영향력을 제약하는 수준을 넘어서 계획과 시장의 결합을 주장한다. 이는 “시장적 조절보다 사회적 조절을 우위에 둔다”는 민주노동당 경제 강령의 기본 방향과 일치하면서 그것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선진 경제는 계획과 시장의 결합을 요구한다. 계획은 정치적 결정에 기반한다. 계획은 시장의 행위자들에게 규칙과 틀거리를 부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시장과 그 행위자들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에 반대해 싸운다. 이러한 자유는 다수의 희생 위해서 소수 특권층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대다수 민중의 자유를 침해한다. 계획은 필요, 환경의 한계, 지역 발전, 스웨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차원의 사회 정의에 기반해야 한다. 계획을 통해 우리는 독점과 카르텔의 등장을 막고, 소득과 복지에서 커다란 격차를 낳는 시장의 경향에 대항해야 한다.” 

정치 영역에서도 좌파당은 사회민주당보다 한 발 더 적극적인 면모를 보인다. 좌파당은 대의제의 좁은 틀을 넘어서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를 결합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대의제 정부 형태는 시민들의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들을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 이는 정책결정 국민투표로 나타날 수도 있고, 노동자, 지역주민, 소비자들 사이에서의 자주관리 구조로 나타날 수도 있다.” 

특히 필자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좌파당의 강령이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계급 대중정당의 오래된 난제에 대해 지적하면서 끝맺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일상적 정치투쟁’과 ‘궁극적 목표’ 사이의 관계다. 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위해 좌파당 강령은 당과 대중운동의 결합, 원내 활동과 대중투쟁의 결합을 강조한다. “잘 조직된 의회 바깥의 투쟁은 의회 내 활동의 성공의 전제조건이다.” 

이 명제는 「2002년 총선 정책」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좌파당에 투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만약 선거와 선거 사이의 시기에 민중이 침묵한다면, 권력을 쥔 자들은 다수가 반대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지역에서, 거리에서, 민중들이 모이는 모든 장소에서 계속될 우리의 운동이 의회에서의 결정을 궁극적으로 규정합니다.”

부자들이여, 우리를 지지하지 말라

그럼 급진좌파정당들이 당면 과제로 제시하는 구체적인 정책들은 어떠한 내용일까? 그것은 이들 정당의 총선 공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그 대부분은 민주노동당이 지난 총선에서 내건 공약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스웨덴 좌파당의 2002년 총선 공약을 보면 그 주요 내용은, 완전고용의 실현, 여성과 아동의 권리 신장, 하루 6시간의 노동, 소득 재분배를 위한 조세제도 개혁, 복지국가의 수호, 환경 보호, 제3세계 외채 탕감 등이다. 주목할만한 공약으로는, 해외 이전을 추진하는 기업을 지역사회와 노동자가 인수할 수 있도록 금융을 지원하고 법 체계를 마련한다는 것이 있고, 연금기금의 투자가 노동권·여성권·환경권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있다. 

네덜란드 사회주의당이 2003년 총선의 12대 공약으로 제시한 정책들은 다음과 같다. 사회복지에 대한 재투자, 민주주의의 축소 중단, 보편적 보건 서비스, 노년층과 장애인 복지 확대, 환경에 대한 우선 고려, 인종주의 반대, 주거 개선, 사법 개혁, 교통의 공공성 강화, 교육의 기회 균등, 스포츠·여가·문화의 동등한 향유, 국제 연대 등. 

급진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스코틀랜드 사회주의당은 작년 스코틀랜드 독립의회 선거에서 다음의 6가지 긴급 과제를 내세워서 바람을 일으켰다. 첫째, 기존 지방세의 폐지와 소득에 기초한 새로운 조세제도의 도입. 둘째, 양질의 무상학교급식. 셋째,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시급 7.32 파운드(약 15,000원)의 최저임금제 적용. 넷째, 공공부문을 통한 주35시간의 24,000개 일자리 창출. 다섯째, 공공부문 사유화 중단. 여섯째, 이라크 파견 부대 철수. 혁명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본가와 기득권 세력에게는 확실히 귀에 거슬릴만한 내용들이다.  

대부분의 급진좌파정당들이 다 비슷하다. 신자유주의로부터 복지제도를 사수하고 부의 재분배를 위해 그것을 더욱 확대한다는 정책들이다. 혹자는 이게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적 내용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라리 이는 사회주의의 전통적 내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때 이러한 사회주의적 정책의 담지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었지만, 이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장단에 놀아나는 ‘제3의 길’에서 갈 곳을 잃은 채 헤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급진좌파 정치세력들이 시장과 사적 소유의 공세로부터 복지와 연대의 전통을 지키자는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진보적 조세제도와 복지의 확대를 주장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과연 ‘사회민주주의’적인지 ‘사회주의’적인지 가려보자는 것은 잘해봐야 스콜라적 입씨름이 될 수 있을 뿐이다.   

2002년 총선에서 스웨덴 좌파당이 거둔 득표율은 8.3%였다(사회민주당은 39.8% 획득). 북유럽에서 급진좌파정당의 득표율은 보통 10% 안팎을 오르내린다. 노르웨이 사회주의좌파당이 가장 최근의 선거에서 12.4%를 기록했고, 핀란드 좌파연합이 9.9%를 얻었다. EUL에 속한, 유럽의 다른 지역 급진좌파정당의 경우는 이보다 좀 낮아서 대개 5% 선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재건당이 지난 총선에서 얻은 득표율이 5.0%고, 스페인 통합좌파도 올해 총선에서 5.0%를 기록했다. 

이 정도의 지지를 받는 정치세력이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다른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서 이를 통해 정책을 관철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중운동과 결합하여 기득권 세력을 압박하는 것이다. 사회민주당·녹색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북유럽에서는 급진좌파정당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반면 그렇지 못한 나라들(가령 이탈리아)에서는 세계화 반대 운동과 같은 사회운동과의 연대가 보다 중요시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급진좌파정당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포함한 유럽 정치의 주류가 보다 왼쪽으로 기울어지도록 압력을 넣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에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공산주의 정당이 서로 대등하게 경쟁하던 상황에 비하면 상당히 수세적이고 소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30년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을 거치면서 움츠러들 대로 움츠러든 노동운동·사회운동의 핵심을 보존하고 그 이상과 가치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소극적인 과제만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는 여러 모순과 위기가 이념의 추를 더욱 왼쪽으로 몰아갈 미래의 어느 때, 이들이 사수한 ‘진지’는 전 세계 좌파 전체의 자산으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총선 공약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기백이며 자부심이다. 

“어떤 정당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모든 시민들에게 다 이로운 것이라고 설득하려 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과 거리가 멉니다. 좌파당의 정책도 만인에게 다 이로울 수는 없습니다. 복지제도에 납세하길 꺼리고 자신의 풍부한 소득을 차라리 사적인 소비에 쓰길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좌파당의 정책으로 손해를 볼 것입니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 결정권도 더 적은 현실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정당에 투표해야만 합니다. 대기업이 보다 많은 영향력을 지녀야 하고 스웨덴이 EMU(유럽통화통합)에 가입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 당으로부터 어떠한 지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스웨덴이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원조를 줄여야 하고 외국인 망명자의 입국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편이 아닙니다. 환경보다는 이윤의 극대화가 더 고려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 당의 정책으로 행복해지기는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좌파당에 투표하는 것으로 불의와 싸우는 과업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대의 기구는 대표를 선출한 민중들로부터 고립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의 활동은 의회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의 일상 생활에서도 이뤄집니다.” (스웨덴 좌파당의 「2002년 총선 정책」에서) 


필자는 이것이 또한 우리의 목소리여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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