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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원작성자 : 장석준 
번역자 :  
게재 : 이론과 실천 2002년 6월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정당의 고뇌 : 독일 사회민주당 ②
-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 공산당·사회민주당
독일 노동계급은 왜 나치에 패배했는가? 

세계 진보정당운동사의 최대의 비극은 (1914년의 ‘배신’에 이어) 다시금 독일에서 벌어졌다. 강력한 두 개의 노동자정당을 지니고 있었던 독일 노동계급은 1933년 최악의 파시스트 세력(나치)에게 권력을 내주었다. 도대체 이 어이없는 패배의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문제를 다시 검토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지만 결국에는 그들 역시 비극의 한 주인공이 되어 버린 독일 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들어야 한다. 

열정도 이상도 없는 혁명 - 1918년 11월 혁명 

혁명적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네. 당장. 오늘 당장에도. … 하지만 당신네들은 복종하는 것은 예라고 하고 책임지는 것은 아니오라고 하지. 상황이 성숙해 행동이 요구될 때는 항상 그에 대응하지 않았어.

- 에른스트 톨러, 희곡 <힝케만>에서   


비록 1914년 8월 4일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 전원이 전쟁 예산안에 찬성했지만, 독일 좌파의 혼란과 침체가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절친한 동지였던 칼 리프크네히트 의원은 그 해 말의 전쟁 예산안 표결에서는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 이를 계기로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반전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로자와 그를 중심으로 반전 좌파가 다시 결집했다. 이들은 1915년 4월 <인테르나치오날레>를 창간하고, ‘스파르타쿠스(고대 로마의 노예반란 지도자 이름)동맹’이라는 당내 분파를 만들어 반전 투쟁에 돌입했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의회 안만이 아니라 공장과 거리를 종횡무진하며 당내 좌파를 재건하는 핵심 역할을 떠맡았다.

전쟁이 해를 거듭할수록 사회민주당 의원들 중에 반전 입장을 밝히는 이들이 늘어났다. 1916년 3월에는 18명의 의원들이 반전 의사 표명을 억압하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필립 샤이데만 지도부에 대항해 탈당을 결행했다. 1917년 4월에 이들은 마침내 ‘독립사회민주당(USPD)’이라는 독자정당을 창당했다. 흥미로운 것은 베른슈타인 등의 일부 수정주의자들도 새 정당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은 USPD 내의 좌익 분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잔류한 사회민주당 세력은 이제 ‘다수파’ 사회민주당(SPD)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8년 1월 반전투쟁은 드디어 백만 노동자가 참여한 총파업으로 폭발했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파업위원회를 러시아혁명에서 등장한 것과 같은 노동자·병사평의회로 발전시켜 대안권력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USPD에 속한 베를린의 좌파 노조간부들은 ‘혁명적 노조간부 그룹’이라는 또 다른 분파를 결성해 은밀하게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그 해 10월, 정부는 타협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했다. 황제가 수상을 임명하는 게 아니라 원내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당내각제가 약속되었고, 사회민주당의 오랜 숙원이었던 프로이센 주의회의 3계급 선거 폐지가 이뤄졌다. SPD는 여기서 집권의 길을 발견했다.

그러나 즉각적인 전쟁 중지를 요구하는 대중들은 SPD 지도부의 신중함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11월 3일 킬의 해군 사병들은 패배가 뻔한 출항 명령을 거부하고 노동자·병사평의회를 건설했다. 일주일 사이에 독일 전역의 도시들로 혁명이 확산됐다. 11월 9일에는 수도 베를린에 노동자·병사평의회가 건설됐다. SPD 지도부로서도 더 이상 의회 안에서 개혁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같은 날 샤이데만은 공화국을 선포했다. 독일 혁명의 첫 단계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을 비롯한 USPD는 노동자·병사평의회에 기반해 생산수단의 사회화, 대토지 소유 해체 등 사회혁명에 착수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SPD는 애초 10월부터 시작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을 완료하는 수준에서 혁명을 끝마치고 다음해 1월에 선출될 제헌의회에 전권을 부여하자는 입장이었다.

12월 16일에 소집된 노동자·병사평의회 전국대회는 SPD보다는 훨씬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다. 기간산업의 사회화와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해체, 기존 국가기구의 민주화가 결의됐다. 특히 군대의 철저한 민주화를 결의한 「함부르크 선언」이 주목할만했다. 그러나, 막상 평의원들 사이에는 노동계급의 지도부로서 아직 SPD쪽을 신뢰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한데, 그 SDP 지도부는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군대의 민주화 요구를 철저히 외면하고 기존 군장성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비밀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군장성들과 함께, 제헌의회에 전권을 부여하기 위해 평의회들을 해산시키고 그 옹호자인 과거의 동지들, 즉 USPD를 권력에서 배제할 방안을 모의했다.

단지 혁명이 필요한 때 혁명을 두려워했던 것만이 SPD의 오류는 아니었다. 대중의 요구를 제압하기 위해 수구 세력과 손을 잡고 그들에게 다시 권력을 부여한 것, 이것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11월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누가 방해했더란 말인가? 그들은 그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어떤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비판이 아니다. SPD에게 이러한 조소를 던진 이는 바로 극우파인 아돌프 히틀러였다.

독일 공산당의 잘못된 출발 

본래 스파르타쿠스동맹은 USPD 내의 좌익분파로 활동하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칼 리프크네히트 등은 12월의 급박한 시기에 USPD가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자 독자정당의 창당으로 돌아섰다. 이에 대해서는 조직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무엇보다도 스파르타쿠스동맹 이외에 새 정당에 함께 할 세력들이 누구인가가 문제였다. 가장 영향력 있는 좌익 분파였던 혁명적 노조간부 그룹은 USPD 잔류를 택했다. 남은 것은 20대 청년들이 주를 이루었던 ‘국제 공산주의 그룹’뿐이었다. 이들은 사실상 무정부주의자,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이었다. 전쟁 전의 사회민주당 일상 활동을 경험해본 적이 없고, 전쟁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무장봉기를 가벼이 여기던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국제 공산주의 그룹의 합류로 일단 창당이 단행됐다. 새 정당의 이름은 ‘독일 공산당-스파르타쿠스동맹(KPD)’이었다. 하지만 애초의 우려는 곧 현실화됐다. 1918년 12월 30~31일의 창당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독일 노동계급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혁명에 착수할 태세가 아니므로 제헌의회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중의 급진화를 촉진하고 에베르트·샤이데만의 권력을 아래로부터 해체해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결의안은 62 대 23으로 부결됐다. 새 당을 주도하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오랜 일상활동 경험을 지닌 스파르타쿠스동맹 출신들이 아니라 극좌 청년들임이 드러났다. 이들 중의 한 명은 호기롭게, “우리에게는 1000표의 투표보다 가두에 있는 10명이 훨씬 가치 있다”고 외쳤다.

비극은 창당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찾아왔다. 임시정부에서 USPD 인사들을 배제하려는 시도가 노골화되자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무작정 봉기를 일으켰다. 군부와 SPD 지도부는 이를 좌파를 모두 숙청해버리는 기회로 활용했다. SPD 간부인 구스타프 노스케는 비밀부대를 풀어서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학살했다. 1919년 1월 15일의 일이다.

전 세계 그 어느 노동계급운동 역사에서도 이러한 ‘형제 살해’는 없었고, 그 이후에도 이와 같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1914년 8월의 ‘배신’ 이상으로 세계 사회주의 운동을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진영으로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더 커다란 비극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과 함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을 추구하던 그녀의 날카롭고 섬세한 정신마저 학살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정신이 SPD의 실패한 이력에 대한 대안을 자처했던 새 정당, KPD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다수 민중을 모든 기존 질서를 초월하는 목표와 결합시키는 것, 일상적인 투쟁을 위대한 세계 개혁과 결합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큰 문제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분명 그 발전의 전체 과정에서 두 개의 난관 사이를, 즉 대중적 성격을 포기하는 것, 다시 말해 이단적 분파로 떨어지는 것과 부르주아 개혁 운동으로 변하는 것 사이를, 또 무정부주의와 기회주의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송병헌 옮김, 책세상, 2002, 116~117쪽.


칼과 로자가 살해된 지 나흘 뒤에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SPD가 37.9%를 획득, 연정을 구성하든 말든 상관없이, KPD 당원들은 그 해 여름까지 독일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좌파의 절망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8월 11일에는 드디어 바이마르 헌법이 통과되고 민주공화국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바이마르 공화국’이라 불린다). 이웃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노동자·병사평의회 등 애초 혁명의 진보적 요소들은 귀족, 재벌, 군부, 사법부, 대학 지식인 등의 기득권층에게 다시 길을 내주었다.

이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절친한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그녀의 노선을 계승한 KPD의 새 지도자 파울 레비는 오직 KPD의 잘못된 출발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당을 재구성하는 것만이 새로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운동을 살려내는 길이라 판단했다. KPD 내의 극좌 맹동주의자들과 과감히 단절하고 USPD 좌파와 결합해 사실상 신당을 창당하자는 것이었다.

1919년 10월 KPD 2차 당대회에서 레비 등 스파르타쿠스동맹 출신 지도부는, 그 첫 단계로서,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하고 선거에 적극 참여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 당원들을 모두 당에서 쫓아냈다. 10만7천여명의 당원 중 절반 이상이 축출됐다. 이 조치를 관철하기 위해 레비 등은 극좌파 대의원들에게 당대회의 시간과 장소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등의 편법까지 썼다. 이런 극약 처방이 필요할 정도로 극좌 노선의 폐해가 극심했던 것이다. (이 때 당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공산주의노동자당’이라는 당을 따로 꾸렸다가 흐지부지되고 만다. 레닌이 『공산주의의 “좌익” 소아병』에서 비판한 대상이 바로 이들이다.) 

‘노동자계급 공동전선’이라는 실험 

뜻밖의 기회는 극우 세력의 헛발질로부터 왔다. 1920년 3월 13일 군부 내 극우 세력이 급조된 쿠데타를 시도했다(주모자의 이름을 따서 ‘카프 반란’이라 부른다). SPD와 정부는 황망히 도망하는 것 외에 별다른 적극적 행동을 취하지 못했지만, 자유노동조합(SPD를 지지하던 최대 노동조합)의 주도로 1천2백만 노동자의 총파업이 벌어져 쿠데타에 대항했다. 쿠데타군은 굴복하고 말았다.

총파업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자유노동조합의 칼 레기엔은 SPD와 USPD에 ‘노동자 정부’의 수립을 제안했다. 부르주아 정당들을 배제하고 두 당만으로 연정을 구성해 미완의 개혁들, 구체제의 민주화와 토지개혁·광산 국유화 등을 단행하자는 것이었다. 비록 이 제안 자체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파울 레비 등은 이를 적극 지지했다. 이것은 정확히 1년 후에 코민테른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제시하게 될 ‘노동자계급 공동전선’ 전술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아무튼 노동자 정부 구상의 실현 여부와 상관없이, 3월 총파업은 1918년 혁명의 잘못된 귀결을 일정하게 교정하는 역할을 했다. SPD는 수구세력과 결탁하던 노스케와 같은 당내 부패분자들을 숙청해야 했다. 노동계급의 다수가 급진화해, 그 해 총선에서 SPD의 지지율은 1/3이 줄어든 데 반해 USPD의 지지율은 18.8%로까지 상승했다.

10월에는 레비의 숙원이었던 USPD와 KPD의 합당이 이뤄졌다. USPD의 일부 우파는 이에 반대해 SPD로 복귀하긴 했지만, 대다수 당원은 새 통합정당으로 향했다. 새 정당의 이름은 KPD를 그대로 계승했고, 당원은 45만명이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 가입한 좌파정당으로서는 서유럽 최대의 대중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신당 내에도 극좌 맹동주의의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또한 코민테른조차도 서유럽 상황에서 혁명적 대중운동을 발전시킬 방도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레비는 1921년 1월 이탈리아 사회당의 리보르노 당대회에 참석하여 이탈리아 공산당의 조급한 창당을 목격했다. 그것은 KPD의 잘못된 출발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었다. 레비는 이 사태를 방조하거나 조장한 코민테른 지도부를 비판했다.

바로 그 무렵인 3월에 독일에서는 코민테른의 직접 지시로 무모한 봉기가 다시금 감행됐고 역시 실패로 끝났다(만스펠드 광산 봉기). 그 여파로 당의 지역조직들이 파괴되고, 당원은 절반으로 줄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파울 레비는 「폭동주의에 반대하는 우리의 노선」이라는 팜플렛을 통해 코민테른을 격렬히 비판했다. 레비 자신은 이 때문에 당에서 쫓겨났지만, 그의 비판 자체는 결국 코민테른 노선에 반영되었다. 코민테른 3차 대회의 ‘노동자계급 공동전선’ 전술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후 KPD는 노동자계급 공동전선의 깃발 아래 투쟁할 때에 발전할 수 있었고, 이 전술을 방기할 경우에는 어김없이 비극을 맞이했다. 이 전술의 골자는, SPD 상층에는 계속 적극적인 투쟁을 제안하고 SPD 기층 당원들과는 투쟁 속에서 함께 함으로써, 다수 노동자들이 SPD 지도부에 비판적이면서도 관성적으로 SPD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1922년 자유주의자인 라테나우 외무상이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KPD가 주도하여 벌인 반파시즘 시위운동, 그리고 KPD의 주도로 SPD 노동자들과 함께 한 공장평의회 건설 운동은 당시 막 절정을 치닫던 살인적 인플레이션과 맞물려 1923년을 혁명 전야로까지 몰고 갔다. 작센주와 튀링겐주에 수립된 SPD 좌파와 KPD의 연립정부(주정부 수준에서 ‘노동자 정부’의 실현)는 연방정부의 불법 군사 행동으로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 성과는 1924년 총선에서 KPD가 12.6%의 지지율을 획득하는 것으로 유지됐다. 1926년에 KPD가 주도하여 SPD 당원들의 열렬한 지지와 1천5백만 국민의 찬성을 얻어낸 구 독일제국 군주재산 몰수에 관한 국민투표도 공동전선 전술의 훌륭한 성공 사례였다.

그러나 레닌 사후 소련 국가의 외교 조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코민테른이 KDP의 착실한 발전에 가장 강력한 방해물로 떠올랐다. 1923년 이후 코민테른은 가입 정당들의 ‘볼셰비키화’라는 명목으로 각 당의 당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과두체제를 정착시켰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코민테른 정당들에서는 지도부를 당대회에서 선출했고, 당 내 비판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볼셰비키화’ 이후 이들 당에서는 중앙위원회 내 부설기관인 정치부, 조직부, 서기국이 당의 전권을 장악했고, 당내 반대파는 무조건 출당시키는 게 관행이 되었다. 특히 소련 국가의 외교적 관심이 집중된 독일의 당, KPD에 대해서는 사실상 코민테른이 당 지도부를 임명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1928년의 6차 대회에서 코민테른은 공동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사회 파시스트’로 낙인찍어 파시스트 세력들보다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먼저 공격한다는 극좌 전술을 채택했다. 물론 KDP 역시도 이 결정을 따라야 했다. 이 전술은 말도 안 되는 오류였지만, 이미 코민테른의 하부 관료기구화된 KPD 내에서는 이 잘못된 노선을 아래로부터 수정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치의 위협 앞에서 

“부르주아에 대항해 싸우면서 스스로 부르주아의 어리석음과 독선 그리고 나태함으로 가득 차 있어요! 다른 당의 당원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다른 당의 명령에 따른다고 서로 미워합니다. … 불화와 배반뿐이지요.”

- 에른스트 톨러, 희곡 <힝케만>에서


이제 독일 노동계급이 나치에 패배하고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말해야 할 때다. 가장 커다란 책임은 역시 SPD에게 있다. SPD는 여전히, 원내에서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하고 우파와 협력해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실천 방도도 상상하지 못하는 최악의 의회주의 정당이었다. 1928년 총선에서 “학교 급식이냐 군함이냐”는 공격적인 구호로 모처럼 다수 의석을 확보하여 연정을 이끌게 되었음에도, 막상 군함 건조 예산안이 논의되자 우파 정당들과 협력해야 한다며 “학교 급식이 아니라 군함”을 선택하는 그런 정당이었다.

당원은 80만~100만 수준을 유지했지만, 고령화가 심했다. 의원들 중 10%만이 40세 미만이었고, 1930년 현재 25세 이하 당원은 8%에 불과했다. 이는 의원의 60%가 40세 미만이었던 나치나 당원의 1/3이 20대였던 공산당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었다. SPD는 노동계급의 한 세대의 다수를 획득한 정당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확대할 힘은 전혀 없었다.

SPD가 주의회의 다수 의석을 장악하여 연정을 이끌었던 프로이센 주정부에서 SPD는 노동계급의 역량을 실질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이뤄놓은 것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1929년 메이데이 때는 극우·극좌를 막론하고 일체의 시위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공산당의 메이데이 기념 시위를 탄압하여 33명의 사망자를 내는 참극을 빚기까지 했다. 이는 당지도부의 극좌적 SPD 공격 전술을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던 의식 있는 KPD 당원들까지 SPD를 증오하도록 만든 제2의 ‘형제 살해’였다.

또한, SPD는 1931년 여름 독일에도 상륙한 세계대공황의 여파에 속수무책이었다. 실업대란이 벌어져 1932년 1월에는 전체 국민의 1/5인 600만이 실업자 상태였다. 독일 노동운동 내에서도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 같이 강력한 재정팽창 정책을 통해 정부가 직접 나서서 고용을 창출하자는 목소리들이 대두했다. 1931년부터 자유노동조합의 경제 전문가인 보이친스키는 SPD 좌파인 타르노프, 바데와 협력해 이러한 고용창출계획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주창자들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WTB 계획’이라고도 불린다). 적어도 자유노동조합은 이 계획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적 방안을 관철하려면,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처럼, 재정팽창 정책에 반대하는 일체의 우파 세력과 단절하고 노동자세력 단독의 힘(SPD·KPD 연합)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SPD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1929년을 전후해 독일의 보수정당들은 하나같이 극우 성향의 지도부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했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좌파정당의 활동을 모방한 현대화된 극우 대중정당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그 약칭이 바로 ‘나치’다)이 좌파의 무능력에 실망한 중간계층을 끌어들이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SPD 지도부는, 최악의 파시스트 세력인 나치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비록 극히 보수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존의 보수정당들과 최대한 협력하고 이들의 정책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것이 유명한 ‘관용정책’이다. 그런데 당시 부르주아 정당들은 긴축재정 정책을 고집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과의 협력을 중요시하는 SPD로서는 WTB 계획 같은 대안을 추진할 수도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서유럽 최대의 혁명적 대중정당’이라던 30만 당원의 KPD는 어떠했던가? 이 무렵의 KPD는 SPD의 정치적 수동성에 대한 대안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SPD의 정치적 수동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 거울이었을 뿐이다. 비록 SPD에 실망한 청년 노동자들·실업자들이 총선에서 KPD 지지로 이동해 1932년 총선에서는 지지율이 16.9%까지 오르기는 했지만, 이러한 선거상의 성과가 당의 활동력과 곧바로 연결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SDP와 오십보 백보였다.

KPD는 당세가 신장할수록 SPD 지도부에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을 제안하고 SPD 당원들과 실제로 반파시즘 공동행동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KPD는 코민테른 스탈린 지도부에 대한 철저한 복종 때문에 이러한 능동적인 전술을 제대로 펴보지 못했다. 거리에서 KPD 당원들이 나치 당원들과 사실상의 내전을 벌이던 1931년 무렵이 되면 과거 스파르타쿠스동맹 출신인  클라라 체트킨, 빌헬름 피크(후에 동독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등을 중심으로 반파시즘 공동전선 전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에른스트 텔만 등의 당지도부 일부도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조짐은 코민테른 지도부에 의해 철저히 묵살·억압됐다. 대신 SPD에 대한 극좌적 공격이 계속됨으로써 과거 창당 당시의 극좌 맹동주의 체질이 다시 당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당내에는 “나치가 집권해 부르주아 정당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싹쓸이하면 권력은 이제 우리 차례”라는 치기 어린 사고마저 만연했다.

하지만 집회장 연설에서 쓰이는 말들의 무책임한 좌경화는 역설적으로 KPD의 선거정당화와 함께 이뤄졌다. 공황으로 양산된 많은 실업자들이 당의 주요 지지층이 되면서(1932년에는 당원 중 실업자가 85%에 이르렀다), KPD는 노동 현장과는 동떨어진 가두정당처럼 되어버렸다. 32년 말 현재 공장세포(세포는 공산당의 당 기초조직이다)는 2210개였던 데 반해, 주로 실업자들로 이뤄진 지역세포는 6000개에 달했다. 실업자 당원들은 급진적 언사에 쉽게 이끌렸지만, 선거에 참여하는 외에는 일상활동에 잘 결합하지 못했다. 더구나 쉽게 당에 들어왔다가 다시 쉽게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KDP의 당원 이적률은 최고 54%에 달했다). 실업 노동자들이 공산당에 조직됨으로써 이들이 나치의 지지층이 되는 비극은 방지되었지만, KPD는 이들을 독일 노동계급운동을 일신시키는 힘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패배 

“난, 더 이상 힘이 없어요. 더 이상 싸울 힘도 더 이상 꿈꿀 힘도 없어요. 꿈 꿀 힘이 없는 자는 살 힘도 없는 거요” 

- 에른스트 톨러, 희곡 <힝케만>에서


1930년 6월 작센주 선거에서부터 나치의 약진이 시작됐다. 하지만 SPD 지도부는 여전히 힌덴부르크 대통령(1차대전 당시의 참모총장)을 중심으로 덜 파쇼적인 보수정당들이 정권을 유지하게 하는 것만이 최상의 방어책이라고 보았다. 의회 바깥에서 행동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그릇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정당들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32년 7월 20일 파펜의 극우파 연방정부가 SPD의 거점인 프로이센 주정부를 군대를 동원, 해산시켜버렸을 때에도 SPD는 일체의 저항을 하지 않았다. 열흘 뒤의 총선에서 심판하면 된다는 것이 SPD의 입장이었다. KPD는 총파업을 호소했지만 노동 현장에 굳건한 기반이 없었기에 이 지령은 공문구에 불과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칼 맑스를 집어삼킨다”는 구호 아래 SPD·KPD 모두의 거점인 베를린의 공략에 나섰던 나치 베를린 지부장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붉은 무리들은 그들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그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1933년 1월 10일 SPD가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나치 당수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사실 이 때쯤 되면 SDP·KPD 모두에서 일정한 반성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1931년 12월 SPD의 노동자 당원들은 노동자 축구클럽들과 기존의 선진노동자 무장조직인 ‘국기(國旗)단’을 한 데 모아 ‘철의 공화주의 전선’이라는 가두투쟁조직을 만들었다. 그 두 달 전에는 SPD의 관용정책과 반공산당 정책을 참다 못한 당내 좌파가 탈당해 ‘사회주의노동자당’(당시 이에 합류한 SPD 당원 중에는 전후 서독 수상이 되는 빌리 브란트도 있었다)을 만들고 SPD와 KPD에게 공동전선의 결성을 압박했다. 다음 해 여름에는 기층 당원들 수준에서 공동투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철의 전선’ 단원들과 KPD의 ‘적색선봉투쟁동맹’ 단원들이 힘을 합쳐 나치 돌격대들과 가두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SPD 지도부는 기층의 이런 움직임을 금지했고, 코민테른으로부터도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양당 지도부가 최초로 공식적인 공동투쟁 협상을 시작한 것은 히틀러 정부가 이미 들어선 다음이었다. 제1차 협상은 1933년 2월 27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바로 이 날, 제국의회 의사당에는 원인 모를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히틀러 정부는 이를 빌미로 비상통치를 시작했다. 메이데이 다음날 자유노동조합이 해산되고, KPD와 SPD가 차례로 불법화되었다.

독재체제를 확립한 나치는 노동운동 진영에서 논의만 되던 고용창출계획을 실행에 옮겨 실업대란을 진정시켰다. 새로운 세계전쟁의 준비를 대가로 해서 말이다. SPD 지도자 루돌프 힐퍼딩은 망명지 파리에서 게슈타포에게 총살당했고, KPD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은 강제수용소에서 숨졌다.

물론 이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악몽이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수백만의 목숨을 대가로 해서만 격퇴될 수 있었던 나치의 야만이 10년 전 베를린의 거리에서 훨씬 쉽게 격퇴될 수 있었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악의 의회주의를 보여준 SPD와, 선진 자본주의에 적합한 전략 노선을 세우는 데 실패한 혁명 세력의 무능이 그 공범이라는 것도. 그것만이 이를 진짜 ‘지나간 과거’의 악몽이게 할 수 있는 길이다.

주로 참고한 한글 문헌들 

- 나인호, 「독일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과 고용창출계획, 1929-1932」, 연세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 스터름달, A.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황인평(황광우) 옮김, 풀빛, 1983 중 제4, 5, 6, 7, 9, 14장.
- 신명훈, 「1918/19 독일혁명과 독일공산당(스파르타쿠스단) - 당조직 문제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1. 
- 오인석,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 독일 민주주의의 좌절』, 한울아카데미, 1997. 
- 이동기, 「바이마르공화국 말기 나찌즘 대두에 대한 독일 공산당의 대응」,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4.
- 정용숙, 「바이마르 시기 독일 사회민주당의 민중정당으로의 구조적 전환 연구 - 신중간 계급에 대한 당의 지지 기반 확대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 조원옥, 「1918-19년 독일혁명기 사회민주당의 사회정책」, 부산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6. 
- 카, W., 『독일근대사』, 이민호·강철구 옮김, 탐구당, 1998. 중 제10, 11, 12장.
- 트로츠키, L., 『트로츠키의 반(反)파시즘 투쟁』, 박성수 옮김, 풀무질, 2001. 
- 헬러스, D. 『우리가 알아야 할 코민테른 역사』, 오현수 옮김, 책갈피, 1994. 
- 홍성곤, 「대공황기 독일공산당의 반파시즘 전략」, 동아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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