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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이상이 교수 인터뷰는 오늘날 진보정치세력이 처한 곤란함의 근본적인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상이 교수의 주장은 최근 진보진영에 제출되는 선거연합에 대한 주장 중 노골적이고 과감한 편에 속하는 것으로, 소위 민주, 평화, 개혁 세력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 관하여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다.
진보세력이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늘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민주당, 그러니까 '어떤 개혁'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상투적인 질문이고 이 질문에 누구나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한 번 현실적인 고려를 해보자는 말이다. 이상이 교수의 주장대로 복지국가를 전면에 내세운 정치세력이 집권을 하면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보자. 한국의 경제관료들 사이에 커다란 두 개의 축이 있다는 점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한 축은 박정희의 국가주도 경제개발체제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적인 시각의 경제관료들이고 또 한 축은 워싱턴컨덴서스의 주장을 직수입한 신자유주의자들이다. ( 참고 : [동아일보] 하늘 보는 ‘이피아’ → 땅을 보는 ‘모피아’ ) 대한민국의 경제 정책은 이 두 파벌의 대결 속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박정희 이후 대체로 전자가 후자의 도전을 방어하는 상황이 이어졌지만 97년 외환위기 때문에 전자에 속하는 관료들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김대중 정부때부터 후자의 경제관료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사에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 참고 : 다시 보는 김대중의 눈물 )
즉, 강만수류의 고환율 정책에 반대하는 오늘날 일각의 주장들은 진보적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나 정통적인 입장에 서있는 신자유주의자들 또한 같은 취지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한나라당 정권이 실각한 이후 들어서는 '어떤 개혁' 정권에서 경제 정책의 핵심을 입안할 경제 관료들은 매우 분명하게도 정통파 신자유주의자들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좌파들을 선동해서 행정고시를 치르게 하여 그들이 경제 관련 부처에 대거 유입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물론 개혁적 인사들을 책임있는 자리에 앉혀서 경제 관료들을 통제하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러한 방식의 폐해에 대해서는 참여정부 시절의 정태인, 이정우의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물론 경제관료들이 국가의 모든 것을 좌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상이 교수도 인정하고 있듯이 '역동적 복지국가'라는 것은 단지 복지정책의 확대와 예산의 확보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기획은 (이상이 교수가 다시 한 번 누차 강조하고 있듯이!) 체제 자체의 변화를 전제해야 가능한 것이며 신자유주의자들이 추진할 경제 개혁 조치에 기반해서는 기존의 '생산적 복지'라는 패러다임을 깰수가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상이 교수가 간절하게 염원하고 있는 그 개혁적 정치세력이 만들 정권과 정책은, 최소한 그것이 2012년에 등장한다고 가정하는 이상, 한쪽에서는 복지정책의 확대를 과감하게 추진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정부 예산의 지출 축소와 노동유연화를 밀어붙이는 기형적인 형태가 될 것임이 매우 분명하다.
물론 이상이 교수는 복지제도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염원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이야기 하면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복지의 맛을 느끼게 된다면 앞으로도 더욱 복지를 원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우를 판매한다고 하면서 미국산 쇠고기를 시식용으로 내놓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 '깨어있는 시민'들이 가졌던 가장 큰 불만은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서봐야 별로 변하는 것이 없다'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이명박 정부에서 보듯 개혁 정권의 실패는 종종 보수 세력의 재집권을 초래한다. 그런차원에서 본다면 이상이 교수의 주장은 실패할 개혁 정권의 기획을 다시 한 번 시도해보자는 것에 불과하다.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섰을때, 이들의 '선의'를 위협하는 경제관료들의 수천쪽에 달할 보고서 뭉치를 짓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조직된 피지배계급의 올바른 투쟁(물론 투쟁이라는 것에는 여러가지 방식과 의미가 있다) 뿐이다. 이 투쟁을 조직하고 대변하는 것은 이상이 교수가 '풀뿌리 시민운동'으로 표현하는, 본인도 책임지지 못할 어떤 모호한 대상이 아니다. 2011년과 2012년의 국면을 통해 우리는 피지배계급의 각성과 조직화를 통한 민중적 강제라는 구속구를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속구는 진보정치의 발전과 계급운동의 활성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금의 진보세력이 이러한 전망을 만들지 못하고 지지부진 하고 있다고 해서 아예 진보정치의 존재 자체를 묵살하고 어떤 '가능성'에 투항할 것을 강요하는 것을 우리는 '비판적 지지'라고 부른다.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사실상 20년 넘게 계속 되풀이 되어온 '비판적 지지'의 새로울 것 없는 새로운 버전을 새삼스럽게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이 교수도 이러한 평가를 부정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로써 나는 이상이 교수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온 진보정치의 길을 함께 걷지는 않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진보정치의 역사 자체가 비판적 지지에 대한 치열한 투쟁이었는데, 그걸 열심히 한 보람도 없이 오늘날 같은 주제를 놓고 또다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고래를 잡았어
난 20년 넘게 되풀이 되는 비판적 지지 보다, 30년 넘게 돌림 노래를 부르는 좌파의 구호가 더 지겹다능. 87년 비판적 지지 이후 한 번 이라도 제대로 비판적 지지에 힘이 실린적 있었음둥..?? 늘 제 노래만 부르고 서로 씹고 제 갈길 갔었지. 이렇게 말하면 30년 넘은 좌파의 주장에 한 번도 힘이 안 실렸으니 쌤쌤이라고 받아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어떤 국면에서 비지든, 좌파든 보다 비전과 설득을 동반한 주장이 채택돼야지 비지는 이미 폐기됐다는 둥, 좌파가 짱이라는 둥 이건 좀 아니지 싶다. 비지가 실패라는 근거를 열거할 수 있듯이, 좌파의 무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 역시 차고도 넘친다.
해보지 않았으니 어찌될지 모른다니, 그러면 예측과 분석은 뭐하러 하겠으며 글은 뭐하러 쓰겠습니까..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하려면 냄새도 한 번 맡아보고, 다른 사람을 불러서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의견도 듣고, 이걸 매번 할 때마다 그냥 이건 똥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된장맛 똥은 괜찮지 않느냐.. 똥맛 된장 정도는 인정해줄 수 있는거 아니냐.. 뭐 이러고 있으니 제가 '아니 여러분, 이건 그냥 똥입니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죠. 뭐 그래도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한다고 말하면 제가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나중에 된장맛 똥이랑 똥맛 된장은 또 어떻게 구분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