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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진보대연합과 관련하여 진보 진영의 논의가 뜨겁다. 농담이다. 뜨겁고 싶은데, 한없이 뜨겁고 싶은데, 지금 상황은 썰렁 그 자체다.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하면 뭐가 좋은지도 알 수 없는 걸 뜬금없이 하자고 하니 썰렁 할만도 하다. 

진보대연합의 대상은 ‘미래구상부터 노동자의 힘 까지’라고 누군가 간명하게 정리했는데 현재까지의 스코어, 미래구상은 이상해졌고 노동자의 힘은 반응 없고 전통의 좌파 한국사회당과 정체불명의 정치 생명체 새진보연대가 남았다.

이 중 우리의 신경을 보다 자극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한국사회당이다. 한국사회당은 이 주제에 대해 모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2002년 등과 같은 기억을 되살리게 하여 또 몇몇 사람들은 한국사회당과 왜 ‘대연합’을 해야 되냐며 거품을 물기도 한다. 물론 이걸 왜 해야 되는지, 하면 뭐가 좋은지 강호의 이름 높은 여러 필자가 구구절절 설명한 일이 있건만, 원래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 없는 얘기를 쉽게 잊어버리는 법이다.

그러니까, 왜 해야 되냐고?

왜 해야 되는지를 묻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용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다. 파격적인 합당을 해봐야 당원 1,000여명 늘어나는 거랑 지지율 0.1% 올라가는 것 외에 뭐가 더 있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무척 현실적이면서도 뼈아프다. 내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면, 당당히, ‘니덜이 기대하는 그런 거 없다!’고 답해줄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는 한국사회당 측의 인사가 레디앙을 통해 반론을 편 바 있다. 내용인 즉, ‘표가 되든지 말든지 그건 상관없고 지금 중요한건 진보진영의 혁신 아니여?’ 라는 것이다. 세상일을 잘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진보정치세력이 얼마나 잘난 놈들인지 알릴 기회를 만들자는 얘기다. 그걸 양 당의 파트너십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한국사회당하고 뭔가를 같이 하면 왜 진보진영의 혁신이 되는데?’ 물론 항간에는 좀 더 구체적인 질문도 있다. ‘한국사회당은 사회적 공화주의를 한다는데!?’ 요는 이러한 진보대연합에 거는 기대가 한국사회당의 우경화에서 나온 증상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장단 맞출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수혈 받아야 할 것은 보다 시뻘건 좌파의 피인데 그런 시원찮은 피를 수혈해봐야 무슨 좋은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국사회당의 이념은 무엇인가?

사실 지금처럼 진보진영이 ‘뭐라도 해야 하는’ 답답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한국사회당과의 선거연합, 정치연합, 통합, 재창당 등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당의 과거 활동과 사상을 평가하고 검증하려 들었을 것이다. 아마 나였다면 상대가 누군지 명확히 해야 함께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시비를 걸었을 게 뻔하다. 

그런 기준에 따라 평가하면 한국사회당은 한국 진보진영의 이념적 지형에서 어느 자리에 머물고 있을까? 제일 적절한 타이틀은 ‘민중주의의 여러 가지 변형’이 아닐까 싶다. 민중주의라는 단어가 남미식 파퓰리즘을 설명하는 용도로 의례 쓰이기 때문에 혼동이 있을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용어가 뜻하는 본래적 의미로서는 크게 벗어나는 표현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렇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들에게 가장 낮은 몸짓을 보여주겠다며 빈민운동, 소수자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결합해왔다. 물론 ‘좋은 일 하자’ 라는 것이 당의 핵심 이념이 될 수는 없기에 최근 이들은 ‘사회적 공화주의’를 이야기 하며 ‘국민주권운동’을 해야 된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자는 확고한 민중주의인데 반해 후자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완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흐름이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들의 주장 근처에 끊임없이 ‘자유주의’라는 네 글자가 맴돌고 있는 것은 대단히 익숙한 풍경이다. (말하자면, 스탈린주의와 자유주의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데 오늘날 스탈린주의자들의 지척에 자유주의가 맴돌고 있는 것이 그렇다.)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는 것’, 조금 어려운 비유를 들자면 ‘죽지 않으려고 시장에 갔는데 바로 시장에서 죽음을 만났다’는 것이 이러한 이념의 실체다. 이들은 이렇게 노동자의 힘의 ‘노동조합주의’, ‘노동자주의’와 함께 한국 진보진영 정치 지형에서 일그러진 다각형의 꼭짓점을 이룬다.

‘사회적 공화주의’ 채택 자체가 한국사회당의 어떤 큰 변화를 이야기 한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바야흐로 그들의 사상을 찾은 것이고 지금까지 이야기 하지 못하던 자신들의 현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저는 사회주의자입니다.’라는 식의 불명확한 자기 인식에 비하면 명백하게 발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냉정한 평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바야흐로 한국사회당은 이념적인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진보대연합의 의의

여기서 이제 다시 이전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한국사회당이 진보대연합의 대상인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사회당이 추구해온 사상과 이론의 종착점이 사회적 공화주의고 이것이 노동계급과, 변혁운동과, 혁명과, 그 외 자질구레한 것들과 별로 그렇게 친한 게 아니라면 도대체 민주노동당이 한국사회당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전히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수사의 전제는 진보대연합의 의의가 죽어가는 민주노동당을 살리는 데에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한국 진보진영의 이념 지형은 기다란 막대 형태로 좌로부터 우로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일그러진 다각형의 꼭짓점에 서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지형에서는 가장 불분명한 것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 되고 가장 명확한 것은 가장 끔찍한 것이 된다.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과 정파로서의 전진은 그 어느 꼭짓점에도 자리하고 있지 못하지만 어찌됐든 현실에서 유의미한 정치운동을 붙들고 있는 것은 민주노동당이고 변혁운동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의 상당 부분을 여지껏 책임지고 있는 것은 전진이다.

노동조합주의와 민중주의가 세상을 바꾸는데 불충분하다는, 그런 100년 전 얘기를 다시 되풀이 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도 필요하고 저런 것도 필요하고 이것은 조건이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이야기 하는 가운데 이 다각형의 꼭짓점을 아무도 놓지 않고 있어 우리의 변혁운동은 점점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진보대연합의 가장 큰 목표는 바로 이 이념의 지형을 뒤흔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한국에서의 변혁운동 역사를 평가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작업이 되어야 하며 잊혀진 이념과 철학, 사상을 다시 이야기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책임 있는 정파도 나서야 한다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진보대연합에 대한 당 차원의 논의가 의미 있게 진행되어 한국사회당과 일정한 합의를 도출하고 실질적인 진보대연합의 내용을 이루어 낸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기만 한다면야 다음의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하등 쓸모가 없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가 아닌가? 우리의 진보대연합 구상은 아무리 잘 되어도 선거 시기의 선거연합에 그칠 가능성이 많지 않나? 아니, 그마저도 실현되지 못하고 진보대연합 자체가 일회성 에피소드로 끝날 가능성도 무지하게 많지 않나?

사실 그래도 된다. 그리고 늘 그래왔다. 하지만 우리의 책임 있는 정치조직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끝나는 것에 대해 응당 아쉬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게 아쉽다면 당 차원에서 풀 수 없지만 정파 차원에서 추진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보대연합의 최종 목적지는 한국 변혁운동의 정치적, 이념적, 사상적, 철학적 지형을 뒤흔드는 것이다. 물론 이 최종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그런건 중요한 게 아니다. 운동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우리는 우리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헤매고 있었던 시절에 우리의 가장 대견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었는가.

정치조직에서 이념과 사상, 철학의 문제는 결국 교육의 문제로 결론지어진다. 한국사회당 지도그룹과 전진이 교육과 관련된 사업을 함께 추진해 보는 것은 어떤가? 어차피 한국사회당도 ‘사회적 공화주의’의 내용이 부족함에 곤란함을 겪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이야기 한 바 있으니 함께 교육 사업을 진행하면서 한국사회당을 올바른 볼셰비즘의 길로 인도를 하던지, 우리가 사회적 공화주의자가 되던지, 아니면 민주적 사회주의와 사회적 공화주의의 실천적 교집합을 찾던지 무엇을 해도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좀 과장해서 표현 하자면, 철학과 사상에 대한 서로 간의 화해와 용서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서로의 입장과 철학을 이해하고 그것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어느 정도 동질한 (최소한 지금 전진 성원 개개인이 가진 정치적 간극보다는 적은 차이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이론 중앙 그 비슷한 것을 구성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를 통해 한국사회당 계열의 학생 조직, 빈민 운동 조직, 소수자 운동 조직 등의 역량에 정치력과 일정 정도의 영향력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전진 내부에서 책임 있는 논의가 거의 중지되어 있는 여러 형태의 사회 운동들에 우리가 좀 더 명확한 전망을 가지는 것이 수월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을 꺼내놓고 보니 숨이 막힌다. 그렇다. 이것은 10년의 계획과 전망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전진 대다수의 구성원들의 공감과 결의가 필요한 일이다. 정치대회를 하자고 그래야 하나? 황당한 비현실적인 얘기라고 욕이나 먹을 게 너무 분명하지 않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여러 가지 정신질환, 히스테리, 강박, 불안 등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다. 공허한 망상과 허무한 오해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만만찮은 원동력이 된다. 나는 지금 변혁운동에 부족한 여러 가지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함께 젊었던 시절 20대의 신선함을 떠올리며 이 글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상산의 뱀

2011.12.06 14:44:59
*.109.69.239

분당 3개월 전에 진보대연합 및 10년의 계획과 전망을 고민하셨던 비극이 있었군요.

이상한 모자

2011.12.06 15:04:58
*.208.114.70

이땐 정말 분당이 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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