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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고등학교 동창 중에 영화를 전공하는 녀석이 있는데 그 친구는 이상하게도 옛날부터 '트로마' 라는 영화사를 좋아 했던것 같다. 트로마라는 영화사는 엉성한 특수효과와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시나리오, 그리고 망가진 배우들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 특이한 취향의 영화사다. 금기와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이들의 열정은 높이 사줄만 하지만, 일반적인 영화 관객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들은 너무 급진적(?)이다."
 
뭐 퀴어 영화제에서 상영된 경력도 있는 이 '킬러콘돔' 이라는 영화는 트로마라는 영화사가 직접 만든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배급을 담당했었고 움직이는 콘돔의.. 그.. 조악한 특수효과는 아마도 트로마의 기술진들이 담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에 의해 트로마의 영화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줄거리부터 왠지 트로마답다. 어느날 남성의 생식기가 호텔에서 연속적으로 잘리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우리의 시실리 태생의 루이지 형사는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호텔에 들렀다가 빌리라는 게이 창부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기로 결심한다. 루이지 형사의, 32센치나 되는 거대한 물건에 반한 빌리는 루이지를 향한 불타는 사랑의 열정을 품고 일을 시작하려 하지만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콘돔이 살아 움직이는 바람에 무드가 깨져버린다. 루이지는 콘돔을 체포하기 위해 콘돔이 도망간 서랍장 아래를 들여다 보지만, 흥분한 콘돔은 루이지의 왼쪽 고환을 물어 뜯어 버린다.
 
이때부터 루이지는 '시실리인은 당하고는 못산다.' 며 이 킬러콘돔을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된다. 이 와중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여장을 한 채 바베트라는 이름으로 가수 흉내를 내는 전직 경찰 밥, 호모 포비아 샘,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엉망진창의 사건 사고들이 이어지다 뭐 광신도 박사가 동성애자들을 벌하기 위해 지하에서 이 킬러콘돔을 만들었다는.. 뭐 그런 사실이 밝혀지고 빌리와 루이지가 해피 엔딩을 맞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 곳곳에 죠스, 사이코 등의 명작 영화들에 대한 패러디가 등장 한다거나, 주인공격인 루이지 형사가 사실은 피아니스트에 등장했던 닥터.. 무슨 스키 라거나 하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이 영화가 정말로 흥미로운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이 영화가 진짜로 흥미로운 이유는 그 전개에 있어서 동성애와 관련된 소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수자를 옹호하는 영화는 아닐수도 있다. 이를테면, 주인공인 루이지 형사는 하필이면 '백인 마초' 의 게이고 여장 남자인 밥은 항상 바보 취급 당한다. SM 놀이를 하는 변태 게이 커플이 등장하는가 하면, 킬러 콘돔을 만들게 한 지하에 사는 악당은 '여자' 와 '동양인' 이다!
 
이런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견에 가득찬 요소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소수자의 입장에서' 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주인공인 루이지 형사든 누구든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나 멸시의 시선 따위가 (악당의 시선을 제외하면) 전혀 드러나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시작하고나서 루이지 형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조차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루이지 형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그가 호텔에 가서 빌리에게 관심을 가진 후 호텔방으로 함께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밝혀진다. 그것을 누구도 직접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것을 우리는 '당연한 것'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킬러콘돔 세계는 보통 주인공이 이성애자일때 "나는 이성애자다."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처럼, 주인공 루이지도 처음부터 "나는 동성애자다." 라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계라는 뜻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아무도 그들의 성적 취향에 대한 불평이나 경고 조차도 늘어놓지 않는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세상에 대한 시선은 '천진난만' 하다. 우리의 백인 마초 어린이 영화 감독은 "여장 남자는 병신이지.", "동양놈들은 한심하다구.", "여자들이란.. 쯧쯔.." 따위의 편견에 가득 찬 말들을 내뱉으면서 결코 "게이 자식들.." 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정말로 결코.
 
이러한 상황은 영화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영화 중간쯤에 루이지 형사가 자신의 보수적인 가정을 묘사하면서 "어머니는 며느리는 무조건 처녀여야 한다고 말하는 분이셨지." 라는 독백을 통해, 그의 가정이 동성애에 보내는 시선이 견디기 힘을었음을 암시하는 듯한 부분은 영화 뒷부분에 가서 이상한 형태로 뒤집어진다. 예쁘장한 게이 창부인 빌리를 시실리의 고향에 데려가겠다는 얘기를 하면서 루이지 형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자네가 숫총각이 아니라는 사실은 얘기하지 말고 말이야." 그리고, 영화는 다음과 같은 빌리의 느끼한 한 마디와 함께 막을 내린다. "사랑해요, 짭새." 여기에서 빌리는 이런 영화에 늘상 등장하는 수동적인 여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는 '게이 창부 빌리 = 옵션 여주인공', '숫총각 = 처녀' 의 등식이 성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루이지 형사가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아예 영화의 제작자가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평하자면 "게이 왕국의 B급 느와르 SF 물" 이라고 하면 될까. 그러면 별로 상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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