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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나는 '동성애 영화'라고 불리우는 영화들을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이전에 지적했듯이, 나에게 있어서 왕의 남자는 결코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서 멀리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나의 문화적 인프라(?) 탓이 가장 컸겠지만 '동성애 영화란 가능한가?' 라는 나의 뭔가 근본적이고 심오한 물음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덜컥 보게된건 순전히 사람을 잘 만난 탓일게다. 사실 영화를 보러 가기 직전까지 나는 이게 무슨 영화인지 몰랐다. 산이 나오고.. 멋진 모자가 나와서, 단지 그래서 보러 갔을 뿐이다.

이 영화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영화의 플롯을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상징계적 규칙'들에 맞게 각색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카우보이를 하던 두 남자가 아름다운 우정을 가꾸어 나가다 한 명이 죽고, 다른 한 명이 살아남아 추억이 담긴 피묻은 옷을 쳐다보며 친구와의 우정을 곱씹는.. 아, 그래요. 그런 영화 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우정'이란 단어를, 원작자는 발칙하게도 전부 '사랑'이란 단어로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좀 더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작품의 원작자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있을만한, 또 우리가 익숙해져있는 특정한 규칙에 들어맞게 꾸며진 스토리의 일부분들을 '사랑', 그것도 '동성애'적 색채가 빛나는 헝겊들로 덕지덕지 기워놓아 버렸다.

그래, 친구. 이게 우정이 아니라 사랑이라면 사태는 어떻게 진전될까? 바로 이것이 이 영화의 전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규칙을 따라 전형적인 플롯을 더듬어 나가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누덕누덕 기워진 사랑의 천 조각을 마주하고는 당황스러워 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일부 관객들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때문이 혹자는 이 영화에서 그려진 동성애의 실체에 대해 '오해'라던지, '거짓'이라던지, '인위적' 이라는 수사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반대의 평가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특징적이게도 (사실 다른 영화들을 보지 않아서 그것이 특징적인지는 모르겠다.) 동성애적 코드를 다루면서 거기에 굳이 남, 녀 구분을 넣지 않는다. 그러니까 흔히 동성애자들 에게도 남자의 성 역할과 여자의 성 역할을 담당하는 어떤 구분이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주류적 상식(?)을 한 방에 뒤엎고 사랑하는 일대 일의 인간만 남겨놓았기 때문에 그것이 더욱 진실된 동성애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따위의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평가는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본질에 다가서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아무도 '진정한 동성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 문장의 전에 '동성애자 자신을 제외하면' 이라는 문구를 삽입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과감하게 삽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계속되는 논리의 전개를 따라가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면, '진정한 동성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 세계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동성애는 규칙에 맞지 않는다.', 이 세계가 동성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레퍼런스. 그것 이외에는 동성애에 관한 그 무엇도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문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카우보이들은 우정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었으나, 그것이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카우보이들이 나누는 사랑은 왜 우정이 아니었던 것인가? 사랑은 우정과 왜 다른가? 그리고, 우리는 결정적 질문을 여기에서 던질 수 있다. "사랑이란 뭐지?"

진정한 동성애를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듯,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 여기에서의 진실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논리를 뒤집어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에니스와 잭의 사랑을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과 당신 애인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오- 이런. 우리는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랑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카우보이 두 명이 펼치는 우정의 매끈한 플롯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진실이 아니라 덕지덕지 기워진 사랑의 헝겊이 붙어있는 이 지저분하고 난잡한 농담들이야 말로 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이다!

이러한 진리를 실천적으로 서투르게나마 구성했던 영화는 B급 호러물인 '킬러콘돔' 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동성애를 끈적하고 어두운 뒷골목에서 구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을때 '킬러콘돔'은 거꾸로 동성애를 '다른 사랑들과 마찬가지로' 끈적하고 어두운 뒷골목으로 처박아 버렸다. 자, 소수자 운동에 관한 올바른 견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동성애를 이해하거나 납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그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영화 내내 어떻게든 무언가로부터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왔던 에니스는 영화 말미에 가서야 딸의 결혼식에 정면으로 마주선다. 그는 6월에 티튼산에서 방목을 하기로 되어 있다는 변명을 하며 그 부담스러운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까짓거 다른 사람 구하라고 하지!' 라는 말로 이전의 비겁함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피묻은 옷을 바라보며 "맹세할게." 라고 말한다. 여기서 감독은 '알아서 생각하쇼.' 란 마음으로 뭘 맹세한다는 것인지를 굳이 감춰놓았음이 분명하다.

잭도 에니스도 스스로를 게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특히 에니스는 평생 사랑했던 단 한 명의 남성인 잭이 사라진 지금 더더욱 (유물론적으로) 게이가 아니다. 이전에 그 위에 덧붙여 기워진 '사랑의 헝겊' 이 순식간에 떼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에니스는 '전형적 인물' 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수 있듯이 '전형적인 것'은 역설적이게도 '상상적인 것'이다. (덕지덕지 기워진 부자연스러운 플롯이야 말로 '상징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에니스는 그러한 거짓된 삶을 살아가며 잭과의 추억을 부인하고 그러했던 사실로부터 회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당당히 마주하는 것은 잭과의 추억을 포함한 그의 인생이고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연속된 세계다. 그가 잭에게 맹세한 것은 아마 그러한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일게다. 이러한 것은 잭에게 단지 '잊지 않을게.' 라고 말하는것 만으로도 완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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