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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재미있는 뉴라이트 사용후기

서평 조회 수 4450 추천 수 0 2010.01.01 12:00:20


2001년 조선일보 인터뷰 거부 사건으로 유명해진 인터넷 논객 ‘아흐리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소위 20대 논객 한윤형이 책을 냈다. ‘뉴라이트 사용 후기’라는 제목의 이 책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비난해온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주장해온 내용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고찰하고 반론을 하려는 목적으로 쓰여 진 책이다.


소위 ‘뉴라이트 역사관’이라는 것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 문제 등으로 인하여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끝까지 견지하는 포지션은 똑같이 ‘뉴라이트’를 비판하는 다른 이들이 쓴 책과는 많이 다르다. 뉴라이트 역사관을 비판하고 논파하려는 시도를 민족주의에서 찾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한윤형은 ‘민족주의를 반박하는 뉴라이트’와 ‘뉴라이트를 다시 반박하는 민족주의’ 양자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함께 짚어 내면서 보다 합리적인 관점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주장의 요지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뉴라이트 역사관은 기존의 ‘민족주의 역사관’(편의상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을 비판하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하나 실제로는 이승만 이후부터 이어지는 기득권 세력의 역사적 알리바이를 제공하려는 것이고, 이와 불화하는 민족주의 역사관은 단지 기득권을 쟁취하지 못한 김구로부터 이어지는 경향을 옹호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전제를 설정하고 양자의 논리가 부딪치면서 만들어 낸 논점들의 비합리적인 모순들을 짚어내면서 논지를 전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친일파 청산, 정치인 김구에 대한 평가, 신탁통치 찬/반 논쟁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김구는 민족주의 역사관에서는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치고 남, 북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한 민족주의 정치인이지만 뉴라이트 역사관의 입장에서는 단지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때문에 뉴라이트 교과서 논란이 불거졌을 때 민족주의 사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표현한 교과서의 부분에 밑줄을 쳐서 인터넷을 통해 유포하며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을 매국노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전적 의미에서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정의하는 것이 부당한 일인가? 김구가 실제로 행한 일들은 테러리즘으로 정의하기에 합당한 일들이 아니었는가? 또, 일제 식민지 시기 인물들 중에서 우리가 ‘의사’의 이름을 붙여 위인으로 기리는 인물 중의 상당수가 테러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저항한 인물들이 아닌가?


때문에 당시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었던 ‘김구 테러리스트’ 논쟁은 턱없이 과열된 측면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평가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논쟁이 이렇게 과열된 것일까? 한윤형의 주장을 인용하면 그것은 민족주의 역사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보여줬던 다음과 같은 논리 전개 때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① 테러는 무언가 ‘나쁜 일’이다.
② 김구는 ‘좋은 사람’이다.
③ ‘좋은 사람’은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
④ 그런데 뉴라이트는 김구가 테러를 했다고 말한다.
⑤ 고로 뉴라이트는 틀렸다.


논리를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면 누가 봐도 이게 맞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김구의 노선을 따르는 자라면 ‘김구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게 아니라 ‘일제에 대항해서 테러리즘을 택하는 것이 왜 비난 받아야 합니까?’라고 말을 꺼낼 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촛불 시위의 비합법성을 옹호한다. 뭐든지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테러리즘이든 촛불시위든 부당한 압제에 대항하기 위해 비합법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왜 주저하는가?

 

그런데 이 문제는 꼭 특정한 역사관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문제는 아니다. 사실 우리의 생활 곳곳에서 우리는 한국인들의 이런 방식의 사고방식을 늘 접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만 있다. ‘좋은 사람’이 ‘나쁜 것’을 하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몇 년 전 ‘이율배반’(?)적인 처신으로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던 미즈노 순페이 교수라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한국의 대학에 다니며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하고 TV에도 출연해서 한국을 좋아하는 척을 했지만 정작 일본에서 한국에 비판적인 책을 냈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사건의 개요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좋아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시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즈노 순페이 교수가 쓴 글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거나 분노하는 사람을 그리 많이 보지 못하였다. 이 경우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은 ‘좋은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무언가를 비판(언론에서는 비하, 폄하 등의 어휘를 사용하였다)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미즈노 순페이는 한국을 좋아하므로 ‘좋은 사람’인데 일본에서 한국에 비판적인 책을 내는 ‘나쁜 짓’을 하였다. 그러므로 미즈노 순페이는 자신이 ‘나쁜 사람’임을 우리에게 숨기고 ‘좋은 사람’인 척 해왔던 것이다! 이럴수가! 우린 속았어!


나 역시 그가 쓴 여러 문서들을 직접 읽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입장에 되어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는 당연히 일본 사람이므로 한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을 과도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TV 드라마를 보아도 일본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넘쳐나지 않는가? 그의 그런 감상을 자국에서 글로 표현하였을 때에 이제나 저제나 구실만 찾고 있는 일본의 극우 매체들이 약삭빠르게 이용하는 상황은 충분히 상상 가능한 것이다.


물론 내가 미즈노 순페이를 옹호하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미즈노 순페이는 많은 사람들의 상상대로 악질적으로 한국에 숨어들어 많은 사람들을 우롱한 일본 극우파 요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 가능성이 높겠는가? 인간사의 순리로 볼 때 위에서 내가 가정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설득력이 높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를 비난하는데 그렇게 열을 올렸던 것인가?

 

이런 양상은 정치 논쟁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에는 한나라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가 있다. 이 둘은 늘상 서로 싸운다. 한나라당 지지자는 민주당 지지자를 ‘좌익 빨갱이’라고 욕하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한나라당 지지자를 두고 ‘수구 꼴통’이라고 욕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좌익 빨갱이’와 ‘수구 꼴통’이 ‘무엇’을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나 같은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도대체 서로 무엇을 두고 욕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는 지경이 된다. 예를 들어 최근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던 ‘미디어법’문제를 보자. 여하튼 민주당 지지자들 다수의 주장은 한나라당의 대리투표를 문제 삼는다. 그런데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도 대리투표를 했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피차일반이라는 것이다. 대리투표의 위법성 여부는 여전히 깊게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그 회의장의 아비규환을 고려하여 볼 때에 양 당의 의원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대리투표를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리투표’라는 절차적 문제만 가지고 이야기하기에는 힘든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 문제의 정확한 논점은 한나라당이 밀어 붙인 ‘미디어법’이라는 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로 집중될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 법이 방송과 언론을 재벌에게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에 악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민주당 정권 시절에 주도했던 한-미FTA 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한-미FTA 논의 이전부터 방송과 언론에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정책은 민주노동당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논의가 된 바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국내 재벌이 방송과 언론을 소유하는 것은 문제가 되고 외국 자본이 소유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다. ‘그럼 넌 누구 편이냐? 한나라당이냐, 민주당이냐?’ 나는 ‘진보정당을 지지합니다.’ 라고 대답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래서 결국 내가 ‘좋은 사람(민주당)’인지 ‘나쁜 사람(한나라당)’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대답을 끝내 받아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하려면 그냥 방송과 언론을 국내 재벌에게 주는 것이 좋은지, 외국 자본에게 주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둘 다 틀렸는지 어떤지를 서로 논쟁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 바람직한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다. 그들에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어야만 한다. 제 3의 선택지는 없다.

 

바로 이런 풍토에 문제제기 하는 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의의다. 합리적인 토론을 하면서 논리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수사와 악다구니만 가지고 서로 논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불행한 행태가 뉴라이트 역사 논쟁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뉴라이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민족주의 역사관에는 아무런 오류도 없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하는데 그래가지고서 어떤 발전을 이룰 수 있으며 평생 무엇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물론 하필이면 ‘뉴라이트 역사 논쟁’이 이렇듯 불행한 처지가 된 것은 이것이 역사, 학술 논쟁이면서 동시에 정치 논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 책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는 뉴라이트적 역사관과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역사관과 그 전망에 대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지점을 서투르게나마 짚어보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김구인가, 이승만인가? 앞에서는 김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으니 이번에는 이승만을 이야기 해보자. 뉴라이트 역사관에서는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면서 그가 자칫 잘못했으면 소련과 김일성의 음모로 공산화 될 뻔한 남한을 자유민주주의의 품으로 돌려놓았다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이승만이 저지른 모든 오류는 오로지 좌익이 방해한 때문이라고만 이야기 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김구와 이승만 둘 다 한반도의 분단과 그러한 고착상태의 장기화를 불러온 당사자들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한윤형의 말을 빌자면 해방정국에서 움직였던 정치인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음과 같이 배열할 수 있다. ‘김일성-박헌영-여운형-김규식-김구-이승만’이 그것이다. 이 도표에서 김구 왼쪽의 인물들로부터 출발한 경향은 현실에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정치세력으로 거의 남아있지 않다. 김구와 이승만이 둘 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커다란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들을 뺀 나머지’ 중에서 정치적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인데 그 왼쪽에 이들은 도대체 언제, 어디로 사라져 갔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결국 신탁통치 찬성, 반대운동이 펼쳐졌던 광풍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찬탁, 반탁 운동의 갈림길이야 말로 해방 이후 좌익이 패배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스탈린주의자 박헌영은 반탁 운동에 찬성했다가 소련의 지령을 받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로 입장을 바꿨다. 김구와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우익은 박헌영의 입장을 찬탁으로 규정하고 ‘찬탁=매국, 반탁=애국’의 등식을 성립시켰다. 당시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하는 것은 주장하는 사람이 이승만이든 김구든 국내 정세를 고려하면 사실상 남, 북의 분리를 예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새삼스레 좌익의 입장에 대하여 말하자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라고 이야기 하는 것까지는 쉬웠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정치적 행동을 해야 하는 가는 여전히 문제였다.


박헌영은 스탈린주의자답게 소련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정세를 살폈으나 늘 북쪽의 김일성과는 좌익 내부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긴장 관계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익이 좌익을 ‘찬탁주의자 매국노’로 몰자 박헌영은 여론의 몰매를 맞게 되었다. 반면에 김일성은 소련의 영향을 등에 업고 북쪽에서 반탁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잘 진압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박헌영과 김일성의 운명을 갈랐다. 박헌영은 끝까지 한반도 전체 좌익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모든 것은 결국 비극적인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이 정국에서 그나마 파국적인 결과를 맞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거의 유일한 대중 정치인은 여운형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가져온 해방 정국의 돌파구를 살리기 위해 소위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며 동분서주했다.


사실 여운형의 노선은 ‘도박’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였지만 그 시기에는 그러한 도박에라도 희망을 걸지 않으면 남, 북 분단 고착화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 너무도 명약관화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운형의 도박은 최소한 그 시점의 정치 행동으로서는 가장 탁월한 것이었으나 그는 바로 그 때문에 비극적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물론 그 시기에 이승만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구상하고 있었고 김구는 ‘임시정부 정통론’을 주장하며 ‘좌우합작’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이 중대한 사건이 비극적으로 마무리되고 미국이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난 이후에야 이승만과 대립하여 통일 정부를 주장하였던 것이니 참으로 버스 지나간 다음 손 흔드는 격이라 하겠다.

 

신탁통치 찬성/반대 국면에서 볼 수 있는 여운형의 탁월함은 신탁통치 담론을 찬성이냐, 반대냐에 대한 양자택일의 문제로만 사고하지 않고 자기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가장 가능성 있고 합리적인 길을 선택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해당 국면에서 좌익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결국 남, 북이 갈라지는 것이 현실화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좌익은 정국의 주도권을 잃었다.


이때 주도권을 잃어 좌익은 이후 사실상 씨가 마르게 되었고 한국은 오늘날과 같은 기형적인 정당정치 구조를 떠안은 채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의 좌익은 언제나 ‘민주 평화 개혁세력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해 늘 피해를 보았다. 진보진영의 성장 보다는 극우파의 집권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진보정당의 지지자는 늘 민주/평화/개혁 세력을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인 ‘비판적 지지’가 대표적인 예다.


때문에 여운형의 죽음은 한국 좌익의 영원한 트라우마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좌익은 아주 오랫동안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의 좌익은 그것의 부당함을 ‘설명’하는 방법을 택해왔다. 2004년 총선에서 유시민이 ‘사표론’을 얘기 했을 때, 진보정당들은 ‘사표론’이 얼마나 부당한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진보진영의 성장을 가로 막는 걸림돌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느라 진을 다 뺐다.


그러나 한국 좌익에게 오늘날 필요한 것은 세상의 부당함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운형의 한 걸음’이 아닐까? 스스로 좌익을 자칭하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교훈이다.

 

 

* 이 원고는 아주대학교 교지 '아주문화'에 게재되었습니다.


전군

2010.01.01 20:48:15
*.14.81.53

잘 읽었습니다.

백수

2011.10.31 15:29:03
*.38.197.98

명문이네요. 이 글을 왜 아직 안 읽고 있었지.. 역시 큰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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