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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나무 이야기

수필 조회 수 1916 추천 수 0 2010.01.25 01:54:33

백담사 입구에서 여덟시 오십분 차를 타기로 하였다. 표를 파는 아주머니는 저기 뒤쪽에 컨테이너를 잘라 만든 간이 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기다리라고 했다. 단, 그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버스 기사가 사람을 보지 못하니 밖으로 나와서 지나가는 버스를 세우라고 말했다. 문을 나서는 내 등 뒤로 아주머니는 '금강고속이야!' 라고 또 한 번 말을 던진다.

 

나는 길을 건너가 컨테이너 박스 앞에 섰다. 바람이 춥다. 내복을 빨아놓고 온 것이 후회된다. 콧물이 코 속에서 얼어버린 것 같아서 코를 후비려다가 불현듯 그 존재를 떠올린 귀덮개를 가방속에서 꺼낸다. 귀를 덮는다. 한결 낫다.

 

그 순간 버스가 휙 지나간다. '금강 고속'이다. 나는 놀라서 버스 뒤꽁무늬를 쳐다본다. 버스가 쭈뼛쭈뼛한다. 나도 그걸 쫓을까 말까 하면서 쭈뼛쭈뼛한다. 결국 버스가 떠난다. 그게 꼭 내 인생같다.

 

다시 표 파는 가게로 돌아간다. 간판을 보니까 '백담사 입구 버스터미널'이다. 이름은 버스터미널인데 그냥 구멍가게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직 버스 안 지나갔을 텐데..' 하지만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다. 무쇠 난로 앞에 앉는다. 다음 버스 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다.

 

무쇠 난로엔 무엇을 넣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쯤에 웬 할아버지가 한 명 들어온다.

 

"안녕하십니까!"

 

아주머니 말고 주인집 아저씨가 할아버지를 맞는다.

 

"아유, 요새 서울에 계시다면서 오셨네요?"

 

"예, 서울에도 있고, 왔다갔다 합니다. 거 날씨가 풀렸다는데도 왜 이러는지.. 원통가는 거 하나 주십시오."

 

할아버지는 인제군 원통리 가는 버스 표를 받아들고 무쇠난로 옆에 의자를 가져다 앉는다. 뭘 먹고 사는지 가죽이 뼈에 다 붙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했다. 눈빛이 진한 사람들은 보통 괜찮은 사람들일 게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속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고보니 이 할아버지, 어딘가 심슨에 나오는 번즈 사장을 닮았다.

 

"요 앞에 벚나무를 심으면 참 보기가 좋겠어요."

 

무쇠난로를 쬐던 할아버지가 입을 연다. 다짜고짜 이 구멍가게 앞에 나무를 심겠다는 것이다.

 

"벚나무요? 근데 그러잖아도 벚나무를 준다고 합디다."

 

"아니 어디서요?"

 

"마을에서요."

 

"에이, 그런건 못씁니다. 좋은 나무를 써야죠. 말씀만 하세요. 목련이나, 벚나무나.."

 

그런데 갑자기 옆에 서있던 아주머니가 말을 거든다.

 

"이 양반 요새 가래나무를 달여 먹어요."

 

갑자기 난로를 쬐던 할아버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가래나무요?"

 

주인 아저씨의 표정이 좀 수줍다. 나는 가래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난로 쬐던 할아버지가 왜 놀라고 있는지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로 쬐던 할아버지가 입을 연다.

 

"거 가래나무라고 막 먹는거 아닙니다."

 

"아 예, 뿌리를 달여먹으면 몸에 좋다는데요."

 

"에이, 가래나무 열매 빻아서 내가 열목어를 다 잡는데.."

 

"허허, 열목어요?"

 

"가래나무 열매를 이렇게 빻아서 물에 풀면요. 반경 2키로 내의 열목어가 다 죽습니다. 독성이 그 정도인데. 허허."

 

주인 아저씨는 좀 민망한지 왔다 갔다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주인 아저씨가 다시 입을 연다.

 

"그래두 왜, 가래나무 뿌리를 이렇게 달여 먹어서 암을 고쳤다고 하던데요."

 

"아니 누가 그래요? 허허. 그런 얘긴 처음 듣는데."

 

"왜 다 그러던데.. 가래나무 나오는 책에 보면 맨 처음에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난로 쬐던 할아버지가 약간 움찔한다. 이 할아버지는 은근히 나무에 자존심이 있는 할아버지인 것 같은데 그런 가래나무 얘기가 나오는 책은 보지 못하여 당황한 듯 했다.

 

"허허, 내가 열목어를 다 잡는데.. 그래도 그거 많이 먹으면 되겠어요? 조금씩 먹으면 또 모르겠는데."

 

"아, 조금씩 먹지요. 그리고 이건 나만 먹습니다. 다른 사람은 안 줍니다."

 

"거 괘애니 잘못 먹어서 탈나고 그러면.. 뭐가.. 고장나고 그러면 안 좋지 않겠어요?"

 

무엇이 고장 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연륜있는 노인들은 금방 알아 듣는 모양이다. 주인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소리를 높여서 웃는다. 한참을 그러다가 아주머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이 양반, 남의 말만 듣고서 가래나무 뿌리를 달여 먹는다구.."

 

"왜애, 저기- 저기도 그거 먹구선 병이 나았다잖아."

 

'저기'는 또 누군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난로 쬐던 할아버지가 묻는다.

 

"아니 그게 누굽니까?"

 

"거 왜, 정종남이라고 있잖습니까 왜, 그 자식이 그걸 달여먹구 병이 나았다는데.."

 

"허허허허허, 아이구, 정종남이나 정종필이나.. 그 치는 그거 무슨 나무요? 그 퍼렇고 매끈한거."

 

"벌나무요?"

 

"그래요, 그래. 벌나무. 그걸 잘라다가 서울 사람들한테 팔잖습니까? 아, 거 나무떼기가 무슨 효험이 있다고?"

 

"하하하, 그래도 가래나무 뿌리는 제가 먹으니 좋습디다."

 

"그것도 팔려면 나한테 말하세요. 가래나무 그거 저기 산에서 두 가마니는 해올 수 있습니다."

 

그런 대화를 나눌 때 즈음에 아주머니가 무쇠난로 위에 올려두었던 주전자의 물을 종이컵에 따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나름 향긋한 냄새가 풍겨온다. 난로 쬐던 할아버지가 묻는다.

 

"이게 그 가래나무 뿌립니까?"

 

주인집 아저씨가 바로 손을 내젓는다.

 

"에이, 그건 나만 먹는다니까요! 이건 뽕나무 하고.. 뭐 그런거요."

 

난로 쬐던 할아버지가 그 '뽕나무 하고 뭐 그런거 물'을 한 모금 들이킨다. 고개를 갸우뚱 하다 이내 다시 한 모금 들이킨다. 맛이 과히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아주머니가 물을 또 한 잔 따라서 나에게도 준다. 그동안 한 마디 말도 없이 앉아있던 나는 그걸 넙죽 받아서 고맙습니다 하며 마신다. 나무 맛이 난다. 뭐 괜찮은데.

 

"아 이거 열시 오분인데, 이제 나가 보셔야지요."

 

"아이고, 벌써 그렇게 됐나. 허허허. 자,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주인 아저씨와 난로 쬐던 할아버지는 인사를 나눈다. 나도 같은 버스를 타야 하니 일어나서 '백담사 입구 버스터미널'을 나선다. 간이 정거장으로 가려면 신호등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또 바람이 차다. 방금 마신 뽕나무 등등의 물이 뱃속에서 금방 식어버리는 느낌이다.

 

"젊은이는 어디로 가요?"

 

"네, 수원으로 갑니다."

 

"허허, 오늘 좋은 얘길 들었수. 이런 얘기 다른데선 못 듣는 겁니다."

 

나는 그냥 씨익 웃는다. 어디선가 눈발이 날린다. 할아버지가 눈을 껌뻑이며 중얼거린다.

 

"아니, 무슨 이런 맑은 날씨에 눈이 오나? 허허."

 

"저 위에서 날려오는가봐요!"

 

먼저 버스를 기다리던 아주머니가 뒷편의 산을 가리킨다. 강원도는 온통 산 천지다. 과연 군데군데 눈이 녹지 않고 남아있다.

 

"이상하게 저 아래쪽으로 가면 눈이 안오거든요!"

 

아주머니가 계속해서 설명을 한다. 나는 무쇠난로 앞에서 집어넣었던 귀덮개를 다시 가방에서 꺼낸다. 그리고 곧이어 '금강고속'버스가 내 앞에 섰다. 왜 꼭 한 번은 시행착오를 해야 일이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또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두 번, 세 번, 시행착오를 해도 똑같은 잘못을 또 하는데 한 번이 대수랴. 어차피 내 인간관계가 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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