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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사이버민중주의

기타 조회 수 844 추천 수 0 2013.06.06 12:18:06
거의 매일 밤을 새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화요금을 지불하며 나우누리를 이용하던 나는 어느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고속 통신 회선을 설치하여 인터넷에도 접속, 디씨인사이드(http://dcinside.com)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 사이트에는 당시 ‘엽기갤러리’라는 게시판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재미있는 사진을 올려서 자기들끼리 돌려보며 유행어를 만들어 내는 등 다소 매니악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 독자적인 문화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유행어 중 몇몇은 맥락을 모르면 전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인데, 예를 들자면 ‘~의 압박’, ‘방법하다, 쌔우다, 업ㅂ다’, ‘아햏햏, 스타쉬피스’ 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의 압박’이라는 말은 한·일 월드컵 때에 코스타리카 기자가 ‘Press of Costa Rica'를 ’코스타리카의 압박‘으로 번역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 사진에서 유래했다. (일본어 번역은 ’코스타리카의 출판물‘이었음.) ’방법하다, 쌔우다, 업ㅂ다‘는 맞춤법을 잘 모르는 할머니가 붙인 경고문의 사진에서 유래했으며 ’아햏햏, 스타쉬피스‘의 경우에는 각각 우연히 발견된 의성어 표기와 허무한 우스갯소리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말들이 나중에 인터넷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쓰이게 되었으니 참으로 인터넷 문화의 첨단을 달리는 집단이라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나야 늘 그렇게 쓸데없는 것으로 시간 보내는 일을 즐겨 하였기 때문에 그 사이트를 발견하고 나서 아무런 부담 없이 그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어떤 서울대생이 ‘일주일에 2회, 회당 2시간, 한 달에 40만원 이하의 과외는 하지 말자’는 요지의 주장을 모 사이트에 게시하였으니 몰려가서 혼을 내주자는 선동문이 디씨인사이드 게시판에 무차별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또 재미있는 일이 생겼겠구나 싶어서 선동문에 첨부된 사이트 주소를 얼른 눌러서 사건의 현장을 찾아갔다. 이미 현장은 소위 ‘폐인’들이 점거하여 온통 난리가 아니었다. 우리 같은 지방대생은 어쩌란 말이냐며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 사람, ‘아햏햏’ 등의 의미 없는 단어를 붙이는 사람, 진지하게 토론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 뜬금없이 고구마 장사를 할 테니 40원만 달라는 사람까지……. 해당 원문에는 이미 몇 천개의 쪽글이 달려있었고 각기 제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서 업데이트 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음 날이 되자 상황은 더욱 처참해졌다. 이 자칭 폐인들은 과외비 동결론을 주장했던 사람의 모든 신원이 공개하고 홈페이지를 박살냈으며 그 외 여러 측면에서 최근에 ‘사이버 테러’라고 부르는 일을 자행해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같은 반에서 인기 없는 학우를 집단으로 괴롭힐 때에 본인들의 양심은 저 먼 곳에 미뤄놓듯, 모두들 자신들이 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철없는 주장을 한 예비 엘리트를 혼내준 것에 통쾌해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거사’를 자축하기 위해 이 사건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이 일을 ‘병욱대첩’이라 부르며 늘 기념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사건이야 말로 일종의 ‘징후’였다. 이 ‘폐인’들이 공유했던 이 사건의 정당성은 그들이 잠시 양심을 망각한 결과로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서울대생의 과외비 동결론을 보고 느꼈던 분노는 그것이 정당한지 여부를 떠나서 매우 ‘민중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인터넷 시대에 그들은 그 ‘민중적인’ 분노를 매우 ‘민중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사이버 테러’를 저지르는 내내 자신들의 손으로 부조리를 응징하는 ‘자력구제의 쾌감’을 공유했음이 분명하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다양한 곳에서 비롯된 다양한 정보를 매우 빠른 속도로 공유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사람들이 익명성의 가면을 쓰고 신속하게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내가 PC통신을 이용하면서 느꼈던 ‘게임을 하는듯한 감정’을 그 당시 병욱대첩에 참가했던 수많은 폐인들이 함께 느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현실에서 금지된 것을 가상 세계에서 해낸 것이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당시에 이런 식의 집단적인 ‘응징’은 인터넷 세계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H.O.T. 출신의 아이돌 가수 문희준이 Rock 음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도 그랬다. 그 죄로 문희준은 군인이 되기 직전까지 전국적 규모의 테러를 감수해야만 했다. 폐인들의 상당수가 여성주의자는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빠순이들을 속여 얻은 인기를 먹고 사는 아이돌 가수 따위가 Rock음악을 논하다니…….’ 식의 감성으로 불쌍한 문희준을 못살게 굴었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하나로 아이돌 가수에게 침략당하는 Rock 음악의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넷마블’에 개설된 문희준 팬 페이지에 도배를 하다가 넷마블 아이디 영구 사용 정지 처분을 받았다. 

병욱대첩으로부터 5개월 후, 이 사이버 민중주의자들은 그게 바람직한 것이든 아니든 구체적인 정치적 성과를 내놓게 된다. 바로 21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논란거리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당시 ‘폐인’으로 지칭할 수 있는 일군의 인터넷 매니아들은 매우 명백하게 노무현 지지를 표명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의 경쟁자였던 대쪽 판사 출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인터넷에서만큼은 ‘이회충’이라는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정치에 한 올의 관심도 없었던 이들에게 노무현이라는 신선한 아이콘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안티조선 운동 등을 통해 성장해있던 정치토론 사이트 등에서 노무현 지지 논리를 학습하고 이를 무서운 속도로 공유해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누구에 의해 기획된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이끌어진 것도 아니었다. 분노하는 이들의 앞에 이들의 민중적 갈망을 터뜨릴만한 대상이 적절한 시기에 나타났을 뿐이다.

* 이 글은 2009년 출판된 졸저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초고의 일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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