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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1. 이 논쟁 자체의 발단이 생명권과 자기 결정권을 둘러싼 철학적 고민에 기반한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일정한 의미는 있어 보입니다. 우선 당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대중정당으로서 진보신당이 겪고 있고 앞으로 겪어야 할 곤란의 예표라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2. 예를 들어, 노동 문제에 대해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고 당과 전교조 활동에 매우 우호적이고 적극적 교사인데 '사랑의 매'는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사가 자율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이 문제는 당의 강령을 구체화 하고 지켜가야 할 분들이 더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보기에 일단은 접어 둡니다. 


3. 다른 한편으로 낙태 논란은 당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고 당 내에서 활동하면서도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당원들에게는 당의 노선과 본인의 신앙, 가치관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정치, 경제적, 사회적으로는 꽤 진보적인 입장들을 가지고 있지만 생명 윤리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비타협적이고 자폐적이라고 비난 받을 만큼 원칙을 고수하는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4. 특히 낙태 문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매우 잘알려져 있다고 봅니다. 가톨릭 교회는 낙태에 대해 윤리적이고 종교적으로 반대할 뿐만니라 낙태를 금지하는 법 규범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수호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들의 의무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이때문에 미국과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노동당과 민주당을 지지해 오던 입장마저 변화할 정도로 - 심지어 그것이 가톨릭 교회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손해를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 교회의 입장은 완강합니다. 


5. 현재로는 정말 힘든 일인 것 처럼 보입니다만 언젠가 진보신당(혹은 민노당)이 집권이라도 하는 날이 오게 되면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거기에 동의하는 당내 가톨릭 정치인들은 파문(교회로 부터 축출)되거나 성사 참여가 배제되는 교회법적 처벌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6. 그렇다면 교회와 당 사이에 균형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 것일까요?. 


7. 첫째는 우리가 왜 이 당을 지지하는 것인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보 정치 세력을 우리의 대변자로 지지합니다. 도대체 진보가 무엇이냐에 관해 말이 많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진보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급진적으로 실현하는 움직임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진보 정당을 이해하고, 거기에 충심으로 동의할 수 있다면 낙태 문제를 자기 결정권으로 이해하는 당내 세력과의 대화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8.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낙태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 다시 말해 국가 권력의 개입을 통해 여성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규제하게다는 것에는 그 누구라도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별개의 독자적 생명, 또 하나의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생명권을 다른 인간의 결정에 맡긴다는 것이 올바르냐는 항변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낙태 지지자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며 태아도 생명이고, 무엇보다 별개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객관적, 과학적으로 설득할 방법이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9. 또한 신학적으로도 이 문제에 대해 일정한 재해석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죄와 구원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내밀한 양심이 만나는 자리이지, 공권력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인간과 하느님 안에서 올바른 길, 구원의 길을 보여준다고 믿어지지만 그러한 힘은 초대와 설득으로 부터 나오는 것인지 법적 강제로 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무엇이 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분리와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와 화해로의 초대를 위한 것임을 기억할 때, 성난 얼굴로 낙태 여성의 죄책을 거론하는 것이 성급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10. 결론적으로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이유와 교회와 교리 속에 감춰진 복음의 본질을 숙고해 볼 때, 현재와 같은 낙태죄의 유지를 주장할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진보적 가톨릭 신자들은 낙태의 법률적 처벌을 폐지하고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들의 존엄과 치유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것은 교회도 지지하고 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것인데) 여성주의자들과의 화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 이것은  당내 가톨릭 신자들이 낙태 문제에 대한 윤리적, 종교적 판단을 포기하거나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내 제 정치 조직이나 소수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들도 본인들의 양심과 사상에 입각한 의견을 가질 자유와 권리가 있슴은 당연합니다. 다만 우리가 진보 정치의 방향과 진보 정당의 정책에 동의한다면 그 큰 틀 안에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과 어떻게 협력을 모색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이렇게도 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12. 예를 들어 가톨릭 신자로서 저는 여성이 개인적 결단에 따라 낙태라는 선택을 하는 것을 비판하거나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낙태 시술에 대해 의료 보험을 적용해야 한다는(미국 의료 보험 제도 개혁에서 쟁점화 된 부분) 정책이 제기 된다면 거기에는 반대할 것입니다. 전자가 개인의 양심과 선택으로 귀결되는 문제라면 후자는 낙태 행위 자체를 촉진하는 부분이 있고 그것은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허용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13. 대중 정당은 단일한 이해와 이념으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선한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내 정치란 누가 어떤 당직을 차지할 것이며 어떤 사회 경제적 이념을 당의 주류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 이전에 이처럼 다양한 이해와 생각들 안에서 최저 합의점을 찾아내고 당의 단합을 드높이는 일이라 봅니다. 그런면에서 최근 전개된 낙태 관련 논쟁의 파괴적인 모습은 당내 정치의 실종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의 재건과 생존 혹은 부활은 이렇게 망가진 당내 소통 구조의 복원을 전제로 할 것입니다. 





댓글 '3'

이상한 모자

2011.11.21 12:53:56
*.208.114.70

좋은 말씀입니다.

mike

2011.11.21 17:20:26
*.133.196.229

잘 봤습니다

하뉴녕

2011.11.22 09:21:27
*.118.61.194

좋은 말씀입니다. 이 문제는 엠네스티 안에서도 헤묵은 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엠네스티 역시 많은 카톨릭 신자들을 활동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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