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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수능에 출제해도 될 홍세화 대표의 글

조회 수 2344 추천 수 0 2012.10.08 12:58:44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사랑하는 진보신당 당원 동지 여러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파리의 한 아파트 책상이 놓인 작은 방입니다. 지금처럼 심각하고 복잡한, 그리고 대선이라는 중요한 정치일정을 앞둔 시기에 망설임이 없지 않았지만 제가 처한 상황이 어지간히 다급했던지라 우선 서둘러 이곳으로 떠나왔고 이제야 자리에 앉아 이렇게 여러분께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먼 기억처럼 이야기하리라 생각해 왔지만, 제가 이곳에 머무는 까닭은 이미 제가 당 대표가 되기 전부터 직장암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던 아내가 재발의 위험을 느끼며 심리적 육신적 고통을 호소해 온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석 명절이 지난 바로 다음날 서둘러 가방을 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굳이 이래야 하느냐고, 다른 이가 묻기 전 제가 스스로에게 왜 묻지 않았겠습니까? 설령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제게는 떠올릴 때마다 아픈 기억이 있지요. 수십 년도 전인 어느 날 갑자기 밤 보따리를 꾸려 어린 아이들을 앞세우고 파리에서 독일로 도망치려던 기억 말이지요. 비록 그 기도가 실패로 끝나고 불길한 예감을 누르며 파리로 되돌아오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개인적 사정에 대한 구구한 설명은 더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표단과 당직자들과 미처 상의도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황급히 떠나온 것에 대해, 그리하여 오늘 당 대회를 맞이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들께 대표로서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늦게나마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얼마나 송구스러운지……. 돌이켜보면 지난 일 년 동안 대표로서 제가 보여드린 모습이 이런 두서없음의 연속이 아닌가 싶어 낯이 뜨거워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꿋꿋하게 당을 지켜온 여러분의 용기에 기대어 말씀드립니다. 우리 스스로를 대견해 하며 오늘 우리의 당 대회를 자축하자고.
 
당원 동지 여러분.
 
이곳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간 지 올해로 십 년, 이 십 년의 마지막 일 년이 예기치 않게 진보신당의 대표로 지내왔던 시간입니다. 어쩌면 생소했던 이 경험들을 복잡한 정치현장을 떠나 다시 이곳에서 틈틈이 꺼내어 반추하고 있습니다. 4년 2개월 만에 다시 온 파리. 변덕이 심하던 10월의 날씨답지 않게 며칠째 푸르른 가을 하늘 아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걸을 때면 줄곧 그랬습니다. 아주 익숙했지만 이제는 제법 낯설어진 카페와 거리 풍경들, 우파 사르코지 정권에서 올란드의 사회당 정권으로 바뀐 딱 그만큼의 변화라도 찾을 수 있을지 무망하게 두리번거리는 제 모습은 여지없이 이방인의 그것일 테지요. 유럽의 경제위기의 여파는 이곳에도 그늘을 드리워 퇴근길의 ⓑ거리는 이전과 달리 정체되지 않습니다. 리터당 2,300원이 넘는 비싼 휘발유 값 탓에 차 대신 대중교통들을 이용하는 때문이지요. 눈 여겨 보면 파리 거리에 문을 닫은 가게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지요. 말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속을 옷깃을 세우고 걸으며 묻습니다. 내가 스쳐가는 풍경의 이면에 인간의 고통은 어디에 틀어박혀 있는가? 공포는 어디로 지나가는가? 눈물은 어디에서 흐르고 있는가? 비명은? 외침은? 절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과연 진보정치에 닥친 위기가 아니었다면 어찌 현실정치에 둔감한 저 같은 사람이 당 대표가 되는 일이 생겨났겠습니까? 어쩌면 노동과 삶의 현장에서 서늘하게 배제되어가는 인간의 고통이 켜켜이 쌓여가는 존재의 위기가 있고, 이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과 함께 진보정치가 뿌리째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해야겠지요. 그러기에 우리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지켰던 것이고, 넉넉지 않은 주머닛돈을 꺼내어 피켓과 홍보물을 만들어 지난 4월 ⓒ거리에 서게 하였던 것이겠지요. 마음 밑바닥에 전해져오는 근원적인 위기의식, 그럴수록 진보정치의 터전이 뿌리로부터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어떤 절박함 말이지요.
 
이 위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록 아직은 충분히 사람들을 일깨우지 못하지만 인간 존재의 조건을 뒤흔들 위기는 머지않아 사람들을 덮칠 것입니다. 휘청거리며 붕괴되어가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삼키며 내일 또 다른 모습의 괴물로 진화하려 할 것입니다. 이 닥쳐올 위기 앞에서 우리는, 좌파는, 이른바 진보정치는 무엇을 하느냐가 이전보다 더 절박한 물음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할 때 좌파와 진보정치 또한 역사의 잔해로 남겨지거나 존재 소멸될 터이고요.
 
기억하시나요? 지난 해 10월 26일 제가 대표단 선거에 나서며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라는 글에서 이 위기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진보정치의 위기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누구와 함께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데서 온 것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을. 지난 일 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놀라움을 가지고 목격해 왔고 또 해오고 있는 것은 스스로 진보라 명명하는 우리의 안과 밖에 공리주의자들과 실리주의자들이 넘쳐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인’이 부재할 때 ‘결과’들이 번성한다고 했던가요? 진보좌파의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위기의 결과 앞에서 초조한 이합집산만이 눈에 띄는 것이, 병의 원인은 말해주지 않는 처방전만이 난무하는 현실이 여전히 오늘 진보좌파의 초상이라면 지나친 자기비하가 될까요?
 
사회연대를 위한 대선공동대응. 배제된 노동의 연대투쟁이 지닌 역동성에 다가가고 이 역동성이 진보정치의 새로운 주체화의 동력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물으며 찾아낸 우리의 대답이었습니다. 대선투쟁 공동기구 구성을 이루어내려는 우리의 노력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선거용 정치협상의 조급함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사회연대와 새로운 진보좌파정당 건설은 떨어질 수 있는 과제가 아닙니다. 연대투쟁의 현장과 정당운동의 현실이 연계되는 지점이 아직은 명확한 실체로 다가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진심과 인내를 내던져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좌파는 이념의 동질성 이전에 인간의 고통에 존립하고 투쟁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빚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길을 만들었으니 너희가 오라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길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고민과 지혜를 마지막으로 쏟아 부어 신뢰와 합의의 기반을 만들어내야 할 때입니다.
 
한국에서의 십 년. 그 끝자락에 있는, 여러분이 당의 대표라 불러주었던 일 년이 제 인생에서 너무 행복했고 앞으로도 자랑스럽게 기억할 것이라고, 다시 돌아온 파리에서 조용히 되뇌입니다. “만신창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 척박한 땅에 참된 진보정당의 뿌리를 내리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젊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얻은, 그것 아니었다면 쎄느 강변에서 소멸했을 허명에 값하는 의미로서 이미 충분”하다던, 여러분에게 드린 저의 약속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서 저의 개인적 번민까지도 여러분에게 털어놓고 다시 머리를 맞대고 제가 할 일을 찾겠습니다. 다가오는 12월의 추운 겨울 ⓓ거리에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 남은 여정을 여러분과, 사회적 연대투쟁에서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낮고 궂은 일이 되길 바라면서……. 오랜 유배의 시간을 거쳐 다시 ‘동지’라 부르게 된 여러분 모두에게 연대의 인사를 드리며.
  
파리에서,
홍세화 드림. 


1. 다음 중 글쓴이가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거리'의 의미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고르시오.


① 사명감

② 진보정치

③ 입신양명

④ 투쟁

⑤ 선거


2. 다음 중 밑줄 친 ㈀과 ㈁에 드러난 글쓴이의 속마음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을 고르시오.


① 모든 것을 때려 치우고 도망가야겠지.

②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겠지.

③ 내가 한국 사회 진보정치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되겠군.

④ 그래도 대통령 선거는 열심히 해야겠군.

⑤ 내가 출마만 하면 한국 사회가 막 요동치겠지.


댓글 '2'

kidogom

2012.10.08 20:13:38
*.221.119.234

1 - 2

2 - 4


orfeu

2012.10.09 15:10:25
*.96.163.198

문종 : 편지글 (서신)

문체 : 우유체, 대화체, 만연체

성격 : 설득적, 사색적, 신변잡기적, 코스모폴리탄적
제재 : 아내의 투병과 대통령 선거

주제 : 파리에 오니 씰비 생각이 나네진보정치와 당의 미래에 닥친 어려움을 고민과 연대로 헤쳐나가고자 하는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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