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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게임이 현실을 지배하는 날이 올까?

조회 수 1064 추천 수 0 2013.08.05 17:04:19
게임의 전국시대가 됐다. 각 시대마다 장르마다 게임의 질을 평가하는 여러 기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에는 정말로 다양한 게임에 대한 다양한 기준이 난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좋은 그래픽과 효과음을 따지던 시기도 있었고, 또 한 때는 주인공 캐릭터가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따지던 시기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종족(?)이 등장하는 지를 따져야 했던 때도 있었고, 또 얼마나 영화에 버금가는 효과를 보여주는 지에 관심이 집중된 때도 있었다.

최근에는 다양한 디바이스를 기반으로 정말 다양한 게임들이 마구 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준들이 매우 다양해졌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게임의 근본에 대해 다시 고찰해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게임의 최소 기준은 ‘규칙’

게임이란 무엇일까? 그러니까 최소한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기준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를테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비주얼 노블(Visual Novel)’같은 것은 게임인가? 여기에 대답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게임의 형태가 다양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해져도 변치 않는 기준은 있다. 어떤 ‘놀이’가 ‘게임’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칙’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인류가 발명해낸 지 대단히 오래된 게임 중 하나인 바둑이나 체스를 떠올려 보자. 여기에는 ‘판’이 있고, ‘돌’ 또는 ‘말’이 있으며, 판에서 돌을 놓거나 말을 움직이는 ‘규칙’이 있다. 이것으로 게임의 개념의 최소 기준이 충족된다.


▲ 수퍼 마리오 브라더스. 닌텐도가 1985년에 제작했다.

이러한 개념은 비디오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를테면 가장 유명한 비디오 게임의 하나인 ‘수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떠올려 보자. 바둑에 비하자면 훨씬 복잡하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마리오는 점프를 할 수 있고 적을 밟아야 이길 수 있다. 위에서 밟는 것이 아닌 적과의 모든 접촉으로 마리오는 패배한다. 이것이 규칙이다. 규칙이 아닌 방식은 이 게임의 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를테면 마리오가 쿠파에게 로우킥을 먹인 후 들어 메쳐 쓰러뜨리고 암바를 걸어 항복을 받는 일 따위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버섯 병사들을 동원해 쿠파성에 수공을 걸어 용암을 식혀 굳게 하고 쿠파를 포위해 생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쿠파의 머리를 밟아야만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비디오 게임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수퍼 마리오의 ‘점프’는 주인공이 칼을 휘두르거나 총을 쏴서 적을 맞히는 형식으로도 발전했다. 전쟁을 재현하는 실시간전략시뮬레이션에서는 각각의 병사 등을 조작해 현실을 재현할 수 있지만 1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거나 지도 밖의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할 수는 없다는 제한이 작용하게 되고 이것 역시 규칙의 일부로 작용하게 된다. 1인칭 슈팅 게임에서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총을 쏴서 상대를 맞추는 것으로 승리할 수 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등의 대응은 할 수 없다는 점도 규칙이다.

‘규칙’의 발전과 현실 모사

규칙이 이렇게 발전하면서 비디오 게임이 현실을 얼마나 더 잘 모사할 수 있는가가 핵심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게 됐다. 어느 새 사람들은 소위 게임의 ‘자유도’를 따지며 얼마나 더 현실과 가까운 체험을 할 수 있는 지를 궁금해 하게 된 것이다.

즉, 뒤집어서 말한다면 현실을 가장 잘 모사할 수 있는 비디오 게임은 규칙이 가장 복잡한 게임일 것이다.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규칙’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을 하는 형태에서 시작된 게임은 어느 새 현실에 대한 가상적인 체험을 대리할 수 있는 도구로 발전하게 됐다. 이로써 ‘경쟁하는 도구로서의 게임’과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도구로서의 게임’이 한 점으로 수렴하게 된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규칙을 갖고 있는 바둑에서도 게임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발견해낼 수 있다. 바둑은 규칙을 이용해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룰 수 있다는 점에서 경쟁하는 도구로서의 게임으로 평할 수 있다. 하지만 바둑과 관련한 도서의 제목을 보면 이것 역시 특정한 현실을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백의 심장에 비수를 꽃아라’와 같은 제목의 바둑 해설서의 존재나 ‘바둑에는 인생이 있다’고 말하는 바둑 마니아의 독백을 떠올려 보자. 이것은 바둑을 두는 행위가 어쨌든 현실의 ‘전쟁’을 모사하게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사례이다.


▲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에서 전쟁이 장기로 표현되는 장면. (화면 캡쳐)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는 게임과 현실의 관계가 역으로 표현된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전쟁을 다룬 이 영화에서 김유신과 계백의 대결은 평야를 달려가는 기병들의 스펙터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병사를 말로 사용하는 장기를 두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방법은 오히려 전쟁의 참혹함과 게임적 본질을 동시에 표현하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인식론적 함의

이제 라캉주의자들이 매양 갖다 붙이는 ‘상상, 상징, 실재’의 삼위일체적 인식론을 꺼내보면 게임의 규칙과 현실 모사에 대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라캉의 인식론에서 우리는 언어 ‘규칙’에 의해 구성된 상징에 구속되어 있으며 실재는 언어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상황과 마주칠 때에 돌출된다. 이러한 실재의 출현은 주체에게는 텅 빈 공간으로 인식되며 주체는 이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상상을 동원해 이 빈 공간을 메꾸게 된다. 이건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소위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일본의 음란게임)에 비해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동급생2의 한 장면. 마우스로 화면을 클릭해야 한다.

이를테면 등장하는 여성들과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음란게임인 ‘동급생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게임이 제시하는 수많은 난관을 뚫고 드디어 등장인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고비를 넘기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건 성행위를 묘사하는 소위 ‘H씬’이라는 것인데, 동급생 시리즈에서는 마우스 커서로 여성을 묘사한 그림 각 부분을 클릭하는 것으로 여러 종류의 성적 행위들을 재현할 수 있다. 이 단계를 잘 넘겨야 좀 더 노골적인 성행위에 대한 묘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장면이 성행위를 묘사하고 있기는 하나, 플레이어가 이러한 행위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적 판타지는 그 대상이 오로지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늘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즉,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상상적 쾌락이며 그것이 상상적 쾌락에 불과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성적 판타지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실재의 출현을 증명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여고 기숙사를 도촬해 협박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주제로 한 질 나쁜 일본산 음란게임인 ‘슈사쿠’는 그 충격적인 소재와는 별개로 게임 내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플레이어는 슈사쿠를 조작해 게임을 풀어가야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주인공은 슈사쿠가 아닌 플레이어 자신으로 변경된다. 즉, 플레이어는 게임 속 캐릭터가 자신을 ‘주인공인 슈사쿠’가 아닌 ‘슈사쿠를 조작하는 플레이어로서의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슈사쿠에 대해 역으로 작용하는 ‘상상적 동일시’가 ‘상징적 동일시’로 전화하는 순간이다.

 
▲ 슈사쿠의 등장인물인 '에리'가 모니터 밖의 주인공을 향해 손을 내미는 장면. 물론 물리적 한계 때문에 팔이 모니터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음란게임을 즐기다 말고 이 장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모니터에 손을 뻗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터랙티브화 되는 미디어 산업

다시 말하면 결국 게임에서 요구되는 ‘규칙에 맞는 조작’이라는 조건은 상징에 구속되는 현실에서도 제한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마리오가 쿠파를 오로지 발로 밟아서만 죽일 수 있다는 규칙을 적용받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마법을 사용해 괴롭히거나 순간이동을 통해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없는 조건의 제약을 받게 된다. 이렇다는 사실 자체가 미디어 산업에 대한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영화계에서는 한동안 영화의 개봉에 맞춰 캐릭터 상품의 발표, 인터넷을 통한 이벤트 진행, 게임 발매 등의 프로젝트를 하나로 묶는 방식이 유행을 했다. 이를테면 ‘다크나이트’라는 배트맨 관련 영화를 개봉하면서 ‘고담나이트’라는 배트맨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공개하고, 새로운 피규어 등을 발매하며, 다크나이트의 영화를 내용을 한 게임을 함께 발매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소비자들은 배트맨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미디어 컨텐츠에 동시에 개입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인터랙티브한 방식으로 미디어 컨텐츠를 즐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됐다.


▲ 카카오톡을 이용한 소셜게임인 애니팡. (애니팡 개발사 선데이토즈 홈페이지)

즉, 사람들은 영화를 본 후에 영화의 스토리와 관련된 주변 정보를 능동적으로 찾아봄으로써 애니메이션의 존재를 접할 수 있고, 피규어를 구입하는 것으로 영화에서 제시된 컨텐츠를 실제 생활에서도 재현할 수 있으며, 게임을 통해 영화의 스토리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스마트폰과 메신저를 이용한 게임이 범람하는 상황에서도 이제 이런 함의를 읽어낼 수 있게 됐다. 메신저는 소통을 위한 수단이므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전제를 안고 있는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을 통해 게임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적 영역에 있어야 할 게임의 규칙이 상징적 영역으로 침범하는 하나의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은 게임이 메신저를 통해 자신을 호출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직장 상사의 게임 점수를 상회하는 결과를 내는 것으로 만족감을 얻는다. 세상은 게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댓글 '1'

unknown

2013.08.06 09:14:41
*.93.79.50

스승님이 읽으시면 좋을 (혹 이미 읽으셨을) 책이 생각나네요.

자음과 모음에서 나온 이상우씨의 「게임, 게이머, 플레이」입니다.

아직 접하시지 못했다면,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후에 리뷰나 감상도 같이 나누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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