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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고전 게임을 논해보기로 한다. 학교에서의 전공은 심리학이었지만 인생에서의 전공은 컴퓨터 게임이다. 80년대, 286-XT 시절 고도리 1.0과 테트리스로 시작된 게임 인생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와 플레이스테이션3 때문에 소니가 망하네 마네 하는 오늘날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최첨단의 시대에 새삼스럽게 고전 게임을 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오늘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해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상은 돌고 돈다는 것이다. 과거에 데스크탑용 게임을 만드는 데 이용됐던 노하우가 오늘날에는 소형 디바이스용 게임을 제작하는 데 재활용된다. 이런 의미는 게임에서의 그래픽 기술 변천사를 돌아보면 보다 확연해진다.

초창기 컴퓨터 게임의 그래픽 수준은 처참한 것이었다. 오늘날 ‘로그류’ 또는 ‘로그라이크’라고 불리는 롤플레잉 게임의 당시 모습을 꺼내보면 충격적인 수준의 그래픽을 활용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때에는 전문 용어로 ASCII 코드, 흔한 말로는 그냥 글자와 숫자, 기호들로 그래픽 작업을 대신했다. 때문에 각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해둔 ‘색인’이 필요할 정도였다. 이 시대의 게이머들은 이러한 글자들의 나열에서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던전의 내부와 치명적인 위력의 불꽃을 내뿜는 포악한 용의 사멸을 상상했다.


▲ 통칭 로그류(Rogue like) 게임의 화면

컴퓨터의 하드웨어적 성능이 향상되고 보다 다양한 그래픽 표현의 시도가 가능해지면서 ‘도트(dot)’라고 불리는 그래픽 표현 방식이 등장했다. 이 기술은 모니터의 화면이 사실 수많은 작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됐다.


▲ 고전 게임 그래픽을 확대하면 커다란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보통 현대의 모니터에서는 가로 세로 1인치의 넓이에 72개의 점이 들어간다. 그래서 웹(web)용 그림 파일의 해상도를 72dpi(dots per inch) 등의 단위로 표현하기도 한다. 보통 웹용 그림 파일을 그대로 출력했을 경우 출력물의 느낌이 흐릿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는 모니터라는 필터를 거쳐서 보는 것과 출력된 인쇄물을 보는 것의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출력용으로 작업하려면 해상도를 높여야 한다. 인간의 눈을 만족시킬 수 있는 출력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300dpi 정도의 해상도로 작업을 해야 한다. 가로 세로 1인치 넓이에 점이 300개가 들어가야 하는 것인데 모니터의 경우 점의 크기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작업물의 크기가 커진 상태로 작업을 해야 한다. 이게 그래픽 작업을 하는 컴퓨터에 고사양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야기가 잠깐 샜지만, 어쨌든 이런 원리로 하드웨어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도트그래픽의 수준도 점점 상향평준화 됐다. 칼라 모니터가 등장하게 된 이후 처음에는 4가지 색의 점으로 그래픽을 표현하던 것이 16개, 256개, 65536개의 순으로 발전하게 됐다. 하지만 몇 가지 색으로 표현하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성과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 위의 그림은 '동급생2'로 16가지 색상의 도트들을 수동으로 찍어서 만든 그림이 삽입된 어드벤처 게임이다.

하지만 도트를 열심히 찍어서 그래픽을 만드는 것이 게임 그래픽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시대가 왔다. 도트 그래픽은 근본적으로 2D다. 시점변환 등 다양한 동적 묘사가 필요한 게임 분야에서 이러한 방식의 그래픽 묘사는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3D 그래픽의 근본을 이루는 ‘폴리곤’은 그렇게 등장했다.


▲ 최초의 폴리곤 사용 어드벤처 게임이었던 '어둠속에 나홀로(Alone in the dark)'

폴리곤은 쉽게 말하면 3D로 구성된 물체를 표현하기 위한 기본 단위다. 초기의 3D그래픽은 커다란 폴리곤 몇 개로 대상을 표현했지만 하드웨어가 고급화되고 관련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기본 뼈대를 섬세하게 입체화된 폴리곤으로 구성하고 그 위에 2D 텍스쳐를 입히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고급화된 기술이 적용된 게임의 경우 폴리곤이 무려 한 화면에 5만개가 등장하기도 하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3D 그래픽 기술이 일반화되면서 과거의 도트 애니메이션 등의 기술이 과거와 같은 위상을 갖지 못하게 됐다. 고성능의 데스크탑과 게임 전용 하드웨어를 갖춘 비디오 게임기가 게임의 주요한 플랫폼으로 자리잡으면서 2D 기반의 그래픽 기술들은 3D의 들러리와 같은 위상에 처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3D 그래픽을 기반으로 한 게임의 경우 과거보다 훨씬 많은 제작비용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컴퓨터 게임 제작의 핵심은 ‘얼마나 참신한 게임적 아이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인가?’가 아닌, ‘얼마나 화려한 화면과 특수효과를 보여줄 것인가?’로 변하게 됐다. 게임개발은 대기업의 몫이 됐고 중소게임개발사들은 이제 한계에 봉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방 다른 돌파구가 마련됐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소형화된 기기들의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형 기기들은 데스크탑과 비교할 때 하드웨어적 한계에 더 많이 부딪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형 기기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가벼운 게임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 하드웨어적 한계 때문에 3D의 화려한 화면으로 구성된 게임을 소형 기기용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과거의 방식, 즉 2D 도트애니메이션의 부활이다.

이런 상황이 되자 정부에서도 게임 산업의 부흥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야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게임물의 심의 문제였다. 모든 게임은 게임물등급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가장 많이 팔리는 소형디바이스 중 하나인 아이폰을 개발한 애플 측은 이러한 절차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애플의 앱스토어에 게임물이 등록될 수 있느냐 마느냐는 기술적으로 오로지 애플사가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따라서 이 법령이 개정될 때까지 한국에는 아이폰용 게임을 내려 받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했는데, 이 때문에 아이폰이 출시되고 상당 기간 한국의 아이폰 이용자들은 아이폰을 이용한 게임을 하지 못하는 신세에 처하게 됐다.

그동안 어려움을 겪던 중소 게임회사들은 소위 ‘게임법 개정’에 사활을 걸었다. 게임물등급심의위원회가 아닌 다른 주체에게 게임물의 등급 심의를 위임할 수 있다면 앱스토어를 이용해 상품을 공급하는 게 가능해진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도했던 이 논의에 여성가족부가 주장하는 청소년 보호 등을 골자로 하는 셧다운제 등이 끼어들어 논의가 엉망진창이 됐지만 결국 우여곡절 끝에 2011년 7월 소위 게임법 개정안이 의결됐고 이제 우리는 앱스토어에서 자연스럽게 게임을 다운 받아 실행할 수 있게 됐다.


▲ 인기 스마트폰용 게임들

스마트폰의 게임들이 화려한 그래픽 효과보다는 아이디어를 중심에 둔 아기자기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하드웨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에 서술한 이런 사실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은 돌고 돌아 다시 고전게임의 시대가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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