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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경세가(經世家)라는 단어가 낯설다. 경세가란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을 통칭할 만한 단어라는 설명이다. 이는 학자가 될 수도 있고 관료가 될 수도 있으며 정치인일 수도 있고 활동가일 수도 있다. 그 시대에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하여 필요한 역할들은 다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수행한 수많은 사람 중에도 유독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대동법' 시행의 기틀을 닦았던 위인들이 그랬던 모양이다.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개혁 정책인 '대동법'을 시행하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기틀을 닦았던 네 명의 경세가들을 다룬 책이다. 율곡 이이, 오리 이원익, 포저 조익, 잠곡 김육 등 네 사람의 일대기를 통해 조선시대의 커다란 변화를 추동했던 계기를 만들어낸 경세가들이 어떤 자세를 갖고 현실에 임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이 책에서 이이는 올바른 정치에 대한 의지를 갖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릴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고민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당시 훈구파를 몰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던 사림들은 정권을 장악하면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을 별로 갖고 있지 않았다. 군자들이 정치를 하면 뭐든지 잘 되겠거니 하는 정도의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이는 기득권의 교체 이후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록한 '만언봉사'를 왕에게 올렸으나 결국 당쟁에 휘말려 그의 정치력은 무력화 되고 만다.

이원익은 모범적인 관료의 표본이다. 그는 명확한 관료적 철학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실무 능력을 보여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등을 거치며 중책을 맡아 활약했다. 그의 관료로서의 능력은 자연스럽게 명망으로 이어졌고 이 명망 덕분에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광해군과 인조가 모두 이원익을 첫 번째 재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조익은 뛰어난 이론적 역량을 통해 대동법 시행에 가해지던 정치적 공격들을 무력화시킨 학자이다. 국정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할 때에는 늘 그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반론과 저항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이를 뛰어넘는 계기는 물론 '힘'을 쓰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설득'을 통해 명분을 취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조익은 이념적 당위가 아닌 이론과 논리를 통해 대동법 시행의 현실적 명분을 세웠다.

김육은 대동법이 실제로 시행될 수 있도록 한 정치가이다. 그는 김집과 라이벌의 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김집이 자기 세력을 모으는 것으로 조정 내의 '올바른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것'에 고민의 핵심을 둔 반면 김육은 다양한 사람들을 활용하여 '해야 할 일을 실제로 되도록 하는 것'에 집중했다. 김육의 명확한 문제의식과 뛰어난 정치적 수완 덕에 대동법은 실제로 정책으로서 시행될 수 있었다.

이렇게 실천적 지식인, 모범적 관료, 비판적 학자, 그리고 '안민(安民)'의 목표를 잃지 않은 뛰어난 정치가의 세대를 초월하는 노력을 통해 대동법이 시행될 수 있었고, 이 대동법의 시행 덕에 등장한 공인(貢人)들이 조선시대 경제 체제의 변화와 신분질서의 붕괴에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들과 같은 경세가들에게는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발견되는 어떤 공통된 인간성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직관을 가지게 된다.

다양한 역사를 돌아보면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앞서 열거한 네 명과 유사하다고 평가할만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의 사례를 돌아보자. 레닌의 시대는 혁명가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을 뒤엎고 혁명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대였다. 이들은 언제나 '지배계급을 일소하자'고 주장했으나 그것을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갖고 있지 않았다.

레닌은 국면마다 새로운 틀의 고민을 제출하는 것으로 이러한 수많은 그저 그런 혁명가들과 구별되는 변별력을 확보했다. 기회주의와 경제주의에 빠진 혁명 서클의 시대에 레닌은 '당'이라는 정치 결사체의 틀을 제시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다. 혁명가들이 고수하던 마르크스주의가 왜곡되고 속류화 되는 경향이 나타나자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을 써 이론적 반박을 시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국가의 구체적인 상을 그린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이이가 만언봉사를 작성하고 조익이 대동법에 대한 반론을 논파하는 상소를 올린 것에 비견할 만한 것이다.

국내의 예로 치면 1980년대 초의 유명한 경제기획원 출신 경제관료, 김재익 전 청와대 수석도 조선시대 경세가들과 비슷한 특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경제로 요약되는 고도성장 시기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신념을 갖고 한국 경제에 '안정·자율·개방'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군인 출신으로 경제 정책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가정교사'로 불리며 종래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다양한 개혁 정책을 시도하려고 노력했던 김재익 수석은 1983년 '아웅산 테러'로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그가 당시 제기했던 문제의식들은 후대에도 지속돼 일부는 주요한 정책으로 받아들여져 다시 생명을 이어가게 됐다. 정치학을 공부하다 대안적인 경제 정책의 필요가 우선이라 생각해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후 경제기획원을 거쳐 청와대 경제수석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전력투구 한 그의 일대기는 이이, 이원익, 조익의 것을 한데 합친 것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현대의 예에서도 이러한 인물들은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같은 이들이 그렇다. 그는 재무부에 근무하던 시절부터 '해결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만큼 관료로서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뜻이다. 그의 이러한 실무적 능력은 자연스럽게 명망을 형성해 이명박 정부에서 금융위원장으로 활약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금융위원장은 '금융계의 대통령'으로도 불리는 요직이다. 그가 재무부 시절 취했던 입장 때문에 일각에서는 "관치금융의 화신이 돌아왔다"는 우려가 전해지기도 했으나 그는 "관(官)은 치(治)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을 던지며 이러한 우려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이후 김석동은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저축은행 개혁에 손을 대 최악의 사태를 막으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이러한 예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원익이 실무적 능력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잃지 않을만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대동법 시행의 기초를 마련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언론을 통해 사의를 표명한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도 이런 사례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70년대 부가가치세 도입의 실무 작업을 진행하고 재무부 3대 요직이라 불리는 이재국장, 국제금융국장, 세제실장을 전부 역임한 유일한 경제 관료이다. 그는 재정경제부 차관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로 직을 잃고 10년간 '야인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시기에 '외환위기를 초래한 무능한 관료'로 찍혀 친구조차 만나지 못하는 외로운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신문에 칼럼을 쓰며 연명했는데, 이러한 고생을 바탕으로 2005년에는 593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인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강만수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을 집필해내기도 했다. 이때를 회고하며 그는 "그래도 내가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정권의 손을 잡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 덕분에 그는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컴백할 수 있었다. 이는 계축옥사 이후 은거하다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된 조익의 사례와 함께 생각할만한 부분이다.

이쯤에서 고개를 갸우뚱 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김재익 수석을 제외하면 별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선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에 빗댄 것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수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독재자 레닌과 저축은행 사태로 수많은 서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김석동, 고환율 정책과 부자감세로 서민들의 생활고를 가중시킨 강만수를 어떻게 조선시대에 민생을 챙기기 위해 동분서주한 위인들에 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이러한 부당한(?)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관료들과 학자, 정치가들이 있었다. 이들의 상당수가 위에 언급한 4인처럼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이이, 이원익, 조익, 김육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그들은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조선시대에 존재했을 수많은 벼슬아치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물의 양을 더 많게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국정을 돌보는 것보다 풍류를 즐기는 데에 더 많은 소질을 가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저 책을 보며 지식을 쌓는 것에만 몰두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속한 정파의 확장과 권력 쟁취를 위한 방법을 찾는데 혈안이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행위들은 그 자체로 어떤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 어떤 명분과 이유가 없다면 '사사로운 것'이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책에서 논하는 4인은 최소한 '사사롭지 않은 것'을 인생의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던 특성을 갖고 있다. 이들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공적인 어떤 것을 이루려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즉, 경세가가 말하는 '안민(安民)'과 '민생(民生)'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어떤 '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제1의 전제이다.

오늘날 냉소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정반대로 성립된다. 정치적인 것들에 대해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은 관심 밖의 일이다. 이제 오늘날에는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가 누구에게 유리한 일을 했으며, 누가 얼마나 부당한 방법을 통해 배를 불렸을까를 논하는 게 정치적 대화의 전부가 됐다. 자기와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상대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악마적인 존재인지를 논증하는 게 '안민(安民)'과 '민생(民生)'을 논하기 위한 제1의 전제이다.

이런 조건의 현대 사회에서는 대동법 시행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던 정치가인 김육이 탄생할 수가 없다. 김육의 정치적 역량이라는 것은 상대와 대립하더라도 그를 인정해주며, 이를 통해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명분을 얻고, 이 명분을 바탕으로 왕을 설득하고, 왕이 결단을 내림으로써 정책이 시행하게 만드는 것인데, 오늘날의 조건에서는 이미 악마화 된 상대를 인정하는 것도 어렵고, 그런 상대를 굳이 인정 해주더라도 명분이 얻어지지 않는다. 대동법의 시행은 김육의 정치적 수완 때문에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인데 현대 사회에서는 김육의 수완을 따라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뒤집힌 관점을 다시 한 번 뒤집어서 좀 더 섬세하게 다루어 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레닌, 김재익, 강만수, 김석동에게 '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이 존재했다는 것', 이것을 1차로 전제하지 않으면 오늘날의 안민(安民)과 민생(民生)을 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택한 길들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따질 수 있는 기초는 이러한 전제가 성립된 뒤에야 마련된다.

위에 언급된 사람들은 분명 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인정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레닌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장점을 버리고 일부러 죽을 수도 있는 힘든 혁명가의 길을 선택했으며, 김재익은 현실을 모르는 시카고 보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안정화 시책을 관철시키려 했다. 김석동은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고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는 공직생활에 몸을 실었고 강만수는 잠을 잘 시간도 없이 외환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다만 불행하게도, 그들이 그런 태도를 갖고 선택한 것들이 서민들의 삶을 힘들고 팍팍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을 따름이다. 즉, 그들은 경세가이기는 했으나 대동법을 만들지 못했거나 대동법 시행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을 갖고 그들의 실패한 선택지를 면밀히 분석해서 이번에는 다른 선택지를 고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 자체가 정치이며 이렇게 할 때만이 우리의 정치가 다시 영향력을 갖고 살아 움직이며 역사의 발전을 추동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에서 이러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 덕분에 우리의 정치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329174019

댓글 '2'

이상한모자

2013.04.01 02:06:55
*.192.210.237

약간 도발적으로 써보려 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상한 글이 됐다.

폐인

2013.04.02 01:48:31
*.116.201.194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번엔 언급된 사람들의 정책에 대한 평가도 해주시면 좋겠네요. 특히 강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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