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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눈물겨운 노력

조회 수 3992 추천 수 0 2013.01.13 22:27:43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4월 개봉 소문이 SNS를 타고 퍼져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만큼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인기가 여전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 사실 확인은 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이쯤에서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돌아보고 앞으로를 전망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5년 TV도쿄를 통해 방영된 거대 로봇 애니메이션이다. 그 때까지 존재했던 거대 로봇물들의 공식을 많이 배신(?)한 작품이기에 큰 충격을 줬고 많은 마니아들을 양산해냈다.

‘수퍼계 로봇(Super Robot)’ vs ‘리얼계 로봇(Real Robot)'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을 분류할 때 ‘수퍼계 로봇(Super Robot)’과 ‘리얼계 로봇(Real Robot)’의 구분을 많이 쓴다. 이는 ‘수퍼로봇대전’ 이라는 게임 시리즈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구분법인데 이 두 분류의 기준을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수퍼계의 경우 로봇 자체가 영웅시되며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서사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리얼계의 경우는 로봇 자체가 하나의 병기에 가깝고 로봇의 존재 자체와 구분되는 현대적 서사를 배경으로 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퍼계 로봇의 예로는 철인28호나 마징가Z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고 리얼계 로봇의 예로는 기동전사 건담이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 대표적 수퍼계 로봇 마징가Z ... 와 그의 여자친구

그런데 사실 이러한 구분은 ‘기동전사 건담’이 1979년 방영되면서 기존의 로봇물들과 무언가 다른 형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합리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영역들의 논쟁 구도와도 비슷한 것 같다. 철학의 영역이라면 계몽주의 이후 이성과 합리를 기반으로 한 철학자들이 활약하는 모더니즘의 시대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동전사 건담은 상대적으로 ‘비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전 로봇 애니메이션에 대한 비판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 마치 '스타워즈'를 연상시키는 포즈를 취한 RX-78-02 건담

에반게리온의 창작자인 안노 히데아키 감독 또한 젊었던 시절에는 이런 조류에 열광했던 것 같다. 그가 젊은 시절 관여했던 작품인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를 제작할 때에는 메카닉이나 미사일 등의 무기의 디자인과 관련해 매우 세밀한 고증 작업을 벌였고 아예 일본자위대에 자기가 직접 체험입대를 했다는 뒷말이 남아있을 정도다.

에반게리온의 독특한 위치

그런데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경우 이러한 리얼계 로봇이라는 기준으로도 구분하기 힘든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세계의 종말과 관련한 온갖 종교적 상징을 마구 끌어온 세계관에 메카닉의 디자인과 의미에 있어서도 기존의 리얼계 로봇물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다시 철학의 영역에 비유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부를만한 것이었다.

아마 이러한 상황은 안노 히데아키 개인의 흥망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극한의 리얼리즘적 요소를 도입하려 했던 ‘왕립우주군’이 크게 망하게 되자 미소녀, 메카닉, 열혈물 이라는 요소를 적당하게 버무린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큰 인기를 끌자 오히려 안노 히데아키는 본인의 예술관에 회의를 느끼게 됐던 것이다. 즉, 건버스터의 성공은 소위 ‘오타쿠’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작품성’이라고 부르곤 하는 어떤 ‘메시지’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에 맞는 ‘기호’에 열중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감독 스스로가 깨닫게 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라는 사람이 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책에도 잘 나타나 있는 현상이다.


▲ 미소녀, 메카닉이 등장하며 늘 근성을 강조해 '근성물'이냐는 비아냥을 들었던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한 번 비튼 작품이다. 안노 히데아키와 제작사인 가이낙스는 ‘오타쿠’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모든 요소를 애니메이션에 집어넣었지만 그러한 요소들의 자기부정을 곳곳에 첨가했다. 완구의 제작이 어려울 정도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메카닉의 디자인이나 아무리 봐도 좋게 봐주기 힘든 등장인물들의 병적인 정신상태 등이 그러한 것에 해당한다. 심지어 TV판의 마지막 화에서는 대놓고 오타쿠들에게 이제 현실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안노 히데아키의 비뚤어진 시도에도 오타쿠들은 열광하며 이러한 ‘비틈’은 그 자체로 오타쿠들의 소비 대상이 되고 말았다.

에반게리온 극장판이 만들어진 이유

이런 상황에 에반게리온의 극장판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사람들의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잠시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 ‘기동전사 Z건담’을 극장판으로 다시 제작한 경우를 예로 들어보아야 할 것 같다.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몰살의 토미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작중에서 많은 등장인물들을 죽여 버리기로 유명했다. 이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주인공인 소년의 성장기를 그려내기 위해 만든 어쩔 수 없는 장치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런 시도들이 ‘파탄적으로’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만 했다.


▲ Z건담 극장판에서 8년 만에 다시 만난 아무로를 지켜보는 샤아

‘기동전사 Z건담’의 극장판 제작은 이러한 과거에 대한 토미노 감독의 사죄의 제스추어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TV판에서 마지막에 정신붕괴를 일으켜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주인공 카미유 비단이 극장판에서는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 채로 해피엔딩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의 붕괴로 인해 쥬도 아시타라는 새로운 소년이 전장으로 내몰리게 되는 ‘기동전사 ZZ건담’으로의 연결고리를 제거한 것이기도 하며, 이것은 곧 건담 시리즈 전체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이 함께 파국적 대결을 벌이는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로 이어지는 역사 자체를 감독이 부정한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시도는 ‘전쟁과 소년에 대한 어른의 사과’로 굳이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 샤아를 지켜보는 아무로. 이 둘은 그야말로 '세기의 라이벌'이라고 평가할 만 하다.

에반게리온 극장판 제작 시도도 이러한 흐름의 하나가 아닐까라는 예측이 대두됐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가 개봉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예측에 힘을 실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행태가 TV판에 비교해서 훨씬 밝아졌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가 개봉했을 때에도 사람들의 이러한 믿음은 어느 정도 유지가 됐다. 일부 사람들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의 제작이 시종일관 불안정함을 추구했던 TV판에서의 만행에 일종의 ‘힐링’ 역할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루프물'로서의 에반게리온

하지만 한편에서는 또 다른 ‘오타쿠적’ 관점에 제시됐는데 그것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가 일종의 ‘루프물’이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루프물이란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이 반복적으로 다시 제시되며 그 안에서 문제의 해결방식을 찾도록 하는 작품의 형식을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을 들 수 있는데, 이 영화의 내용은 한 일기예보관이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에 갇혀 고통을 받다가 그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주성치가 서유기의 모티브를 따다 만든 ‘서유기 월광보합’에도 비슷한 개념의 장면이 나온다. 등장인물이 사망하자 손오공 역을 맡은 주성치가 바로 전 시간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등장인물을 살리기 위한 시도를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소위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에서도 이러한 기법은 매우 많이 활용됐다. 그래서 안노 히데아키의 극장판 제작을 일종의 ‘안이한 것’으로 폄훼하는 시각도 있었다. 루프물의 형식이 워낙 많은 인기를 얻고 있으니 여기에 편승해서 쉽게 극장판을 제작하려는 것 아니냐는 ‘오타쿠적’ 의혹이라고 할 수 있다.


▲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와 파는 기존 TV판의 큰 틀을 따라가면서 약간의 변화를 가미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아직 국내에 개봉한 것은 아니지만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를 관람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이 작품에서는 본작과는 다른 엄청난 전개가 진행되며 ‘루프물’의 ‘루’도 꺼내기 힘들만큼 기존작과는 상이한 스타일로 귀결됐다는 평이 지배적인 것 같다. ‘신극장판 파’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준 예고편이 Q에서 거의 반영되지 않아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애초의 계획을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노선의 극장판을 제작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을 정도이다.

오타쿠에 대한 안티적 오타쿠로서의 안노 히데아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여전히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오타쿠’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의 의도를 추측해보면 여전히 동물화한 오타쿠들의 소비패턴에 충격을 주기 위한 어떤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차회 예고. 통 무슨 뜻인지..

물론 오타쿠의 세계가 안노 히데아키 한 사람의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시도는 또 다시 오타쿠들의 특정한 취향으로 소비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되풀이 되는 시도가 만들어 내는 예술적 성과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의 다음 작품은 ‘신·에반게리온 극장판:||’ 라고 한다. 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이 아니고 ‘신·에반게리온’인지, ‘||’은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 ‘:’은 뒤의 ‘||’과 합쳐 도돌이표로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악보의 끝세로줄로 읽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오타쿠들을 향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1995년부터 시작된 안노 히데아키의 오타쿠들을 향한 외침이 이번에는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 기대가 된다. 여전히 Q가 국내개봉을 하는 것인지 아닌 지는 불투명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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