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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택광 : 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
anoxia : 이택광 비판 1


한 명의 인문학 전공자가 현실참여를, 그것도 사회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서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인문학이 무력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 설명은 그럭저럭 진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문학 담론이 유통될 만한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가능할 것이다. 칼 폴라니 붐에 대한 이택광의 지적은 바로 그 환경을 비판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의 글이 이해되는 방식 역시 이 ‘환경’이란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든 인문학자들이 진중권처럼 모든 종류의 대중적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고쳐 말하면 그것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불가능함을 가능하게 하는 진중권의 능력은, 그를 자유롭게 하고 동시에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진중권이 있지 않은가?”라는 핑계로 사람들이 다른 인문학자의 비평적 글쓰기를 읽으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결코 진중권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진중권의 대중성을 따라잡고 싶어 한 지식인들과, 진중권이 학적으로는 별거 아니라 생각하여 그의 영향력을 초월하고 싶어 한 인터넷 글쟁이들의 열폭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 역시 그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를 적절한 방식으로 응대해야 할 이유가 이로부터 설명된다. 그리고 진중권을 좋아하는 나는 또한 스스로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이택광과 같은 문화평론가의 매개자가 되려는 것이다. 힘이 닿는다면, 앞으로 내가 ‘커버’할 사람들의 범위가 더 넓어지길 기대한다.


각설하고 이택광의 문제의식을 요약해보자. “칼 폴라니를 통해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려는 일련의 시도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선 논점을 몇 가지로 나눠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칼 폴라니는 실제로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했는가?
2) 칼 폴라니를 활용한 한국의 몇몇 논자들의 제안은 현재의 정세에 정합적인가?
3) (좌파) 지식인의 역할이 ‘대안’을 만드는 것인가?


이택광이 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비판적인 대답은 대충 다음과 같이 연결된다. 첫째, 칼 폴라니는 자신의 글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적 체제를 모색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 덧글에서 꽤 상세한 논쟁이 있었다.) 둘째, 칼 폴라니의 말이 아니라 칼 폴라니의 논의를 원용한 ‘대안’을 말한다 해도, 그게 현재 정세에 정합적인 것 같지는 않다. G20 회의에서 오바마가 유럽에게 통 큰 양보를 하고 개도국 투자에 전격합의 한 지금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을 상황이 아니다. 대공황이 와서는 안 된다는 사실엔 모두가 동의했다는 뜻이다. 지금의 상황은 칼 폴라니가 아니라 장하준이 떠오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 셋째, 지식인의 역할은 대안 체제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인은 현존하는 체제를 정확하게 분석하여 그것을 대중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대안 체제는 몇몇 지식인이 완결된 형태로 조립하여 대중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둘러싸는 조건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꿔야 한다고 인식하고, 운동을 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비로소 대안은 나오는 것이다.


“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이란 글은 그러한 대답의 일부를 좀 더 큰 틀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택광은 칼 폴라니 이론에 대한 평가에 관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류학에서 많이 활용되고 경제학에선 별로 쓰이지 않는 칼 폴라니를 경제학의 문맥으로 애써 끌어들이는 지식인들의 행동에서 그는 (경제학적?)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을 읽는 듯하다. 인문학적 접근이 소외되는 이유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문학적 접근이다.


내적 요인에 대해서도 그는 설명하고 있지만, 외적 요인에 대해서만 서술해 보자면 이렇다. 한국 사회의 진보담론에는 진화심리학적인 것과 경제학적인 것이 있다. 이것은 각기 박정희 시기의 우생학과 경제성장 담론에 대한 비판의 지형에서 나온 것 같다. 즉 한국 사회의 문화지형은 여지껏 박정희를 극복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도 박정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거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나 윤리, 또는 욕망에 관심을 가지는 인문학의 분석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이택광의 분석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정치의 부재’라고도 볼 수 있겠다. 정치의 문제는 “어떤 제도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가?”라는 과학적인(?) 물음의 대상으로 환원된다. ‘중립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경제의 문제는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우리의 생활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된다. 역시 ‘중립적인’ 문제가 된다. 논쟁이 이렇게 ‘중립적으로’ 전개되면 최신이론이 요즘 새로 밝힌 사실에 의하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이론-레이싱 경쟁을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비판은 꽤나 근본적이다. 그러므로 이택광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은, 역시 근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 말하는 인문학의 개입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체, 윤리, 욕망? 그런 것으로 무슨 사회를 분석할 수 있단 말이냐. 나는 진화심리학이 사회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라고? 서구에는 진화심리학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비평도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면 당신도 서구중심주의지. 서구가 잘 먹고 잘 사는 건 과학 때문이지 인문학이 있어서는 아냐. 왠지 서양애들은 그렇게 안 믿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대충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정석이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이택광의 논지를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논지를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대표적으로 트랙백을 건 anoxia 님의 글을 살펴보자. 그의 반론은 1) 우생학이 박정희의 담론이라 인정하기 힘들다. 2) 그렇더라도, 진화심리학이 우생학과 같은 패러다임에 있다는 사실은 기각된다. 3) 진화심리학이나 경제학이 주체, 윤리, 욕망의 문제를 안 다룬다고는 볼 수 없다. 로 요약될 수 있다.


1)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자. 우생학은 요즘의 상식인들이 느끼듯이 파시즘이라는 특별한 체제에서만 특이하게 자라난 괴물이 아니다. 현재의 진화심리학이 그런 것처럼, 우생학은 19세기 과학의 주류였다. 그 문화적 영향은 20세기에도 미쳤다. 아도르노가 미국에서 절망한 것도 우생학 때문이었고, 콘돔 또한 우생학의 도구로 선전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우생학의 영향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가령 유전자 연구를 통한 인간종의 발전을 위한 노력도 우생학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 같은 후발 주자들에겐 그것이 하나의 신념처럼 박혔다. 싱가포르 수상 리콴유처럼 머리 좋은 남녀들을 짝짓기 해야만 ‘우생학’ 담론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을 개조하여 이미 진화한 서구 국가들을 따라잡자는 것이 박정희 체제의 욕망이었다면, 그것을 우생학이라 부르는 것엔 큰 무리가 없다.


(‘국민 만들기’와 ‘인종주의’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적당한 인용문이 있다. 김동춘의 <근대의 그늘 : 한국의 근대성과 민족주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좌익은 씨를 말려야 한다’는 혈통주의적인 사상과 실천이 분단국가 건설을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분단국가의 형성은 통상 국가 형성의 기반으로서 같은 종족, 동일한 민족이라는 공통성이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규정에 의해 무시·압도당한 데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한의 아들딸’이라는 한국에서의 국민 개념은 좌익을 다른 인종 혹은 인간 이하로 취급했고 그것이 ‘좌익사냥’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종주의 혹은 혈통주의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2)에 대해선 어떨까? anoxia 님은 진화심리학의 대략을 말하면서 그게 우생학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을 말한다. 그래서 같은 패러다임에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이 우생학과 접점을 이루는 부분에선 당연히 그의 말이 옳다. 그런데 이택광은 그 전선에서 나와서 얘기를 한 것이다. 앞서의 내 식으로 요약하자면, 정치의 문제를 “어떤 제도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가?”라는 과학적인(?) 물음의 대상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같은 패러다임에 있다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은 우생학과 정면대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생학은 옛날의 것이고, 진화심리학은 요즘의 것이다. 진화심리학이 비판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편견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계몽의 대상이다. 그런데 정치 문제를 바로 이렇게 계몽의 문제로 치환하는 엘리트주의-계몽주의적 태도야말로 이택광이 문제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칼 폴라니라는 대안을 대중에게 ‘공급’하려는 이들에게 그가 느낀 위화감도 그런 것이겠고.


그리고 그가 문제삼은 것은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 일반이 아니라 진화심리학을 활용한 사회비평이라는 점도 이해되어야한다. 여기에서 자연히 3)에 대한 답변도 도출된다. 나는 최재천 교수의 진화심리학적 사회비평을 거의 보지는 못했는데, 하나 인상깊게 본 것이 있다. 유전자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논변이었다. 유전자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논의를 활용해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면 그건 ‘과학적인 사회비평’이 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흔히 이런 문제를 ‘사실 명제와 당위 명제의 구분’이라 부른다. 물론 자연주의자들은 이 구분을 마뜩치 않아 한다.) 그러면 다른 논의를 활용해 호주제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과, 진화심리학을 활용한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설득력’의 문제로 들어간다면 유전자 특성과 호주제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는데 말이다. 


 anoxia 님은 이택광의 글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 문단만을 정교하게 독해하고 거기에서 잘못된 용어 사용과 잘못된 판단을 발견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대중적 담론의 지평에서 점점 인문학이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는 대개의 이유는 인문학이 설득력 없는, 형이상학적 현학에 그치기 때문이다. 마치 이택광의 이 글과 같은 이유다.”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람들이 인문학적인 글에서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는 대개의 이유는 그것이 ‘형이상학적 현학’에 그치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 그런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독해해야 하는지를 몰라서가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나같은 사람의 이러한 글도 다소 쓸모는 있을 것이다.


흠..

2009.04.15 12:01:18
*.154.102.160

마지막 말씀엔 전적으로 동감.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문학적 독해능력이 딸리는 게 사실이라 봅니다. 그래서 말인데, 개인이 스스로 독해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이 있을까요?.. 물론 책을 많이 읽는 게 기본이겠지만... 뭔가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은 없을까요? 하다못해 책읽기가 좀 더 즐거워 질 수 있는 방도라도?

한윤형님만의 특별한 독서방법이 있는지...

하뉴녕

2009.04.15 12:07:29
*.241.15.63

제가 답변할 주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 책 별로 많이 안 읽어요) ^^;;

다만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논의하는 이가 고민하는 문제를 저도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이해가 빠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정말로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논의한 이의 글을 찾아서 읽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하하하

2009.04.15 17:42:55
*.154.102.83

저 책 별로 안읽어요"란 말씀은 고수분들 세계를 기준으로 한 것이겠죠?ㅎㅎ

심각하게(?) 고민한다 해서 제 이해력이 상승곡선을 탈지는 모르겠으나, 선택과 집중을 하라는 말씀은 와 닿는 거 같습니다. 뭔가 조금 특별해 보이면 어떻게든 찍어서 맛봐야하는(그렇다고 깊게 맛보지는 못하면서!) 제 성품(?)이 현재의 죽도 밥도 아닌 저를 만들어 놓은게 아닌가란 생각...요즘들어서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부분인데요...그런 맥락에서 제대로 읽지도 않을 잡다한 책들을 정리중에 있기도 하구요... 님 말씀 듣고 나니 좀더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루시앨

2009.04.15 12:05:20
*.36.106.59

잘 읽었습니다.

체제를 분석함에 있어서 과학과 인문학이 상충하거나, 경쟁한다는 시각이 사회에 깊게 존재하는것 같아요. 물론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이 '실재'를 찾으려는 욕망과 깊게 관련되어, 때로는 가치 주장마저 그러한 '사실'들로 정당화하려는 것에 기인하지만, 인문학, 혹은 예술은 '활동'의 차원에서 주어진 현재의 상황 혹은 맥락을 규정짓고 실천하게 해주는 만큼, 역할이 좀 다른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상황'과 '실재'의 경계가 애초에 명확하지 않기에 서로 겹치고 경쟁할수 밖에 없는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

하뉴녕

2009.04.15 12:09:21
*.241.15.63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사실 현재 실정에서 인문학은 "우리 몫도 좀 달라능!"이라고 말하는 '방어적 입장'인데, '인문학의 개입'이라고 하면 통째로 다 먹겠다는 심보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좀 많은 것 같습니다. ;;

아 물론 현재 인문학자들의 사회비평이 "우리 몫도 좀 달라능!"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만한 수준에 올라와 있지 않다는 자기 반성도 필요하겠지요. ;;;

Y_Ozu

2009.04.15 18:13:51
*.143.139.169

'본진'에 대한 성의있는 변호로군요. 저도 심정적으로 이쪽에 가깝기 때문에 본문의 주제에 대해 딱히 반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리플에서 말씀하신 '자기 반성'이라는 면에서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인문학자들의 사회비평이 잘 먹혀들지 않는 이유로 "그런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독해해야 하는지를 몰라서"라는 지적도 수긍할수 없는건 아니지만, 그런 글쓰기 방식이 의미의 환유적인 비약(또는 도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문제의 원인인것 같습니다. 예술 텍스트의 해석에서는 효용성이라는 가치가 크게 고려할 변수가 아니고 의미의 도약이 텍스트를 둘러싼 해석과 재생산에 오히려 긍정적일수 있지만, 담론의 효용성이라는 가치가 강조되고 좀 더 직접적인 의미작용의 효과를 요구하는 사회과학적 의제에서는 환유적 도약의 과잉이('정치의 부재'와 같은 선언적인 수사는 그 자체로는 일종의 환유적인 도약입니다) 담론 투쟁 속에서의 semiosis에 실패하는 원인이라고 봅니다. 저도 인문학이 실재가 어떠했는지에 집중하는 자연과학과는 다른 몫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단지 예술적인 직관이나 초보적인 논리분석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실재라는 기반 위에서 일어나는 의미 효과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의 도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적 비판의 가장 큰 약점은 실험과학이나 통계와 같이 자연과학이 갖고있는 해석의 도구를 대체할 독자적인 도구의 개발에 소홀하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실재 위에서 일어나는 의미작용을 규명할수 있는 가장 체계적인 인문학적 도구로는 기호학이라는 분석의 틀이 이미 있긴 합니다. 문제는 한국의 인문학자들 대부분이 기호학적 분석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하다는 거죠. 소프트한 문화비평가로서의 움베르토 에코는 잘 알려져있지만 하드한 기호과학자로서의 에코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것처럼. 문화평론에서 기표나 기의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호학적 분석이 되는건 아니죠.)

루시앨

2009.04.15 18:47:02
*.36.106.59

Y_Ozu// 주인장님이 아니라서 댓글달기가 약간 저어합니다만...

인문학이 "실재라는 기반 위에서 일어나는 의미 효과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의 도구를 필요로 한다"는 말에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음, 이건 인문학의 성격상 "가치 지향", 혹은 "당위"의 영역을 띠기 때문인데, 애초에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것에 논리적으로 "실재"는 절대로 정당화시켜줄수 없다고 보아요. 사실명제에서 당위명제를 이끌어낼수 있다는 논리적 측면에서도, 그리고 실제로 "전략"의 측면에서도 그 당위가 필연적인것은 아니거든요. 그런 실재에 대한 해석도구는 다른 사실에 관한 학문들에서 끌어와도 되구요. (인문학이 독자적이어야 한다고 해서, 사람이 숨을 쉬고 죽는다는 사실까진 부정하지 않잖아요..? ^^ 다만 그것을 다른 의미로 구성하려 할뿐.)

다음 문단은 좀 물타기가 될수도 있는데;;;;;;

이것을 윤리는 아니지만, 또 다른 당위에 관한 학문(..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에서 살펴보면 좀더 명확해진다고 생각해요. 바로 경영학 내의 전략/마케팅 영역인데, 이쪽은 "돈을 번다"라는 하나의 가치지향 아래서 다양한 규범을 제시하는 분야이지요. (마케팅은 사실상 전술적인 부분이 많으므로 전략만 놓고 보면) 사실 전략은 정당화가 불가능해요. 다만 논리적 일관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현재의 상황을 재구성해서 "니즈가 있다"를 보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전략의 효용은 완성된 것이거든요. 1) 상황/의미의 재구성이라는 측면과 2)그로인한 행동의 촉구(그게 어떤 행동인지는 모르지만)라는 점에선 인문학이 행하려는 기능과 유사하다고 생각해요.

Y_Ozu

2009.04.15 19:35:22
*.143.139.169

루시엘/ 그러니까 그 당위가 실재 또는 사실과 분리되어 작용할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실재와는 별개로 작용하는 의미 효과를 분석하기 위한 좀 더 섬세한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것을 논증하는것 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논제들이 늘어나고 있고, 여기에 단지 은유적 상상력이나 뭔가 기발한 개념의 연쇄로 대응하는건 제가 보기엔 효과가 그닥 별로인것 같습니다. 인문학에서도 자연과학 못지 않게 분석의 엄밀성을 갈고 닦아온 오랜 전통이 있고, 그런 전통에 좀 더 관심을 갖는것이 '뭔가 소프트하면서 흐리멍텅한' 현재의 인문학적 담론의 위상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루시앨

2009.04.15 19:54:37
*.36.106.59

사실명제에서 당위명제를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은 고전적인 논의 아닌가요..?

인문학이 단지 은유적 상상력이나 뭔가 기발한 개념의 연쇄라고 보는 것은 어떤 학문 분야든 아마추어 입장에선 그런것 아닐런지요. 이를테면 08년 노벨물리학상의 기본 주제인 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은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선 사실 매우 은유적으로 보이죠. (물론 이걸 아는 사람들이 풀어 설명해주면, "라그랑지안이 어떤 대칭성에 대해 불변이지만, 실제로는 부분적인 대칭성에 대해서만 불변인 경우를 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이라 부르고, 간단한 함수들로 설명할수 있겠습니다만, 이것이 은유의 범주를 과연 벗어나지 않을까요..?)

그런면에서, "지금" 시도되는 인문학의 글들은 오히려 과거의 개념과 담론들을 벗어나 지금-여기를 분석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라 보여집니다만.

(제가 굳이 경영 전략 이야기를 든건... 이쪽 분야야 말로 은유와 상상력이 넘쳐 흐르는 분야이기 때문이죠. 실제 HBR 등을 열심히 분석해도 현재의 상황을 한큐에 재구성하는 놀라운 "상상력"과 은유가 있을 뿐이지, 다른것은 부차적일 뿐이기에...)

Y_Ozu

2009.04.15 21:09:27
*.143.139.169

그거야 철학하는 사람들의 원론적인 자기만족에 불과한 거고, 실제로는 그러한 원론에 동의하면서 사회적 실천의 차원에서는 끊임없이 사실판단으로부터 실천적 가치를 끌어내려는 자연과학자(또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따르는 사회과학자)들의 행위에 주목할 필요가 있죠. 이젠 좀 진부해진 프레임론이지만, 자연과학과 공유하는 인식론적 프레임에 갇혀 자연과학자들의 이중적 실천과정('우리는 당위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만 어쨌든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적 원리에 의해 근본적으로 재정의해야 된다는 식의)을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몇몇 아슬아슬한 개념의 줄타기로 자족하는 모습은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은 상대쪽의 프레임에 무의식적으로 갇혀있거나 프레임을 벗어나 정처없이 떠돌기만 할 뿐 본인들의 프레임을 정교하게 짜는데는 무관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관심있는 건 특정개념의 인식론이나 존재론이 아니라 화용론입니다.

하뉴녕

2009.04.15 21:14:13
*.51.255.7

이렇게 가면 논의가 또 지리해 지지요. ^^;; 인문학의 방법론으로 어떤 것이 적절한 것인지 제가 판단할 위치에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텍스트를 보고 어떤 이가 "이건 환유의 연쇄네."라고 말할 때, "응? 꼭 그런 것은 아닌데 ;;"라고 설명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있는 것이겠죠.

당연히 인문학자들의 문제라는 것도 있겠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이 '문제가 많은 인문학자'와 '문제가 덜한 인문학자'를 제대로 구별하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서 '독해'의 문제라고 표현한 것이겠구요.

사실명제와 당위명제의 구별은 고전적인 것이긴 한데, 모든 이들이 거기에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구체적인 사회평론을 살펴볼 때엔 양자의 구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설득력이 사라진 사례를 발견할 수는 있지요.

Y_Ozu

2009.04.15 21:28:46
*.143.139.169

저 역시 '꼭 그런 것은 아닌데'를 일종의 원칙으로 삼는 입장이라 제 말은 반박이라기 보다는 그냥 '이런 점이 보강되면 좋겠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경우 라캉이나 데리다는 인식론의 차원에서만 이해되고 또 그 부분에서 주로 자연과학자들에게 반박되고 있지만 사실은 매우 치밀한 전략을 갖고 텍스트 해석의 다른 방식을 제시한 기호학자이기도 했지요.

(이만 잠수합니다. 언젠가 또 뵙죠)

루시앨

2009.04.16 00:15:33
*.36.106.59

Y_Ozu//확실히 자연과학자들의 그런 주장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 같네요. 화용론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동의합니다. 어쩌면 언급하신대로 기호학이 하나의 도구가 될수 있을것 같습니다.

한윤형//인문학이라는게 사실 어떤 정식화(?)라던지, 옳고그름 혹은 잘 알고쓴것과 모르고 대충 쓴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것 같아요. 물론 저 스스로 윗 리플에서 공부가 어느정도 되면 그것들을 구분할 수 있지 않겠냐고 썼지만서도...;;;;

bigsleep

2009.04.15 18:10:42
*.169.196.2

훌륭한 시도네요, 젊은이 앞으로 많이 기대할게요.

조실

2009.04.15 22:51:13
*.248.192.169

자꾸 폴라니 이야기가 나오는데 ^^;; 폴라니가 구체적인 체제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시장이나 국가가 아닌 다양한 사회공동체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한) 적극적인 가능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에 대한 폴라니의 강조는 현 수준에서 가능한 대안(체제대안이 아니라 경로 상의 대안)에 대해 일정한 시사점을 줄 수 있구요.

대안 논의가 현 정세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데, 현재의 정세가 자본주의 자체의 붕괴를 말할 시점은 당연히 아니지만 (이건 앞으로 최소한 4~50년 이상 걸릴 문제지요) 일방적인 신자유주의 체제는 더 이상 작동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다른 개념이고, 자본주의의 붕괴를 말하는 것은 성급하지만 신자유주의의 파탄은 향후 몇 년 안에 현실화될 겁니다. 그랬을때,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폴라니 류의 공동체에 기반한 '사회적 경제'의 비중을 높이려는 노력은 (자본주의의 성패와 관계없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전 댓글에도 썼듯이, 사회적 경제가 담당할 수 있는 부분은 어차피 한계가 있으므로 공공부문이나 민간부문에서의 시스템적인 혁신노력도 당연히 고민해야 하겠지만, 현 시점에서 공동체 내지 사회적 경제에 대한 고민들을 폄하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결코 '지식인들이 대안체제를 완결된 형태로 조립하여 대중들에게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공동체나 사회적 경제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완결된 대안체제가 안된다는 건 그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고민들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과정 그 자체가 이택광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주체의 출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특히 여성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종 생협 활동이나 지역공동체 활동을 통해 기존에 느끼지 못했거나 느낌은 있어도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새로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분들이 많거든요. 운동이나 정당활동, 독서나 글쓰기 등등보다 이런 활동들이 훨씬 재밌다는 분들도 많구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넓은 의미의) 정치의 영역에 포괄시킬지가 우리가 진짜 고민해야 할 문제겠지요.

PS 1. 본문에 소개된 글은 안 그렇지만, 이택광님의 글 중 어떤 글은 상당히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기본적인 수준이지만 나름대로는 이런저런 인문학 서적을 읽은 저에게도, 이택광님이 정확히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건지 헷갈리는 경우가 가끔 있더군요.

PS 2. 그리고 폴라니에게는 경제(사람의 살림살이)란 것 자체가 인류학이나 인문학적 관점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폴라니가 인류학에서 주로 활용되고 경제학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는 이유는 현재의 주류경제학 자체가 인문학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인간을 기본적인 인간상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런 주류경제학의 흐름을 거슬러 폴라니적인 관점을 도입한다는 것 자체가 (이택광님 입장에서는 인문학의 소외일 지 몰라도) 다른 측면에서는 반인문학적인 현재의 경제학에 인문학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하뉴녕

2009.04.15 22:36:37
*.51.255.7

어려울 때가 있죠. 근데 어렵다고 이해할 수 있는 끼리끼리 보기보다는, 파열음이 나더라도 계속 이런 식으로 유통되는 쪽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당비 편집진들도 인터넷 소통을 고민하고 있던데 또 다른 계기가 될지도 모르지요. ㅎㅎㅎ

말씀하신 바에는 대개 공감합니다.

단홍시

2009.04.16 10:08:06
*.142.65.66

굉장히 시원한 리플이네요. '폴라니보다는 장하준이 떠오를 수 있는 때'라는 말에 백번 공감하는데, 그 평가에서 부족한 부분, 오해 살 수 있는 부분을 잘 설명해 주셨다고 봅니다.

세라비

2009.04.16 05:55:16
*.99.69.247

인문학이든 아니든간에, 몇 시간 정도 고민하고 쓰는 글에서 수 년 간의 작업을 넘어서는 심오한 무언가를 찾는다는게 좀 어불성설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N.

2009.04.16 11:25:35
*.128.61.114

4/17 술 한 잔 하죠. 그 전에 음악도 같이 듣고. ^^
국립오페라합창단 + 기륭 등 비정규 투쟁 공동 촛불음악회가 열립니다. 금요일, 7시, 보신각. 쟁가님은 선약이 있어서 일정 끝나는 대로 오신다고 하는데.

무뇌한

2009.04.18 21:43:03
*.153.186.183

계몽주의도 우생학적 관점으로 볼 수 있을까요?

씨니or요사

2009.04.21 05:56:21
*.180.114.103

아뉘... 폴라니가 요즘 뜨는거요? 거참.. 왼날님이 튀는게 아녔구만...

시장 만만세를 외치다, 고귀한 원주민이라도 생각 나셨나?

하지만 폴라니의 출발은 합리적인 서구인만큼이나 고귀한 원주민 따위도 가짜라는 것이었던거 같은데.. 아녔나요? @.@~

BigMan 해먹는게 얼마나 괴로운건뎅... =_=

뫼르소

2009.04.24 17:07:48
*.152.155.43

"모든 인문학자들이 진중권처럼 모든 종류의 대중적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 반대쪽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중권이 대중적 비난을 방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그러한 비난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부채질해서 어떻게 적용하는지 말입니다.

anoxia

2009.07.03 01:02:01
*.170.110.177

트랙백 보냈습니다. (윤형씨가 저보다 몇 살 위인 것 같은데) 학기 중이라, 얼른 글을 써서 의견을 교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았습니다. 3개월이나 지체된 것 같은데 토론을 한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써서 트랙백 보냅니다. 저 같은 '듣보잡'에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김우재

2009.07.03 18:08:32
*.230.71.137

난 왜 이제야 이 글을 본건가...

하늘타리

2009.07.06 07:27:24
*.192.166.113

우연히 들어왔다 한윤형씨와 anoxia씨의 논쟁을 봤는데 재밌습니다. 제가 이택광씨 글을 봤을때는 상당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주장하는 바는 알겠는데,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쓴 논거들이 상당히 자의적으로 보였거든요. anoxia씨는 그 부분을 잘 지적했습니다. 윤형씨의 anoxia씨의 비판은 반면에 anoxia씨가 이택광씨가 주장하는 부분의 본질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독해력이 딸려서'(이 부분은 불공정할 정도로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오로지 한 문단만 파고들어 각론적 비판을 했을 뿐이다라는 정도군요.

제 판단에 한윤형씨의 비판은 주장을 주장으로 비판하지 못하면 핵심적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잘못된 주장(주장이 자꾸 나오네요)에 기초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택광의 주장에 동의를 하더라도 그 근거가 취약하거나 잘못되었다면 그 글을 비판할 수 있는거니까요. anoxia가 첫 비판글에서 이택광의 핵심적 주장(진보담론에서 인문학적 목소리의 부재에 대한 우려) 자체를 반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택광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부분에 대해 비과학적이고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한 것이죠.

더불어 윤형씨의 anoxia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도 이택광이 범한 오류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근거로 인용하신 김동춘의 글의 부분은 (그 책 자체는 대단히 훌륭한 저작이라 봅니다만) 그 부분만 뚝 떼어내어 보면 (즉 그 책 전체 혹은 전후 맥락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아전인수격으로 읽히기 쉽습니다. '좌익사냥'이 우생학적 담론 논리를 적용하면 그럴 듯하게 읽힐 수는 있지만, 하나의 가능한 해석(연결고리)을 보여줄 뿐이지 그것이 국민만들기와 인종주의 혹은 우생학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못하거든요. 따라서 여전히 anoxia의 의문은 풀릴 수가 없죠. 따라서 윤형씨의 이택광의 (박정희와 우생학의 관계에 대한) 주장이 그렇게 뻘소리인 것만은 아니다 정도일 수밖에 없지, anoxia 너의 의문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반박할 수는 없는거죠. (윤형씨도 이 정도의 반론을 염두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한편으론, 우생학이 박정희 시대라는 한국의 독특한 근대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서구 근대화의 만연한 풍경이자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공감합니다만, 그것이 오히려 이택광의 주장에는 독이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근대 혹은 국민만들기 일반의 과정에 우생학이 연관된 것은 서구에서는 100년, 한국에서도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텐데요 그것이 왜 유난 박정희 시대와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는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거든요. 더불어 그것이 왜 진화심리학적 진보담론으로 이어지는지 그 연결고리도 전혀 제시되지 않았고요. anoxia가 궁금해 했던 부분이 이 부분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저는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윤형씨도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답변 혹은 변호를 해주시진 않았구요.

얼추 다 지나간 논쟁인데 뒤늦게 글을 읽고 흥미가 생겨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윤형씨나 anoxia씨(당신 본인의 블로그는 아니지만) 건승하시길.

하뉴녕

2009.07.06 11:47:30
*.241.15.143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 문제를 엉뚱한 문맥에 갖다붙이는 거라고 보는 겁니다.

말씀하시는 바대로 김동춘의 서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라고 하셨다면, 그냥 그걸로 된 겁니다. 그런 문맥으로 대한민국 건국사를 인종주의적이라고 개탄했구나,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문맥에서 박정희를 우생학적이라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라고 보면 되는 일이지요. 그런데 에녹시아 님이나 하늘타리 님이나 마치 구슬이 열개 있는데 이것들을 '빨간 구슬'이라고 부르려면 여섯개 이상은 빨간 것이어야 된다는 자세로 "박정희를 우생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증거가 다수가 확보되었는가?"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님의 글에서도 그런 자세가 보이는데, 여기서 '박정희'라는 언급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1961년부터 1979년 사이의 정책을 분석하겠다고 얘기하니 대략 난감해지는 것이지요. 가령 참여정부를 386세대의 프레임을 실현한 정부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여기다 대고 참여정부의 정책 무엇무엇은 386세대랑 상관이 없었다느니, 386세대의 프레임은 참여정부 이전에도 관철되고 있었는데 하필 참여정부와 엮을 이유가 뭐냐느니, 참여정부와 386세대가 관련이 있는 증거를 열 두가지만 대보라느니 하면 굉장히 난감해 지는 거죠. ;;;;

더구나 님은 그렇게는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김동춘이 '국민만들기'를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고 할 때는 좌익사냥 등을 염두에 둔 것인데 이것을 생까고 '인종주의'나 '우생학'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주목하여 한국 역사에서의 민족주의를 논하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아마 그는 그게 논점일탈이라는 사실도 모를 겁니다. (그나마 그 서술도 다 틀렸습니다만.)

하늘타리

2009.07.06 13:15:57
*.192.166.113

이택광씨의 글에서 박정희-우생학-진화생물학의 고리는 그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논거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우생학의 고리가 실은 불분명한 것 같다, 우생학-진화생물학의 고리도 설명이 불충분하다,라는 지적이 왜 엉뚱한 문맥에 갖다 붙이게 되는 것인지 저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박정희-우생학-진화생물학의 계보가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자신이 없다면 그것을 논거로 쓰지 말아야겠지요. 이택광씨의 글은 설명이 부실해서 자의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계보를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논거로 쓰고 있다는 데 있고, anoxia님은 그 부분에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이니까요.

그리고 참여정부는 386세대의 프레임을 실현한 정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증명 불가능한 주장, 즉 담론입니다. 그것이 논거로 쓰이려면 담론을 넘어서 과학적 사실로 증명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말씀하신대로 참여정부와 386세대가 관련이 있는 증거를 열 두가지라도 대야하겠죠. 그것이 굉장히 난감한 일이니까 보통 그것(참여정부는 386세대의 프레임을 실현한 정부라는 주장)을 자기 주장의 논거로 쓰지 않습니다 (못합니다). 문제는 이택광씨의 글이 이러한 성격의 것을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사용했다는데 있는거죠.

답변 감사합니다.

하뉴녕

2009.07.06 13:53:12
*.241.15.143

그 질문을 했다는 게 잘못 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연결고리가 빈약한 것 같다. 설득력이 없다."

라고 해야 할 것을

"용어 사용이 틀렸다."고 했기 때문에 엉뚱한 문맥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연결고리가 빈약한 것 같다."고 했다면 애초에 제가 나설 일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택광이 무슨 자료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 얘기를 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거기에 뭐하러 끼어들겠습니까. 그런데 용어사용 자체가 틀렸다는 식으로 접근을 하기에 우생학이나 인종주의라는 말을 이런 문맥에서도 사용한다...라고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에녹시아 님은 "아 그렇게 쓰기도 하는구나. 무슨 뜻으로 썼는지는 이제 알겠는데, 근데 난 박정희가 우생학적이란 말은 잘 동의 못하겠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용어사용이 틀렸어."라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황당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설명을 자르르...하는데 이 문제와 민족주의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 명백해서 또 한번 황당하고.;;;

(아까 이택광 선생님 블로그를 잠깐 가보니 박정희와 우생학의 연결고리에 대해서 스스로 설명을 올려 놓으셨더군요. 궁금하시면 그 글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여정부=386 담론은 증거를 몇 개 댈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봤자 그걸 님이 '담론'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로 인정해 줄 것 같진 않습니다. 애초에 이런 문제들은 '과학적 사실'로 탐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담론'을 '논거'로 사용하려는 게 아니라, 그걸 가지고 무언가를 설명해 보려고 하는 편입니다. 그때 그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린다면 그 담론은 쓸모가 있어 보인다는 평을 들을 수 있겠지요.

말하자면 저는 애초부터 그것을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담론'으로 의도했다는 겁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식의 글쓰기가 대개 그렇습니다. 물론 '담론'이라고 해서 지X대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담론을 적용한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려야지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저는 이런 접근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과학적 사실'을 찾으시는 분들은 대개 이런 진술들이 의미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죠.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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