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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경향신문] 인도 축구대표팀의 로망

조회 수 3006 추천 수 0 2011.02.19 12:47:08


경향신문 2030콘서트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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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머지않은 과거, 한국 축구대표팀이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승리를 거두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축구팬들이 다만 대표팀의 최선을 다한 분투만을 바라고 또 그 모습에 감동받던 시절이 있었다. 지난달 18일 아시안컵 조별리그에서 한국팀과 마주친 인도 축구대표팀의 분투는 그래서 우리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둔 한국팀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총력을 기울여 인도를 네 골차 이상으로 이기면 토너먼트에서 이란이나 일본 같은 강팀들을 피할 수 있었다. 반면 마음을 비우고 주전들을 쉬게 하면 토너먼트에서 체력적인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조광래 감독은 전자를 택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맨유’의 박지성을 포함한 유럽파 선수들이 총출동해서 인도를 대적했다. 운동장엔 비가 내렸다. 바야흐로 ‘빗속 잔혹극’이 시작될 참이었다.


전반 10분이 지나기 전에 두 골을 넣을 때만 해도 드라마의 결말은 뻔해 보였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나간 한국팀이 유럽강팀들을 맞닥뜨렸을 때의 상황 같았다. 그러나 전반 11분 인도에 패널티킥 골을 헌납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이후 8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네 골차’를 만들겠다는 한쪽의 의지와 영예로운 패배를 거두겠다는 다른 한편의 의지가 비에 젖은 운동장에서 난투극을 벌였다. 결과는 4-1, 한국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고, 이것이 영향을 미쳐 4강전에서 일본에 패배해 아시안컵을 3위로 마감했다.


2011년, 인도 축구는 한국 축구에 패배의 두려움을 안겨주는 상대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두 골 차든, 다섯 골 차든 신경쓰지 않고 설렁설렁 상대를 공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한국은 너무나도 다급했다. 골 넣은 선수가 급하게 골대에서 공을 꺼내 하프라인으로 가져가는 장면이 연출됐다. 그리고 아시아 최고 수준의 팀이 전심전력을 다할 때 그에 맞선 인도의 파이팅은 빛을 발했다. 분데스리가의 어린 공격수 손흥민의 몇 번의 슛이 빗나간 것은 ‘운’의 문제였지만, 골대 안으로 향한 20번의 슛 중 무려 16번을 쳐낸 골키퍼 수브라타의 분전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온 잠재력을 끌어내어 항전했다.


경기의 절정은 A매치 102경기에서 43골을 터트린 인도의 ‘축구 영웅 부티아’가 교체되어 들어온 후반 33분이었다. 우리로 치면 차범근, 황선홍에 준하는 득점기록을 지닌 인도의 영웅이 들어오자 분위기는 반전했고 후반 막판 인도는 몇 번의 역습을 주도하기조차 했다. 부상 탓에 앞선 두 경기를 결장한 그는 27년 만의 아시안컵 출전, ‘박지성’이 있는 한국과의 결전 몇 분을 위해 응고된 피를 두 번이나 뽑아내고 운동장으로 달려 들어왔다. 우리 입장으론 인도가 하필 우리와의 경기에 모든 것을 불살랐다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인도의 ‘로망’을 자극할 수 있는 상대였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 아닐까.


아시안컵엔 관심도 없다가 일본과 4강전을 치른다고 하자 그 경기만 보며 대표팀의 무기력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불과 사흘 전 이란과 ‘120분 혈전’을 펼쳤다는 사실은 도외시하면서. 한편 대표팀 스포츠를 감상하는 게 잘못된 국가주의의 발현인 것처럼 뾰족눈을 뜨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1996년부터 아시안컵을 감상한 나 같은 범인은, 인도에는 ‘꿈의 무대’인 저 아시안컵에 한국인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실정이 야속하다. 무관심과 무성의한 열광 속에서, 한국팀이 아시안컵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싶다는 내 바람은 또 다시 4년 뒤를 기약한다.



하늘타리

2011.02.21 14:34:14
*.36.38.90

드라마는 비오는 날에 펼쳐질 확률이 높군요. 그건 아마 비가 강자에게나 약자에게나 모두에게 난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약자들은 평소와 달리 어려움을 겪는 강자들의 모습을 보고 전례없는 파이팅을 하게 되고요. 하, 비오는 날의 공식이군요. 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하뉴녕

2011.02.21 15:47:00
*.149.153.7

감사합니다. ^^;; 한국 입장에서는 "헉 왜 하필 오늘 비가!!!"라는 심경이었겠지 말입니다...피지컬로 밀어붙이려던 것도 아니고 스타일도 패스축구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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