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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닫는 글 : 다시 언론 운동을 꿈꾸며


안티조선 운동은 성공했을까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에게 영향을 줬을까? 아니면 한국 사회를 변화시켰을까?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이 끝난 지금이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한 번쯤 던져 볼 때인 듯하다.


분명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안티조선 운동이 시작했을 때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티조선 운동의 영향이라기보다 매체 환경을 변화시킨 기술 진보의 힘이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방송의 영향력은 신문을 능가하기 시작했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유선 방송과 인터넷의 영향력이 구매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의 영향력 쇠퇴는 이러한 시대변동과 연관이 있다. 사실은 안티조선 운동이 대중 운동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도 기술 진보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유물론적 조건 속에서, 운동을 시작한 주체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유물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행동을 설명해 준다. 강남에 아파트를 사면 종합부동산세가 사회 정의에 어긋난 것처럼 보이고, 어학연수를 다녀온 이들에게 영어 구사 능력은 취업 준비생의 능력을 변별하기에 적절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변수가 되는 것은 단지 물질적 조건으로만 결정되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그 어떤 물적 조건도 ‘사회 운동을 할 조건’을 설명해 주진 못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PC 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사이버 공간이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종류의 매체 환경을 경험하게 됐다. 그러나 그 환경 속에서 태어난 안티조선 운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환경 자체가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안티조선 운동의 공과를 판단해 볼 때, 나는 이 운동이 한국 사회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안티조선 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다. 물론 안티조선 운동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언론이 불편부당한 관점을 취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그들이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심지어는 그저 제 기업의 이윤추구를 위한 보도를 할 뿐이라는 사실을 풍부한 사례를 통해 증명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볼 때,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의 보도 행태로 대표되는 기존 매체의 저급한 편향성을 극복해야 했다. 그 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를 비판함으로써 한국 언론들에게 중론이나 여론을 관성적으로 대변하고 답습하는 것을 넘어 공론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강제해야만 했다. 한국 언론들이 그런 부분에 대단히 무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 사람 중 한 사람이 정치학자 전인권이다. 그는 《역사와 사회》 2004년 여름호에 실린 〈재판관의 얼굴을 한 노예 : 17대 총선 기간의 4대 신문 사설 분석〉(이 글은 책 《전인권이 읽은 사람과 세상》 488~515쪽에 수록되어 있다)란 글을 통해 탄핵 반대 촛불 시위가 한참이던 격동적인 정치의 시대에 한국의 신문 사설들이 어떻게 정치평론을 전개했는지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전인권은 한국 신문 사설의 전반적인 수준에 대해 통렬하게 문제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대통령 탄핵 사건과 촛불 시위는 우리가 도외시했던 여러 문제들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가령 ‘일반 시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 문제’, ‘공무원노조, 전교조, 대한변호사협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고도로 공공적 의미를 지니는 단체들의 정치 참여 문제’, ‘검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헌법재판소의 역할’, ‘대통령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서 대통령 권한 대행의 출현’ 등 많은 문제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 한국 신문의 사설들은 어떤 역할을 했던가.

 
구체적으로 촛불 시위의 향방이 명확해진 3월 셋째 주의 상황을 살펴보자. 《조선일보》는 국민 여론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못한 채 일주일 내내 방송, 방송위원회, 내각, 민주노총, 변호사협회 등의 단체에 지엽적 문제를 제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국민 역량이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거나 “찬반 의사표시는 합법적이고도 평화적으로”라는 식의 말해도 그만 안 말해도 그만인 사설을 실었다. 반면 《한겨레신문》은 촛불 집회가 안고 있는 논쟁적 쟁점은 외면한 채, 일주일 동안 무려 4번에 걸쳐 촛불 집회를 적극 옹호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또한 《한겨레신문》 사설은 구체적인 정치 평론 없이 한국의 사회 문제를 “국가는 구성원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이다”(《한겨레신문》 2004년 3월 17일자 사설)라는 자연법적 명제를 확인해야 하는 수준으로 다뤘다.


전인권에 따르면 《조선일보》를 비롯한 한국 언론의 심각한 문제는 이른바 ‘세력화 방식에 의한 여론화’다. 이를테면 언론이 자기주장에 동조하는 지지자에게 아첨하거나 그런 지지자를 규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재판관의 얼굴을 하고 정론을 편다고 자부하지만, 이렇게 결정적 순간에는 대중에게 아부하는 독자의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양적 분석을 통해 볼 때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의 사설이 ‘세력화 방식에 의한 여론화’를 가장 많이 추구한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지적했다. 조중동이든 ‘한겨레, 경향’이든 한국 사회의 모든 언론이 흔히 비일관성과 비논리성을 지적받는 것은 바로 ‘세력화 방식에 의한 여론화’의 유혹에 일상적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운동이 시작되자 대중들은 그런 신문들의 비일관성과 비논리성을 손쉽게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인터넷 매체의 속성이 공론을 형성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다. 인터넷은 그보다는 여론이 개인의 취향이나 정치 세력에 따라 갈리는 것을 보여 주기에 좋은 매체이고 그렇게 생긴 전선의 대립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매체다. 나는 이미 2002년 대선의 언론 보도를 돌이켜 본 14장에서 미국 학자들의 입을 빌려 인터넷 매체의 소통의 문제점을 ‘집단극화’나 ‘사이버발칸화’라는 개념으로 짚어 본 바 있다. 즉 우리는 ‘공론 형성에 적합하지 않은 매체’를 무기로 ‘공론 형성에 적합하지만 그 임무에 태만한 매체’들을 공격했던 셈이다. 그래서 특히 참여정부 시기 인터넷상의 안티조선 운동은 조중동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지적했지만 ‘우리 편’이라 생각한 개혁 매체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다. 이른바 개혁 매체들은 참여정부 말기 정권에 비판적으로 돌아서고 나서야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변희재는 바로 이런 점들을 핑계로 안티조선 운동 진영을 이탈해 《조선일보》에 합류했다.

 
사이버 공간의 의사소통과 언론 문제


인터넷 시대가 가져온 언론 환경의 변화는 전 세계적이다. 사람들이 뉴스 정보를 공짜로 얻게 되면서 신문 기업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도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독립 언론 정론지’ 《르몽드Le Monde》는 매각됐다. 미국의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분쟁 지역에 더 이상 특파원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한국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데, 그것은 한국이 한 번도 제대로 된 ‘권력과 자본에 독립적인, 공론을 형성하는 정론지’를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미디어오늘》, 《시사IN》, 《프레시안》, 《한겨레신문》등의 언론들이 고군분투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런 단언이 야박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르몽드》나 영국의 《가디언Guardian》, 심지어는 적당히 상업적 성격을 지닌 《뉴욕타임스》와 우리의 언론들을 비교해 봐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조중동과 같은 주류 언론은 광고 수주를 통해 손익분기를 맞추고, 기자들에게 대기업 수준의 급여를 보장한다. 그래서 주류 언론의 기자들은 공을 들여 취재를 하고, 데스크는 그 소스를 토대로 제 언론사의 정치 성향에 부합하는 기사를 내보낸다. 공들인 기사의 취재 내용을 정치적으로 윤색하는 과정에서 소위 ‘마사지’가 행해진다.

 
반면 개혁적 정치 성향을 지닌 비주류 언론의 경우 생계를 겨우 해결할 수 있는 월급으로 한정된 취재를 해서 기자의 주관을 담아 기사를 써내는 경우가 많다. 주의 주장과 기사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비주류 언론을 향한 오랜 비판은 거기에서 나온다. 한국의 언론 환경은 《조선일보》나 조중동만 배격하면 개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한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정론지와 공론을 가졌던 선진국들도 인터넷 시대의 변혁에 고심하는 세태에, 그런 것을 가져 본 적도 없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는 매우 난감하다. 설령 변희재의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정당할지라도, 그의 선택이 틀린 이유는 조중동이 그런 종류의 공론을 형성할 의사가 없으며 실은 이해관계를 위해 그것을 방해하는 신문이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 시절에는 국민이 공론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다. 민주화 이후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의 룰이 합의되지 않는 가운데 양 세력을 지지하는 정파지들이 수준 낮은 이전투구를 일삼았다. 개혁 성향 언론들의 수준이 다소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 환경을 바꿔 버릴 만큼 결정적이진 않다. 그런 사회에서 냉소주의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조선일보》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처럼, 《한겨레신문》은 민주당을 지지한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정말 그런 수준에서 나라가 운용되어도 별문제가 없다고 믿는다면, 《조선일보》든 《한겨레신문》이든 KBS든 MBC든 다 없애 버리자고 말하는 게 타당하다. 그 정도의 의사소통은 인터넷에서 사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국에선 부족한 공론의 역할을 인터넷 세상의 대안 매체가 채워 줘야 한다. 가령 삼성의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의 경우, 진보 언론도 광고를 내기 저어하는 현실 때문에 트위터(www.twitter.com)에서 트위터리안Twitterian들이 자발적으로 광고를 해야 했다. 다행히도 이 책은 15만 부를 넘기는 판매 부수로 베스트셀러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현실은 트위터와 같은 신문물 혹은 신매체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주지만, 그것에 안주해선 안 된다. 신매체의 가능성과 힘을 찬양하기만 해서야 안티조선 운동의 실패를 반복하는 길밖에 없다. 지난 10년의 세월은 기술 진보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득권 세력을 타파할 수는 있어도, 자동적으로 정치적인 진보를 이끌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지난 10년간 기술만능주의자들은 언제나 발달된 기술이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가져다줄 거라고 주장해 왔다. PC 통신, 커뮤니티, 웹진, 블로그 등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신중론자들은 기술만능주의자들을 인문학적으로 소심하게 공박하는 데 그쳤을 뿐, 기술 진보의 함의를 제대로 읽어 내지는 못했다. 온라인에서 형성된 주체를 오프라인으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던 2008년의 촛불 시위는 신문물에 비판적이거나 유보적이었던 강단 좌파 지식인들에게마저 신문물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심어 줬다. 오늘날 트위터를 둘러싼 논란에서 반복되는 모습도 사실상 그것과 같다. 도대체 트위터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이 무엇이기에 진보를 이끌고, 동시에 한계점을 보이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기술 진보를 둘러싼 논의의 쳇바퀴를 다람쥐처럼 달려야 한다.

 
우리가 사이버 공간에서 느끼는 쾌감은, 역설적으로 부족 사회의 그것이다. 우리의 유전자가 구성된 구석기 시대에 인간은 50명에서 150명 사이의 부족들 얼굴만 인지하면 생활할 수 있었다. 그 사람들과 긴밀한 정서적 교류를 즐기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발달시켰다. 기술이 더 발전하고 도시가 건설된 후, 인간은 그러한 종류의 인간관계를 상실했다. 그런데 기술 발전의 궁극에 있는 사이버 세상이 우리에게 돌려주는 인간관계가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사에게 찍소리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직장인에게 동질적인 사람들을 찾아 주는 트위터의 위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런 위안이 없다면 우리는 한세상을 버텨 내지 못할 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문제는, 우리 사회가 ‘부족 사회’보다 훨씬 큰 사회라는 점이다. 그리고 정치적 문제라는 건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닌 다종다양한 성격의 집단들이 어떤 최소한의 공통 윤리를 형성할 때 풀릴 수 있다. 다시 말해, 공론화와 공론장이 필요한 셈인데, 인터넷 세상에서 그것은 성립하기 힘들다.

 
트위터는 사이버 공간의 진화 과정에서 하나의 극점이다. 인터넷 시대의 여명기에 게시판에서 논쟁할 무렵 우리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 끈덕지게 싸울 수 있었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인 사람의 주장이 더 옳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소모적인 시대였지만 말이다. 그러다 블로그 시대가 개막되자 싸움의 양상은 조금 시시해졌다. 댓글이나 트랙백으로 싸워 봤자, 한쪽이 싸움이 지겨워지면 새 포스트를 쓰며 논쟁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면 됐기 때문이다. 이제 트위터 시대에 사정은 훨씬 단순해졌다. 만일 상대방과의 논쟁이 싫다면, 당신은 ‘언팔로우Unfollow’ 버튼 하나만으로 상대를 지울 수 있다. 내 타임라인Time Line에서 그가 사라지면, 내 세계에선 그의 존재도 사라진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구성한 ‘취향의 부족’ 속에 자신의 위치를 잡는다. 공론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들이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이 ‘파편화된 취향의 부족’의 다발로서만 사회를 구성하고 지각하게 될 것이다. 신문이 매체의 중심이었던 시대에서조차 공론을 형성해 본 경험이 없는 한국 사회는 그런 지경에 굴러떨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미국에서 ‘취향의 부족’을 만들어 내는 매체는 페이스북(www.facebook.com)이다. 페이스북은 자족적인 타임라인에 만족하는 트위터에 비해 뉴스 정보의 유통량이 많은 매체다. 그런데 페이스북 유저들은, 뉴스를 생산자가 편집해서 배치한 그대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들이 ‘라이크Like’ 버튼을 찍은 뉴스를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페이스북 속에서 나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들이 소비한 뉴스를 무한히 소비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선택된 정보 속에 갇힌 귀납 추리의 오류’다. “맞아!”, “맞아!!”, “맞아!!!”, “맞아!!!!”라며 자기 확신을 반복하는 이 폐쇄적인 자아가 사이버 공간에서 뉴스를 소비하는 표준적인 자아다. 한국에서도 최근 다시 한 번 페이스북 유저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제부터 우리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뉴스 소비 형태 속에서 어떻게 정치를 말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언론은 무얼 먹고사는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언론 운동이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언론 기업이 공론을 포기한 사회에서, 우리는 (공론을 형성하기 어려운) 인터넷 공간에 공론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목격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를테면 인터넷 대중의 속을 긁어 주는 ‘인터넷 독립 언론’의 가능성은 특히 한국에선 수익 구조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는 현실에 부딪힌다. 미국에서조차 전업 블로거의 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추세다. 더구나 한국의 블로거들은 하루 수만의 히트를 찍어도 그것을 소득으로 변환시키지 못한다.

 
설령 수익 구조가 생긴다 해도, 이 독립 기자들의 연대체가 가령 분쟁 지역에 특파원을 보내거나 교육 기사 특집을 위해 핀란드에 기자를 보내는 식의 ‘고급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한 장기적인 투자’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일은 기존의 언론 기업에 소속된 기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자본이나 국가 기관이 명예 훼손 소송을 남발할 때, 개인이 조직보다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인터넷 독립 언론’이 기존 매체보다 훨씬 손쉽게 권력에 순화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 사이트의 경우, 참여정부 시절 ‘신권언 유착’의 대상으로 변희재의 규탄을 받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 아래에선 정치 평론 자체를 거세하는 방향으로 메인 화면을 편집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가 순화되고, 방송이 ‘장악’ 논란과 함께 친정부적으로 돌아서고, 오직 《경향신문》과 《미디어오늘》, 《시사IN》,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한겨레신문》과 같은 매체들만이 남아 고군분투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이후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다가 2년 넘게 삼성의 광고를 수주하지 못했다. 《프레시안》은 삼성으로부터 20억 손해 배상 소송의 ‘협박’을 받은 전례가 있다.《시사IN》은 애초부터 《시사저널》의 기사를 삼성이 ‘검열’하는 데 반대한 기자들이 만든 매체다. 자본 권력과 불화를 겪는 매체들의 운명은 평탄치 않다. 광고가 충분하지 않을 때, 신문을 찍으면 찍을수록 손해가 나는 현실에서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은 2008년 촛불 시위 이후의 눈부신 구독자 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 결과 이 신문들은 건설 업체들의 눈치를 보느라 부동산 보도에서 충분히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적 조건이 콘텐츠의 진보성을 제약하는 셈이다.

 
참여정부 시절 이런 매체들은 정부 광고와 공기업 광고를 수주할 수 있었다. 참여정부가 언론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그런 광고 집행을 한 건 옳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임기 말기, 한미 FTA 광고를 무차별 살포해 이 정책 사안에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개혁 매체들을 길들이려고 한 것이 안쓰러웠을 뿐이다.《프레시안》은 잠깐 한미 FTA 배너 광고를 걸었다가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내부 토론을 진행했는데, 격론 끝에 젊은 기자 한 사람이 울음을 터뜨려 그 광고를 거부하는 결의를 다졌다.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는 회의를 정리하면서 “내가 여러분을 굶길 수는 있어도 울릴 수는 없지 않느냐”는 명언을 남겼다. 이 사건은 개혁 언론의 물적 토대를 지탱하는 ‘대주주’가 개혁 정권일 때 어떤 통제가 시도되는지를 보여 준다. 참여정부 지지자들은 개혁 언론들도 정부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트리지만, 특히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의 경우 오랫동안 정부가 내세운 ‘개혁 대 수구 기득권’의 틀 속에서 정부를 방어했다. 우연히도(?) 정부의 기조에 맞춰 ‘《중앙일보》 예외론’을 천명하게 된 민언련과 같은 언론 단체도 마찬가지였다.

 
개혁 언론들이 기업으로서 현상 유지를 위해 정부의 특별한 지원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것은 그들이 맹목적으로 ‘민주당 정권 교체’를 위해 노력하게 될 강력한 유인으로 작용한다. 한나라당 정부가 그들을 지원하지 않을 것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임기 후반기 조중동과 경제 신문 등은 종합편성채널 방송 문제와 관련해 정부와의 관계를 저울질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에선 진보 언론들의 보도 행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은 개혁 언론들이 선거 국면에선 결과적으로 민주당 위주의 기사를 양산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질적 이해관계가 논조를 규정하는 상황은 앞서 말한 공론형성의 관점에서 볼 때 최악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언론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언론 운동이 필요한 이유


우리는 종종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손님이 종업원을 불러내서 음식의 질이나 불편한 서비스에 대해 비난하는 광경을 본다. 슬픈 것은 그렇게 불려나와 경을 치는 종업원도 대개 소비자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란 사실이며, 그 소비자는 자신의 파트타임 노동 경험을 근거로 그 종업원을 더 효율적으로 괴롭힌다는 거다(이를테면 ‘당신이랑 말할 생각 없으니 점장 불러 주세요!’라고 다그친다든지). 물론 그 소비자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광경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무언가에 대해 불만을 품어 봤자 괴롭힐 수 있는 것은 비슷한 우리들 밖에 없다는 참혹한 진실을 보여 준다. 소비자일 때는 말단의 노동자나 자영업자들을 괴롭히고, 내 노동 시간엔 또 다른 소비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우리의 삶을 훨씬 강력하게 규정하는 자본 권력과 정치권력은 대개 이들의 ‘사적인 복수극’에 신경 쓰지 않고 마치 자신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이 뒤로 숨는다. 공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문제를 사적인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군대를 가지 않는 사회 지도층에 쌓인 박탈감을 나이 어린 외국 국적의 연예인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해소하는 온라인상의 세태도 실은 이와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

 
그래서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 사회는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을 대신 호출해 낼 수 있는 중간 단체들을 조직해 왔다. 언론은 정당, 이익 집단, 운동 단체들과 함께 그런 중간 단체들 중 하나다. 만일 우리가 신문 한 부를 600원에 구입하지 않고 5천 원을 주고 사게 된다면 그러니까, 월 15만 원의 구독료로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가 10만 명만 존재한다면, 우리의《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은 정부와 삼성의 비리를 낱낱이 까발리고 양질의 대안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매체 환경에서 이런 가정은 현실적이지 않다. 사라져 가는 《르몽드》나 《가디언》에 해당하는 매체를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 내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그런 목표를 염두에 두고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신문 광고 시장의 현실상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을 단순히 구독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면, 주간지 구독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 《오마이뉴스》과 《프레시안》에 대해 우리는 소정의 구독료를 납부하는 독자 모임이 콘텐츠의 독립성과 질에 대한 평가를 하는 식의 제도적 변혁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블로고스피어와 트위터 세상이 공론 형성에 적대적이라도, 블로거 연대나 트위터리안 연대가 공론 형성에 기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인간은 환경에 속박되지만 오직 그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진 않는다. 세계가 줄곧 바뀌어 왔던 것은 그 때문이다. 언론 운동이 왜 필요하며 어떤 방향으로 필요한지를 납득한다면, 우리는 안티조선 운동이 실패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꾼 사람들을 통해 언젠가는 안티조선 운동도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예비하는 어떤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 지도 모른다. 실패한 운동의 참여자가 그 운동의 기록물을 세상에 내놓으며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전망은 이 정도다.



ㅇㅇ

2011.09.11 00: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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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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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9 박가분의 최장집주의 비판과 진보정당 운동론에 대한 논평 [15] [1] 하뉴녕 2011-02-11 14946
1288 이영훈은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했던가? [88] [1] 하뉴녕 2011-02-07 11074
1287 키워질의 진화심리학적 기원 [2] 하뉴녕 2011-02-05 3372
1286 평양성 : 다시 돌아온 코미디 현실풍자 사극 file [17] 하뉴녕 2011-01-31 3878
1285 한국 보수와 진보의 판타지 [28] [2] 하뉴녕 2011-01-26 5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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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3 그 과학자의 독백에 대해 [9] 하뉴녕 2011-01-19 5792
1282 정치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 [40] [1] 하뉴녕 2011-01-15 6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