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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정치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

조회 수 6661 추천 수 0 2011.01.15 21:03:04

우리가 아는 정치평론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인민의 정치적 관심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체제가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특수계층의 몇몇만 정치를 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심신수양과 행정업무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이 담긴 목민심서 같은 실용서이지, 정치평론은 아니다.  내가 스스로 맡지 않을 업무에 대해서도 떠드는 것이 가능하단 전제 하에, 정치평론이란 것이 성립한다. 군소정당의 경우 필드 플레이어와 관중석의 거리가 훨씬 가깝기는 하지만, 이 전제조건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치평론이란 것에 초월적 논증이 난무하는 것은, 애초에 이것이 본인이 할 일이 아닌 것에 대해 떠드는 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정치평론에 초월적 논증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 사고를 배격하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인가?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치평론이 '실천'에 관계되는 장르이기 때문일 게다. 데이터에서 출발하는 정치평론, 예리한 직관을 통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하는 정치평론, 뇌내망상에서 출발하는 정치평론은 질적으로 다르며, 사실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섬세한 경험적 데이터에서 출발하는 정치평론도 주장하는 바에 이르면 초월적 논증의 형식을 띄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이 초월적 논증의 형식은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면 이렇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X가 있다. 그리고 이 X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A와 B가 있다. 그런데 B는 아무래도 불가능한 방책이며, A에겐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X를 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A를 추구해야 한다.


놀랍게도 이 논증구조는 일반적인 정치평론에 매우 폭넓게 분포하는 형식이다. 많은 정치평론들은 일견 경험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경험적인 얘기는 B가 어째서 불가능한 방책인지를 설명하는데 그치고 있단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X에 도달해야 하므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A다. 이것은 칸트가 윤리법칙의 성립을 위해 초월적으로 '자유'의 이념을 요구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이 아닌가?


몇 가지의 예시를 들 수 있다. 가령 (자칭) '좌파'들이 자주 벌이는 공산주의-사회민주주의 논쟁을 생각해보자.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이미 실패했음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에 올바른 방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역사적 공산주의 체제가 이미 실패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올바른 방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까지가 그들이 '경험적으로' 말하는 바다. 그 이후 그들이 자신의 이념을 옹호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초월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제각기 B가 불가능한 방책임을 주장할 때, 그들은 우익들이 정리하고 내세운 경험적 논거들을 쉽게 수용한다는 것이다. 사민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실패를 말할 때, 공산주의자들이 복지국가의 실패를 말할 때, 그들은 우익의 언어를 쓴다. 따라서 우익들은 손쉽게 두 개의 경험을 모두 받아들여 "이제 우리에겐 어떠한 좌파도 가능하지 않다."고 조소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좌익들은 이들이 내세운 경험은 일회적인 것이며, '한 번의 기회를' 더 보장해준다면 모든 일은 잘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한 번의 기회'를 더 요구하는 것은 A의 방책에 대해서만 그렇다. 그들조차 B가 불가능함을 설명할 때엔 우익들이 내세운 그 경험에 대한 설명을 반복한다.


한국 정치 영역에서 벌어지는 "민주당 강화(...내지는 진보적 견인)론" vs "진보정당 독자노선론"의 대립 역시 마찬가지다. '빅텐트'론의 주창자들은 진보정당의 독자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빅텐트'론이 옳다고 한다. 초월적이다. 진보정당 독자노선론의 주창자들은 민주당이 개혁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보정당의 독자노선이 당위적으로 요구된다고 한다. 역시 초월적이다. "이것 외엔 길이 없다."는 말은, 셜록 홈즈에겐 추리의 기술이지만, 정치평론에 있어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야 하는 당위의 요구다.


햇볕정책과 대북 강경책의 대립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강경책의 지지자들은 햇볕정책이 북한 위정자들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강경책이 답이라고 말한다. 햇볕정책의 지지자들 역시 강경책이 북한 위정자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혹은 강경책이 진짜로 성공하여 정권이 붕괴되는 것은 결코 감내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햇볕정책이 답이라고 말한다. 햇볕정책 지지자에게 북한의 모든 도발은 햇볕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반면 강경책의 지지자들에게 북한의 모든 도발은 강경책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어떤 사건이 터지고, 경험이 축적되고, 분석이 쌓인다 해도, 이 양자의 초월적 논증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양측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초월적 논증의 구조는 종종 인과관계의 문제와 결합하기도 한다. 초월적 논증이 시작되기 전에, 현실비평 단계에서, 우리는 인과론으로 문제를 진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이전 글
2011/01/14 - [정치/정치평론가들] - 최장집에 관한 두 가지 오해, 그리고 한국 정치 에서 제시한 최장집과 이상이의 대립을 생각해보자.


최장집(+진보신당) : 한국에 복지국가가 오지 않는 이유는 노조조직률이 10%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조직률이 높아지지 않으면 복지국가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복지국가 담론에 파묻히기 전에 노조조직률 확대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이상이 : 노조조직률이 10%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국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조직의 강화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조조직률 문제를 따지기 전에 일단 복지정책 프로세스를 갖춘 정당이 집권하여 복지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 상반된 인과관계 속에서도, "B가 불가능하니 A가 답"이란 초월적 논증이 횡행하지 않는가?


사실 두 사람의 논리는 둘 중 하나가 그른 것이 아니라, 모두 옳다. 현실세계의 인과관계라는 것이 한쪽이 원인이고 한쪽이 결과인 단선적인 관계를 맺기 보다 인과의 연쇄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박노자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이명박을 지지할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 "자영업자 비율이 많기 때문."이란 대답을 던졌다.(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가설이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계급투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자영업자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라는 원인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한번 그 원인에 대해, "그렇다면 한국에 유난히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어떻게 될까?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답은 간단하다. "한국에 자영업자 비율이 쉽게 증가하는 이유는, 노동계급이 강고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원인판단이 나온다. 결국 원인과 결과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두 마리의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듯 엉켜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 원인을 파악하자면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원래 선진국에 비해 높은 편이었고, IMF 이후 실업자들을 흡수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가 정책을 펼치면서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원인'이 규명된다 하여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적 원인'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원인이 결과를 낳으면, 그 결과 역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어 다음의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월적 논증은 우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실천'을 요구받을 때 나올 수 있는 인간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과학적인 세계인식'은 아닐지라도, '인간에게 필요한 세계인식'일 수 있는 것이다. 100번의 초월적 요구에서 1번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런 요구를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천의 영역에서 초월적 논증이 소거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논리학의 영역이 아니라 심리학의 영역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섬세한 정치평론에 있어, 초월적 논증만이 난무하는 것이 유일한 길인가 하는 의구심은 든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 민주당을 개혁하는 방법과 진보정당을 키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 중 무엇이 바른 길인지는 정치학자가 대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는데, 실천이 아니라 평론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솔직하게 무력함을 고백하는 태도가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정치평론이 민주주의 국가의 일인 이상, "똑똑한 나-정치평론가가 길을 제시해 주겠노라."는 자세도 (가끔은) 필요하겠지만, "문제가 이러이러하니 같이 고민을 해서 길을 찾아봅시다."라고 사태를 밝히는 것이 문사의 임무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특히 최근 한국사회의 큰 화두인 대북정책 영역에서 초월적 논증을 벗어나는 태도가 아쉽다. 조중동과 한겨레/경향/시사in/프레시안/미디어오늘 이란 여론매체의 두 블럭은, 대북정책 보도의 99%를 앞서 내가 소개한 초월적 논증을 반복하는데 할애한다. 강경책을 택하려고 해도 미국이 전쟁까지 동의해 주지는 않고 (물론 한국인들이 전쟁을 원하지도 않지만) 햇볕정책을 택하려고 해도 민간인 사망 이후 사과도 받지 않고 지원을 하는 것에 대한 여론의 동의를 구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양 진영이 북한에 대한 남한의 무력함을 고백하지 않고 초월적 논증의 성을 쌓아 올리는 것만 반복한다면 정치평론의 역할이 의심스럽다.


사실 두 진영의 경쟁에서 드러나는 것은, 남한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으며, 오직 그들의 존재가 남한 사람들이 쌓은 경제적 부를 위협할 때에만 그 존재를 깨닫는다는 것, 그런 북한의 존재를 심리적으로 지워버리기 원하며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겠다 말하는 정치인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햇볕정책이든 강경책이든 사실상 정치인들이 저 민망한 북한이란 대상을 지워버릴 수 있다고 유권자를 기망하는 것인데, 일단 이 기망을 떨쳐내고 북한의 존재를 심각하게 인지하는 시민적 합의가 있어야 어떤 식으로든 (민주적 합의에 의거한) 대북 정책이란 것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indmyrule

2011.01.16 01:52:03
*.117.169.41

화자의 초월적 논증이 기대하는 것은 청자의 초월적 감수성이 반응하는 것일까요. 저도 마침 정치적 감수성의 취향화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화자에게 초월적 논증이 채택되는 전략적 함의를 고민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역시 '초월적'으로 잠정지었던 결론은 우리의 일상에서 초월적 사고가 높은 확률로 성공적인 탓이 아닐까 했었는데요. 공감이 욕망의 문제라고 하면 제 전공의 한계를 넘어가므로(!) 공감은 아비투스의 문제로 보기로 마음먹었(!)었죠.
암튼 고작 '공감' 하고 갑니다. ;)

하늘타리

2011.01.16 03:05:08
*.36.207.80

각종 평론에서 나타나는 초월적 논증의 문제는 날카로운 지적 같습니다. 다만 읽으면서 두 세가지의 구분되어야 할 사항이 좀 섞여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저 자신이 좀 잘 이해하기 위해 굳이 구분해봤습니다.

먼저 초월적 논증의 첫 번째 문제점은 오로지 정해진 수의 상호배타적인 대안만 존재한다 (exhaustive) 라고 못박고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 가정이 사실이 아니라면 즉 A와 B가 아닌 다른 대안들도 사실 존재한다면, 그 논증은 무효화되죠. 실제로 상당 수의 그런 가정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라는 두 이념형 사이에는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할 수 있죠. 대북강경과 햇빛정책 사이에도 마찬가지고요.

오로지 몇 개의 대안들만 가능하다는 가정은 아마도 거의 반드시(?) 그 대안들을 통합하는 하나의 이론에서 나올 수밖에 없을텐데, 거의 사실과 다르죠.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이론들, 대북강경과 햇빛정책 이론들이 하나의 공통의 인식론적, 논리적 기반을 갖춘 하나의 이론에서 나온 대안들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같은 현상을 다르게 보는 관점들이고 따라서 대체로 상호배타적이어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체제를 놓고 사민주의자들은 사회주의라고, 사회주의자들은 개량적 사민주의라고 볼 수도 있죠. 이런 공통의 가정도 부재하는 초월론적 논증은 그 시작부터 틀릴 수밖에 없죠.

다른 하나는 초월적 논증의 그 초월적 특성이 문제입니다 (응?). 윤형님이 박상훈 선생을 적절히 인용하시면서 지적하신 바대로, 모든 이론적 주장은 어떤 조건에서는 늘 옳습니다. C1에서는 A가 옳고, C2에서는 B가 더 맞죠. 초월론적 논증은, A를 선호하든 B를 선호하든 간에, 모든 시대적 맥락과 조건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반화된 정답이 있다고 가정하고 시작합니다. 따라서 조건부선택을 포함하는 수많은 보다 현실적이고 유연한 선택들은 애초 고려대상이 아니게 되죠. 결국 모든 글은 A와 B라는 대안이 있다는 가정 혹은 전제로 시작하는데, 이것부터 사실 틀리니까, 대책도 안드로메다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초월적 논증의 세 번째 문제점은 두 경쟁하는 대안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가정입니다. 자영업자 계급과 이명박 당선 간의 관계에 대한 지적이 그 문제가 되겠죠. 또한 대북강경론과 햇빛정책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겠고요. 초월론적 논증은 A와 B가 독립적이라고 가정 아니 둘 사이의 어떤 관계성에 대한 고민 자체를 무시한 채 시작하기 때문에, 만일 A의 발생 혹은 채택이 B의 발생 혹은 채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국 자신들의 논증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어떤 답도 가지지 못하게 되죠.

제 독해(!)는 여기까지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하뉴녕

2011.01.16 11:14:09
*.40.203.249

'초월적 논증'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구별해주셨습니다. 제가 직관적으로 문제시하던 부분들을 더 명료하게 풀어주신 것 같습니다. 이제 주대환이나 심상정 같은 '선수'들이 내세우는 정치공학을 무리없이 논파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만 제 글이 어지러워진 것은 문제점들을 명료하게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늘타리 님의 정리와는 조금 결이 다르게 '초월적 논증' 자체를 배격하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글에는 몇 가지 종류의 초월적 논증이 등장합니다. 햇볕정책-강경책 관련한 초월적 논증에 관해서는 이미 제가 본문에서 비판을 하고 있구요. 공산주의-복지국가 초월적 논증에 대해서도 명확히 언급은 안 했지만 비판적입니다.(하늘타리 님 정리를 가감없이 따라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저는 초월적 논증을 필요악이라고 느낍니다. 인용한 부분 중에선 최장집과 이상이의 주장이 대표격이겠는데요. 저는 이상이의 정치평론에 그닥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의 논증이 초월적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 이전의 현실파악이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를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무언가 실천적인 타격지점을 제시해야할 때, 논증은 대개 초월적 형식을 띄는 것 같다라고 저는 느낍니다.


잘 정리해주셨듯이 지적인 사태파악은 "C1에서는 A가 옳고, C2에서는 B가 더 맞"습니다. 레닌주의적 혁명정당이 실패했으니 영국 노동당 노선을 택해야 했고, 그조차 실패했으니 이제 미국 민주당 노선 밖에 답이 없다는 주대환 논리에 제가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이 그렇게 논리적(?)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제갈공명적 논평가들이 넘치는 한국 사회에서 되도록 피해야 하는 유비입니다만, 병법으로 쳐도 한신이 배수진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따른 신립이 성공을 거둔다는 보장이 없지요. 혁명가나 유럽의 스타 정치평론가를 좋아하는 정치평론 잡글쟁이들이 (물론 저도 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만) 종종 놓치는 지점입니다. 그렇지만 병법서 저자가 아니라 장군 내지(병사 몇명 없을지라도) 전략참모의 입장이라면 모종의 결론을 내리고 이 방향으로 가자고 말해야 될 때도 있는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럴 때에 그 논증은 초월적 논증을 벗어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철학사에서 대표적인 초월적 논증이 본문에서 인용한 칸트의 것이고, 현대분석철학에서는 의미이론을 위해 데이빗슨이 가정하는 '자비의 원리'가 있을텐데, 이것들 모두 실천적인 것과 관련이 있지요. 칸트의 논증은 "윤리적 실천이 이미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데이빗슨의 논증은 "우리가 의미를 이해하며 실제로 문제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성립합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결정하는 행위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초월적 논증을 피해갈 수 없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초월적 논증의 폐해를 충분히 고려하는, 가장 세밀하게 지적인 숙고를 거듭한 다음 초월적 논증을 가미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글을 훌륭한 정치평론이라고 느끼게 되겠지요.


꼭 그런 차원이 아니더라도, 분량의 제한이 있는 저널의 영역에서는 문제제기 하나를 던지기에도 급급한 만큼 초월적 논증을 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얘기한 박노자의 경우도 제가 말한 부분을 모르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박노자 자신의 글에 그런 암시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영업자가 많은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는 강조를 하기 위해, 그런 인과관계를 설정한 것이겠지요.


지적인지는 몰라도 학적이지는 않은 제 논의를 충실하게 보강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블로그 보면서 많이 배우려고는 하는데, 그래프는 이해를 못해서 어렵습니다. ^^;;

하늘타리

2011.01.18 11:45:41
*.36.207.77

결국은 초월적 논증이고 어떤 논증이고 간에 얼마나 튼실한 가정 속에서 주장을 시작하는가가 관건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말씀하신대로 실천의 영역에서는 불가피하게 윤리적 판단이 가미될 수밖에 없는데, 그 자체는 성격상 초월적일 수밖에 없겠죠. 제 생각에는 실천가능한 정치적 전략을 제시해야하는 행동가나 정치가의 영역에서는 그런 부분이 분명 한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나, 보다 객관적인 득과 실이 고려되어야 하는 정책의 영역에서는 최대한 배제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배우기는 제가 훨씬 많이 윤형님께 배우고 있는 거 같은데요. 이해 못해서 어려운 그래프는 아마 망한 그래프일 겁니다.

눈팅

2011.01.16 18:33:32
*.34.136.195

본문과 덧글까지 잘 읽었고 유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린아

2011.01.17 16:49:55
*.122.14.92

그러므로 햇볕정책이든 강경책이든 사실상 정치인들이 저 민망한 북한이란 대상을 지워버릴 수 있다고 유권자를 기망하는 것인데, 일단 이 기망을 떨쳐내고 북한의 존재를 심각하게 인지하는 시민적 합의가 있어야 어떤 식으로든 (민주적 합의에 의거한) 대북 정책이란 것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 문구도 어떤 면에서는 초월적 아니에요?^^;;; 전자들이 작동하지 않으니 후자가 필요하다는 식의 논증이라서요;;;

하뉴녕

2011.01.17 16:56:15
*.149.153.7

네? 북한을 지워버리려는 노력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 건 맞죠. 근데 그냥 그걸 인지해야 다른게 가능하다는 것이지 그 다음 방책이 뭐가 될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한게 없는데도요?


뭐 "불가능한 일을 계속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고, 비윤리적이다."라는 정도의 가치판단을 미리 깔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네요.

기린아

2011.01.17 17:25:43
*.122.14.92

시민적 합의를 강조하신 부분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 거니까요. 이 글 자체로는 왜 시민적 합의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논증한 바가 없지 않나 해서요;;;

하뉴녕

2011.01.17 17:28:52
*.149.153.7

음, 제가 철학자 이름 하나 끌어왔다고 지나치게 문제를 제로베이스에서부터 시작하시려는 것 같은데, ;;;

1) 무슨 정책이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추구되려면 시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어떠한 논증이 필요할까요?

2) 오히려 어떤 정책이 시민적 합의의 과정을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논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뭔가 예외적인 이유가 있어야 할 테니까요.)

기린아

2011.01.17 17:57:41
*.122.14.92

민주사회에서 추구하려면 시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의외로 많은 논증이 필요하다는 것은 차치하고... (당장 한국만 해도 시민적 합의로 민주주의가 도입된 것도 추진된 것도 아니니까요.)

시민적 합의를 굳이 지적하신 이유를 이 경우 도대체 알 수 없게 됩니다. 앞의 두가지가 시민적 합의가 부족해서 문제고 시민적 합의가 되면 잘될거다, 라는게 아니라면 시민적 합의에 대한 지적의 의미는 공중에 붕 뜨겠죠.

하뉴녕

2011.01.17 19:08:47
*.27.157.70

민주주의가 도입되는 것과 민주주의의 의사결정은 전혀 다른 문제아닌가요? 그리고 '시민적 합의'가 점프라고 생각하셨다면 '초월적'이라 지적하시느니 '뜬금없다.'고 하시는게 나았을듯요. ㅎ 저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시는진 모르겠는데 전 북한에 대한 망각이 이 사태의 원인이라면 다들 그 강박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혹은 무력함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지하고 다른 정책을 고민해야 할 거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cimen7

2011.01.17 18:11:01
*.108.137.173

안티조선 운동사 잘 읽었습니다.

1. 서두의 심하게 간추린 언론사를 읽다가 강준만의 저서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고, 각주로 여러차례 확인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흔히들 남의 글 인용하는 걸 그렇게 세세히 드러내진 않잖아요. 정치자금 고백하던 김근태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2. 함께 느끼고 고민하고 실망했던 역사의 관통지점을 다시 더듬어 나가는 작업이 얼마나 가슴 저린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끝을 알면서도 다시 돌려보고 제발 이 지점에서 다른 선택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까지 들었다면 너무 바보같은 일일까요?

3. 며칠전에 '위키리크스'라는 단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문득 안티조선이란 말에서 어떠한 감흥도 일지 않는 사람이 책을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생각해봤습니다. 안티란 말에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낄지, 아니면 잊혀진 유적을 발굴한 고고학자처럼 새로운 청량감에 들뜰지 궁금하더군요. 후자의 감흥이 더 널리 퍼지길 바랍니다.

4. 1쇄임에도 불구하고 오타 한 자 없는 책은 별로 못 본 거 같네요. 편집자분들의 수고가 절로 느껴집니다. 굳이 매의 눈으로 찾아낸 흠결이 363p 아래에서 5번째 줄의 '재판소는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의...' 대목의 띄어쓰기 하나였답니다.

5. 안티조선의 경험을 발판 삼아 삼성타도의 협소함을 극복하고, 전체 언로(言路)를 상향평준화 하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ㅎ) 이젠 매트릭스의 복제자가 너무나 많아졌으니까요. 서로 자폭이라도 해준다면 참 좋겠네요.

6. 386세대가, 참여정부가 그랬듯이 나의 젊음을 근거로 지금의 젊음을 판단하는 우를 범한 건 아닌가 되돌아봅니다. 모양은 비슷해보여도 내용물은 어찌나 다른지요.

7. 결론 : '정리의 달인' 정달 한윤형 저. 다음 책 기다리겠습니다. 건강하세요.(→ 기회가 된다면 술 한잔 하고 싶네요.)

하뉴녕

2011.01.18 11:30:43
*.149.153.7

수신인만 바꾸시면 훈늉한 리뷰인데 좀 고쳐서 리뷰로도 올려주세요....ㅠㅠㅠㅠ

여튼 제가 기대한 독자반응인지라 너무 반갑습니다....*^_^*

cimen7

2011.01.18 12:26:19
*.108.137.173

알라딘에서 책을 사긴 하는데, 리뷰를 공개적으로 써 본 적이 없어서요.

윤형님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며 함 올려보겠습니다.

버러지

2011.01.18 13:27:04
*.160.121.229

한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초월적'이란 것은 transcendent(de. transzendent)에 대한 번역어로 생각됩니다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transcendental(de. transzendental, 초월'론'적, 선험적)을 염두에 두고 사용하신 개념이라면 약간 논란의 소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후자의 경우 경험사용의 형식적 가능조건을 탐구하는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의 탐구방식에 한정된다고 생각됩니다. 이 때에는 객관적 실재성을 주는 감각경험과 '괴리'되는 내용을 배격한다는 의미가 또한 포함될 것이라 여겨지고요. 반면 전자는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대상'의 '실재'에 대한 주장을 비판하는 부정적 평가가 가미된 수식어로 사용되는 게 일반적이라 생각됩니다. 더구나 '실천'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후자로서 '초월론적/선험적 논증'이 사용된다는 점도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아마도 칸트 입장에서는 'a와 b 중 가능한 쪽이 a이므로 a를 추구해야한다'라는 식의 논증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전통적)변증론이라 비판할 듯 싶네요. 이념의 추구는 순형식적이며 따라서 경험적으로는 실재성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을 취급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념을 전통형이상학의 '구성적 이념'과 대비시켜 '규제적 이념'이라 말하고 그 자체의 독립적 실재성을 부정함에 있어서 비판의 도구가 '초월론적/선험적(transzendental) 변증'이고 말씀하신 정치평론의 형식은 전형적인(또한 칸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전통 변증론의 그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형식은 구체적 사실과 괴리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떤 긍정적 의미를 찾아내기 어려운 형식이기도 할 것입니다. 덧붙여서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윤리 및 도덕의 순수형식만을, 그것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룰 따름이고 그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명시하는 방식을 배격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표인 X를 이루는 방안 a와 b 중 가능한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 라는 것은 칸트의 입장에서 가능한 논증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蟲-

하뉴녕

2011.01.18 15:31:52
*.149.153.7

칸트 수업 들을 때는 좀 달랐겠습니다만, 지금 제 머리속에서 transcendent와 transcendental의 의미가 명료하게 구별가지 않기 때문에 (혹은 뭐가 뭐였고 특정한 상황에 관계되는 것이 둘중 뭐였는지가 헷갈리기 때문에) 양자 모두의 번역어가 될(수도 있는) 적당한 말을 채택하고 원어병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잠깐 찾아보니 백종현역에서는 '초월적'이 transcendental이고 최재희역에서는 transcendent 네요. 아직도 transcendent 를 초월적이라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제 경우 칸트적 의미의 개념 뭐를 가지고 설명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철학사에 초월적 논증들이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에 칸트의 것이 있다, 고 얘기를 한 거라서 칸트의 용법에 엄밀하게 들어맞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이 용어가 (칸트를 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이 제가 이 글에서 사용한 방식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소지는 있는데, 그런 것인 걸까요? 말씀하신 대로 이건 '논리적'인 판단이긴 한데, 저는 사실 저게 가정적 상황에서만 논리적이고 그런 가정상황이 현실세계엔 있을 턱이 없는지라 '유사논리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교체가능한 다른 적당한 단어가 있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버러지

2011.01.18 16:19:50
*.160.121.229

칸트에 국한된 세부적인 논의는 제 주제에 더 말씀드리기도 저어되고, 마침 heterosis님께서 정리하신 글에 링크된 김영건 선생님의 글들이 있으니 그 글을 추천해 드리는 게 저로서는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월론적'이나 '선험적'이란 개념은 칸트의 독창적인 개념인지라 아마 일반적 사용을 말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윗글의 내용에 결부시켜 사용될 만한 용어라면 '초월적 변증'이란 게 아마 칸트맥락으로 적절할 듯하고, 일반적인 용어로 마땅한 것이 무엇일지는 딱히 저로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직접 말씀하신 '유사논리'라는 것으로 논의를 전개하시는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언뜻 듭니다. -蟲-

하뉴녕

2011.01.18 16:31:17
*.149.153.7

김영건 쌤 글은 나중에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김우재 님 글은 덧글단 후 읽게 되었는데, 과학이란 단어를 써서 불쾌하다는 것 외의 메시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버러지

2011.01.18 16:57:48
*.160.121.229

heterosis님 글을 부드럽게(?) 읽자면야 '칸트의 초월논증은 자연과학적 지식과 갈등하지 않는다/이념이나 실천도 객관적 사실의 맥락을 근거로 하는 정당화가 요구된다'정도이지 않겠습니까만은, 뭐 제가 가타부타 할 문제는 아니겠지요, 허허; 아무튼 김영건 선생님 강추요(...?) -蟲-

하뉴녕

2011.01.18 17:13:58
*.149.153.7

...그렇게 요약할 경우엔 제가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있어야 김우재 님이 글을 쓰신 이유가 성립하는데, 과연 그런지요.

칸트가 뉴튼 물리학 등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정당화하려고 순수이성비판을 구상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래서 칸트 철학이 물리학이랍니까. 과학을 정당화하는게 다 과학이라면 '과학철학'이란 말은 왜 있는 걸까요. 어떤 사실인식과 경험적 근거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초월적 논증에도 '급'이 있단 얘기는 이 글에서도 하고 있는 것이구요. 수긍할 수 있는 비판 하나는 제가 '과학'이란 말을 엄밀한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인데, 제가 지금 물리학 얘기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분야와 관련된 과학(?)이라면 사회과학일텐데;;

김영건 쌤 책은 한권 사서 가지고는 있는데(<동양철학에 관한 분석적 비판> ) 주제가 관심사가 아니다 보니 아직 완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버러지

2011.01.18 17:42:02
*.160.121.229

아니, 저,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뭐 그런 것이었습죠; 대리전은 감히 제 주제에 행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꼬리를 감추겠어요.=_=;; 그나저나 김영건 선생님의 글이자 '비평'이란 맥락에서 접점이 있을 법한 책은 『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론이나 비평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는지라;;; -蟲-

하뉴녕

2011.01.18 19:45:00
*.149.153.7

예 저도 별로 논쟁할 생각은 없구요. 사실 뭐 지적질이야 언제든지 가능하고 배움의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뭐 이런 것도 과학-인문학 어쩌구 저쩌구와 엮어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제가 언제 자료를 안 찾겠다고 했는지도 의문이고요. 여하튼 감사합니다.

Svinna

2011.01.19 17:23:19
*.133.44.249

transcendent의 의미로 쓰신 거라면 이게 칸트만의 고유한 개념도 아니고 중세 때부터 신 얘기하면서 현세를 넘어선 저 세상 같은 의미로 계속 나왔던 것이니 글의 논지에 큰 영향이 없을 것 같은데요. 요즘은 transcendent를 '초재적'으로 번역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최재희 역에서는 초월적이라고 번역하지만요.

하뉴녕

2011.01.19 17:33:30
*.149.153.7

Svinna// 뭐 제가 칸트를 염두에 두었고 본문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어디까지나 칸트 이론을 활용하여 현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제가 간파한 현실의 어떤 논증 형식을 설명하기 위해 초월적 논증이란 말을 끌어다 쓴 것이므로, 애초에 논지 자체엔 기본적으로 영향이 없지요. 다만 그 유비가 개념에 비추어 어느 정도로 적절하느냐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는 것이겠구요. ^^;;

학생

2011.01.18 23:53:26
*.46.171.179

최장집과 이상이, 각각의 주장을 'p이면 q이다.' 와 'q이면 p이다.'로 요약해놓고, '둘 다 옳다.'고 한다면 결국.. 'p'와 'q'가 '동치'라는 말인가요??

하뉴녕

2011.01.19 00:25:46
*.66.234.91

그럴리가요. 물론, 아니죠.

학생

2011.01.19 00:50:06
*.46.171.179

(제가 서툴러서.. 댓글 밑에 다시 댓글 쓰는 걸 몰랐네요.)

그러니까.. 제 말 중, 어느 부분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조금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고맙겠습니다만..^^

하뉴녕

2011.01.19 13:36:24
*.66.234.91

p: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q: 소크라테스는 동물이다.

이 경우 'p이면 q이다.'가 '성립'하는데, 이때 p가 q의 원인인가요? 일상언어에서 '...이면...이다.'라고 쓴다 해서 이것과 그것이 같다는 보장은 없지요.

인과관계는 기호논리 식으로 표현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어쩌면 안 되는 것이거나.)

식 자체가 그릇되게 표현된 것이니 결론에 대해서는 코멘트할 것도 없죠.(물론 일상세계의 담론에선 전제가 틀려도 결론이 맞거나, 적어도 논의할 가치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이 경우는 님이 제 코멘트를 '검증'하겠다고 이걸 끌어들인 것이니...)

여기서 '둘다 옳다.'라는 코멘트 역시, 두 사람의 판단이 '모두 가능하다.'(A와 B가 모두 서로에게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라는 의미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걸 '식'에서의 '옳다'와 등치시키고 그에 입각하여 시비를 거니...

수고는 했습니다만 의의가 없네요.

학생

2011.01.19 21:10:55
*.46.171.179

'논리'나 '논증'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습관에 비하면 사고가 별로 논리적이지 못하군요.. 어려운 '인과관계'라는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 없이 쉽게 생각해보지요..

님의 말대로, 최장집의 주장이 '노조조직률이 높아지지 않으면 복지가 안된다.'이고, 이상이의 주장이 '노조조직률을 높이려면 복지부터 해야 한다.'이라면 이상이의 주장은 결국 '노조조직률이 높아지지 않더라도 복지가 된다.'는 걸 함축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님은 두 주장이 모두 옳다고 하잖아요.

최 : '노조조직률이 높아지지 않으면 복지가 안된다.'
이 : '노조조직률이 높아지지 않더라도 복지가 된다.'

위의 두 문장이 서로 '모순' 즉, 둘 다 옳을 수 없다는 건 상식 아닌가요?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말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둘 다 일리가 있다는 식의 황희 정승 같은 태도로 감히 '논리'나 '논증'을 말하다니 참 한심하군요. 그리고 무슨 말만 하면 앙칼진 암코양이마냥 과민하게 반응하니 좀 무섭네요. 무슨 피해의식 있나요?

z

2011.01.19 22:38:49
*.146.36.106

학생이란 분은 문장의 행간을 못 읽네.ㅉㅉ 증말 답답하다 ㅡㅡ; 왜 그렇게 사냐?

음냐

2011.01.19 23:29:11
*.88.210.160

'노조조직룰이 높아지지 않으면 복지가 안된다'의 대우는 '복지가 되면 노조조직률이 높아진다'입니다. 전자가 최장집이고 후자가 이상이죠. -_-;; 논리 운운하기 전에 기본적인 거부터 좀..

음..

2011.01.19 10:42:56
*.214.245.154

참~으로 옳은 지적이고, 그래서 한윤형씨 글을 좋아해왔습니다. 한씨 글은 그러하다는 느낌을 은연중에라도 받아 왔거든요.

ir

2011.01.24 17:00:43
*.239.247.14

논지들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첫째, 공산주의, 사민주의 논쟁에서 각각의 진영이 망했기에 더 이상 소구력이 없다는 식으로 쓰셨는데, reference가 필요합니다. 특히 공산국가에서 복지국가가 망했다?는 누가 말했는지? 공산주의는 무너지는 거 같은데 복지국가가 무너진 근거는 없고요. 둘째, 최장집 님께서 노조조직률이 높아야 복지국가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복지국가 이론의 극히 일부분에 속합니다. 권력자원론인데 이것도 노조조직률 뿐 아니라, 이들이 다른 계층과 이어지는 연합이나 정당 연정 등등 분파가 몇 개 있고요, 최근에 이 설명력이 굉장히 약화되어 신제도주의로 갑니다. 보통, 사회경제학적 요인부터 시작해서 지방정부간 이론 등 수십개가 있지요. 또 하나만 가지고 설명이 안 되서 보통 두서너개 섞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최장집 님은 정치학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하셨지만 상대적으로 비전공인 복지라는 개념과 담론까지는 나가지 못한 부분이 있겠고요, 이상이 님도 보건의료 쪽이 주전공이라 복-소의 공동대표시지만 모든 논의를 포괄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겠습니다.


저도 소설을 많이 씁니다. 상상력도 풍부하고 가설도 많은데, 이 가설들이 책상에 앉아서 편하게 글로 어찌 마무리 해 보려고 하면 소설이 되고, 이는 메타비평하고 이어지는 부분이 있지요. 글쓰기에는 고고학적 성찰과 논리적 접근이 있을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정치나 특히 정책 이런 부분에 와서는 충실하게 맥락과 reference를 살피지 않으면 어이없는 글이 되기 쉽상이고, 영국의 경험철학처럼 단어 하나에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논리적 귀결을 만들어 내 볼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역사가 있어서 그마저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둘은 또 깔끔하게 나눠지지도 않습니다. 결국, 세상은 님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넓고요, 비평하고자 하는 분야, 특히 인문학적 성찰과는 다른 분위기 사회과학 쪽은 무리를 지어 공부를 하지 않으면 감 못 잡는 '이상한 글'들이 많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님에게 공부를 하라고 '감히 오지랖 넓게' 충고한 적이 있습니다. 님의 팬들은 어떤 부류인지 냉정하게 성찰해 보셨으면 합니다.

내 원..

2011.01.24 22:04:23
*.208.114.70

그럼 공부를 무리를 지어 한 너님같은 사람들이 글을 쓰세요..

하뉴녕

2011.01.24 22:38:51
*.149.153.7

이전부터 간간히 다는 님 덧글을 몇 개째 읽고 있는데 별로 영양가가 없어 보입니다.

정치학자나 보건의료학자라서 전문성이 떨어져서 저 정도 얘기밖에 못했다면, 님이 얘기하고 싶은 대안은 뭡니까? 복지국가 만들려면 뭘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복지국가의 쇠퇴' 운운은 바우만 책만 봐도 떡하니 나오고 있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근거로 '공산주의자'들이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삼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정황도 명백한데 레퍼런스 운운하는 것은 무엇이며...

최장집이나 저나 '노조조직률'만 염두에 뒀을 리가 만무하고 조직화의 한 사례로 그것을 제시했음을 행간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는데 몇가지를 섞고 말고의 하나마나한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제가 언제 스스로 소설 썼습니까? 남이 쓴 소설들 구조 분석했지...그 '남'들 중에 아마 님보다 공부 많이 한 사람들도 있겠죠. 근데 다들 왜 그러느냐는 겁니다.

결국, 세상은 님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넓고요. 워낙 공부한 사람들이 쓸만한 소리를 안해서 제 블로그라도 찾아들어와 글 읽는 사람들을 '팬'으로 가정하는 이들을 인도하려면, 님이 쓸만한 소리들의 레퍼런스를 제시하면 될 일입니다. 뭐하러 저같은 것에게 충고를 하세요? 무리를 지어 공부해야 효과가 있단 것엔 동의하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성찰들은 안 하는 거 같더라구요. 성찰 밖에 할 게 없는 저같은 사람은 내비두시고, 무리를 지어 성찰도 같이 해보시죠...

ir

2011.01.24 23:23:48
*.239.247.14

님에게 전혀 도움도 안 되었고, 영양가도 없었군요. 그럼, 역시나 제 오지랖이니 미안하고요,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또, 레퍼런스 운운해서 죄송하기도 한데 많이 있긴 있습니다.

다만, 소위 학자라 불리는 그룹(?)은 블로그가 아닌 저널에 보면 쓸만한 내용들이 많이 있는데 접근성의 문제겠죠. 안 보인다고 성찰 안 하는 건 아닌데 더욱 해야 되겠군요. 언젠가 마주할 기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상한(?) 댓글 남기는 일 없을 겁니다. 한윤형 씨 건승 기원합니다.

하뉴녕

2011.01.25 02:29:27
*.149.153.7

제 말은 그게 무슨 무공비급이라도 된다고 복지국가에 대한 다른 논의가 있으면 어디어디 저널 무슨 호에 누구 얘기 보면 이런것도 있더라 그런 걸 보면 이 이상의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다 하면 되는 것을 가지고 소설을 쓰네 마네 공부를 하네 마네 해야 하느냐는 거죠.

공부를 해서 아는게 많으면 남에게 도움을 주는게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잘난 척을 하려면 뭔가 도움이 된 다음에...

뭐 악의로 그랬겠습니까. 알겠고 훗날의 만남 기대하겠습니다.

ㅋㅋ

2011.01.24 16:57:52
*.112.5.247

학생때는 뭐든 이마로 치받아보고 싶은 법 ㅋㅋ

산마

2011.12.28 01:23:06
*.102.205.159

인터넷을 헤매다 뒤늦게 댓글을 답니다. 제 지적을 통해 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으며, 이후에 읽을 독자들의 오해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오래된 글에 댓글을 다는 무리를 감수합니다. 논쟁에서 서술하신 바와 같은 논리전개가 자주 보인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한 논리를 칸트의 것으로 돌리는 것에는 수긍하기가 힘듭니다. 댓글을 보건데 사용하신 초월적 논증이란 표현이 논리학에서 칸트의 논증을 포함한 유사한 논증들을 묶는 학술용어로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고, 칸트가 자유의지를 요청하며 전개하는 논리가 윤형님이 모델화한 논리가 같다는 판단 하에 칸트 자신의 초월(론)적 논증이라는 표현을 갖고 오신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윤형님이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는 초월적 논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할 때 암묵적으로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을 정초하려 한 칸트가 그와 같은 논증을 폈으므로, 인간이 자신의 실천을 정초하려 할 때 초월적 논증이 기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칸트의 논리가 모델화하신 논리와 부합하느냐는 이 글 전체의 논지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텐데요, 저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거듭되는 추측 죄송합니다만, 윤형님은 칸트의 논증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도덕적 행위가 존재해야 한다' '도덕적 행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a와 자유의지론이 있다' 'a를 고르면 도덕적 행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자유의지론에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자유의지가 있다'

느끼시겠지만 칸트는 자유를 요청하면서 '일말의' 가능성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또한 반대주장이 실현불가능하다고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상정하는 순간 자유도 상정될 수밖에 없음을, 따라서 자유를 부정하며 도덕을 논하는 것이 자기모순임을 주장합니다. 논리적 불가능성의 문제지요.

따라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들이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의 상대적 차이 또는 경험적 차이를 우리가 도덕을 논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것을 배제하는 오류와 혼동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윤형님이 모델화한 두 가지 입장이 각자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변의 문제는 실천을 추구하는 논변의 필연적인 한계와는 관련이 없다고 봅니다. 예로 드신 정당 정치의 문제는 정당 정치의 역사가 짧고 그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아마 결코 충분한 연구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정당의 문제나 대북정책의 문제 등 인간의 '실천'과 관계된 문제에서 예의 유사논리가 나타나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 아닌 당위의 영역이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연구가 자연과학 연구와는 달리 아직(영원히?) 필연적인 법칙의 산출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뉴녕

2011.12.28 08:00:27
*.118.61.6

오래된 글엔 댓글이 있기 마련인데 늦은 지적 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 맞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말씀하신 부분에 조금 더 맥락을 추가하여, 칸트 자신의 논증에 대한 정치적 필요(!)까지 감안했을 때는, 크게 무리가 없는 서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힐쉬베르거 책에서도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논증해 내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농담(?) 비슷하게 던지고 있기도 하니까요. 물론 이런 판단은 제가 충분히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것이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부분에 타당한 부분이 있고, 저는 더 이상은 철학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라, 아마도 앞으로의 글쓰기에선 이런 식의 비유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님의 댓글이 혹시 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칸트 철학에 대한 오해를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되기를 저도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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