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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어느 '스포츠맨'의 답변

조회 수 19444 추천 수 0 2011.07.25 23:57:26



박가분 / 스포츠맨 한윤형


이 글을 본 지는 오래 되었는데, 이제껏 답을 안 하고 있었다. (만일 읽어보게 된다면 알겠지만 딱히 내 답변이 필요한 글은 아니다.) 그동안 바쁘기도 했거니와, 굳이 내 블로그 방문자들 중 일부가 호기심에 이 글을 클릭해보고 스트레스를 느끼도록 유도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글쓴이를 위해서도 고민이 되었는데, 살다보면 변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인데 굳이 인생 한 시기의 방황(?)일 수도 있는 행태를  꼭 집어 코멘트한다는 게 너무 팍팍한 일이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그와 슈리가 장정일-조영일 싸움에 대고 얼척없는 코멘트를 하는 꼴까지 보니 그런 걱정조차 사치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타인들의 선의를 먹고 산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할 테니까. 어쨌든 본인이 저지르는 일들이고, 자기확신도 충만하다면, 책임도 지는게 자연스럽다.

 
1. 논쟁의 태도에 관한 문제


문제의 글은 내가 논쟁을 하는 '태도'에 대해 지적한다 생각된다. 적반하장이 유분수다. 그 영역으로 갔을 때 지적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닌 박가분이기 때문이다. 논쟁을 할 때 그의 문제는 (이건 슈리의 문제가 아니라 박가분의 문제다.) 상대방의 논지, 권위자들의 텍스트, 자신의 주장, 논쟁상황 등 모든 종류의 맥락을 왜곡하여 자신의 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가분의 글은, 박가분의 글만을 읽는 이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박가분의 독자들은 글쓴이가 비판한 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 그가 던진 화두를 부여잡고 고담준론(?)을 늘어놓는다. 이 글을 보고서도 '논쟁이 스포츠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논의한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어처구니가 없다. 


슈리의 글로부터 촉발된 성매매 논쟁, 혹은 '슈가분' 논쟁 전반에 임한 그의 태도가 그랬다. 이에 대해서는 thehole 님이 (슈리가 아닌) 박가분의 논쟁하는 태도에 대해 적절하게 비판한 적이 있음으로 그대로 인용해 본다.

 

( http://sonofghost.tistory.com/14 에 달린 덧글이다.)
thehole
본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간단하게 부연한다. 내가 느끼는 박가분님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다.

1) 논쟁의 기초를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박가분님은 실명(아이디) 비판을 삼가고, 두루뭉술하게 '논객'이라고 지칭하면서 누군가(들)를 비판한다. 그 논객은 자신이 박가분님 글에 등장하는 '논객'임을 알 수 있겠지만(모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은 알 도리가 없으며, 박가분님이 그 논객의 글을 이해하고 반박을 하는 건지도 역시 판단할 수 없다.

2) '권위에 의존'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뜬금없이 윤소영 등의 말을 앞뒤 맥락 다 자르고(이는 박가분님이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던지는 비난이기도 하다) 띡 인용한 다음, 그에 대한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3) 2)와 관련된 것으로, 박가분님은 뭐가 그리 급했는지, 인용문을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 이는 논쟁이 진행될수록 박가분님에게서 더욱더 빈번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가분님의 논지는 더욱 엉망이 되며, 비판자의 입장에서도 박가분님의 입장을 비판하기보다는 그의 인용문 이해를 '첨삭'해야 하는 비생산적 수고를 들여야 하게 된다.

4) 박가분님은 기존의 (맑스주의뿐 아니라 여성주의 등등의) 논의 지형/수준들을 알지도 못한 채로,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그 부분에 대한 분석을 요청한다. 본인은 결코 해본 적이 없는 그 분석을.

5) 박가분님은 말과 태도를 바꾼다. 박가분님이 더 심오한 분석을 요청하는, 이론을 현실에 대입할 때의 난점들을 충분히 고려하는 논객이었다면 애초에 슈리님의 글부터 비판해야 했다. 내가 보기엔 그가 무언가를 요청하고, 어떤 어려움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할 때, 박가분님은 그냥 이 상황을 벗어날 만한 멋드러진 말을 찾아 던지는 것일 뿐이다.

6) 내가 궁극적으로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슈리/박가분님의 태도가 썩었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맑스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말이다. 물론 이들에게 결정적이었던 것이 맑스고, 또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 맑스인지라 나의 문제제기는 주로 맑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문제제기들을 통해 그리고 위의 1)~5)를 통해 이들이 맑스를 모를 뿐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혹자는 논쟁에 있어 '논리'가 아니라 '태도'를 묻는 건 반칙이 아니냐고 반응할 것이다. 하지만 논쟁의 태도를 문제시삼은 건 박가분이 먼저란 사실을 상기하자. 다음으로, 여기서 지적하는 '태도'는 어떤 싸가지 같은 것이 아니다. thehole님이나 내가 "너 싸가지 없어서 기분나빠!"라고 힐난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그의 논쟁의 태도를 문제삼아야 하는 이유는, 저런 식으로 맥락을 훼손해서는 생산성있는 대화를 나눌 확률이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이지 그에게 조롱을 당해서 기분이 나쁘기 때문은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기분도 나쁘다.) 그런데 링크한 글을 보면 알겠지만 우습게도 조롱을 당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팔팔 뛰는 쪽은 오히려 박가분이다.  


박가분은 왜 이러는 것일까. 그가 평소에 쓰는 글에 동원되는 어휘나 자신이 개입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판단의 수준을 볼 때 '머리가 나빠서' 그랬다고 보기는 좀 의심스럽다. 오히려 지기 싫어서, 폼잡으려고, 멋있는 척 하려고 그랬다고 추정하는 쪽이 차라리 더 설득력 있다. 따라서 나는 박가분과 그의 지지자들이 내게 붙인 '스포츠맨'이란 레토릭이, 참으로 박가분 자신에게 붙이면 어울릴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발 이걸 보고 '관심법'이니 뭐니 하는 일은 없기를. 나는 언제나 의도를 추정한 부분은 의도를 추정했다고 확실하게 기록해주고 있고, 의도추정한 이 문단을 배제하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의 논지는 살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스포츠맨'이란 레토릭은 하다못해 박가분 자신에게 활용하려고 해도 별로 정교하지조차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포츠맨'은 "어떻게든 이겨 먹으려고, 혹은 멋있는 척 하려고,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고 허망한 제스쳐를 반복하는 연사"와는 차이가 크니 말이다. 사실 백분토론처럼 각자 활용할 수 있는 발언기회와 시간이 동등한 수준으로 제한된 특수한 상황의 말싸움이 아니라면, 일반적인 지면-인터넷 상의 논쟁들은 스포츠 게임과 연결지을 요소가 별로 없다. 나는 박가분이 논점과 별 상관없는 장광설을 길게 늘어놓는 것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고, 그저 내 글을 통해 그가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음을 섬세하게 지적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건 '스포츠맨'이 아니라, 상대방을 '스포츠맨'이라고라도 매도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어떤 상처입은 영혼의 악다구니일 것이다. 


2.  그 논쟁이 시작된 이유와 '슈가분'의 관심법  


박가분은 그 논쟁에 있어 내가 물었던 논점들에 대해 답변한 적이 없고, 위에 링크한 글에선 내 논쟁태도를 '스포츠맨'이란 레토릭으로 공박했다. 따라서 나도 이 글에서 내가 문제삼았던 슈리의 글의 논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겠다. 

(해당 논쟁에서 내가 쓴 포스트들을 일별하자면 다음과 같다.
2011/05/18 - [문화/기록물] - 슈리,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비평
2011/05/19 - [문화/기록물] - 슈리 님의 답변에 대한 코멘트
2011/05/24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1) -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2011/05/25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2) - 노동계급,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2011/06/04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3) - 글의 논지가 안 보이는게 내 책임인가?
2011/06/05 - [문화/기록물] - 인식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 : 누가 마르크스를 우습게 만드나?
2011/06/06 - [문화/기록물] - "그냥 압니다"와 '방법적 신뢰'의 문제
이렇게 열심히 썼건만 혹은 썼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 그저 '스포츠맨'이란 레토릭 뿐이라니!)


그런데 박가분은 왜 슈리가 쓴 글의 문제에 대해 본인에게 지적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왜 나한테 지랄이세요?^^;" 이게 박가분의 심경요약인 듯 한데, 이에 대해선 "니가 RT했잖아 ㅅㅂㄻ야!!!"라고 답해주면 되려나? 


박가분은, "오히려 이 문제는 슈리 본인에게 이 상상적인 '진보/좌파 판'에서 그에게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기에 일어난 것이 사태에 더 부합하지 않은가?"라고 주장한다. 허망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슈리가 글을 썼을 때도, 그가 자신의 글을 트위터에 올렸을 때에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뜨거운 반응은 박가분이 문제의 그 글을 '생각해 볼만한 글'이라고 RT하면서 나타났다. 확실히, 슈리는 '발언권'이 없었다. 그런데 발언권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발언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사태'라고 부를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문제는 슈리의 글이 아니라 박가분의 RT였다. 박가분의 사태에 대한 해석은 이 지점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야바위의 몸짓이다.


즉, 상식적인 수준에서 정리한다면 이렇다. 세상에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런 사람들이 이상한 글을 쓰는 것도 자연스럽다. (박가분과 그 지지자들이라면 이 지점에서, 내가 슈리의 글을 이상한 것으로 낙인찍고 있다고 반박할 것이나, 나는 지금 '슈가분'에게 분노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종류의 우스운 글들에 열을 펄펄 내면서 분개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집단에서, 그 이상하고 우스운 글을 걸러내는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다. 잡지에 기고도 하고 인문학에 관한 책도 내고 본인을 '맑스주의자',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자'라고 지칭하는 청년 글쟁이(=박가분)가 그 글을 '생각해볼 만한 것'이라 평하고 '일독을 권'했을 때, 사람들은 진보/좌파의 수준이, 혹은 글쟁이들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되느냐고 조롱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박가분의 터무니없는 뇌내망상보다는 사태를 더 무리없이 설명한다. 


여기서 사태는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평소에 진보니 좌파니 글쟁이니 하는 것을 싫어했던 이들에겐 이 일련의 사태가 평소 그들의 편견을 정당화해주는 '실재의 응답'이 된다. 말하자면 진보/좌파/글쟁이는 원래 이 정도 수준의 종자들이며, 슈리와 박가분은 그 점을 증명하는 일종의 '병신인증'을 행한 것이란 게 그들의 정서일 게다. 한편으로 '슈가분'과 한톨이라도 공통점이 있는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라든가, 진보정당 지지자라든가, 청년이라든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든가, 나도 마르크스를 읽어봤다든가, 나도 지젝을 읽어봤다든가, 기타 등등) 그 공통점 때문에 '슈가분'의 주장이 그 집단의 특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인지될까봐 우려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슈가분의 주장을 자신들이 먼저 비판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격렬한 분노와 정제되지 않은 비난은 이 둘의 조합에서 생긴다.  


나는 박가분과 그 지지자들이 내 '설명' 혹은 '해석'을 '관심법'이라 비난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관심법'이라 비난하는 건 너무나도 우스운 일이다. 사실은 슈가분이야말로 그들 글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법'으로만 이 논쟁을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나는 박가분이 본인이 범한 잘못의 목록을 남에게 '윤리'로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게 한 두가지가 걸리는 게 아니니 이쯤이면 '종족특성'이라 불러야 할지.)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1) 상상적 적대감 때문에
2) 인맥중심의 추악한 감정싸움으로
3)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에



이 '설명'은, 앞서 내가 제시한 설명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실은 아무것도 설명하는게 없다. 왜냐하면 이 설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평소의 편견/인맥/신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언할 것인가? 사실 3항의 '마르크스주의' 앞에 '비'자 하나만 갖다붙이면 위의 재단은 "왜 박가분은 한윤형을 비판하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도 될 수 있다. 가령 어떤 페미니스트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발언을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고 치자. 이 사건에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예비역들의 상상적 적대감, 그 적대감을 가진 이들끼리의 인맥과 연대의식,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마초들의 혐오라는 요소가 모두 기입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요인들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런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 페미니스트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우리가 판단해서는 안 되는가?  


슈가분과 그 지지자들의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비난한 이유를 저런 수준으로 단순화하고, 그 이유들을 심지어 비판자 개인에게도 적용한다는 것이다. 내가 앞서 인정했듯, 만일 슈가분을 비판한 이들이 100명쯤 된다고 친다면 그중에서 평소의 편견/인맥/신념의 영향을 받은 이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런데 특정한 비판자가 바로 저런 이유들로 자신들을 비판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그들은 나에 대해서도 위에 열거한 이유들로 인해 자신들을 비판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인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위에서 박가분의 논쟁의 태도를 비판했을 때 지적했듯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 실명비편을 하지 않고 사태를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려 설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윗이나 포스트에서 그들이 나의 비판의 이유를 저것으로 단정지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증거는 많다. 그들은 많은 글에서 상상적 적대감, 인맥중심의 감정싸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혐오가 이 논쟁을 흐트려 놓았다고 거듭 말했으며, EM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 비판에 해당하는 것처럼 서술했다. 어떤 트윗에서 그들은 사실상 나를 겨냥해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지목했다. 가령 이번 글에도 이런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그의 사소한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 지적했듯이 자신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글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그 '의미 없음'에 대해 본인이 최종적인 '규정'을 내리겠다는 저 고압적인 태도였다. 물론 이건 본인이 논객으로서 가진 어떤 '위치' 없이는 불가능한 태도이다. 또한 이 '최종규정'에는 으레 그렇듯이 상대가 속한 것으로 상정된 '진영'에 대한 전반적인 멸시와 조롱이 매우 찰지게 묻어나왔다."  


나는 그런 종류의 단언이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논리의 문제점을 충실하게 비판해놓고 "봐라. 넌 이렇게 나를 비판할 이유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하고 있으니 '상상적 적대감'에나 빠진게 아니냐?"라고 얘기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도 하지 못하면서 저런 이유들이나 열거하는 건 그 자체로 코미디가 아닌가? 이런 거야말로 '관심법'이라 비판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더 웃긴 부분도 있다. 상상적 적대감에 빠져서 그렇다느니, 인맥중심의 감정싸움 때문에 그렇다느니,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해서 그렇다느니 하는 종류의 얘기는 슈가분 식으로 늘어놓는 게 아니라 훨씬 더 세밀한 글의 맥락에서 사용되더라도 일종의 '조롱'에 해당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조롱했다. 그러나 박가분은 한윤형처럼 남들을 조롱하며 살지 말자고 다짐하는 듯하다. ('종특' 나왔다!) "물론 나는 이 생각을 누구처럼 온갖 유치한 비아냥을 섞어가며 타인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니 말이다. 웃을까 울을까 망설여진다. 나는 비아냥과 조롱을 섞어가며 논박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박가분처럼 논박은 전혀 없이 조롱만 담긴 글을 쓰는 일도 없고, 무엇보다 내가 비아냥거리는 만큼 다른 이의 비아냥거릴 권리를 존중한다. 박가분은 그냥 본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는 게 아닐까? 


물론 박가분은 본인이 하는 것은 관심법이나 조롱이 아닌, 정신분석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남들에게 동의해달라고 호소할 수 있는 영역의 얘기는 아니다. 이를테면 그들이 '조롱'이나 '비아냥'이라 여기는 내 온갖 표현들도 내 깜냥으로는 의도추정의 영역에 있겠지. (심지어 나는 어느 부분이 의도추정인지 표시도 해준다!) 여기서 벗어나는 건 '슈가분'이란 조어 하나 뿐인데, 슈가분은 슈가분이란 조어가 생기기 전에도 한윤형의 글에는 비아냥 밖에 없다고 비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조어나 받게 되었지.) 결국 정신분석 담론의 지적전통을 이어받아 타인에 대한 정신분석을 남발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관심법'이나 '조롱'에 보다 관대한 태도를 취해야 할 필요가 있을텐데, 박가분 등에겐 그런 종류의 '개념'이 전혀 없는 거다.


그런 역지사지까진 요구하지 않더라도, 어떤 종류의 해석이 '조롱'이나 '비아냥'이 아닌 '분석'으로 인준되는가에는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권위'란 것이 작동하게 될게다. 물론 권위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고, 그 해석의 설명력이나 설득력도 함께. 정신분석 담론을 활용하는 이가 영향력을 획득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애널리스트가 증권시장에서 영향력을 획득하는 방식이나 어떤 무당이 '영빨'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방식과 크게 다를바 없다. 근데 이렇게 본다면 박가분이 글쓰는 방식 자체가 '권위'가 없으면 작동을 안 하는 체제인데, 그는 내가 고압적으로 슈리의 글에 대해 평결을 내린다고 비난한다. (종특!!! 종특!!!!) 겸손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글 좀 유하게 쓰라고 충고하면 "노력할게요."란 소리라도 나오지, 번데기가 송충이에게 주름잡지 말라고 하면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왜 나한테 지랄이세요?^^;"???


정리하자. 박가분은 왜  사람들이 슈리를 비난하는지, 왜 한윤형이 '슈가분'을 비판하기 위해 그토록이나 긴 글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말인즉슨 슈리의 글이, 슈리의 글을 전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생각해 볼만하다.'고 한 박가분의 코멘트가, 슈리의 글의 문제보다 슈리의 글을 비판한 사람들을 더욱 문제시한 박가분의 논평이, 그 논평들에서 보여진 박가분의 논쟁의 방식이 적어도 그들의 글에 화를 낸 이들보다는 더 이해할만하다고 본다는 것일 게다. 나는 거기에 대해 동의하지 못해서 그들과 싸운 것일 뿐이다. 슈리는 어느 순간 글을 내렸고, 박가분이 그를 옹호한 방식은 부당했기에 계속 글을 썼다. 그런데 박가분은 왜 슈리가 아닌 자신에게 '지랄'하냐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랄'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자세하게 서술했다. 바로 이것이 서로의 의견이 어긋난 지점이었는데,  박가분은 이 얘기는 하지 말고 자신이 개발새발 읽어낸 다른 텍스트에서 추출한 마르크스주의-페미니즘-성매매 논쟁에 대해서만 말하자고 한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나는 그런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견해가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해 박가분과 나눌 얘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나를 '스포츠맨'이라 부른다. 나는 스포츠맨이고 그들은 '1차텍스트'를 읽는 인문학도라는 것이다. thehole님의 지적처럼 박가분이 나중에 얘기한 것 마냥 "이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라고 말하려고 했다면 먼저 그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재단한 슈리부터 비판했어야 한다. 하지만 슈리가 아니라 슈리의 비판자들을 비판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실제로 문제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 상황을 벗어날 만한 멋드러진 말을 찾아 던지는 것일 뿐"이란 평을 듣게 되는 거다. 그런 얼척없는 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그들이 1차텍스트를 얼마나 허망하게 읽어대는지에 대한 thehole님의 지적에 대해 답변이나 했으면 좋겠다.
( thehole/ 치안과 정치: 슈리님께 던지는 질문 , thehole/ 심심풀이: 박가분님의 '논쟁의 맥락'이란 글에 대해


나아가 박가분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는 EM님의 견해도 경청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박가분은 명백히 슈리+박가분을 겨냥한 이 글도 날 욕하는 맥락으로 배치하는데, 이 얘기는 이따 하자.) 

(...) 그런 이야기를, 이를테면, 최근 슈리님의 논쟁적인 글로부터 비롯되었던 일련의 사태(?)와 관련지어 풀어낼 수도 있겠다. 많은 이들이 슈리님의 글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글에 불만을 표해냈고(이 글은 지금은 슈리님의 블로그에선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링크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불만의 내용은 그것을 갖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실로 다양했다. 어떤 이는 그가 ‘성매매’를 바라보는 방식에 경악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그가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신의 논의에 활용하는 방식이 싫었을 수도 있으며, 어떤 이는 그의 ‘윤리학’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 입장을 내놓았다(링크).

(...) 나는 (한편으로는 내 ‘능력’을 의심하면서도) 내가 가진 한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슈리님이 어느 정도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비판적 코멘트를 하고 싶었고, 그것을 통해 가급적이면 논쟁을 논쟁답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더구나 나는—일종의 선배(아주 literal한 의미에서)로서—그들의 마르크스, 나아가 정치경제학적인 관심을 좀 더 북돋아주고 싶었고, 또 그런 관심이 비극적인 방식으로 사그러지도록 두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아주 단기적으로 보면 내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슈리님은 이곳까지 오셔서 의미있는 덧글을 달아주셨으니까(링크). 그리고 고맙게도 몇몇 블로거들이 나와는 저마다 다른 측면에서 좋은 코멘트들을 해줬던 것 같다(아, 물론 내가 상황을 이렇게 이끌었단 얘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기존의 날 선 비난들도 더욱 크게 증식되었고, 결국 사태는 슈리님이 ‘문제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서 내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 이 대목에서 (준-)익명성에 기댄 네티즌들의 무분별한 이지메 같은 것은 별 문제가 안 된다. 유명 포탈사이트 등에서 연예인 등을 대상으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떠올리면, 이번 것은 ‘이지메’ 축에도 못 낀다. 그리고 이번 논쟁/논란의 와중에 나왔던 수많은 코멘트들이 그런 포탈사이트에 올라오는 수백, 수천 개의 덧글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진심으로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진짜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애초 슈리님은 그렇게도 헛점 많은 글을 어찌 그리도 의기양양하게 공개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의기양양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도 슈리님은 저리도 약하게 무너져내렸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깊이 음미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슈리님을 포함하는 이른바 ‘잉여’들, 즉 자신들을 둘러싼 ‘세태’를 거스르며 ‘잉문학’ 또는 ‘사회과악’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탐하는 이들을 둘러싼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할 때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첫 번째 질문은 쉽다. 슈리님을 포함한 ‘그들’은 자신들을 가르쳐줄 ‘선배’ 또는 ‘선생’이 곁에 없다는 거다. 좀 주제넘게 말하면 이렇다. 만약 슈리님이 그 문제의 글을 공개하기 전에 나한테라도 보여줬더라면 나는 대번에 ‘이봐, 너, 그거 절대 공개하지 마. 우리 좀 더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글이 적어도 현재와 같은 형태로 공개되도록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슈리님을 모르고, 슈리님은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나같은’ 사람을 하나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그저 동년배보다는 좀 더 똑똑해 보이는—그 스스로도 그렇겠지만—자기 동료들이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뿐이었을 거다(이런 과정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한 답변이다.

두 번째 질문은 좀 더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친밀한 선배의 지도가 없다는 것이 그들을 약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슈리님 등에겐 자신들을 지도해줄 선배가 ‘곁에’ 없다 뿐이지, 적어도 그들은 이제껏 한국사회의 그 어떤 세대보다도 이를테면 가장 많은 책을 가지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마르크스만 해도, 그들은 이전 다른 어떤 세대와도 다르게 {Das Kapital}의 꽤 괜찮은 한글 번역본을 두 종이나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들은 그 수많은 책들을 선생으로 삼아 자신을 벼려나갈 수도 있을 것이며, 만약 그런 ‘훈련’을 충분히 거쳤다면 이번 슈리님의 경우처럼 저리도 쉽게 무너져내리진 않았을 것이란 소리다.

그러니 적어도 그들은 이런 책들, 비록 말은 없지만 예의 그 ‘선배’들이 줄 수 있었을 모든 지식과 사려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말없는 스승’을 차분하게 연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아니, 그들 중 ‘뛰어난’ 몇몇은—좀 더 쉬운 길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약간의 책을 섭렵한 뒤 스스로 ‘선생’이 되는 길이다. 다시 말해 ‘선생’이 없다는 객관적인 한계를, 그들은 선생을 부정함으로써, 나아가 스스로 선생이 됨으로써 극복하고 있다는 거다. 이는 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내가 결론적으로 하고픈 얘기는—그러나 이건 슈리님을 특정해서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현재 자신들을 둘러싼 조건 때문에 좀 힘들더라도 적절한 선생/선배를 찾아 그로부터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내가 슈리님의 글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단순히 그가 생산적 노동/비생산적 노동을 제대로 이해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얘길 한 적이 거의 없다’, ‘이런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모두가 이 문제를 오해하고 있다’ 등등과 같은 표현을 너무도 쉽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입밖에 낼 수 있는가! 그런 진술들이 만약 뭔가를 증명해 준다면, 그것은 오직 글쓴이의 무지와 옹졸함일 뿐이다.(...)
- EM/ For the students of Marx…



참고로 말해두자면, 나는 EM님의 '선의적 해석'과는 달리 슈리의 의기양양함과 그가 블로그에서 글을 지우는 행위가 별개의 것이라 보지 않는다. 사실상 슈리는 의기양양하게 글을 지웠고, 글을 지운 후에 쓴 새로운 글도 의기양양했으니 말이다. EM님은 나에 비해 '슈가분'에게 호의적인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들의 글을 읽었을 때 느끼는 황당함의 본질은 비슷하다. 그리고 그 황당함을 굳이 시간을 들여 표현한다는 것은, 나름의 선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그 '선의'는 꼭 슈리나 박가분이라는 인물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소속감을 느끼는 어떤 진영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선의'가 비아냥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슈가분은 EM님의 선의를 배반했고, thehole님의 선의를 무시했으며, 내 선의에 대해서는 조롱을 일삼았다.  


3. 나는 그들의 글을 논술첨삭했는가. 


박가분이 자기확신을 강화하는 방식은 일종의 폐쇄회로와도 비슷하다. 그는 아무리봐도 박가분의 글밖에 정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코멘트 중에서 자신에게 우호적인 것을 골라내 그걸 자신의 논지라며 내세운다. 그가 그의 지지자들의 트위터에서 골라낸 그 보석같은(!) 구절이 다음과 같다. 

논지에 비약이 있고 형식적으로 불완전한 글들이 있다. 논지의 비약과 형식적 불완전성은 그 글의 의미 자체를 퇴색시킨다는 건 맞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팔 걷어붙이고 가르치려 나서는 '논술 교사'들을 너무 많이 봤다. 정말 발에 채일 정도로 너무 많다.

그리고 이런 경우들에서 내가 늘 확인하는 건, 저 논술 교사들이 쓴 첨삭문을 열심히 읽고 대응해봤자 아무런 유익함도 없으며 완벽한 시간 낭비라는 사실 뿐이다. 이런 첨삭문이 흥미로워지는 순간은 대부분 논쟁 자체를 스포츠로 소비할 때다.
 
그들이 말하는 건 애초에 네 글은 링 위에 올라올 자격이 없는 글이니까 나가라는 것이다. 올라올 자격이 없다고생각한다면 그냥 무시하면 될일인데, 굳이 빨간펜을 들고 첨삭에 나서는 고압적인 태도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으며 항상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
 
문제가 되었던 그 글에 대해, 논술 첨삭을 하는 사람의 글보다는, 차라리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내고 관심법까지 썼던 여성주의자들이 트윗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생산적이었다.

만약 그 일독의 가치를 한 톨도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원글의 논리구조가 형편없었으므로 그 외의 말은 다 쓸데 없다는 걸 인정하고 백기를 들어라'라고 주장하는 스포츠맨들과 그 스포츠맨들을 응원하는 사람들 뿐일 것 같다.
 
이글루에 흔히 보이는 반지성주의 하이에나들과 게시판에 흔히 보이는 논술 교사들에 비해, 어쨌든 1차 텍스트를 성실히 읽고 어떤 식으로든 사유를 전개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더 가치롭다.


이 글을 쓴 사람이 착각하는 것은 내가 슈리나 박가분의 글이 논술문이 아니라고 해서 '다시 쓰라'거나 '링위에서 나가라'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는 거다. 만약 내가 논지의 비약이 있고, 형식적 불완전성을 갖춘 글을 논쟁의 영역에서 몰아내려는 '논리주의자' 내지는 '반증주의자'였다고 치자. 그랬다면 나는 박가분과 같은 글쓰기를 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박가분의 글에는 논증이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논지의 비약과 횡설수설이 있는 글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글 중 일부는 논증적으로 더욱 말끔하기 정리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어떤 글들은 논증적으로는 정리될 수 없는 어떤 통찰을 보여주기 때문에 비약이 나타난다고 보는 편이다. 특히 정신분석 담론의 지적 전통에 영향을 받은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논증이 부실한 경우가 많은데, 그 영향을 받은 글쓰기를 하는 이들에게 엄밀한 논증을 요구한다는 건 독수리에게 수영을 하라고 요구하는 식의 반칙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내가 처음 말을 걸었던 박가분의 최장집주의자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훑어보면 논증은 하나도 없고 '관심법'(그들의 용어를 빌린다면)만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쓴 A4 20여페이지의 글을 정독한 후 "그의 의도는 최장집주의에 성질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본인의 관점을 제시하고 그에 입각한 실천을 요구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어도 최장집의 '텍스트'가 아니라 한국의 진보정당 운동이라는 '컨텍스트'가 되어야 한다."라며 비평을 시작한다. (링크


그러므로 박가분에게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트위터에 저 말을 쓴 사람에게 "한윤형씨는 논리주의자는 아니다."라고 해명하거나 적어도 저 글을 인용하지는 말았어야 한다. 물론 그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건 사치다. 그런데 이 경우는 염치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도 있는 것이, 박가분이 자신의 글을 '논증'이라 확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를테면 박가분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최장집주의자들이 냉소주의자임을 증명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합리적인 추측은 그가 의도추정 내지 추측의 영역과 논증의 영역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 독서습관의 편식이 위험한가 보다. '1차텍스트' 아무리 많이 본들 무엇하겠는가. 미리 편견을 가지고 읽는데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쁜 습관을 배울까봐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1차텍스트'를 표준적인 독법을 배우지 않고 읽은채 뇌내망상을 전개하느니 일반적인 해설서를 읽고 현실에 적용하는 쪽이 훨씬 더 뻘소리를 줄이는 길이다.  EM님조차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정치경제학에 대해 얘길 하려면 마르크스의 {자본론} 또는 {자본}만 읽고서는 부족하다. 나름의 한계가 있지만, 이를테면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나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정도는 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윤소영 교수의 책은 그다지 좋은 입문서는 아니라 생각한다. 하여간 이런 것도 모르고 {자본론} 제1권 제1장만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모두 이해하겠다고 설치는 것은 누가 봐도 민망한 꼴이다."라고 말했는데, 내 생각을 덧붙이자면 이해되지 않는 {자본론} 읽으며 지젝의 언급이나 상기해 내느니 뒤에 언급한 책들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여하간 다시 주제로 돌아오자면, 나는 과거 박가분이 논증적인 글을 쓰지는 않지만 유의미한 글을 쓰고 있다고 보았었는데, 최근의 글들을 보며 그 생각이 많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슈리에 대해 말한 것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슈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일반적으로 해독가능한 슈리의 논지를 정리했을 때마다 슈리는 내 정리가 '오해'라 주장했고, 박가분도 거기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해'일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이 그 '오해'를 대체할 만한 슈리 글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의미를 확정하든 그들이 수세에 몰리게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남들의 해석을 '오해'라고 밖에 주장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추정했다. 그게 내가 슈리의 글을 '무의미'하다고 말한 맥락이며, 박가분의 슈리에 대한 옹호가 그 '무의미'함에 봉사하고 있다고 본 이유다.    


이런 내 주장에 대해 반박하려면 내가 슈리의 글의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슈리의 글에 대한 새로운 의미값을 제시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슈리는 글을 지웠고, 박가분은 그 작업을 거부한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자신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글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그 '의미 없음'에 대해 본인이 최종적인 '규정'을 내리겠다는 저 고압적인 태도였다. 물론 이건 본인이 논객으로서 가진 어떤 '위치' 없이는 불가능한 태도이다. 또한 이 '최종규정'에는 으레 그렇듯이 상대가 속한 것으로 상정된 '진영'에 대한 전반적인 멸시와 조롱이 매우 찰지게 묻어나왔다." 대체 이걸로 뭘 설명했단 말인가? 한편 그가 인용한 한 트위터 유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시작인건가^^;; 예컨대 디씨에서같이 상대방을 맥락없이 비하하는 수준낮은 태도로 논쟁에 임하는 자들에겐 설득이 불가하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인데다가 남이 조리있게 맥락을 설명해봤자 트집을 잡는것외에는 다른 이론적 무기도 없다.

논증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자들은 반대로 이 논증에 충실해야함을 논증할 방법이 없다. 물론 이것을 그들은 모른다.


여기서 문제가 된 슈리의 글의 논지를 정리해달라는 나의 요구는 '트집을 잡는 것'이 되고, 슈가분이 하듯이 서구 정치철학자 이름을 줄줄 읊지 못한 나의 글쓰기는 '이론적 무기도 없다'는 지점에서 조소의 대상이 된다. 슈가분이 대체 조리있게 맥락을 설명한 적이 있다면 가져와주길 바란다. 슈가분의 글과 아무 상관도 없는 지젝-라클라우 논쟁에 대해 서술하면 그게 맥락인가? 지젝라클라우바디우지젝지젝지젝라클라우라클라우바디우바디우바디우 막 이렇게 써놓으면 이론적 무기가 생기나?그런 태도야 말로 물신주의가 아닌가? "왜 맑스를 믿느냐?"란 질문에 "그냥 압니다."라고 답변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고 타박하는 것이 '논증에 충실한 것을 요구'하는 것인가? 더구나 저건 그나마 나중에 나온 말이고, 기본적으로 나는 슈가분에게 '논증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 적도 없으며, 그들이 '오해'라고 천명한 내 해석을 대체할 논지를 알려달라고 주문했을 뿐이다.


그들은 아무런 답변을 못했고, 나는 심지어 슈가분이 대체 왜 저런 글을 쓰는지에 대해 '조리있게 맥락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해야 했다. 특히 이 글이 글이 그렇게 나왔다. 첫 번째 글을 썼더니 '관심법'이라 하더라. 특히 두 번째 글을 읽는다면 그들이 내세우는 맥락이란 게 아무 내용도 없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덧붙이자면, '논증에 충실해야 함'을 왜 논증해야 하는가? 그게 왜 논증의 대상인가? 우리가 지금 인식론의 기초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나?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맞춤법에 충실해야 함'을 맞춤법해야 하는가? (물론 이 말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논증에 충실하라고 요구하는 건 맞춤법에 충실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궤의 이야기다. 애초에 이 규율은 그것을 너무 벗어나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온 실용적인 규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실용적 규율을 물신화하여, "맞춤법을 하나라도 틀리는 너와는 논쟁을 할 수 없어!"라고 팍팍하게 구는 사람도 있겠지. 가령 내가 아까 '개발새발'이란 부사를 썼는데, '괴발개발'이 표준어라고 고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아닌가. 그런 것도 못 쓰는 놈이 무슨 글쟁이냐고 시비걸면서 지구를 떠나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 누가 보면 내가 슈가분에게 그랬는줄 알겠다. 하지만 내가 슈가분에게 요구한 것은, "이 맞춤법에 틀린 단어가 내가 추측한 그 단어의 오기가 아니라면, 대체 무슨 단어를 오기한 거냐?"라고 물어본 것에 가깝다.  


앞서 말했듯 슈가분은 어떤 비판에 대해서도  

1) 상상적 적대감 때문에
2) 인맥중심의 추악한 감정싸움으로
3)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에


라는 이유를 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맑스주의자'의 비판만을, 그것도 그들이 '맑스주의 전공자'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이의 비판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하게 비판을 받아들인 EM이란 사람은 최근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성노동’ 논쟁의 경우에는 어땠는가? 애초 그것을 촉발시킨 블로거께서는 그것이 비생산적이라는 ‘이론적’ 규정을, 성노동자들이 운동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실천적’ 의도의 근거로 삼았다. 어차피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노동자운동이라는 것이 별볼일이 없으니 그의 이런 규정과 의도야 별다른 의미조차 없이, 심지어 노동운동 내에서 논쟁조차 되지 못한 채 잊히고 있는 중이지만, 만약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키우 삼판과 같은 정도의 권력을 갖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 EM/ "킬링필드"와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논쟁


박가분은 '선배'로서 역할을 하려고 했던 EM님의 조심스러운 비판을 그들의 활동에 대한 '승인'으로 받아들였다. 앞서 말했듯 나는 그런 행동이 EM님의 선의를 배반한 것이라 보지만, 여기서는 뒤늦게 EM님이 파악한 슈리의 '논지'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애초 그것을 촉발시킨 블로거께서는 그것이 비생산적이라는 ‘이론적’ 규정을, 성노동자들이 운동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실천적’ 의도의 근거로 삼았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던 바며, 슈리 님이 아니라고 부인했던 그 논지다. 슈리는 스스로 지워버린 한편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 이런 인식적 명제들로부터 현실의 운동에 있어서, 노동자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세력이고,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황당한 결론들을 끌어내면 안 된다. (...)
- 슈리, <언어의 애매성을 넘어서 : 푸우님께 응답하며> (지워진 글)


나는 슈리 님이 이런 논지들을 '오해'라며 거부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의미로든 자신의 글의 논지를 확정짓지 못한다면 그 글의 내용은 무의미하다.'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접근하는 방식이 EM님의 것보다 훨씬 사려깊은 것이 아닌가? (물론 원래부터 그렇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하도 '오해' 드립을 치길래 그렇게 된 거지만 말이다.) "만약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키우 삼판과 같은 정도의 권력을 갖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막 상상적 적대감과, 인맥의 흔적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혐오가 묻어 나오지 않는가? 


4. 마르크스를 혐오하는 사람들  


난 이 친구들이 왜 이렇게 근거없는 자뻑이 강한지 이해하기 힘들다. 가령 그들은,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서술이 얼마나 자뻑에 가득찬 것인지를 모르는 모양이다. 슈가분이 글을 쓰는 방식을 보면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선배를 오프라인에서는 물론, 온라인의 게시판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것 같다. 게시판 시대에 그런 분들을 잔뜩 겪어본 입장에서 말하겠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논쟁을 하다가 본인의 깜냥으로 잘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과거에 그런 분들은 "아하 제가 배움이 부족해 말씀하신 사례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할 수 없군요. 하지만 제가 모자라서 그렇지 아마도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것도 설명할 수 있을 거에요. 저보다 고수인 분들이 오시면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공부하러 들어가 볼게요."라고 반응하곤 했다. 과거의 나는 이런 반응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 이론의 설명력을 확신하고, 곤혹스러운 사례를 대면하면 그 사례에 대해 스스로의 머리로 깊게 사유해 보는 대신, 재빨리 현장에서 물러나 그런 사례들에 대응하는 자기 문파의 초식에 골몰하는 것이 제대로 공부하는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이 반응을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이다."라는 슈가분의 언설과 포개놓아 보라.  '1차 텍스트를 성실히 읽고 어떤 식으로든 사유를 전개하는 사람들', 그래서 '언제나 더 가치있다'는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참으로 대단한 사유능력이다!
 

1차 텍스트를 제 꼴리는 대로 독해하며 익힌 그 대단한 사유능력 때문인지, 그는 자신들의 문제를 지적한 EM의 글을 기껏 읽고서도, 그게 슈가분보다는 한윤형에게 더 적실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브라보!

(EM)

(...)최근들어 특히 '젊은 논객'이 급증하는 것도 부분적으로 이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젊은 논객'이 많아지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쁠 것은 없고 그들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같이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그런 현상이 '건전한' 바람이기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잉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만 한정지어 본다면, 그들이 내놓는 논의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얘기를 풀어나갈 수 있겠다. '젊은 논객' 또는 그에 준하는 오늘날의 똑똑한 20대들은, 그들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고 그들이 인식하든 말든 그들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지적 성과들을 놓고 보면, 결국 남이 한 얘기를 원래보다 훨씬 저열한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것이거나 한 십년쯤 시간이 흐른 뒤에 스스로 후회하고 부정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어쩌면 '과분하게' 허용된 발언권을 이용해 행하는 발언들은, 결국에 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장난이거나 기껏해야 그들 자신이 성장해 나가는 과도적 계기를 이룰 뿐임이 드러날 것이다.(...)
(박가분)

(...) 덧붙여 이 비판은 한윤형 본인에게도 되풀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한윤형 본인에게 더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상 나도 그렇고 슈리 본인도 그렇고 한윤형 본인이 담론시장에서 가지는 가치에 비하면 '논객'으로서 명함을 내놓을 어떤 깜냥도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EM님에게 사소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당사자가 문제의 글을 올린 행위 자체는 소위 그 '논객문화'와 별다른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접점'이 생기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말하자면 '명실상부한 젊은 논객'과 '차세대 논객의 가능한 후보들'(?)로서의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원래 문제의 글은 논객으로서 기존의 학계나 담론진형에 개입하려는 야심만만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젊은 논객들에게 '과분하게' 허용된 발언권 (이를테면 나 슈가분이 잡지에 기고하는 따위의 발언권들) 따위는 애초에 슈리에게는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문제는 슈리 본인에게 이 상상적인 '진보/좌파 판'에서 그에게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기에 일어난 것이 사태에 더 부합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정작 한윤형 본인이 논객으로서 논쟁의 지형에 '기여'라고 생각했던 것이 별로 대단한 '기여'가 아닐 수도 있으며, 본인이 논객으로서 블로그나 트윗상에서 사회과학에 대해 행한 이런저런 발언들, 특히 (정치-)경제학에 대해 본인이 내린 단언들에 대해 나는 솔직히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이 생각을 누구처럼 온갖 유치한 비아냥을 섞어가며 타인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나도 한윤형과 얼추 비슷한 세대로서 논객문화에 헛된 매력을 느낀 것이 지금도 후회가 되며, 나 자신이 저 퇴행적인 논객문화에 발을 들여놓은 것에도 후회가 된다. 말하자면 나 역시 논쟁을 스포츠로 소비하는 저 관행에 밥 숟가락을 하나 더 얹혀 놓았다는 느낌이 들며, 그것에 관하여 나는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물론 앞서 나 스스로 인용한 글을 포함해, EM님의 지적은 슈리나 박가분의 문제를 넘어선 하나의 시대진단이기 때문에, 나 자신도 청취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 대해서라면 나는 슈가분과 경험했던 것이 다르다. 나는 8-90년대 학번 운동권들이 제각기 마르크스를 누가 더 잘 이해했니 인용한 문구가 옳으니 그르니 따위의 시시껄렁한 주제를 정치논쟁의 본질로 삼는 꼴을 게시판에서 본 사람이다. 그런 꼴을 보며 살았던 사람이 가령 성매매라는 구체적인 논쟁거리를 택한 후  ‘마르크스는 이런 얘길 한 적이 거의 없다’, ‘이런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모두가 이 문제를 오해하고 있다’  따위의 말을 지껄일리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선배'들이 마르크스에 대해 나보다 훨씬 많이 읽고 훨씬 많이 안다고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덧붙여,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은 이유는 그네들이 마르크스를 읽지 않으면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심화되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도 배울 점은 있겠지만, 그의 통찰은 적어도 실용적인 면에서는 선배 철학자나 후배 경제학자들로부터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내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


슈가분은 비판자들로부터 뭐 대단한 인신공격을 받은 것처럼 당하지만, 그 시절 게시판에 내가 글을 쓰면 "군대나 다녀와라." "직장을 가봐라." "마르크스는 읽었냐." 등의 제각각 적당히 타당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당한 인상비평/인신공격이 횡행했다. 그들이 그런 일을 당해봐야 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이 당한 것이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좀 웃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넷상의 과잉된 반응이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면, 몇몇 트러블메이커들은 무류하며 영생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상한 모자라는 친구가 '이 시대의 큰스승'을 자처하는 것에 대해서도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아니, 그들 중 ‘뛰어난’ 몇몇은—좀 더 쉬운 길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약간의 책을 섭렵한 뒤 스스로 ‘선생’이 되는 길이다. 다시 말해 ‘선생’이 없다는 객관적인 한계를, 그들은 선생을 부정함으로써, 나아가 스스로 선생이 됨으로써 극복하고 있다는 거다."라는 EM의 비판이 유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나는 누군가 그렇게 평가한다면 그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이 시대의 큰스승'이란 그의 별칭이 '선배'들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사실상) 퇴장해버린-하고 있는 운동판의 막내가 스스로에게 붙인 자조적인 호칭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믹'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추종자가 있다는 건, 또 하나의 코미디인 것이다. (그리고 요즘 제정신 가진 이-또래든 선배든 후배든-가 희소하다 보니 요즘은 나도 그가 정말로 '이 시대의 큰스승'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요점은 나와 이상한 모자, 그리고 슈리와 박가분은 세대로는 얼추 겹치지만 어쩌다보니 '80년대 정서'를 만났는지 만나지 못했는지에서 차이가 생겨났다는 거다. (물론 별로 엄밀한 얘기는 아니다.) 그리고 '80년대 정서'를 만난 적도 없는 박가분이 '80년대'를 복권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무기력해진 선배들의 관심을 끄는 건 또 나름의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다. 애초에 '청년논객'이란 게 별게 아니란 걸 인지한 사람이, 그 별 것도 아닌 환상에 의해 본인이 소비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괜히 내 핑계 대지 말고, 무슨 내가 알량한 기득권으로 후발주자 핍박하는 것마냥 모양새 꾸미지 말란 얘기다. 자신을 향한 비난을 받아치려고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정작 한윤형 본인이 논객으로서 논쟁의 지형에 '기여'라고 생각했던 것이 별로 대단한 '기여'가 아닐 수도 있으며, 본인이 논객으로서 블로그나 트윗상에서 사회과학에 대해 행한 이런저런 발언들, 특히 (정치-)경제학에 대해 본인이 내린 단언들에 대해 나는 솔직히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블로그를 꾸준히 읽은 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내가 무언가에 기여했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내가 하는 일들이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고 끊임없이 자책하는 편이다. 심지어 나는 '논객'이란 게 허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기 때문에, 그말로 자신을 지칭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물론 남들이 나를 그 범주에 묶는다고 얘기하는 경우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내가 동네방네 '논객'이라 자랑하고 다닌다고 해서, 그게 박가분이 '변증법적 유물론자'를 자처하는 것만큼 우스꽝스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키보드워리어'란 말을 경멸어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중립적인 어휘로 바꾼 것은 나 자신이었다. 박가분과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자'임을 믿는 한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관대하지 않은 사람이다. 


논쟁이 스포츠로서의 효용이나 있었다면, 그리고 논객이 스포츠맨으로서라도 소비될 수 있었더라면, 한국 사회가 처한 문제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실제의 세상은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더욱 잔인하다. 심지어 한국 사회의 가장 전형적인 '논객'인 진중권조차도 스포츠맨으로서 소비되지는 않는다. (그저 괴팍한 인간으로 소비될 뿐이지.) 그리고 나는 종종 차라리 박가분이 스포츠맨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가 사실상 다른 종류의 맥락을 잊어버리고 오직 자신의 글쓰기만 봐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그가 행하는 스포츠의 장르는 체조나 피겨스케이팅 쪽일텐데, 특이한 점은 연기도 채점도 본인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 좀 해라. 내가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러고 있으면 진짜로 없어 보인다.


(이를테면 트위터에서 '친구들이 말려서 참았는데 참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런 이들은 밟아버려야 하는 거였다.'라고 말하길래 누구 얘기하나 했는데, "스포츠맨 한윤형"이란 제목의 글로 비아냥대는 글을 썼다면, '밟아버리겠다'고 공언했으니 적어도 트랙백 정도는 다는게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는 행위 아니겠는가. 뒤에서 비아냥대는 걸로 뭐라 할 생각없고, '밟아버리겠다.'며 키워질을 거는 것도 상관이 없는데, 뒷담화 비아냥을 키워질로 오인(?)하는 희안한 정신세계는 참 봐주기 민망하다. 그리고 슈리가 블로그 글을 모두 지워버린 건 유감스럽지만 각자 평가할 만한 문제라고 하는 그 사람이, 내가 트위터 계정폭파를 했을 때 논쟁을 피해 도망친 것마냥 자신의 친구들과 시시닥거린 짓거리는 얼마나 안쓰러운가?)


(...) 결국 슈리의 최종적 논점은 좌파들에게 정치적 진리(혹자에게는 이 단어가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당파성이라는 용어를 차용해도 무방하겠다)를 판가름할 수 있는 유일한 객관적 장소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자체이며, 거기서 일어나는 유의미한 변화에 관해 취할 수 있는 당파적 입장을 제외한다면, 그 나머지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은 말 그대로 '열려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 영역에 대해 좌파가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상황'에 대해 열려 있는 문제이며, '실용적 판단'에 의해 대답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 박가분/ 슈리의 글과 논쟁을 읽고서 -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 만일 이 논쟁이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다문화적 투쟁들의 연쇄 속에서 계급투쟁이 갖고 있는 지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슈리가 제기한 쟁점 자체는 그렇게 '생뚱맞은' 것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다. (...)

(...) 나는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여타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투쟁을 구조화하는 '반자본주의적 투쟁'이 (이론을 떠나)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변혁할 수 있는 핵심세력과 역량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최종적으로는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그러한 역할에 적합한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판단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제대로 된 노동운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여타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투쟁들에 대해 정세 속에서 실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박가분 : 최근의 논란에 대한 최종진술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슈리 님 글의 결론이 무엇이라고 판단될 수 있느냐에 있다. 일단 내 질문에 대해 답변하지 않는 슈리 님은 자신의 글의 결론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전된 논의를 따르자면 슈리 님 글의 결론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미 언급한 대로 슈리 님의 글이 오류로서라도 의미를 지니려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선택되어야만 한다. 

하나의 방법은 이거다. 나는 첫 번째 비판 글에서 슈리 님의 글의 논지를 요약한 후, “정리하자면 이글의 논지는 좌파들은 성매매특별법에 찬성해서도 안 되고,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해서도 안 되며,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근데 슈가분 님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입장인 것 같다. 

(...) 편의상 박가분 님의 정리를 슈가분 님의 견해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는 이렇다. 슈가분 님의 정리가 옳다면, “좌파는 성매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주어진 대답은 없다. 그 대답은 열려 있다. 그러므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열려’ 있다는 것만 인정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슈가분 님이 ‘좌파’를 무엇이라 정의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여하간 좌파들은 그 문제가 닫혀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보기엔 별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가 없다.(...)
- 2011/05/24 - [문화/기록물] - 슈리/박가분 재비판 (1) -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이번 ‘성노동’ 논쟁의 경우에는 어땠는가? 애초 그것을 촉발시킨 블로거께서는 그것이 비생산적이라는 ‘이론적’ 규정을, 성노동자들이 운동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실천적’ 의도의 근거로 삼았다. 어차피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노동자운동이라는 것이 별볼일이 없으니 그의 이런 규정과 의도야 별다른 의미조차 없이, 심지어 노동운동 내에서 논쟁조차 되지 못한 채 잊히고 있는 중이지만, 만약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키우 삼판과 같은 정도의 권력을 갖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 EM/ "킬링필드"와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논쟁


글쎄, 슈가분의 마르크스가 진짜 마르크스라고 믿는다면, 세 번째 글이 마르크스에 대한 혐오가 가장 넘치는 글로 보이는 걸?   
 


Q

2011.07.26 08:25:47
*.51.120.134

박가분이 저리 가면 안되는데.... 안타깝네요. 참 똑똑한 사람인데

슬라보예 지젝

2011.07.26 09:08:39
*.114.22.71

너는 되고 왜 난 안돼

thehole

2011.07.26 09:53:50
*.131.65.167

일단 한 마디만 하고 지나치면, 박가분님은 여전히 트랙백을 막아 놓았군요.

하뉴녕

2011.07.26 19:46:14
*.141.20.106

혹시 열어두었다면 트랙백 걸어줄까 했는데 역시나 막아두었더군요. 뭐, 그런 건 '취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럴거면 남 트위터 계폭에 왜 코멘트를 하고...

눈팅족

2011.07.26 16:04:01
*.255.63.30

산파술도 학생이 대답을 해야 가능한 것인데....
꿀 먹은 벙어리인 학생에게는 보다 세심한 관심과 정신과치료가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지...

하뉴녕

2011.07.26 19:47:50
*.141.20.106

꿀 먹은 벙어리가 아니라 엉뚱한 소리를 길게 늘어놓습니다. 물론 플라톤 대화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그렇습니다만, 그건 '대화'니까 소크라테스가 적절히 커트하면서 얘기를 유도할 수 있죠. 플라톤이 정제된 글이 아니라 대화편 속에만 진리를 담을 수 있다고 믿었던 건 대충 비슷한 이유에서겠죠...(먼산)

이챠

2011.07.26 17:00:17
*.41.224.95

더는 안 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뭘 하든 다 시간 낭비인 것 같아 전부 관두기로 함.
다만 박가분이 내가 의무로 해야할 것을 지적하며
날 부를 때, 성실히 응하며 뭐든 다시 시작하겠음.
하지만 동시에 박가분도 해야할 일이 있을 것이다.

에브리바디 핫바디.
슈가분을 포함해 모두다 건강히 여름 나시길.

공현

2011.07.26 16:42:45
*.172.231.104

저도 마르크스 원전이라곤 공산당선언밖에 안 읽어봤고 해설서만 몇 권 읽어왔지만;
그 논쟁 이후로 가끔 슈리님 블로그를 보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마르크스주의가 완전히 틀린 거였나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지요;; 전혀 다른 거 같은 이야기들이 막 써있는데;; 으음;;

하뉴녕

2011.07.26 19:48:22
*.141.20.106

슈리가 다시 올리는 글들은 사실상 그들이 수용한다고 언급한 EM님의 비판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aleph_k

2011.07.26 17:35:27
*.127.174.123

원한을 품었을 때조차 공정한 하뉴녕.

김강

2011.07.26 17:55:28
*.246.72.118

하아

2011.07.26 19:40:07
*.146.36.209

이제 이걸로 그만하세요 그냥. 더 이상 둘이서 싸워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듯.

하뉴녕

2011.07.26 19:49:13
*.141.20.106

원래 제가 하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만, 이 정도의 일이라면 적어도 서너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겠죠...

이 말씀은

2011.07.26 20:22:45
*.38.197.193

박가분씨한테 돌려주시는게..

장각

2011.07.26 22:36:31
*.203.188.18

오랜만에 존나 재밌게 읽었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차피 의미없는 논쟁이라면 스포츠라도 잘하는 놈이 난놈이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00

2011.07.27 03:07:51
*.137.164.154

브라보!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인신공격이 아니라, 박가분 씨가 이 글을 독해할 능력이 있는지 저는 좀 의심스러워요.

이챠

2011.07.27 11:51:50
*.41.224.95

뭐, 1차 텍스트, 남의 블로그글 가리지 않고 이때껏 그래왔던 것처럼 하기야 하겠지요. 지 꼴리는대로. (개소리를 개소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스포츠맨이면, 개소리에서 새소리를 듣는 건 크리에이터나 아티스트인가? '예능작가 박가분' 정도?)

독해 능력 문제 같진 않네요. 독해 상황의 심리 문제지. 자기 기획, 당파, 존심이랑 관계 없는 글 만나면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독해하기도 하고 그러겠지요. 박가분이 밤낮 계속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으면 다들 이렇게 말려들었겠어요? 애초에 무시하지. 아니면 정말로 아직 증명 영역과 추론 영역을 구분 못하나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의 지난 글을 자세히 따보면 정확해 질테지만 그런 정력은 이제 누구도 발휘할 수가 없을 듯.

thehole

2011.07.27 10:51:10
*.131.65.167

사실 저하고 관련된 글도 아니고, 또 박가분님이 저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던(아니면 제 블로그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상황이라 그 글은 그냥 패스했었는데, 글을 써주신 김에 다시 한 번 박가분님의 글을 읽어 봤습니다. 마지막 문단이 재밌네요.

일단 EM님의 20대 논객 비판이 박가분님(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더 합당한지, 한윤형님에게 더 합당한지는 제쳐두고 말하면...

박가분님은 마지막 문단에서 "원래 문제의 글은 논객으로서 기존의 학계나 담론진형에 개입하려는 야심만만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라고 말하는데,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줄곧 "~해야 한다"는 서술을 했던 슈리님의 그 글이 '개입'하려는(더군다나 마치 모든 좌파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식으로 쓰면서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 글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기존 학계나 담론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한 수 '가르쳐' 주려는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썼던 것일까요. 박가분님은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슈리님이 입을 닫고 있는 상황이니 박가분님이 그 의도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서술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가분님은 '20대 논객의 과도한 발언권'에 대한 EM님의 우려를 자신에게 적용하지는 않는군요. 이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슈리님에게는 그런 발언권이 없었다'는 말만 하고, 자신이 이 '상상적인 판'에서 얼마나 '과도한 발언권'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박가분님은 EM님의 선의를 다시 한 번 배신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박가분님은 "원래 문제의 글은 논객으로서 기존의 학계나 담론진형에 개입하려는 야심만만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젊은 논객으로서 '과분하게' 허용된 발언권 따위는 애초에 슈리에게는 있지도 않았다" 등등의 말씀을 하시는데, 이처럼 슈리님의 '위치'나 슈리님 글의 '의도'를 그토록 확신을 갖고 변호하는 박가분님을 보면, 젊은 세대에게 '선배'나 '스승'이 없다는 EM님의 이야기는 적어도 슈리님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박가분'이라는 선배이자 스승이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쾌한 점은, 그 슈리라는 분은 이제는 이 일에 관해 정말 단 하나의 코멘트도 하고 있지 않는 반면(다만 트위터에서 진지하게 자신만의 맑스주의 이론을 창안하고 계시더군요), 계속 박가분님이 (어찌 보면 안쓰러울 정도로) 이 사태를 무마하고(자신들이 해온 이야기를 부정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줄 수단들을 '과분하게' 활용하면서) 정리하려는 글들을 쓰고 계시다는 점인데요. 우선 박가분님이 계속 슈리님의 '위치'와 '의도'를 설명해야 하는 이런 구도 자체가 황당합니다. 그리고 슈리님을 방어(전 방어라고 느낍니다)하는 모습에서, 보면 제자를 감싸기만 하다 그 제자를 나쁜 길로 인도하는 잘못된 스승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뉴녕

2011.07.27 23:22:14
*.171.89.66

뭐 엄밀히 따지면 박가분은 본인에 대해서도 '과도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긴 했죠. 슈리는 그것도 없었다고 했고. 그 판단은 대략 사실이죠.


다만 박가분의 논리(?)는,


1) EM은 '20대 논객 문화'를 비판했다.
2) '20대 논객'의 전형에 가깝고, 논객문화의 폐해를 체현하는 것은 한윤형이다.
3) 따라서 EM의 글은 한윤형에게 더 들어맞는다.


는 것이겠죠. 근데 EM님의 글이 '슈리 사건'이란 사례에서 보편론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그 사례보다 제가 더 문제라고 해버렸으니 말이 좀 웃기게 되죠. 글 소재로 성매매를 끌어들였건 말건 계급운동이 더 중요하다는 중심논지만 있으면 몹쓸 글이 아니라는 그 한심한 판단과 어울리는 인식이겠죠.


당연히 EM님의 지적은 저한테도 성립할 테지만, 제 경우는 본인이 뭔가 새로운 것을 하는 게 아니라 이곳저곳의 언어를 '통역'하거나 실시간 대응이 필요한 일에 끼어들어 '설거지'를 하고 있다고 믿는 만큼 "그런 글쓰기는 몇 년만 지나도 의미가 없을 거고 몇 년 후에 님이 계속 글을 쓸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와 같은 종류의 충고를 할 수 있겠죠. 맨날 듣는 충고인데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저는 쓸 게 없어지면 그만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라...(근데 '잡일'은 계속 생기더군요. 하다못해 이번처럼 순진한 신규진입자들을 위해 "이녀석들은 바보입니다."라고 딱지를 붙여주는 종류의 잡일도 있으니까요. 물론 이런 일에 재미붙일 경우 생계 문제를 제가 따로 해결해야 한단 문제가 생깁니다만...)


반면 슈리의 글은 '써서는 안 될 글' 류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박가분이 쓰는 글이 그 부류인지는 모르겠으나 똥과 된장을 가릴 능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보여줬다고 봐야겠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지젝의 견해를 반복하는데 지젝이나 지젝 번역하는 지식인들의 글보다 쉽게 읽히는 것도 아닌데다가, 어떤 종류의 현장에 대한 정보나 감각적인 성찰도 없는 박가분 글의 의미를 찾아내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닐텐데 정작 본인은 그런 부분에 대해 별로 고민이 없겠죠. 그럼 남는 것은 "우리와 전혀 무관하게 맑스-레닌주의자임을 자칭하는 혁명적 좌파가 나오다니!!!"라는 386세대의 향수어리고 자뻑 포함된 호들갑 밖에 없는건데...뭐 그래도 본인은 아니고 저만 세대론의 수혜자라고 믿겠죠. 그러면서도 본인과 슈리의 의미를 "이 세대에 드물게 정치경제학 책을 보고 있는 중이다!!"로 규정하는데 대체 그건 세대론이 아니라는 건지...박가분과 슈리의 공통점은 '대가'인양 문체를 쓰다가 오류를 지적받으면 "저희는 어리니까 좀 봐주세요."라고 밖에 해석될 수 없는 변명을 반복한다는 거지요.


예전에 어느 술자리에서 90년대 학번 선배들에게 "세대론이란 소동으로 생긴 파이를 결국 저만 줏어먹은 꼴이 되었네요."라고 자아비판했더니 "괜찮아요. 20대 누구라도 줏어먹는 쪽이 낫지 선배들끼리 떠들다 끝났으면 더 문제였을테니까요. 줏어먹는 건 아무나 하나요."란 소리를 들은 적도 있는데 이제 저는 세대론에서 퇴장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박가분이든 누가 됐든 40대 이후에 글쓰겠다고 아닥하고 공부할게 아니라면 잘 줏어먹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랑은 더 생산성 있는 얘길 할 가망이 없겠지만 뭐 어떤 종류의 경험이든 사람을 변화시킬 가능성은 있으니까요.


다만 '인정'한다는 제스처는 취하지 않더라도 (사실 이런 사람은 드물죠.) 논쟁 후에 그 논쟁에서 나온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노력이 보여야 하는데... 문체가 워낙 두드러져서 안 보이는지 몰라도 그런 모습이 별로 안 보여서 큰 기대는 안 되는 편입니다...근데 하는 꼬라지보면 본인이 못 주워먹은 걸 가지고 또 "그러니까 세대론의 문제는 한윤형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것 같기도 하네요...

2011.07.27 19:10:00
*.10.11.247

니마 야권연대 관련글 댓글에서 판다님 트랙백 부터 먼저 반박하고 박가분 디스하신다고 말하셧잖아요

빨리 글써주셈

하뉴녕

2011.07.27 22:58:38
*.171.89.66

원래 순서를 그렇게 잡았는데 우연히 장정일-조영일 싸움에 대해 슈가분이 얼척없는 소리 늘어놓은 거 가지고 빡쳐서....그것도 곧 쓰긴 쓸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rrt

2011.07.27 22:26:39
*.140.58.209

박가분이 자기가 없다는 걸 몰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없다는 걸 알아도 그짓밖에 할 짓이 없으니 그런 거겠죠

wonik sokal

2011.07.28 16:23:34
*.153.171.210

박가분 리즈시절...

http://blog.naver.com/paxwonik?Redirect=Log&logNo=40046803666

마지막 댓글좀 보소

"자, 이제 결론이 안 나는 님의 사변에는 신물이 났습니다. 슬슬 자러 가야겠군요. 제 포스팅이 강간당하기 전에, 댓글은 잠시 차단해두겠습니다."

나이 쳐먹고도 하는 짓은 짓거리는 지금하고 똑같네 ㅋ
지가 강간해놓고 강간당했다고 떼쓰면서 정조대 아이템 사용하기

백워터

2011.07.29 07:43:07
*.140.58.209

리즈이후에도 마이너리거

독자

2011.08.06 02:14:28
*.131.236.179

박가분 같은 사람에게 글을 청탁하여 공론장으로 나오게 하는 출판사나 매체들이 더 나쁜 사람들이라 봄.

음..

2011.08.09 23:56:16
*.214.235.105

이런 글 보면서 내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말로서 다른 사람을 설득(?)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란 점. 박각분도 분명 평균보다는 명석한 사람일텐데(한윤형씨야 물론이고), 어쩜 이렇게 긴 글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도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는지...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뭐랄까..., 이런 사람들도 말로서는 서로를 설득하지 못하는데, 나같은 사람이 어쭙잖게 주위 사람을 설득하려 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네요. 뭐, 동시에 위로도 되긴 합니다. 내가 멍청하거나 언변이 약해서가 아니라(사실 좀 약하긴 하지만..) 말을 잘 한다는 건(혹은 글을 잘 쓴다는 건) 정말 무지무지하게 힘들어서 그런 거란 생각이 드니까요.

p.s. 그나저나 나는 언제쯤 이런 글들을 좀 술술 읽을 수가 있을까요? OTL

Currahee

2011.08.10 01:30:50
*.226.206.57

박가분은 좀 맞아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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