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드라마틱 25호에서 박원국은 <경성스캔들>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독립운동의 머리띠를 두르고 등장한 순간 그 시대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고 로맨스를 말하려는 초반의 도발적인 질문은 사라지고 말았다고 썼다. 맞는 말이다. 그는 명확히 이수현(류진)이 애물단의 수장으로 나타나는 11화를 지적한다. 그 순간 이 로맨스물의 남주 1,2와 여주 1,2는 모두 독립투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던’이란 말이 유행했던 1930년대라는 공간을 일제의 강압과 독립운동 세력의 저항이라는 민족주의 도식을 넘어서 그려내려는 시도는 요즈음의 트랜드라고 볼 수 있다. <경성스캔들>은 그리고 드라마쪽에서 그 트랜드를 대변하려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종영된 지금은 이 드라마가 ‘일제의 강압과 독립운동 세력의 저항’을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탈이념의 시대를 말하고 이념에 포섭되지 않는 일상사를 중시하겠다고 말하지만, 일제시대에 그러한 잣대를 들이대기엔 좀 문제가 있다. 민족주의 담론을 비껴나서 1930년대 경성의 풍경을 담는다고 치자. 그 거리의 ‘때깔’을 표현하고,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 극소수의 독립운동가를 제외하면 시대와 상관없이 살고 있었다고 치자. 이런 시각은 가령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논쟁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논쟁이 제기되는 것 자체만으로 사람들이 불쾌해하는 사회라면 어떻게 될까. <청연>이 친일파 논란에 휘말려, 혹은 논란 이전에 이미 대중의 무관심에 사라져 갔던 것을 생각해 보라.
일제시대에 일본어를 한다는 것은 물론 힘 있는 이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전근대 사회인 조선에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어떤 보편성의 맥락에 진입하기 위한 행위였을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들도 사상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어를 멈추고 일본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물론 당시의 조선어에는 학술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개념어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례는 노정태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친일파 지식인의 정신세계엔 아마도 두 개의 맥락이 혼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들은 두 개를 분리하지 않고 뭉뚱그려 ‘친일’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한다. 그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별하다 보면, 뭔가 생각하기 싫었던 지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이 영역은 마땅히 억압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래서 ‘가벼운 일제시대’보다는 ‘가벼운 독립운동’이 훨씬 사람들을 거스르지 않는 선택이 된다. 때깔은 좋지만, 그게 우리의 환상을 침해해선 안 된다. 핸섬한 모던보이는 미워하기 힘든 대상이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경성스캔들>은 결코 용두사미로 끝난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인들의 욕망을 유행의 앞에서 끄집어낸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봤음에도) 일본친구들이 본다고 생각하면 쪽팔린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그것은 이 드라마가 ‘예외적’인 것이 아님을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무거움의 존재.. 혹은 주제..
사랑과 낭만, 혁명과 투쟁
이 두 가지를 어느 것에도 치우침없이 말끔하게 진행을 하는
걸 보면서 그 시대의 아픔과 낭만과 혁명과 독립운동이 낯설
고, 감히 다가설 수 없는 거대 명제가 아니고, 친근하면서도
내게 익숙한 주제가 되어 주더라구요.
내겐 너무 반가운 드라마였어요. 한성별곡은.. 무거운 돌과
같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