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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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었을 때, 언젠가 <은하영웅전설>을 다시 한번 정독하고 그에 대한 무지막지하게 긴 평문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길어봤자 책 한권 분량이 나오지도 않을 테고,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의 숫자는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보나마나 블로그에 올리게 되겠지만.
나는 양 웬리의 신봉자였다. 양 웬리의 팬들은 은하영웅전설 팬의 큰 줄기를 차지하지만, 나의 경우는 약간의 특이성이 있다. 말하자면, 양 웬리의 팬들은 대개 양 웬리가 동맹을 장악하고 라인하르트와 우주적 패권을 다퉈주기를 바랬다. 대개의 자유행성동맹 팬들이 그랬다. 자유행성동맹 팬들 중에는 구국군사위원회의 쿠데타가 성공했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꽤 있었다.
반면 나는 양 웬리의 사상 그 자체를 숭배했다. 양 웬리의 행동 중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양 웬리가 '우유부단하다.'는 세간의 평 -소설 자체의 평가를 포함한-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다나카 요시키보다도 양 웬리를 더 잘 알았다. 양 웬리는 철두철미한 신념으로 무장한, 일관성 있는 위인이었다. 그 본인이 아무리 신념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고, 그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10%씩 깎았다해도, 그리고 그의 사고방식이 상대주의에 가깝다고 해도, 자신의 유연한 사고회로를 걸러서 나온 결론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는, 그는 결코 유연하지도 우유부단하지도 않았다. 그는 강고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내가 은하영웅전설의 광팬이던 시절에, 내 머리속에서 양 웬리는 은하영웅전설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나는 내가 작가의 의도를 온전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다나카 요시키는 양 웬리를 주인공으로 보고 있는데, 다른 이들은 왜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못내 답답했다. 은하영웅전설에 대한 글을 평문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그 '과거의 나'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물론 군대에서 -_-;; - 탄생했다. 내가 틀렸다. 양 웬리는 은하영웅전설의 이물질이다. 나는 그 이물질에 대해 탐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나카 요시키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와, 내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의 차이에 대해서도.
옛날에, 다음카페에 흔히 '홍차카페'라고 불린 은하영웅전설 동호회가 있었다. 나는 거기서 꽤 열심히 활동했다. 그때 나는 고교생으로 대전에 있었기 때문에 '오프'는 거의 나가지 못했지만. 카페 회원들은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을 아이디로 사용해야 했는데, 카페의 창립자가 '라인하르트'라는 아이디를 가져갔고, 양 웬리는 영광스럽게도 영구 결닉이었다. 나는 처음에 '라이오넬 모톤'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했다. 그는 함대 사령관은 아니지만 양 웬리가 그 능력을 인정했던 단역이었다. 정말이지 '양 웬리 주의자'다운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활동을 꽤 열심히 하다보니, 나중엔 이 아이디가 너무 단역이라는 생각이 들어, 동맹군 역사의 명장 중 하나인 '투덜쟁이 유스프', 즉 '유스프 트파로울'로 아이디를 바꿨다. 언젠가 동맹군의 모든 장성(?)이 모여 양 웬리를 옹립(?)하자는 논의를 했다. 물론 이 논의는 결렬되었다. 그런 것이 가능할리 없었다. 양 웬리와 다른 동맹장성의 아우라 사이에는, 어찌됐건 군생활 2년 정도의 격차가 존재하니까.
그러다가 나는 은하영웅전설의 세계를 떠났다.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사춘기의 유치한 감상으로 치부했다. 별로 어려운 SF를 읽은 것도 아닌 주제에, 무슨 SF매니아라도 되는 듯이 "은영전은 스페이스오페라에 불과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중얼거리며 애써 내 정체성을 부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군대에서 '유치하고 천박한 나'를 재확인했다. 보급병 인생은 검열, 검열, 검열! 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정말 지긋지긋한 검열이 하나 있었다. 1종창고 -사회말로 하면 식품창고다.-의 모든 재고를 일일별로 맞추어야 한다는 지시강조사항이 내려온 검열이었다. 아아, 밥은 매일 쳐먹는데, 조미료는 매일 들어가는데, 그 양을 일일별로 맞춰놓으라니! '극악'이었던 건 검열날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지 않고 '이번 주간'에 온다는 언명이었다. 이것들은 날짜를 정해주면 당연히 내가 그 전날 재고를 다 맞춰놓을 것임을 알고 있었던 거다. 나는 검열나온 중령에게 1종소모대장을 집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내 머리속에 은하영웅전설의 한 인물에 대한 묘사가 갑자기 떠올랐다. 동맹군의 도손 대장. 쓰레기통을 뒤져 감자 몇 킬로그램을 찾아내서 식료품 양을 맞춰놓으라고 했다던 인물. 씨발 내가 지금 하고 있는게 그 짓이구나.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나는 지금도 '1종 소모대장'이 쓸데없는 행정이라고 본다. 공급하는 양만 맞춰주면, 식료품은 당연히 통제할 수 있다. 누가 빼돌릴까봐 쓴다고? 굳이 빼돌리자면 '1종 소모대장' 쓰면서도 얼마든지 빼돌린다. 헛소리다. 아아, 그래, 자유행성동맹은 그딴 인물을 군부의 수장으로 임용했단 말이지. 정말 망해도 싸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히 흘러갔던 것.
그렇게 은하영웅전설은 다시 내 곁으로 왔다. '양 웬리 주의자'로서의 아련한 추억도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 주변에 은하영웅전설 본편 정본을 가진 사람이 있다. 언젠가는 다시 그것을 빌려 정독하고 여기에 글을 올릴 것이다. -_-;;;
옛날에 을지인가에서 나온 해적판에 '얀 웬리'라고 되어 있었구요. 이 해적판은 문체의 면에선 나름의 미덕이 있는 번역이었으나 어쨌든 오역이 좀 많았구요. 21세기 들어서 서울문화사에서 '정본'이랍시고 새로 번역이 나왔어요. 여기서 '양 웬리'로 바뀌게 되죠. 처음에는 이 명칭을 사용하는데 저항감이 있었는데, '정본'을 보면 '양 웬리'의 성격이 '얀 웬리'랑 좀 달라요. 얀 웬리가 신사같은 이미지가 강하다면, 양 웬리의 대사는 훨씬 더 시니컬합니다. 그래서 제 머리속에서는 그냥 '양 웬리'로 정리가 되었어요. '본편 정본'이란 서울문화사판본, 1권에서 10권까지를 의미하는 거죠. 외전이 4권이 있는데, 이건 찾기 힘들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