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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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이 뒤늦게 김규항-진중권 논쟁을 비평하여 나도 뒤늦게 한마디 거들 핑계를 찾게 되었다. 내 생각에 이 논쟁이 상이한 반응을 낳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김규항의 진보신당 비평은 올바르되, 김규항의 진중권 비평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글은 진보신당의 위기와 정체가 정체성 확립 부재에서 오고 있다고 진단하는데, 맞는 말이다. 그 문제를 사퇴한 심상정에서 뿐만이 아니라 완주한 노회찬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렇게 깊이 있지는 않은, 평이한 분석이지만, 신문 칼럼의 짧은 분량을 생각할 때 그가 쓸 법한 글이며 필요한 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전체 글의 맥락에서 볼 때 진중권을 언급한 오류는 사소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규항의 글을 대충 읽었지만 그 오류를 기억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물론 진중권 본인에게 이는 다른 문제였을 거다.
김규항의 이 글에 담겨 있는 함의는 이렇다. 1) 진중권이 전진을 조롱한 이유는 그가 좌파 사상을 용인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다. 2) 진중권과 같은 자유주의자의 활약으로 촛불당원들이 유입되었다. 3) 그렇게 유입된 자유주의 당원들은 진보신당을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어떻게 이렇게 읽느냐고 항의할 분들이 있겠지만 이 칼럼 뿐 아니라 그 후 김규항이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면 이렇게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팩트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2) 뿐이고, 1)과 3)은 해석이다.
3)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나는 촛불당원이란 범주가 2010년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촛불 당시 유입된 당원들의 정치적 성향은 그후 2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각기 갈렸다. 그들이 진보신당을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할 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이때 '자유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들 사이에 합의가 없다는 것이다. 유시민을 위해 심상정이 사퇴하는 것을 '자유주의적 행동'이라 부른다면, 변태같은 코미디가 탄생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심상정더러 사퇴하라는 압력이 전체주의적이고 심상정의 완주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자유주의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고 진보정당이 추구해야 하는 자유주의도 있는 거고 피해야 하는 자유주의도 있는 건데, 김규항의 '대충 비평'은 이런 섬세한 문제를 그냥 포대기로 덮어 버린다. 덮어 버리면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다.
또 진보신당이 그들 때문에 자유주의적으로 변했다고 할 때, 더 큰 문제는 그들과 논쟁을 하면서 당의 방향성을 제시할 사회주의자, 혹은 사민주의자 그룹의 역할이 존재했느냐는 것이다. 정말로 슬픈 것은 지난 2년 동안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회찬 심상정 등 당 지도부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전진과 같은 의견그룹의 문제일 수도 있다. 심상정은 후보 사퇴 후 기자회견에서 진보신당의 정체성이 확립된 적이 없다고 논평했다. 정말로 맞는 말이지만 여기에 대해선 심상정도 큰 책임을 지닌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에 대한 책임은 진중권에게도 김규항에게도 내게도 있는 거다. 김규항이 "심상정 뿐만 아니라 노회찬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말한 그 세밀한 시각을 진중권에게도 대입했다면, 틀림없이 "진중권 뿐만 아니라 전진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말해야 했으리라.
1)에 대해선 진중권이 직접 반론을 했다. 진중권의 반론의 핵심은, "내가 전진을 조롱한 건 내가 좌파 사상을 용인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터키 인형 속에 난쟁이를 숨기는 차가운 도시 남자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중권은 난쟁이를, 혹은 붉은 자지를 안 숨기는 사회주의자를 비판하고 있는데, 그의 비평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진중권 본인의 행동에 대해선 그 자신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길이 없다. 그리고 진중권의 벤야민 독해가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는 별도로 할 수 있는 얘기긴 하지만 이 논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김규항은 진중권의 반응에 대해 거듭 진중권이 좌파를 용인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고종석과 강준만과도 구별된다는 것이다. 김규항은 진중권이 전진에게 '닭짓'이란 표현을 썼단 이유로 그를 반공주의자라고 부른다. 좀 변태적인 어법이다. 나는 심지어 유시민이 민주노동당을 조롱할 때도 그를 반공주의자로 여기진 않았다. 유시민은 민주노동당이 공산주의라서 박멸해야 한다고 믿은 게 아니라 백년 쯤 후져빠진 정당이라 생각했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진중권의 '닭짓'이란 어휘 역시 어떤 미학적인 경멸을 담은 말이지, 반공주의를 표현하는 말은 아니다.
아마도 진중권은 전진을 조롱하면서 '김규항 같은' 이란 수사도 사용했었다. 김규항은 본인이 받은 모멸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상의 자유'의 두 가지 측면을 의도적으로 혼동한다. 이를테면 내가 국가보안법에 의해 한총련이 구속되는 것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한총련의 이념을 '닭짓'이라 부를 자유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김규항은 NL들이 "우리를 비판하면 모두 국보법 찬성론자!"라고 말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자신과 전진을 옹호하고자 한다. 전진은 그것을 반갑게 여길까?
진중권이 전진을 비판한 방식에 대해서는, 나도 좀 과했다고 여긴다. 진중권은 전진의 문건이 '운동권 사투리'라는 점을 규탄하여 촛불당원들의 환호를 받았다. (당시엔 촛불당원이란 범주가 가능했다. 지금도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행동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헐 자유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욕하네. 나 삐졌음. 너희들 진보정당 운동할 자격 없음. 너희들 다 나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전진 비주류 계파(물론 조직원이 한명 뿐인)의 리더이신 이상한 모자 선생님은 진중권의 전진 규탄에 환호하는 촛불당원들에게 운동권 정파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저 유명한 "전진 떡밥 - 운동권의 역사"를 저술하셨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은 "이상한 모자의 대응이 김규항의 그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진중권의 전진에 대한 비평은 전진이란 정파의 이념적 내용에 대한 것이었다기 보다,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이번 씨네21 기고문과 통한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건 전진과 김규항의 자유지만, 진중권의 견해는 가능한 견해다. 그리고 전진의 문건이 새로 유입된 촛불당원들이 못 알아먹도록 쓰여 있다면 그걸 '표준어'로 변환하려는 노력도 분명히 필요하다. 만일 김규항의 진중권 비평을 진중권이란 사회주의자의 잘못된 인성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얘기가 매우 이상해진다. 마치 진보신당이 촛불시위 때 당원을 많이 모은 것이 잘못이라는 얘기인 것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증거는 더 있다. 김규항은 본인이 '자유주의'란 말을 욕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단 점을 밝히기 위해 고종석과 강준만은 용인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언론지상에 마르크스를 읽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쓴 고종석이나 (나는 그런 주장때문에 고종석이 반공주의자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97년도에 진보진영 독자 후보를 내지 말라고 주장했다고 훗날 이에 대해 사과한 강준만이 (나는 그런 에피소드 때문에 강준만이 반공주의자라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진중권보다 '좌파 사상을 더 용인'하는 사람들일 이유는 뭘까? 결국 김규항 얘기는 자유주의자는 진보정당 바깥에 있으면 좋지만 안에 있으면 나쁘다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외연 확장을 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이 무슨 변태적인 비평이란 말인가? 좌파질 한다는 걸 내 정체성에 디스걸면 급토라지는 삐돌이가 된다는 것과 동일시해선 곤란하다.
'자유주의'가 문제라면 지적해야 할 점들은 더 있다. 진보주의자의 관점에서, 어떤 사람이 '자유주의자'란 것이 그 사실 자체로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자유주의적 행동이 진보의 가치를 억누를 때다. 김규항은 진중권이 자신을 '디빠'로 모는게 못내 불만인 모양이다. 물론 김규항은 <디 워> 사태 당시 디빠가 아니었다. 하지만 '타인의 취향'이란 '자유주의적' 어휘로 뒷짐지고 점잖게 디빠에 흥분하는 이들도 비슷하게 문제라고 말한 그 비평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자유주의적 패악질이 아니었던가. "강준만은 조갑제보다 더 나쁘다."는 김규항식 자유주의 비평에 의한다면, "김규항은 변희재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타인의 취향"이란 글의 기저에 깔려 있는, 김규항 본인이 '민중주의적'이라 굳게 믿을 '저 어려운 글을 쓰는 평론가'들에 대한 적개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김규항은 그것이 사회주의적인 태도, 예수의 행동을 계승하는 태도라고 믿을 거다. 하지만 어떤 좌파들의 자유주의 비평의 시각에서 보면 그건 지식인의 담론적 권위를 해체하여 글쓰기를 시장논리에 종속시키는 '자유주의적 책동'이었다고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김규항의 십년 동안의 행동을 엄밀히 분석하자면 사회주의적이라기 보단 자유주의적이었던 거다.
물론 그건 김규항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십년 전 '전투적 자유주의자'란 애매한 이름으로 묶이던 그룹, 강준만, 진중권, 김정란, 김규항 등에게 함께 해당하는 문제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환호하며 성장했는데, 당시 그들의 비평 활동의 결과로 한국 사회의 담론지형이 더 '자유주의적'으로 변했다는 건 사실이다. 좋은 의미에서도 그렇고 나쁜 의미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그 '자유주의적 재배치' 속에서 진중권이나 김규항 등이 출판 시장에서 '진보 지식인'이란 포지션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며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이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거야 당연하다. 그런 것을 무차별적으로 욕해서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진중권처럼 자신이 어떤 허울을 뒤집어 쓰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김규항은 자신이 진중권처럼 책을 많이 팔지 못했단 이유로 스스로를 자본주의 바깥에 서 있는 사회주의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지나치게 편의적인 시각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김규항이 자유주의적 비평 활동의 결과로 걸치고 있는 '진보 지식인'의 아우라가 부당한 것이라고 시비 걸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김규항의 '대충 자유주의 비평'이 실은 자신이 해왔던 일을 부정하는 것이란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김규항이 '사회주의적 영성'을 지녔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의 활동은 활동 그 자체로 평가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그 점을 부정한다면 그는 '품성론자'와 다를 것이 없다.
정치는 현실과 이상의 함수인데, 지나치게 하나의 변수를 무시하는 태도는 생존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진보적인 이상을 지닌 정치인이 똑같은 신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현실적인 유연성을 얼마나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외부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외부에 드러난 모습만을 보고 신념의 배신이라고 단정짓는 태도는 신념의 투철함이기 보단 정치적 미성숙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외형적인 모습만을 보고 진짜와 가짜로 이분하는 태도는 저급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면적인 신념이 무엇인지를 알기 힘들다는 점에서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별하느냐의 문제가 생기지만,(그래서 세상에 사기꾼이 판을 치는 거겠죠.) 그러한 구별은 평가자의 시각이 얼마나 세련되어 있느냐의 문제이고, 객관적인 진실만을 두고 말하자면 기회주의적인 회색도 있지만 진정성을 가졌으나 합리적이기 때문에 회색인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내면으로는 진짜 진보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정치인에게는 현실상황에 따라서는 때로 보수로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최소한의 숨통을 틔워주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진보정당 정치인들을 보면 가끔 도대체 숨막혀서 어떻게 정치를 할까 하는 의문이 생기곤 하거든요.
들사람
외려, (대의)민주주의와 사회-공산주의 간에 겉보기보다는 실천적 시너지 효과를 낼 만한 구석이 의외로 크다면 모를까.. 즉, 민주주의를 자유주의화해온 자본주의적 대의민주제의 독소를 사회주의적 가치로 어떻게 제거할 거냘 놓고서 말예요.
특히나 한국처럼, 미국산 공산주의 분쇄 이론였던 근대화론의 영향 아래 따라잡기 발전 전략으로 소위 동아시아의 기적을 경험한 데(소위 반부변주 국가들에)선, 자유주의적 가치는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의 모판은 커녕 이런 가치의 싹을 늘 유보, 질식시키는 "물적 조건"이었죠. 소위 "부르주아 혁명"의 미덕이 민주주의를 살찌웠다고 서유럽 사회과학 쪽에서 설파해온 근대주의적 가정-신화와 달리, 한국 같은 데선 부르주아가 없어서 민주주의가 없는 게 아니라 서유럽및 일본산 부르주아지에 물적, 지적으로 종속된 부르주아의 실존적 숙명 때문에 민주주의가 없었던 셈이라고 할까요.
배타적으로 한 가지 원칙을 밀고 나가는 것이 부르는 문제를 인정한다고 해서, 샌델이 깔고 있는 대전제까지 받아들이는 건 문제 아닐까 해요. 일단 하버드라는, 다시 말해 global ruling class의 지적 요람에서 유지, 지속하고파 하는 "공동체"란 게 현실적으로 과연 뭐겠는지 놓쳐선 안 될 듯하고, 이 경우 배타적 원칙 실현(이를테면 사회-공산주의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어리석음에 대한 언급이 실질적 해방의 정치사상이나 실천 구상의 알맹이가 발렸으면 좋겠다는 욕망과 무관한 걸지도 질문해볼 필요가 있겠지요.
여러 비판적, 실질적 해방사상을 위시한 사상들 간의 차이가 쉽사리 적대로 환원돼선 안된단 말씀엔 저 역시 전적으로 수긍하고, 앞으로 그러는 데 필요한 실천감각은 어떤 것일지 논의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이건 굳이 샌델 같은 "메인스트림" 철학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도출할 수 있는 경로가 많지요. 그게 어떤 "위험성"도 훨씬 줄 테고요. 뭐 일테면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 더 기다려달라" 식의 무한한 연기 논리에 힘을 실어줄 위험성이겠달까요. 민주개혁적 시민사회 진영에서, 근까 김기식씨가 말하는 빅텐트론처럼 말예요.
또 그런 이미지를 염두해두고 대중지식인입네 하고 인터넷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것이고...
김규항은 바닥까지 드러난 진중권의 외설적 이데올로기 비판을 그냥 냅두면 달밤에 개짖는 꼴이란걸 알면서도 대응 하는걸 보니 출판사 사장으로 급하긴 급했나봅니다.
ㅋㅋㅋ 김규항의 내밀한 욕망과 질투에 대한 심리투사는 진중권보다 더 비열하면 비열했지 덜 하지 않네요. 자유주의자들 세명에게 조롱받을만치 김규항의 정치적 아우라가 쎄긴 쎈가봅니다. ㅋㅋㅋ
들사람
진중권씨만 해도 사실, 자길 쉽사리 자유주의자라 딱지 붙이는 김규항씨에 대해 "자지 말고 정치해"라며 사적인 악연의 일단을 선정적으로 드러내기보단, 김규항씨 특유의 정치적 올곧음과 동전의 양면이랄 수 있을 "지적, 이론적 보수성"이 어떤 난점을 부르고 있는지 지적해주면 더 좋았죠.
김규항씨도 보면 1980년대 이후의 좌파사상 조류를 그저 "난놈들의 현학"으로 깔아뭉개며 구관이 명관임을 역설하는 쪽였는데, 사실 이게 개별적 주장의 시비를 떠나 이른바 "몰락 이후"의 세계정치 지형에 실천적, 지적으로 제대로 대응하는 건진 심각하게 따져볼 문제였어요.
제가 경험한 바로도, 예컨대 지구화된 식민주의 지배양식으로서의 근대성 경험과 근대식민지 경험을 이어볼 수 있는 비판이론적 자원으로 "근대성 비판"의 문제틀을 활용할 수 있잖냐는 질문에 대해, 김규항씨는 "근대는 극복이 아닌 미완의 과제"란 명제에 입각해, 이를 상대화하는 좌파 진영의 지적 조류는 지적 수입상 놀음에 다름 아니라는 (제가 보기엔 보수적ㅋ) 반응을 보였는데요.. 이건 좀 아니잖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죠. (최근 언론 지면에 나오는 "진보적 자유주의"론자들도 거의 다 근대는 미완의 과제란 쪽에 서 있을 텐데요.. 김규항씨의 위치는 그럼 어찌 되는 걸까요.ㅋ)
진중권씨도 엔엘 사상을 농경사회적이라고, 피디 사상을 산업사회적이라고 하면서, 탈산업사회를 사는 지금 엔엘은 말할 것도 없지만 피디도 시대착오적이긴 마찬가지란 식의 입론을 펼쳤죠? 그러면서 미래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사회발전 도식에 기대 신인류의 탄생을 얘기하고.. 진보좌파 진영의 내적 쇄신과 달라진 정세에 조응하는 새로운 (좌파적) 주체 형성의 필요성이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지만, 저런 식의 내러티브 속에 자유주의자라고 불릴 소지가 있었음을 진중권씨도 부인할 순 없지 싶어요. 새로운 주체 형성의 징후와 필요성을 저렇게 굳이 주류미래학 담론의 프레임 안에서 이야기해야 했는지도 모르겠고요.
(엔엘 쪽에서 붙이는 자유주의 딱지의 질이 그야말로 딱지치기 수준밖에 안 되는 거야 뭐.. 지금 엔엘만큼 자유주의적인 행보를 취한 정파도 없거니와.ㅋ 그외에 발부된 자유주의 딱지가 그렇다고 내용상 적절했는지도 좀 의문이긴 하지만요.)
외려 기존 질서의 단절과 연속 과정 속에서 이뤄져야 할 새로운 주체 형성이 "1980년대"의 자장 아래서 기존 피디 혹은 노동운동 진영의 지적, 문화적 보수화 경향 속에 지체될 수밖에 없었던 조건들을 환기하고 그 지체를 해소할 길을 제시하는 "유기적 지식인"으로 각을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새로운 주체 형성을 가로막아온 조건을 "지양"하자고 하기보다는 일종의 청산주의적인 제스쳐를 취한 것도 사실 아녔나 싶거든요.
암튼 전 이 참에 그간 두 사람이 여러 모로 보여줬던 미덕은 뭐며, 앞으로 이들의 목소리가 발휘할 "정세적 유효성"은 어디까지인지에 관해 고르게 토론이 이뤄지면 좋겠고, 그게 두 사람을 제대로 "지양"하는 바람직한 방향 아닐까 싶군요. 일방적인 성토나 상찬, 조각난 품평이 아니라 말예요.
내 비록 널널한 자유주의자로 살지만 남이 선뜻 가지 못하는 길을 묵묵히 가열차게 가는 그들에게 미안함과 함께 뭐라도 배워보고싶은 생각이 드는거죠.
그래서 오세철 교수, 문재훈 소장님, 이일재 선생님,채만수 소장님, 노동자전선 같은 구좌파가 주장들에 관심과 함께 자본주의사회에서 상식화된 비상식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노힘회원이었던 김규항은 그걸 계몽하고 싶었던게죠.
김규항은 어쩌면 디지털 시대를 사는 고품격 인문좌파들에게 그걸 계몽하고 싶은 건 아닐까요?
몇년전 강유원씨가 수유너머류의 노마드좌파들에게 폭언을 퍼부었듯이 말입니다.
2010/08/18 11:23
--> 사실 이거야말로 김규항의 글을 소비하는 정서지요. 저는 들사람 님의 덧글에 동의합니다. 진중권도 '새것'과 '낡은 것'만을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과히 좋은 것은 아니죠. 새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냐라는 문제도 있겠고 한국의 지식 수입의 맥락에서 새롭게 창조된 맥락이 무엇이냐의 문제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김규항의 평론가 비판이 '보수적 반응'이었다는 들사람 님의 지적은 제가 본문에서 하고 싶었던 그 말이기도 합니다.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일로 큰 분이 자유주의자 척결 운운하고 계시니...;;; 본인이 무슨 짓을 하셨는지 잘 모르시는 거죠.
들사람
오세철, 채만수 샘들의 맑스주의 담론들은 왜 punky님 같은 "자유주의자"들에게 그저 심리적 위안의 알리바이만을 제공할 뿐, 님 같은 임금노예들과 그런 처지를 구조화하는 이 세상을 아울러 바꿔보고 싶다거나 그러겠노라고 하는 일상화된 실천의 계기를 만드는 데는 신통치가 않은 걸까?
오세철, 채만수식 맑스주의를 내동댕이 치거나 홀대하는 우경화된 현실이 문제일까, 그런 현실에 개입하려는 "좌파적 대중화" 전략 내지 감각의 부재,부실이 문제일까?
"자기언어"라고 하셨는데, 외람된 소릴지 몰라도 채만수, 오세철 샘의 언술에서 당신들 나름의 자기언어를 구사하고 있단 인상을 받을 수 있으시던가요? 전 잘 모르겠던데요..ㅎ 특히 채만수 샘은 맑스 특유의 쌈닭풍 문체를 쓸데없이 과도하게 답습해선 쟁점을 외려 흐리거나, 무오류주의적인 완고함으로 역사유물론적인 지식생산의 기본과는 거리가 먼 걸로 비치기 십상인 글만 쓴단 소리 들으셔도 딱히 이상할 게 없죠 사실. 소련 및 동구권 몰락을 내부 요인이 아니라 미국 등 서방세계의 농간 탓이 전부인 양 접근하는 것도 어이 없지만 말예요.
뭣보다, 대체로 토 달 게 없이 전형화된 얘기 속에서 막상 울퉁불퉁하고 기우뚱거리는 "삶"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요, 이분들의 맑스주의 속에선. 세상이 조립설명서대로 아다리 맞아들어가는 프라모델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건만 펼치는 입론들은 어찌나 이음매 없이 늘 한결 같고 매끄러운지. 여기엔 그분들 세대 특유의 "미학적 습속"이 개재돼 있는 게 아니냔 생각까지 들 정도예요. 빛나는 전망 쪽 얘기가 됐든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쪽 얘기가 됐든요.
"자기언어"라고 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일종의 언어적 환상이죠. 다시 말해 자기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건 사실, 이미-항상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듣고 배운 생경한 개념과 말들이 곰삭아 맛과 결 차원에서 재배열된 결과들이란 건데요. 이걸 도무지 부인할 수 없다면, "지적 수입상 놀음"으로 보이는 모종의 움직임도 나름의 호흡을 가지고 수용 맥락을 준별해 가면서 할 얘기지, 뭔가 마뜩치 않고 기껏해야 자기한테 와닿지 않는단 이유로 갖다 붙이는 딱지라면 굉장히 곤란한 거 아니겠어요? 김규항씨도 사실 (정통)맑스주의라는 수입 담론을 곰삭여 한국적 현실과 맞물린 자기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기언어화했던 거고요. 1980년대 맑스주의 담론의 뒤늦은 수용과 활황에 대해 국수적 우파 계열의 학자들이 했던 힐난의 내용이 뭐였는지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힐난이 결국 제 발등 찍기에 불과하다는 점은 일단 제쳐놓고서라도, "자기언어의 빈곤, 결핍"으로 치면, 채만수-오세철 선생의 맑스주의에 대해서도 그저 소련산 맑스-레닌주의 독본이거나 서유럽산 좌익공산주의 담론일 뿐, 자기언어와 삶 속에서 토착화됐다고 하기 곤란한 구석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어요.
암튼 저도 불안정 임노동자로 밥벌이하고 있지만, 전 그런 제 조건을 좌파적 실천을 말하고 가능케 해줄 물적 조건으로 이해하지, 자유주의적 욕망에 포섭된 임금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고로 맑스주의 같은 생각의 꾸러미는 그저 경외의 대상으로밖엔 소비할 수 없는 상태라고만은 보지 않거든요. 그렇게 위악을 떨어서 좋을 게 뭐냐 싶어서기도 하고, 결국 맑스가 말하는 실질적인 변화란 게 이런 모순적인 조건에서 이뤄지는 것일진대, 이런 삶의 조건을 모순덩어리네 뭐네 냉소할 바엔 그 조건에서 뭐가 바뀔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더 낫단 거죠.
전 님처럼 후자 식으로 그저 맘으로만 경외한다는 태도는, 존재와 의식이 겉돌 수밖에 없는 녹록찮은 상황을 환기할 순 있을지 몰라도, 그 겉돎이 극복불가능한 것인 양 기정사실화할 이윤 될 수 없다고 봐요.
불안정노동자 겸 세입자들의 맑스주의는 어떤 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맑스주의를 접한 불안정노동자 겸 세입자들이 전업 혁명가로 나서게 하는 것 못잖게, 아니 그 이상으로 말예요. 전 정말이지,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우리네 "삶"을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근본적이고도 실질적인 변화를 줄곧 욕망케 하는 노동자들의 맑스주의가 분명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이유로 이런 탐색이 개량 딱지를 두려워할 순 없는 노릇이란 거겠죠. 68혁명 이후, 혹은 "몰락 이후"에 이뤄진 좌파-맑스주의 사상/반체제운동들의 내적 갱신 움직임들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이유로 한낱 "사파"로 폄훼되거나 미심쩍은 "경계 대상"으로만 치부돼서도 안 되겠구요. 그러는 와중에 누가 뭐래도 맑스주의의 고갱이를 지킨다는 결기가 실은 무척 반맑스적인 이론적 물화를 조장하는 건 아닌지 되새김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만 주억거리고 있기엔 지금 좌파 진영이 마주하고 있는 정황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얘기기도 하겠고요.
어쨌든 어떤 경우에도 무지가 도움을 준 경우는 없지않겠어요?
그저 맘으로만 경외한다는 태도는, 존재와 의식이 겉돌 수밖에 없는 녹록찮은 상황을 환기할 순 있을지 몰라도, 그 겉돎이 극복불가능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으로
어릴땐 빈민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에서 빈곤의 구조화와 21세기 자본주의에서 불가촉천민으로 일컬어지는 홈리스 운동과 장애차별철폐 운동에 조금씩 발을 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시혜자로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아야 한다는게 제일 중요하지만 말입니다.
요즘 들어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고민해볼수록 점점 더 맑스가 말한 부분들이 생생해지던데요... 암튼, 들사람님의 노사과연에 대한 비판은 항시 들었던 것이고, 제가 필요한 부분을 그곳에서 취득할 수 있으면 고마운 것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들은 경계해야 되겠죠.
들사람
다만 저는 맑스주의-좌파적인 사상/실천도, 정통파들의 주장처럼 참된 "것"과 수다한 삿된 "것들"로 갈리기보다는 생명과정 전반이 그렇다고 하듯이 "잡스럽게 분열증식"하고 에미애비나 국적 따위 몰라도 되는 새끼들도 치면서ㅋ 내성이랄까요, 역량도 더 세지고 생동성을 갖는 게 아니겠냐고 보는 쪽이지요.
이른바 정통파인 분들께서 누누히 환기하는 "노동"의 선차성을 자본주의 극복 운운하는 마당에 저 역시 당연히 부인하진 않지마는, 그것이 겨냥하는 "계급(적 주체) 형성"이란 건 마치 사태찜이 "사태 아닌 것"들과의 찜쪄먹힘 속에서 비로소 그 훌륭한 맛으로 사랑받는 것과 엇비슷하겠다고 보는 쪽이니, 확실히 정통파는 아니죠.ㅋ
이런 점에서 정통파한테서 받는 인상은 말인즉슨 별로 틀린 건 없지만, 막상 "삶"의 문제를 파고들 결정적 2%가 부족하다고 보는 편이고요. 질 좋은 사태만 가지고서 사태찜의 맛을 품평하려 드는 격이랄까요. 사태찜이 맛있다 해도, 사태가 아무리 질 좋기로서니 거기서 사태찜 맛이 날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ㅋㅋ
저만의 고민은 아니겠지만, 해서 앞으로 이런 질문이 필요하고 중요해지겠다고 생각해요. 철거민운동, 홈리스운동과 장애인운동에서 성소수자운동, "전형화된 노동자상"을 염두에 둔 노동운동에 이르기까지, "헐벗음"을 구조화하는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모순들과 마주하게 될 서로 다른 주체들이 저마다의 "차이"들을 적대로 환원치 않고서도 그 유동하거나 중첩된 차이들을 외려 하나됨(혹은 공통됨)의 동인이게 할 "다른 조직화"란 어떤 것이겠냐고 할까요? 한국만이 아니라, 북한, 일본, 중국,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 "동아시아"라는 인식 지평 속에서 사안을 다룰 실천감각도 긴요해질 테고요.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조직화 논리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중심도 주변도 없이" 차이화된 주체들이 저마다 중심성을 발휘하도록 말이죠. 저는 이런 주체화 과정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하에서 의식하든 않든 "노동자"들로 살아가는 이들한테 필요한 "계급 형성" 과정 아니겠나 해요.
어쨌거나 전 탈-무지라는 소극적 전략에 그치지 않고서 좀더 적극적으로 맑스 공부라는 게 좀더 매력적이고 "삶"과 깊숙이 연루된 앎이자 삶의 과정이었음 좋겠단 바램이예요. 그저 그뿐입니다.
punky님께서도 이런 의미에서 모쪼록 정진하시고, 건승, "건투"하시길 비네요. 비록 지금은 각자 선 자리에서 말하고 있지만, 언젠간 따로 또 같이할 "때"가 언능 오고야 말잖겟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