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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ultur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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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0 Apr 2026 01:19:3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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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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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설국열차를 관람하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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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짧은 리뷰를 요구한 다른 매체에는 설국열차에 대해 ‘지적인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평했다. 영상의 스펙터클이나 스토리의 완성도를 부각시키려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많은 상징적 장면을 삽입함으로서 관객들이 영화를 본 후 겪는 경험들을 통해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하는 영화가 있기도 하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명백하게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는 큰 어려움 없이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설국열차 속에는 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온갖 요소들이 가득하다. 열차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열차의 외부가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된 상황에서 열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amp;nbsp;&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열차에 탑승한 대부분의 승객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지만 유독 꼬리 칸에 탄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설국열차는 이 꼬리 칸에 탄 사람들이 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을 다룬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혁명을 주제로 한 드라마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물론 설국열차가 전제하는 혁명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계급이 임노동을 통해 재화를 생산하고 지배계급이 이에 대한 착취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지만 설국열차의 세계에는 노동계급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설국열차에 등장하는 생산수단은 열차 그 자체인데, 거의 무한히 작동할 수 있는 신성한 엔진, 얼어붙은 세계를 달리는 열차라는 환경, 자동화된 설비가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역할을 대신한다. 즉, 꼬리 칸의 사람들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체제에 기여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이 죽지 않을 만큼의 노동력을 보존하기 위해 미력하나마 약간의 복지를 제공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인 셈이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즉,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열차는 일종의 공리주의적 세계이다. 그리고 꼬리 칸의 사람들은 이런 체제에서 ‘배제된 자들’이다. 총리는 시종일관 이들에게 “윌포드님에게 감사하라!”고 말하며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을 강요한다. 열차의 지배자인 윌포드는 이들이 체제의 균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그러니까 공리주의의 교리로 말하자면 이들의 숫자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들을 사회의 일부분으로 감당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즉, 윌포드가 길리엄과 내통해 꼬리 칸 사람들의 개체 수를 조절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과 벌레로 단백질 블록을 만들어 배급하는 것은 공리주의에 기초한 해결책인 셈이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 중에 한정된 재화를 배분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방법은 ‘윌포드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그런데 통치에 대한 이런 공리주의적 접근은 파시스트의 통치술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왜냐면 공리주의 자체가 어떤 전체주의적 기획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진지한 공리주의자들은 공리주의가 자유주의적 발상에 기반하고 있으며 공리주의 그 자체가 전체주의의 비극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나름대로 증명하고 있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공리주의자가 전체주의자로 전향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공리주의적으로 설계된 어떤 사회가 전체주의로 전화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설국열차가 보여주는 총리의 존재와 총리가 지휘하는 살육자들의 존재를 상기해보자. 도끼를 든 살육자들은 총기를 휴대하고 안전장구를 갖추고 있는 군대, 즉 국가기구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살육자들은 제각각의 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검은 마스크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물론 총리가 최고 책임자이지만) 정복을 착용한 일본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올 것인지는 매우 명백하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즉, 살육자들의 존재는 국가가 공인하지 않았지만 특정 정치세력에 복속된 사적 폭력을 의미하며 역사적 사건에서 이것을 찾을 수 있는 예는 ‘검은셔츠단’이다. 그들이 살육을 저지르기 전 생선의 배를 갈라 피를 나누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 역시 어떤 비이성적 신념의 존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파시스트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설국열차에서 공리주의적으로 설계된 사회는 파시즘과 필연적으로 마주친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파시스트에 대한 은유는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유치원 칸’에 대해 생각해보자. 유치원 칸 구성원들의 과장된 몸짓은 어딘가 1950년대의 미국을 연상시킨다. 1950년대의 미국은 경제적 번영과 전쟁의 상흔이 공존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매카시즘이 만연했던 시기도 1950년대다. 유치원 칸은 어린이들에게 반복해서 윌포드의 자비와 탁월함, 엔진의 신성함으로 상징되는 열차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윌포드는 체제의 모든 매커니즘을 꿰뚫고 있다는 데에서 신적인 위상을 가진다. 시스템에 속해있는 주체로서는 시스템의 전체 매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커티스가 인도하는 꼬리 칸의 반란자들은 길리엄을 열차의 지도자로 만드는 것 정도 이외의 구상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윌포드와 커티스의 대결구도는 신과 인간의 대결구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관계에 준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계는 독재자와 민중의 구도로 치환된다. 물론 여기서 민중이란 인민주의적 봉기를 실행하는 그 민중이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이런 측면에서 보면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의 역할이야말로 의미심장한 것이 된다. 민수와 요나는 체제의 본질에 대한 지식과 직관을 갖추고 있다. 문을 열 수 있는 능력과 문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의 존재는 열차라는 사회 안에서의 지식인이자 예언자, 선지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민수와 요나는 인민주의적 봉기를 일으킨 커티스와 (동기가 뭐든) 행동을 함께 하면서도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간다. 윌포드의 문 앞에 이르러서야 이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정치적 지향을 말하기 시작한다. 열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는 이들의 주장을 사실상 거부하는 커티스의 선택은 지식인과 인민주의적 대중들의 갈등을 보여준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열차의 지배자가 바뀐다 한들 공리주의적 질서가 지배하는 체제에서 꼬리 칸 거주민들의 처지가 극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열차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제1의 목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이런 방식의 체제의 유혹에 무방비한 상태로 윌포드의 논리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그에게 이를 넘어설 수 있는 통찰을 주는 것은 요나의 특이한 능력이다. 요나는 체제에 대한 직관력을 활용해 기차의 엔진이 사실은 무한정 작동할 수 없으며 마모된 부품은 꼬리 칸 어린이들의 노동과 이에 대한 착취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이러한 체제의 진실을 깨닫게 된 대가로 커티스가 치르는 것은 한쪽 팔의 절단인데, 이는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하는, 결여를 내포한 체제와 주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된다. 즉, 자신의 결여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진실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에 동의하는 커티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묘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혁명은 이렇게 완수되는 것이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열차를 하나의 현실적 질서로 본다면 이 질서를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는 오히려 기차 외부에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기 전까지 승객들은 외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이는 곧 외부에 대한 인식 자체를 제거하는 효과를 거두는 장치로 활용된다. 따라서 외부로 향하는 문은 그야말로 벽이라는 환상으로 작용하게 되며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질서로서의 열차는 자신의 항상성을 위해 열차 내부의 수많은 문제를 은폐한다. 즉, 열차는 진실에 대한 외면과 망각을 통해서만 완벽한 공리주의적 사회로서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이러한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취해야 하는 행동은 이미 벽이 되어버린 문에 본래의 의미를 부여해 문을 여는 것이며 외부로 당당하게 나아가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이다. 문 밖에 천국이 있을지 지옥이 있을지 체제 내부의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환상을 횡단하는 것으로 역사가 이끌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즉, 열차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행위는 암흑 속으로의 돌진에 준하는 것이 된다. 사회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하는 것이다.&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나눔고딕&quot;&gt;* 이 글은 노동당 기관지 &#039;미래에서 온 편지&#039; 창간호(8월)에 게재되었습니다.&lt;/font&gt;&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설국열차</category><category>공리주의</category><category>파시즘</category><category>매카시즘</category><category>마르크스주의</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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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80832#comment</comments>			<pubDate>Fri, 27 Sep 2013 21:07:45 +0900</pubDate>
		</item><item>
			<title>사상은 &#039;구식 아니야?&#039; VS. 사상은 &#039;무서워!&#039; / 김세균 외 &lt;사상이 필요하다&g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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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gt;오늘날 &#039;사상&#039;을 언급하면 보통 두 가지 반응에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사상을 언급하는 것이 너무 무서운 일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상에 대해 말하는 게 구식이라는 것이다. 후자는 현대에 이른바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이고, 전자는 정치·사회적 맥락에 대한 문제의식을 크게 갖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사상을 언급하는 게 무서운 일인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일인데다 그 사상의 내용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이나 사고체계에 관련되어 있는데 형이상학적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저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나름의 복잡한 생각은 필요하지만 그게 꼭 형이상학적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세계에 대해 고찰하려면 반드시 형이상학적 개념과 사고를 요하게 되는데, 평소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image.pressian.com/images/2013/08/30/50130830185737.jp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amp;lt;사상이 필요하다&amp;gt;(김세균·홍세화·손호철·강내희 등 지음,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문제는 세계를 다루는 일에 대한 것, 즉 &#039;정치&#039;다. 정치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깊은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사상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고찰의 결과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의견을 모아야 한다는 게 정치의 어려운 점이다. 따라서 정치에 있어서 사상을 논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며 여기에 정치적 실천을 결부시키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이 짊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과거 세계를 변혁하려고 했던 운동권들이 사상을 논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사상적·실천적으로 결정적인 기여를 한 혁명가 레닌은 &quot;혁명적 이론 없는 혁명적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quot;고 말한 바 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의 근본에 대해 알아야 하니 이에 대해 고민한 사상가들의 사상을 섭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운동권들은 변증법을 논하고 구조주의를 읽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한국사회에서 정치적 갈증에 목마른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있었던 1980년대를 거치며 2000년대 초반까지 철학과 사상의 향연이 나름대로 펼쳐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경험이 주효하게 작용한 측면이 있다. 헤겔, 마르크스, 레닌, 루카치, 아도르노, 벤야민, 그람시, 프로이트, 알튀세르, 발리바르, 라캉, 푸코, 네그리, 보드리야르, 지젝, 랑시에르, 아리기, 바디우 등 최근까지도 회자되는 이름의 소유자들이 세계의 근본과 변혁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임은 다시 재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현대의 정치를 돌아보면 과연 이러한 사상적 고민의 결과가 제대로 반영되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정치에서도 사상에 대한 두 가지 부정적인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을 거부하는 태도와 낡은 사상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우리가 &#039;야권&#039;이라고 부르는 정치세력들에서 이러한 태도는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2010년 이래로 지금까지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소위 &#039;안철수 현상&#039;은 정치가 사상을 거부한 경우의 대표적인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안철수 현상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면서 동시에 정치에 대한 실체적 냉소주의의 표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안철수가 &#039;새 정치&#039;라는 방향을 말하지만 새 정치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제나 &#039;더 많은 분들과 소통해서 정리가 되면 말씀드리겠다&#039;는 식의 언명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 기대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오히려 잘 보여준다. 안철수에 대한 정치적 기대는 안철수가 자신의 사상을 밝히지 않는 방식으로 행보하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039;사상들&#039;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며 멀리하는 태도가 정치적 반사이익을 가져다주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안철수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들은 대개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안철수가 무엇을 하려는지 방향을 명확히 하지 않고 모두에게 칭찬받을 만한 행보만을 고집하려 한다는 지적들은, 결국 안철수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에 사상의 자리가 없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안철수의 정치적 근거를 구성하는 것은 그의 인격적 요소들일 뿐이다. 국민들이 그와 같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 정치에 뛰어들기를 바랐기 때문에, 안철수는 자신이 정치를 통해 무엇을 하려는지 스스로도 정확히 모르는 채로 정치인이 되어야만 했다. 때문에 그는 &#039;좌우에 관계없이 새 정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039;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안철수가 사상을 가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면, 민주당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사상을 외면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주당은 오랜 기간 한국 사회의 대표적 야당으로서 활동해왔고 10년의 집권경험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 사이에 서로 다른 두 가지 결의 사상이 공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민주당 내에서 야당으로서의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소위 운동권과 관계된 사상과 연관된 삶을 산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사회 운동의 경험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고민을 하면서 얻을 수밖에 없는 사상적 단초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민주당이 종종 &#039;중도적 진보&#039;를 표방하고 스스로를 중산층‧서민의 정당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런 구성적 특징이 작용하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반면 여당으로서의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관점보다는 &#039;통치&#039;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국가를 잘 통치해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이 앞서의 정체성과는 배치되는 행보를 할 때에는 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서민의 생존에 실체적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는 한미FTA 체결과 같은 신자유주의 개혁 조치들을 민주당 정권이 추진했다는 것에 대한 그들 내의 논리적 정당성은 이러한 사상에서 도출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민주당이 당 내에 내재한 상이한 두 가지 사상적 특징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면 다소 논란에 휩쓸릴 수 있을지라도 대안적인 정치세력으로서 다시 한 번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런 방법을 선택하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봉합하고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함으로써 단기적인 정치적 이득을 얻는 것에만 급급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2012년 선거 국면에서 진보정당과의 야권연대를 외치다 선거가 끝난 이후에는 강령 및 주요 정강‧정책을 보다 온건한 쪽으로 바꿔버린 것은 이들의 이런 선택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행동해온 탓에 내부적인 계파 갈등이 지속적으로 불거지고 자신들이 유리한 국면에서도 제대로 이득을 취하지 못하는 문제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어떻게 보면 국정원 선거개입을 둘러싼 국면에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무력하게 발목을 잡혀 있는 상황 역시 민주당의 사상을 외면한 기회주의적 처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최근 문제가 된 통합진보당의 경우는 낡은 사상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다. 이석기 의원을 둘러싼 내란음모의 혐의와 비상식적 언행에 대한 추문들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국가를 전복하려는 범죄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입법기관으로 행세할 수 있느냐며 분개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망상증 환자라며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로 취급하기도 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image.pressian.com/images/2013/08/30/50130830185737(0).jp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연합뉴스&lt;/span&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분명히 말하자면 이들의 행태는 단지 범죄의 문제도 아니고 심리적 치료의 문제도 아니다. 8, 90년대에 이들이 공유했던 사상을 접해본 사람들은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문제는 이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유하고 있는 사상에서 비롯되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가 억압되고 언론이 통제되는 것이 당연시되던 때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대안적 사회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지금은 이른바 뉴라이트로 전향한 김영환 씨가 소위 &#039;강철서신&#039;이라는 문건을 배포해 대학가에 북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보급한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세계 변혁의 청사진을 얻게 됐고 이를 위해 어떤 고난과 헌신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석기 의원을 둘러싼 논란을 이해하려면 이들의 이러한 신념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부당한 제재와 천재지변으로 북한이 경제적 곤란함을 겪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대외정치적 환경이 개선되면 북한 정권이 얼마든지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다. 이들 입장에서 남한 정권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에 가까운 곳이며 자본주의의 온갖 부조리가 집약된 곳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따라서 북한 정권이 남한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이들이 가담해야 할 진영이 어디인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이들이 합정동에 모여서 유류저장고 습격과 무기 탈취 및 제조를 언급한 것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반도 전체가 북한의 자주적 정권의 지배하에 들어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들이 단체로 괴이한 소리를 늘어놓은 이유는 자신들의 사상과 신념의 관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라는 얘기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이런 생각이 아무리 좋게 봐줘야 &#039;낡은&#039;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이 통제되던 군부 독재 시절에야 북한 정권에 대한 호의적 &#039;오해&#039;를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낡은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정체된 삶을 살아오던 사람들의 행태가 정보기관의 필요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는 것, 이것이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을 둘러싼 스캔들의 본질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앞의 세 가지 사례는 한국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정치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때문에 지금 이 시점에서 누군가 이들과는 구분된 올바른 정치로 변혁을 이루려 한다면 새로운 사상을 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시도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amp;lt;사상이 필요하다&amp;gt;(김세균·홍세화·손호철·강내희 등 지음, 글항아리 펴냄)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를 고민해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풀어놓은 책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 책에 등장한 논설들은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홍세화, 손호철, 조희연, 김세균, 하승수의 글은 민주주의와 진보정치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됐는지를 탐구하려는 글들이다. 민주주의와 진보정치는 결국 세상을 바꾸기 위한 올바른 정치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고찰해보아야 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들의 고민은 지금까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불러온 것이 무엇이었으며 진보정치가 여기에서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해석과 미래에 대한 제안으로 귀결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강내희, 심광현, 우희종, 이도흠의 글은 세계의 근본에 대해 탐구하려는 것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새롭게 규정해왔는지, 역사는 어떤 동력을 통해 움직여왔는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의 의미와 우리가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찰해보자는 게 이들의 제안이다. 세계의 근본을 아는 것은 영원히 지속될 변혁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이들의 사고를 따라가는 것은 나름대로 흥미로운 경험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이들의 글에는 일정한 한계가 드러나는 부분도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도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없이 논의가 진행되는 부분이나 소위 &#039;운동권 사투리&#039;가 여과 없이 적시되는 부분 등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불친절한 부분으로 다가올 수 있다. 앞서 언급하기를 정치의 역할 중에는 사상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구하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의 이런 부분들은 사상에 대한 공포를 더욱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amp;lt;사상이 필요하다&amp;gt;의 이러한 단점은 뒤집어 말하면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사상의 문제를 고민해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거의 날 것 그대로 접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록 이 책이 여러 부분에서 단점을 지적할 수 있는 구성의 한계를 보이지만, 나름의 가치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점을 평가할 수밖에 없게 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특히 추천할 만한 홍세화의 글이다. 오랫동안 지식인으로 활동하다 2011년 진보신당의 대표를 맡으며 잠시 정치인의 길을 걷기도 한 홍세화는 이 책에 실린 글을 통해 가장 현실과 가까우면서도 날카로운 통찰과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외치며 등장한 박근혜 정부와 여기에서 박정희의 향수를 공유하는 대중의 시선, 이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야권의 무기력한 대응이 근본적 차원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앞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지금 이 시점의 진보정치에 반드시 필요하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한 시대가 지났고 진보정치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시기지만 세계의 변혁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남아있는 한 &#039;사상&#039;은 또다시 호출되어야 하고 새로운 실천으로 전화되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amp;lt;사상이 필요하다&amp;gt;의 독서가 긴 여정의 첫 걸음을 떼는 계기가 된다면, 가치 있는 책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충분히 다 하는 것이 될 게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이 글은 프레시안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lt;a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830185737&quot;&g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830185737&lt;/a&gt;&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사상이 필요하다</category><category>홍세화</category><category>안철수</category><category>이석기</category><category>민주당</category><category>통합진보당</category><category>손호철</category><category>조희연</category><category>김세균</category><category>하승수</category><category>강내희</category><category>심광현</category><category>우희종</category><category>이도흠</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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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80735#comment</comments>			<pubDate>Wed, 11 Sep 2013 21:10:5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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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겨레21/크로스] 이주의 트윗, ‘설국열차’는 무엇을 말하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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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gt;&lt;b&gt;체제 바깥을 향한 쓰레기들의 분투&lt;/b&gt;&lt;/div&gt;&lt;div&gt;&lt;b&gt;‘세력 교체냐, 체제 해체냐’ 딜레마에 부딪친 인민 봉기&lt;/b&gt;&lt;/div&gt;&lt;div&gt;&lt;b&gt;역사의 동력이 바깥을 향한 무모한 열정임을 역설하다&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김민하 정치평론가&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amp;lt;설국열차&amp;gt;는 지적인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각종 사회학적 ‘떡밥’들이 많이 등장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최후의 인류를 싣고 한없이 달리는 설국열차는 공리주의적 세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국열차의 탑승객들은 대체로 기본 이상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꼬리 칸 사람들만은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꼬리 칸 사람들의 존재가 체제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자본주의 사회에는 노동계급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동계급이 재화를 생산하며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착취를 통해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꼬리 칸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체제의 ‘항상성’을 유지하면서 이들의 존재를 어떻게 감당할지를 고민하고 일정한 조처를 취하는 게 열차의 주인인 윌포드의 역할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윌 포드와 길리엄의 공조는 나름의 공리주의적 해결책인 셈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러나 이렇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라는 공리주의적 원칙이 관철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체제를 향한 꼬리 칸 사람들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는다. 커티스는 이러한 불만을 열차의 시스템을 점거하는 것으로 해소하려 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길리엄을 지도자로 만들겠다는 것 외에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는 없다. 따라서 커티스의 반란은 대중의 인민주의적 봉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민수와 그의 딸 요나는 열차 구조 일부에 대한 지식과 직관을 가지고 있다. &amp;lt;설국열차&amp;gt;를 봉기에 대한 드라마로 읽는다면 그들은 지식인이며 예언가이며 선지자인 셈이다. 그들은 반란에 조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름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윌포드의 문 앞에서 드러나는데 그것은 봉기의 결과가 체제의 지배세력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제 그 자체의 거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는 민수의 제안을 뿌리치고 커티스는 체제에 포섭되는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 하지만 요나의 직관으로 꼬리 칸의 아이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착취당하고 있음이 폭로되면서 커티스는 민수와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한다. 이 결과로 그는 한쪽 팔을 잃는데 이것은 속죄인 동시에 체제의 진실을 안 것에 대한 대가이다. 이 덕분에 커티스는 ‘벽’으로 여겨지던 열차 밖으로 나가는 문, 즉 환상을 넘기 위한 소멸을 감수할 수 있게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환상 너머에 반드시 긍정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북극곰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협을 뜻하기도 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열차 밖으로 나가기 위한 수많은 몸짓이 역사를 이끌어온 것 또한 진실이다. 체제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하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13/0819/7001186273_20130819.JPG&quot;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봉준호 감독의 &amp;lt;설국열차&amp;gt;는 많은 논쟁거리를 불렀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출연할 만큼 세계적으로 입지를 다진 감독의 작품이라는 ‘애국 코드’ 못잖게, 이 영화의 ‘논쟁성’이 흥행을 이끌어가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amp;lt;설국열차&amp;gt;에는 이 영화에 대해 자꾸 얘기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무임승차자도 살 권리는 있다&lt;/b&gt;&lt;/div&gt;&lt;div&gt;&lt;b&gt;자유·평등·박애의 보편성 이야기하는 인간주의 서사&lt;/b&gt;&lt;/div&gt;&lt;div&gt;&lt;b&gt;영화를 둘러싼 논쟁적 담론들이 내 사유를 깊게 만든다&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최서윤 월간 〈잉여〉 편집장&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번에는 봉준호 감독님이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뒤집어놓으셨다. 무엇보다 타임라인과 뉴스피드를 뜨겁게 달군 것은 그가 연출한 영화 &amp;lt;설국열차&amp;gt; 관련 떡밥이다. 양갱·코카콜라 등 ‘먹거리 드립’, 커티스·에드가·그레이 역을 맡은 배우들이 멋지다는 찬사, 결말에 대한 해석, 신자유주의 논란 등 떡밥이 많기도 하다. 떡밥 문 사람들끼리 엄청 수다 떠는 데 끼어들지 못해 좀 쓸쓸했지만, 이제 나도 &amp;lt;설국열차&amp;gt; 봤으니 끼어들 수 있다. 신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가장 끼어들고 싶었던 건 ‘꼬리 칸 무임승차 논쟁’이다. 생존을 담보하는 ‘설국열차’에 탈 수 있는 인원과 기차 내 자원이 제한돼 있는 상황에서 불법으로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꼬리 칸 사람들이다. 이들 때문에 ‘합법적으로’ 탑승한 사람도 피해를 볼 수 있기에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필요하므로 기차의 창조자이자 독재자인 윌포드의 독재는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오히려 폭동을 일으킨 꼬리 칸 사람들이 뻔뻔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반문의 여지도 있다. 기존 시스템이 붕괴되는 인류 절멸의 상황에서 돈과 권력으로 생존을 거래하며 ‘합법’을 논하는 것이 타당한가. 또한 창조자의 독재가 한정적인 자원을 배분하고 열차의 시스템을 유지시키기 위한 최선의 체제인가. 좀 더 민주적인 형태의 협의체를 만들고 좀더 인도적인 방식으로 ‘폐쇄된 생태계’의 균형을 맞췄다면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나는 17년이라는 세월에 주목한다. 꼬리 칸 사람들은 17년 동안 가축처럼 사육당했고, 개인의 자유가 배제된 채 윌포드의 선택에 의해 해야 할 일을 배정받으며, 가족이 찢기고, 제대로 된 사법 시스템 없이 신체훼손형을 받았다. 핍박받는 것이 무임승차의 대가라면 그 대가는 언제쯤 다 치를 수 있나. 꼬리 칸 사람들은 무임승차 의 ‘죄’를 대대손손 떠안고 기꺼이 착취당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근대 이전, 국가가 새로 세워질 때마다 개국 공헌도에 따라 계급이 나뉘고 그 계급은 고착돼 대대손손 내려왔다. 아니, 꼭 근대 이전으로 국한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 우리나라는 오늘날 일제에 충성한 사람들, 독재정권에 공헌한 사람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며 부를 대물림하고 있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현대 국가는 연좌제를 금지하고 기회의 평등을 주고자 한다. 자유·평등·박애.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반영된 덕이다. 이 정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역사적 서사가 앞으로도 이어져나가길. 아니, 좀더 진보하길 희망한다. 재난이 닥친다 해도, 비록 적은 자원과 적은 개체 수의 인간이 남는다고 해도. 하지만 무임승차했으니 ‘그 정도는’ 당해도 싸다고 느끼는 이가 다수라면 아마 안 될 거야. ‘꼬리 칸 무임승차 논쟁’이 씁쓸하게 다가왔던 이유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amp;lt;설국열차&amp;gt;는 이 밖에도 많은 논쟁거리를 불러왔고, 이 열기는 쉽게 식지 않을 것 같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출연할 만큼 세계적으로 입지를 다진 감독의 작품이라는 ‘애국 코드’ 도 기록적인 흥행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논쟁적인 영화라는 것을 흥행 요인 중 으뜸으로 꼽고 싶다. 이 영화는 이 영화에 대해 자꾸 얘기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사유가 깊어지는 것은 덤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원문 :&amp;nbsp;&lt;a href=&quot;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151.html&quot;&gt;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151.html&lt;/a&gt;&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설국열차</category><category>봉준호</category><category>공리주의</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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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80685#comment</comments>			<pubDate>Mon, 26 Aug 2013 16:21:5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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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게임이 현실을 지배하는 날이 올까?</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80604</link>
				<description>&lt;div&gt;게임의 전국시대가 됐다. 각 시대마다 장르마다 게임의 질을 평가하는 여러 기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에는 정말로 다양한 게임에 대한 다양한 기준이 난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좋은 그래픽과 효과음을 따지던 시기도 있었고, 또 한 때는 주인공 캐릭터가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따지던 시기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종족(?)이 등장하는 지를 따져야 했던 때도 있었고, 또 얼마나 영화에 버금가는 효과를 보여주는 지에 관심이 집중된 때도 있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최근에는 다양한 디바이스를 기반으로 정말 다양한 게임들이 마구 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준들이 매우 다양해졌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게임의 근본에 대해 다시 고찰해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게임의 최소 기준은 ‘규칙’&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게임이란 무엇일까? 그러니까 최소한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기준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를테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비주얼 노블(Visual Novel)’같은 것은 게임인가? 여기에 대답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게임의 형태가 다양화됐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러나 게임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해져도 변치 않는 기준은 있다. 어떤 ‘놀이’가 ‘게임’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칙’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인류가 발명해낸 지 대단히 오래된 게임 중 하나인 바둑이나 체스를 떠올려 보자. 여기에는 ‘판’이 있고, ‘돌’ 또는 ‘말’이 있으며, 판에서 돌을 놓거나 말을 움직이는 ‘규칙’이 있다. 이것으로 게임의 개념의 최소 기준이 충족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778_78844_570.gif&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수퍼 마리오 브라더스. 닌텐도가 1985년에 제작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러한 개념은 비디오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를테면 가장 유명한 비디오 게임의 하나인 ‘수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떠올려 보자. 바둑에 비하자면 훨씬 복잡하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마리오는 점프를 할 수 있고 적을 밟아야 이길 수 있다. 위에서 밟는 것이 아닌 적과의 모든 접촉으로 마리오는 패배한다. 이것이 규칙이다. 규칙이 아닌 방식은 이 게임의 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를테면 마리오가 쿠파에게 로우킥을 먹인 후 들어 메쳐 쓰러뜨리고 암바를 걸어 항복을 받는 일 따위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버섯 병사들을 동원해 쿠파성에 수공을 걸어 용암을 식혀 굳게 하고 쿠파를 포위해 생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쿠파의 머리를 밟아야만 이길 수 있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비디오 게임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수퍼 마리오의 ‘점프’는 주인공이 칼을 휘두르거나 총을 쏴서 적을 맞히는 형식으로도 발전했다. 전쟁을 재현하는 실시간전략시뮬레이션에서는 각각의 병사 등을 조작해 현실을 재현할 수 있지만 1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거나 지도 밖의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할 수는 없다는 제한이 작용하게 되고 이것 역시 규칙의 일부로 작용하게 된다. 1인칭 슈팅 게임에서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총을 쏴서 상대를 맞추는 것으로 승리할 수 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등의 대응은 할 수 없다는 점도 규칙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규칙’의 발전과 현실 모사&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규칙이 이렇게 발전하면서 비디오 게임이 현실을 얼마나 더 잘 모사할 수 있는가가 핵심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게 됐다. 어느 새 사람들은 소위 게임의 ‘자유도’를 따지며 얼마나 더 현실과 가까운 체험을 할 수 있는 지를 궁금해 하게 된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즉, 뒤집어서 말한다면 현실을 가장 잘 모사할 수 있는 비디오 게임은 규칙이 가장 복잡한 게임일 것이다.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규칙’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을 하는 형태에서 시작된 게임은 어느 새 현실에 대한 가상적인 체험을 대리할 수 있는 도구로 발전하게 됐다. 이로써 ‘경쟁하는 도구로서의 게임’과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도구로서의 게임’이 한 점으로 수렴하게 된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규칙을 갖고 있는 바둑에서도 게임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발견해낼 수 있다. 바둑은 규칙을 이용해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룰 수 있다는 점에서 경쟁하는 도구로서의 게임으로 평할 수 있다. 하지만 바둑과 관련한 도서의 제목을 보면 이것 역시 특정한 현실을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백의 심장에 비수를 꽃아라’와 같은 제목의 바둑 해설서의 존재나 ‘바둑에는 인생이 있다’고 말하는 바둑 마니아의 독백을 떠올려 보자. 이것은 바둑을 두는 행위가 어쨌든 현실의 ‘전쟁’을 모사하게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사례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778_78845_03.pn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에서 전쟁이 장기로 표현되는 장면. (화면 캡쳐)&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는 게임과 현실의 관계가 역으로 표현된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전쟁을 다룬 이 영화에서 김유신과 계백의 대결은 평야를 달려가는 기병들의 스펙터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병사를 말로 사용하는 장기를 두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방법은 오히려 전쟁의 참혹함과 게임적 본질을 동시에 표현하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인식론적 함의&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제 라캉주의자들이 매양 갖다 붙이는 ‘상상, 상징, 실재’의 삼위일체적 인식론을 꺼내보면 게임의 규칙과 현실 모사에 대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라캉의 인식론에서 우리는 언어 ‘규칙’에 의해 구성된 상징에 구속되어 있으며 실재는 언어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상황과 마주칠 때에 돌출된다. 이러한 실재의 출현은 주체에게는 텅 빈 공간으로 인식되며 주체는 이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상상을 동원해 이 빈 공간을 메꾸게 된다. 이건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소위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일본의 음란게임)에 비해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778_78847_221.gif&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class=&quot;Apple-tab-span&quot; style=&quot;white-space: pre;&quot;&gt; &lt;/span&gt;&amp;nbsp;&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동급생2의 한 장면. 마우스로 화면을 클릭해야 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를테면 등장하는 여성들과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음란게임인 ‘동급생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게임이 제시하는 수많은 난관을 뚫고 드디어 등장인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고비를 넘기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건 성행위를 묘사하는 소위 ‘H씬’이라는 것인데, 동급생 시리즈에서는 마우스 커서로 여성을 묘사한 그림 각 부분을 클릭하는 것으로 여러 종류의 성적 행위들을 재현할 수 있다. 이 단계를 잘 넘겨야 좀 더 노골적인 성행위에 대한 묘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문제는 이러한 장면이 성행위를 묘사하고 있기는 하나, 플레이어가 이러한 행위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적 판타지는 그 대상이 오로지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늘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즉,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상상적 쾌락이며 그것이 상상적 쾌락에 불과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성적 판타지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실재의 출현을 증명하게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런 측면에서 보면 여고 기숙사를 도촬해 협박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주제로 한 질 나쁜 일본산 음란게임인 ‘슈사쿠’는 그 충격적인 소재와는 별개로 게임 내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플레이어는 슈사쿠를 조작해 게임을 풀어가야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주인공은 슈사쿠가 아닌 플레이어 자신으로 변경된다. 즉, 플레이어는 게임 속 캐릭터가 자신을 ‘주인공인 슈사쿠’가 아닌 ‘슈사쿠를 조작하는 플레이어로서의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슈사쿠에 대해 역으로 작용하는 ‘상상적 동일시’가 ‘상징적 동일시’로 전화하는 순간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778_78849_445.jpg&quot; /&gt;&lt;/div&gt;&lt;div&gt;&amp;nbsp;&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슈사쿠의 등장인물인 &#039;에리&#039;가 모니터 밖의 주인공을 향해 손을 내미는 장면. 물론 물리적 한계 때문에 팔이 모니터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음란게임을 즐기다 말고 이 장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모니터에 손을 뻗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았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인터랙티브화 되는 미디어 산업&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다시 말하면 결국 게임에서 요구되는 ‘규칙에 맞는 조작’이라는 조건은 상징에 구속되는 현실에서도 제한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마리오가 쿠파를 오로지 발로 밟아서만 죽일 수 있다는 규칙을 적용받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마법을 사용해 괴롭히거나 순간이동을 통해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없는 조건의 제약을 받게 된다. 이렇다는 사실 자체가 미디어 산업에 대한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영화계에서는 한동안 영화의 개봉에 맞춰 캐릭터 상품의 발표, 인터넷을 통한 이벤트 진행, 게임 발매 등의 프로젝트를 하나로 묶는 방식이 유행을 했다. 이를테면 ‘다크나이트’라는 배트맨 관련 영화를 개봉하면서 ‘고담나이트’라는 배트맨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공개하고, 새로운 피규어 등을 발매하며, 다크나이트의 영화를 내용을 한 게임을 함께 발매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소비자들은 배트맨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미디어 컨텐츠에 동시에 개입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인터랙티브한 방식으로 미디어 컨텐츠를 즐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778_78850_814.pn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카카오톡을 이용한 소셜게임인 애니팡. (애니팡 개발사 선데이토즈 홈페이지)&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즉, 사람들은 영화를 본 후에 영화의 스토리와 관련된 주변 정보를 능동적으로 찾아봄으로써 애니메이션의 존재를 접할 수 있고, 피규어를 구입하는 것으로 영화에서 제시된 컨텐츠를 실제 생활에서도 재현할 수 있으며, 게임을 통해 영화의 스토리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스마트폰과 메신저를 이용한 게임이 범람하는 상황에서도 이제 이런 함의를 읽어낼 수 있게 됐다. 메신저는 소통을 위한 수단이므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전제를 안고 있는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을 통해 게임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적 영역에 있어야 할 게임의 규칙이 상징적 영역으로 침범하는 하나의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은 게임이 메신저를 통해 자신을 호출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직장 상사의 게임 점수를 상회하는 결과를 내는 것으로 만족감을 얻는다. 세상은 게임이 되고 있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원문 :&amp;nbsp;&lt;a href=&quot;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778&quot;&gt;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778&lt;/a&gt;&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수퍼마리오</category><category>게임</category><category>규칙</category><category>황산벌</category><category>라캉</category><category>동급생2</category><category>슈사쿠</category><category>애니팡</category><category>카카오톡</category><category>스마트폰</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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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80604#comment</comments>			<pubDate>Mon, 05 Aug 2013 17:04:19 +0900</pubDate>
		</item><item>
			<title>&#039;컨트롤러&#039;의 변천으로 보는 게임의 역사</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80417</link>
				<description>&lt;div&gt;인간이 도구를 이용해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일단 게임을 구동할 수 있는 기계가 필요하고, 게임의 내용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며, 비디오를 출력할 수 있는 화면도 필요하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 중에서도 인간의 의사를 기계의 것으로 번역해주는 ‘컨트롤러’는 게임기계와 인간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도구다. 따라서 게임의 역사는 컨트롤러의 역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컨트롤러는 게임의 트렌드를 뒤바꾸며 게임 산업의 핵심 요소로서 발전해왔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초기 콘솔게임기의 컨트롤러&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아직 컴퓨터가 집집마다 보급되지 않던 시절, 집에서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TV에 연결할 수 있는 콘솔게임기를 갖추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 시절을 대표하는 게임기는 후일 ‘아타리 쇼크’로 유명해진 ‘아타리’ 시리즈이다. 아타리 시리즈가 포함하고 있는 컨트롤러는 기종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스틱, 스타트, 셀렉트 버튼과 발사 버튼 1개가 부착된 것이다. 후일 이러한 방식의 컨트롤러는 ‘조이스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는데, 단순한 조작을 필요로 하는 게임이 주종일 이뤘던 아타리 시리즈의 컨트롤러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 같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628_78423_1818.jp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span class=&quot;Apple-tab-span&quot; style=&quot;white-space:pre&quot;&gt; &lt;/span&gt;&amp;nbsp;&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아타리와 컨트롤러. (위키백과)&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당시 게임기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컨트롤러가 달려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굳이 아타리의 컨트롤러를 하나의 표준으로 간주한다면 이후 세대의 콘솔게임기에서 표준으로 자리 잡은 것을 꼽자면 누가 뭐래도 닌텐도의 패밀리시스템의 컨트롤러일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십자버튼과 스타트, 셀렉트, A, B 버튼으로 이루어진 이 컨트롤러는 게임 컨트롤러의 역사에 매우 큰 족적을 남겼다. 가장 큰 특징은 A, B라는 2개의 버튼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게 중요한 이유는 게임 소프트웨어의 역사에 남을 게임인 ‘수퍼 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가 바로 이 버튼의 존재를 전제하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수퍼 마리오 브라더스에서 게임의 주인공인 마리오는 B버튼을 누르고 십자버튼을 조작하는 것으로 ‘대쉬’를 할 수 있다. 대쉬를 한 상태에서 점프를 하면 더 멀리 뛸 수 있고 이를 응용한 다양한 행동이 가능하게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628_78425_930.jp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됐던 패미컴 컨트롤러. (위키백과)&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A, B버튼이라는 형식은 이후에도 다양한 게임 형식의 발전을 도모했다. 패미컴 게임의 대표적 타이틀 중 하나인 ‘악마성 드라큐라(영문 타이틀은 ’Castlevania’)’ 역시 이런 흐름을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악마성 드라큐라에서 주인공인 뱀파이어 헌터는 A버튼을 이용해 점프를 하고 B버튼을 이용해 채찍을 휘두름으로써 적을 공격하거나 피하는 동작을 구현해낼 수 있었다. 악마성 드라큐라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발상은 점프를 A버튼을 이용해 함으로써 사실상 거의 쓸 필요가 없게 된 십자버튼의 ‘위’방향을 B버튼과 조합해 특수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정된 컨트롤러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여 게임은 더욱 재미있는 형태로 발전해나갈 수 있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컴퓨터 게임의 발전이 가져온 변화&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PC가 집집마다 보급되고 PC를 이용한 게임이 대중화되면서 게임 컨트롤러의 발전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PC는 애초에 게임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기가 아니지만 오히려 이것 때문에 PC로 구현할 수 있는 게임의 범위가 넓어지게 됐다. PC에는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라는 주변기기가 기본으로 갖춰진다. 이를 잘 활용하면 훨씬 다채로운 형태의 게임을 구동할 수 있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기계적으로 사고해보면, 조작이 다소 어려워지긴 하겠지만 키보드 키 하나하나를 게임에서 전부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훨씬 풍부한 내용의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실제 복잡한 조작이 필요한 비행기 운항 시뮬레이션 같은 경우 키보드를 활용하지 않으면 사실상 게임을 완벽하게 즐기는 게 불가능한 수준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PC게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롤플레잉 게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게임 소프트웨어의 경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행위’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키가 있을 정도였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뭐니뭐니해도 PC게임의 가장 막강한 무기는 ‘마우스’의 존재이지 않았나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마우스는 하이퍼텍스트 등 오늘날 웹 기술의 기초적인 개념을 고안한 더글러스 칼 엥겔바트(Douglas Carl Engelbart)에 의해 개발됐다. 마우스가 생겨나면서 PC의 사용자들은 모니터 화면의 모든 장소를 점령할 수 있게 됐다. 이는 게임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게 됐다. 오늘 날 큰 인기를 끈 실시간전략시뮬레이션(RTS)이나 일인칭슈팅(FPS) 등의 장르는 마우스와 키보드의 조합을 전제하지 않으면 쉽게 조작법을 생각해내기 어려운 것들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PC에 도전하는 콘솔 컨트롤러들&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렇게 되자 게임 콘솔의 컨트롤러는 PC의 키보드, 마우스 조합의 편의를 넘어서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수퍼 패미컴, 메가드라이브, 세가새턴 등의 콘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변화는 입력할 수 있는 버튼의 수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검지손가락으로 조작할 수 있는 L, R버튼과 C, X, Y 등의 버튼의 추가는 PC게임에서 키보드의 편의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버튼 수의 증가는 플레이스테이션의 ‘듀얼쇼크’라는, 진동기능을 포함한 컨트롤러의 경우는 A, B, X, Y에 L1, L2, R1, R2까지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628_78427_1528.jp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플레이스테이션과 컨트롤러 &#039;듀얼쇼크&#039;. (위키백과)&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PC게임에서 키보드의 편의는 컨트롤러의 버튼을 늘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시급한 것은 ‘마우스’를 대체 할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걸 가장 잘 나타내는 장르는 FPS다. PC를 이용한 FPS게임은 마우스로 시점을 조작하며 키보드로 캐릭터의 움직임을 조작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고개를 돌려 시야를 바꾸면서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걷는 행위의 구현이 가능했던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게임 콘솔의 컨트롤러로는 이러한 행위를 구현하는 게 쉽지 않았다. 따라서 과거에는 콘솔 게임기용 FPS가 큰 인기를 얻기 힘들었다. 물론 콘솔 게임 진영에서는 곧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해냈다. 그것은 바로 조이패드에 ‘아날로그 스틱’을 추가하는 것이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제 게임 콘솔에서도 십자 버튼을 이용해 캐릭터의 움직임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아날로그 스틱을 조작해 시야를 바꿀 수 있게 됐다. 플레이스테이션의 듀얼 쇼크 패드에는 2개의 아날로그 스틱이 채용됐다.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둘을 동시에 조작하면 PC의 키보드, 마우스 조작 못지않은 조작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휴대용 게임기에서 촉발된 변화&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마우스의 화면 전체를 대상으로 포인터를 빨리 이동시켜 조작할 수 있는 장점을 컨트롤러로 취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히려 휴대용 게임 콘솔의 새로운 시도로부터 도출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닌텐도DS는 사실상 최초로 ‘터치식 스크린’을 채용해 큰 성공을 거둔 휴대용 게임기다. 닌텐도DS에는 두 개의 화면이 있는데, 상단의 화면은 보통 LCD스크린이지만 하단의 화면은 터치식 입력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를 활용해 닌텐도DS의 소프트웨어들은 PC게임의 마우스에 대항할 수 있게 됐다. 화면 어디든지 터치를 하는 것으로 입력을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628_78430_1952.pn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span class=&quot;Apple-tab-span&quot; style=&quot;white-space:pre&quot;&gt; &lt;/span&gt;&amp;nbsp;&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닌텐도DS. (위키백과)&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문제는 당시로서 이러한 방법은 휴대용 게임기에만 활용될 수 있었다는 거다. 즉, 터치식 스크린을 활용한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일단 터치식 스크린이 있어야 하는데, 각 가정마다 터치식 스크린을 보급된 상황이 아니라면 스크린을 같이 끼워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이런 문제는 오늘날 순식간에 해결됐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보급은 이제 누구나 터치식 스크린을 하나쯤은 갖고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성공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닌텐도DS에서 통용되던 터치 입력을 활용한 게임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치 스크린의 활용은 게임 컨트롤러의 역사에 있어서도 혁명적 발상이었던 셈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마이크로소프트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스케일이 큰 형태로 밀어 붙이고 있다. 서피스, 엑스박스, 윈도우폰에 모두 동일한 OS가 구동되는 환경을 만들고 각각의 기기들이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태블릿PC인 서피스나 윈도우폰의 터치스크린을 이용해 엑스박스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소니는 좀 더 소박한 방식으로 컨트롤러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4에 장착되는 컨트롤러에는 컨트롤러 자체에 작은 터치패드가 장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니 측은 이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628_78428_1241.jp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위 리모컨. (위키백과)&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닌텐도는 좀 더 근본적인 컨트롤러의 변혁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나름 틈새시장을 공략해 큰 성공을 거둔 위(Wii)의 리모컨은 21세기 게임 컨트롤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위 리모컨은 모션센서가 장착돼있어 리모컨의 움직임 그 자체가 게임의 내용에 반영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를 이용한 복싱이나 테니스 등을 재현한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바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좀 더 발전시켜 인간이 신체 중 20개 포인트에 반응하는 동작 인식 컨트롤러인 ‘키넥트’를 개발해 보급하기도 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7/35628_78429_130.pn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모션 인식 컨트롤러인 키넥트. (위키백과)&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최근 일본에서는 ‘소드 아트 온라인’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게임 컨트롤러는 뇌와 직접 연결돼 신경을 제어하도록 설계돼있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최근까지 게임 컨트롤러의 발전상을 보면 언젠가 실현이 될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새로운 가상현실과 이를 통한 게임의 등장, 그리고 이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전면에 부상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컨트롤러</category><category>아타리</category><category>패미컴</category><category>듀얼쇼크</category><category>닌텐도DS</category><category>위리모컨</category><category>키넥트</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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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80417#comment</comments>			<pubDate>Sun, 14 Jul 2013 23:19:39 +0900</pubDate>
		</item><item>
			<title>그의 글이 어렵다고?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80406</link>
				<description>&lt;div&gt;&amp;lt;미디어스&amp;gt; 기자가 쓴 책에 대한 서평을 &amp;lt;미디어스&amp;gt; 기자에게 청탁하는 ‘몰상식’에 이 지면 담당자에게 항의를 했다. 그러자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지면에서 내 역할은 ‘웃기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을 웃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쓴 필자의 흉을 보는 것이라는 ‘통찰’이 한순간 머릿속을 스쳤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저자 한윤형과는 10년 이상 친구로 지내왔다. 늘 특이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사교적인 사람이라고 자평하지만 내가 보기엔 ‘수완 좋은 호인’보다는 ‘사회 부적응’에 조금 더 가깝다. 그럼에도 그가 많은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비결은 술을 많이 마시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 친구는 특이하게도 술을 마시면서도 온갖 것을 고민하며 진지한 이야기를 끝없이 풀어놓는다. 술자리 자체가 고민의 공유와 토론의 장이다. &amp;lt;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amp;gt;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거 같이 술 먹으면서 한 얘기들인 것 같은데….’&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책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작자의 일상에서 얻는 통찰에, 2부는 ‘88만원 세대’로 통칭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고민에, 3부는 정치 및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재미’는 1부에서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다. 혼자서 자주 출입하던 집 근처 치킨집의 흥망성쇠에서 동네 상권과 대형마트를 대하는 소비자들의 태도에 대한 통찰을 얻는 부분은 1부의 백미다. 한윤형은 영세 자영업자와 자기 사이에 형성된 인간적 신뢰가 폐업으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통해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한 판매자-소비자 관계에 일상이 포섭되는 순간을 포착해냈다.&amp;nbsp;&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의 이러한 성정은 다른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2부에서 드러난 작자의 세대론에 대한 통찰은 세대론에 대한 편의적 논평만 반복해온 기성세대의 태도에 일침을 놓을 만한 것이다. 한윤형은 젊은 세대로서의 경험과 이를 둘러싼 논의에서 드러난 사실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세대론 자체가 기성세대의 부속품이 되는 현상을 질타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자기 세대의 문제와 세대론 그 자체에 대한 끈질긴 탐구 없이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한윤형은 100을 알고 10을 쓰는 사람&amp;nbsp;&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교육, 정치, 노동 등 사회문제에 대한 평론을 보여준 3부에서도 이러한 그의 특성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인터넷 세계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인 논란의 특징에서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를 포착하고, 이는 다시 정규교육 이후 부딪칠 수밖에 없는 노동의 문제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며, 여기에서 이어지는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는 일련의 과정은 한번쯤 곱씹어볼 만하다. 특히 평소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한윤형이 노동 문제에 대해 가진 진보적 시각을 이 부분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각 문장에 녹아 있는 작자의 세상만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놀랍다. 종종 한윤형의 글이 어렵다는 사람들을 본다. 한윤형에게 “네가 10을 알더라도 글에는 3만 쓰는 게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방법인데 너는 꼭 10을 다 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윤형은 100을 알고 10을 쓰는 사람에 가깝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가끔 한윤형이 (내가 보기에) 황당한 일을 할 때마다 나는 시계를 삶아 먹으려 했던 뉴턴을 떠올린다. 이런 평가가 같은 회사를 다니는 친구의 그저 낯 뜨거운 칭찬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amp;nbsp;&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이 글은 시사IN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lt;a href=&quot;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801&quot;&gt;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801&lt;/a&gt;&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한윤형</category><category>청춘을위한나라는없다</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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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80406#comment</comments>			<pubDate>Wed, 10 Jul 2013 14:07:37 +0900</pubDate>
		</item><item>
			<title>[한겨레21/크로스] 이주의 트윗, 팟캐스트를 다시 본다</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80001</link>
				<description>&lt;div&gt;&lt;b&gt;성공적인 틈새 파고들기&lt;/b&gt;&lt;/div&gt;&lt;div&gt;&lt;b&gt;공정성 취약하지만 현안에 대한 다양한 관점 제공&lt;/b&gt;&lt;/div&gt;&lt;div&gt;&lt;b&gt;제구실 못하는 주류 언론 시스템 보완재 역할도&lt;/b&gt;&lt;/div&gt;&lt;div&gt;&lt;b&gt;&lt;br /&gt;&lt;/b&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13/0604/137025522319_20130604.JPG&quot;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개인적 차원에서, 별로 인기 없는 팟캐스트 방송을 2년6개월 동안 진행해왔다.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동네 밴드를 홍보하려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전공(?)을 살리게 돼 시사 문제 해설과 사연 낭독, 그리고 약간의 코미디가 결합된 조금 독특한 포지션의 방송이 되고 말았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동안 팟캐스트 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상파 라디오의 다시듣기를 제외하면 처음에는 그야말로 개인들이 만드는 소박한 형태의 방송이 많았다. 대부분 특정한 취미와 관련된 정보나 일상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나누는 것이 내용이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amp;lt;나는 꼼수다&amp;gt;가 현실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등 활약을 하고 나서는 더 본격적으로 ‘언론’ 형태의 팟캐스트 방송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근 조세회피처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의 소유자 목록을 폭로한 &amp;lt;뉴스타파&amp;gt;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을 정도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제 팟캐스트는 기성 언론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안언론으로서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게 됐다. 공중파·종합편성채널·케이블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제공되는 방송 콘텐츠들의 한계가 계속 지적돼왔는데, 팟캐스트는 이런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쉽게 제작·유통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언론은 ‘관점’과 ‘공정보도’를 동시에 요구받는 데서 늘 모순적 처지에 놓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만을 기계적 중립을 지켜 보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편파적으로 제공하는 것도 비판받을 만한 일이다. 따라서 언론은 늘 이 두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다양한 팟캐스트의 출현은 이런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소규모 팟캐스트들은 팩트를 공정하게 보도하는 기능은 취약하지만, 듣는 사람에게 다양한 관점을 제공해줘 세상 보는 눈을 더 넓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공정한 보도’에 대한 요구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메이저 언론들의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얘기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런 틀로 보면 대안언론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amp;lt;뉴스타파&amp;gt;나 인터넷 언론사 등을 통해 제공되는 무게감 있는 인기 팟캐스트 등은 팟캐스트라는 형식을 통해 역할을 한다기보다 오히려 메이저 언론들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완적 역할을 한다는 통찰도 얻을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런 맥락에서, 나도 지금 진행하고 있는 팟캐스트를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해볼 작 정이다. ‘루저’와 ‘잉여’들의 방송을 자처해왔으나 부족한 게 많다. ‘못난 사람들의 관점’을 말하며 외로움에 빠진 우리 세대와 공감하고 싶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 &quot;&gt;김민하 정치평론가&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13/0606/137042050152_20130606.JPG&quot;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가볍고, 작고, 날렵한 팟캐스트는 미디어계의 아이돌이다. 팩트를 공정하게 보도하는 기능은 취약하지만 현안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을 풍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 시청자가 팟캐스트 방송 ‘뉴스타파‘를 시청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작고 날렵한 미디어계 아이돌&lt;/b&gt;&lt;/div&gt;&lt;div&gt;&lt;b&gt;하이테크와 로테크 사이를 부유하는 중간자적 존재&lt;/b&gt;&lt;/div&gt;&lt;div&gt;&lt;b&gt;숨어서 모험심 자극하는 은둔형 도발자의 매력에 빠져보길&lt;/b&gt;&lt;/div&gt;&lt;div&gt;&lt;b&gt;&lt;br /&gt;&lt;/b&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13/0604/137025522331_20130604.JPG&quot;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인간사 이야기가 대립항에서 시작함을 주장했다. 선과 악이 경쟁을 벌이는 것이 그 대표적 예다. 대립항 사이에는 중간자적 존재가 끼어 있어 인간사 이야기를 윤택하게 해준다는 말도 보탠다. 중간자적 존재에 주목해보라는 말이다. 정의와 불의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배신자적 존재, 물도 아니고 뭍도 아닌 해변, 그들은 인간사 이야기의 보물창고쯤에 해당한다. 팟캐스트를 미디어계의 중간자적 존재로 뽑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최근 미디어 생태계를 흔들고 소란스럽게 만드는 블루칩임을 알리려 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이테크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팟캐스트는 참으로 낯선 존재다. 첫사랑처럼 자신만이 몰래 감추며 즐겨왔던 라디오 같은 느낌을 준다. 팟캐스트를 통해 전해오는 DJ의 소리는 오랫동안 익숙해온 인터넷에선 찾을 수 없는 육감적 매력을 지닌다. 사람 냄새 나는 존재인 셈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amp;lt;나는 꼼수다&amp;gt;의 매력으로 시끌벅적함, 가식 없는 웃음을 손꼽은 바 있다. 육 감적인 면을 지니면서도 웹이나 모바일을 통해 배포된다는 점, 즉 하이테크이면서 로테크이기도 한 모습에서 중간자적 매력을 읽는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한국에서 팟캐스트의 등장은 기술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면과 더 밀접하다. 정치공학적인 이유로 기성의 라디오·텔레비전 이 제구실을 못할 때 팟캐스트는 성큼 성장했다. 대안적 매체여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무장한 채 등장했다. 그래서 팟캐스트에는 의외로 비장함이 많이 배어 있다. 연예인에 기대 연명하는 기성매체의 꼴을 지우겠다며 개인·조합·집단이 나선 탓에 늘 절절한 사명감이 넘친다. 한국의 팟캐스트 안 목소리들은 위트와 유머로 포장되지만 그 밑바닥엔 비장함의 페이소스가 깔려 있다. 그래서 그것은 묘하게도 ‘웃픈’ 중간자적 존재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올드미디어는 시청취자를 기다리게 하는 힘으로 그 존재를 과시해왔다. 방송 시간을 기다리시라, 그러면 멋진 신세계를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주변을 끌어왔다. 팟캐스트는 거꾸로 말한다. ‘우리는 여러분의 손길을 기다립니다’라는 식이다. 팟캐스트의 세계에 이르면 시청취자는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찾는 존재가 된다. 곳곳에 편재해 있을 팟캐스트를 찾아 뉴미디어의 밀림을 헤치고 나서는 모험가적 존재가 된다. 그런 점에서 팟캐스트는 숨어 있으면서 모험을 자극하 는 은둔형 도발자의 모습을 한다. 시청취자를 모험적 존재로 만들어주는 은둔형 도발자의 꼴을 한 팟캐스트, 또 다른 중간자적 매력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시작한 시간이 얼마 되진 않았지만 팟캐스트의 퍼포먼스에 물이 오르고 있다. 팟캐스트가 특종을 하고 기존 언론이 그것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며 받아 적는 진풍경도 연출 하고 있다. 제한된 자원을 가진 팟캐스트가 주체 못할 큰 덩치의 기성 언론을 부축하는 우스꽝스러운 신이 펼쳐진다. 파릇하고 앳되지만 기성에 삿대질하며 이끌려 하는 팟캐스트는 그래서 애늙은이 같아 보인다. 풋풋하지만 유치하지 않은 묘함을 묻히고 있는 존재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몸이 가벼운 팟캐스트는 매체 풍경 내에서 뛰고 난다. 모바일도 타고, 웹에 실리고, 유튜브로도 진출한다. 없는 듯하지만 언제 어디든 편재해 있다. 모든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큰 것은 쪼개지고, 눈에 보이는 것은 간섭당하는 시대에 가볍고, 작고, 날렵하며, 없는 듯한 팟캐스트는 그래서 미디어 생태계의 아이돌이다. 아직 그 아이돌의 매력을 접하지 못한 분들께 그 신세계를 권하고 싶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 &quot;&gt;원용진 서강대 교수&amp;nbsp;&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팟캐스트</category><category>뉴스타파</category><category>원용진</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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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80001#comment</comments>			<pubDate>Sat, 08 Jun 2013 23:43:55 +0900</pubDate>
		</item><item>
			<title>[한겨레21/크로스] 이주의 트윗, TV로 간 ‘혼자 삶’</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76043</link>
				<description>&lt;div&gt;&lt;b&gt;‘리얼’이 아니다 그러므로 즐긴다&lt;/b&gt;&lt;/div&gt;&lt;div&gt;&lt;b&gt;‘리얼 예능’ &amp;lt;나 혼자 산다&amp;gt;가 그리는 1인 가구의 고충&lt;/b&gt;&lt;/div&gt;&lt;div&gt;&lt;b&gt;소소한 연대 훈훈하지만 ‘로망’의 전시는 ‘환상’임을 상기시켜&lt;/b&gt;&lt;/div&gt;&lt;div&gt;&lt;b&gt;&lt;br /&gt;&lt;/b&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13/0402/136480623412_20130402.JPG&quot;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amp;lt;나 혼자 산다&amp;gt;(MBC)라는 리얼 예능 프로그램이 요즘 관심을 끌고 있다. 제목 그대로 혼자 사는 ‘남자들’의 일상을 소재로 만든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노홍철, 김태원, 김광규, 이성재, 데프콘, 서인국은 각기 다른 사정으로 1인 가구로 살면서 ‘그룹채팅’, ‘번개’를 매개로 소소한 연대를 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 프로그램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실제 1인 가구가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생활 형태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경제적 이유로 가정을 꾸리지 못하거나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유명 연예인들 역시 각자의 사정으로 혼자 살면서 1인 가구로서 삶의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김태원, 이성재가 기러기 아빠로서 겪는 고독을 그린 부분은 이 프로그램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두 번째 이유는 이들이 1인 가구로서 겪는 여러 고충을 ‘무지개 회원’이라는 공동체적 틀로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인 가구의 어려움이란 단지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외로움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1인 가구의 존재는 우리 삶이 공동체에서 유리되고 파편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마음을 나눌 대상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이로 인한 자존감의 상실과 만성적 우울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amp;lt;나 혼자 산다&amp;gt;의 등장인물이 한자리에 모여 ‘성욕 해결의 곤란함’ 등을 토로하며 보여주는 소박한 연대의식은 시청자에게 일종의 위로가 될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세 번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프로그램은 ‘예능’이라는 카테고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amp;lt;나 혼자 산다&amp;gt;에서 등장인물의 대부분은 ‘할 일이 없다’며 금요일 밤에 집에 틀어박혀 집안일 등으로 소일한다. 하지만 우리는 유명 연예인인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스케줄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누추한 주거 공간에는 서인국이 붙박이처럼 앉아 있는 소파도 없고, 김광규가 먹다 남은 치킨을 보관하는 양문형 냉장고도 없다. 노홍철 집에 있는 커다란 식탁은 어떤 사람에겐 그야말로 ‘로망’이다. 여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이 프로그램이 ‘현실’이 아닌 ‘환상’을 그려내고 있음을 상기시키며, 바로 이 덕분에 우리는 안심하고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장치야말로 ‘리얼 예능’의 필수 조건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 &quot;&gt;김민하 정치평론가&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13/0402/136480623435_20130402.JP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혼자 사는 남자들의 일상을 소재 삼아 만든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인 의 주요 장면. MBC TV 화면 갈무리&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대통령도 혼자 사는 나라에서 너무 소소한 웃음&lt;/b&gt;&lt;/div&gt;&lt;div&gt;&lt;b&gt;중산층의 혼자 삶이 독거노인·반지하방 등의 의제 밀어내&lt;/b&gt;&lt;/div&gt;&lt;div&gt;&lt;b&gt;한 손만 더 내밀면 풍부한 정치 의제에 닿게 되련만&lt;/b&gt;&lt;/div&gt;&lt;div&gt;&lt;b&gt;&lt;br /&gt;&lt;/b&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13/0402/136480623423_20130402.JPG&quot;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혼자 사는 삶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능 프로그램과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시사 프로그램의 카메라 세례를 받는 그늘진 공간 이었다. 평범한 삶과 격리된,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삶으로 그려져왔다. 기러기 아빠들의 돌연사, 병든 독거노인, 볕들지 않는 반지하 방 청년세대 등등. 그런데 그곳에 갑자기 예능의 웃음과 함께 볕이 들기 시작했다. 그늘이라곤 한 점 없는 연예인, 싱글, 돌아온 싱글 들이 대표선수를 자처하며 그 삶을 대변하고 있다. 혼자 삶을 전하는 전도사들의 움직임은 분주하고 그 복음들의 음량도 만만찮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각종 사회 장치들도 혼자 삶이 예찬받는 데 일조하고 있다. 혼자 삶을 위한 편의시설, 상품들로 넘친다. 외로움을 떨쳐주는 각종 단기 처방적 이벤트와 애완산업은 거대 사업화하고 있다. 혼자 삶의 전도사들의 간증과 이같은 장치들이 어울리면서 혼자 삶이 화려한 색으로 치장되고 그쪽만 책임지는 스타도 등장할 정도다. 음지에서 양지로 왔을 뿐 아니라 그를 응원해주는 뒷배까지 속속 등장하니, 화려한 싱글이란 말은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게 되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양지로 들어서는 혼자 삶에 브레이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 전문가를 자처하는 친지들의 익숙한 목소리. 사회의 재생산을 걱정하며 온갖 복지를 내거는 국가적 유혹. 혼자 산 경험이 이기적 삶을 만들고 사회 파멸로 이끌 거라며 같이 유대하자는 운동권의 슬로건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혼자 삶은 그를 찬양하는 간증, 그를 걱정 하는 말, 그리고 둘 간의 충돌의 복판으로 들어섰다. 혼자 삶이 정치적 공간에서 부유하는 정치 의제가 되고 만 것이다. 중산층의 혼자 삶이 독거노인, 반지하방 등의 의제를 밀어냈으니 이는 분명 배제의 정치다. 혼자 삶이 상품화하고, 새로운 시장에 대한 자본의 욕망이 커지고 있음을 자본 확장의 정치라 불러 무방할 것이다. 재생산 없는 홀로 삶을 불편한 눈으로 보고 복지 혜택을 줄이려 하는 국가 정치 또한 존재한다. 혼자 삶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사랑, 외로움, 배려의 문제 등은 일상, 몸의 정치 의제 아니던가.&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두 번 방영에 지나지 않지만 개그맨, 로커, 탤런트의 행보는 대강 방향을 잡은 것처럼 보인다. 혼자 삶으로 파생되는 다양한 정치 의제를 되도록 지워가며 조용한 행복 찾기, 쏠쏠한 재미 구하기 등 평범한 개인적 의제로 좁혀갈 태세다. 한 발만 더 걷고, 한 손 만 더 내밀면 풍부한 정치 의제에 닿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통령도 혼자 삶을 사는 나라에서 그 정도 주제를 찌질한 웃음으로만 마무리짓는다면 참 못난 짓에 그치고 말텐데 하는 아쉬움.&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 &quot;&gt;원용진 서강대 교수&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lt;a href=&quot;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4216.html&quot;&gt;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4216.html&lt;/a&gt;&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나혼자산다</category><category>1인가구</category><category>혼자삶</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guid isPermaLink="true">http://weirdhat.net/xe/culture/76043</guid>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76043#comment</comments>			<pubDate>Thu, 04 Apr 2013 13:30:24 +0900</pubDate>
		</item><item>
			<title>조선 &#039;드림팀&#039; 보니, 레닌과 강만수가 떠올라!</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75542</link>
				<description>&lt;div&gt;경세가(經世家)라는 단어가 낯설다. 경세가란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을 통칭할 만한 단어라는 설명이다. 이는 학자가 될 수도 있고 관료가 될 수도 있으며 정치인일 수도 있고 활동가일 수도 있다. 그 시대에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하여 필요한 역할들은 다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수행한 수많은 사람 중에도 유독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039;대동법&#039; 시행의 기틀을 닦았던 위인들이 그랬던 모양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amp;lt;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amp;gt;(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개혁 정책인 &#039;대동법&#039;을 시행하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기틀을 닦았던 네 명의 경세가들을 다룬 책이다. 율곡 이이, 오리 이원익, 포저 조익, 잠곡 김육 등 네 사람의 일대기를 통해 조선시대의 커다란 변화를 추동했던 계기를 만들어낸 경세가들이 어떤 자세를 갖고 현실에 임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image.pressian.com/images/2013/03/29/50130329174019.JPG&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amp;lt;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amp;gt;(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 책에서 이이는 올바른 정치에 대한 의지를 갖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릴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고민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당시 훈구파를 몰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던 사림들은 정권을 장악하면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을 별로 갖고 있지 않았다. 군자들이 정치를 하면 뭐든지 잘 되겠거니 하는 정도의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이는 기득권의 교체 이후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록한 &#039;만언봉사&#039;를 왕에게 올렸으나 결국 당쟁에 휘말려 그의 정치력은 무력화 되고 만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원익은 모범적인 관료의 표본이다. 그는 명확한 관료적 철학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실무 능력을 보여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등을 거치며 중책을 맡아 활약했다. 그의 관료로서의 능력은 자연스럽게 명망으로 이어졌고 이 명망 덕분에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광해군과 인조가 모두 이원익을 첫 번째 재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조익은 뛰어난 이론적 역량을 통해 대동법 시행에 가해지던 정치적 공격들을 무력화시킨 학자이다. 국정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할 때에는 늘 그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반론과 저항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이를 뛰어넘는 계기는 물론 &#039;힘&#039;을 쓰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039;설득&#039;을 통해 명분을 취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조익은 이념적 당위가 아닌 이론과 논리를 통해 대동법 시행의 현실적 명분을 세웠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김육은 대동법이 실제로 시행될 수 있도록 한 정치가이다. 그는 김집과 라이벌의 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김집이 자기 세력을 모으는 것으로 조정 내의 &#039;올바른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것&#039;에 고민의 핵심을 둔 반면 김육은 다양한 사람들을 활용하여 &#039;해야 할 일을 실제로 되도록 하는 것&#039;에 집중했다. 김육의 명확한 문제의식과 뛰어난 정치적 수완 덕에 대동법은 실제로 정책으로서 시행될 수 있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렇게 실천적 지식인, 모범적 관료, 비판적 학자, 그리고 &#039;안민(安民)&#039;의 목표를 잃지 않은 뛰어난 정치가의 세대를 초월하는 노력을 통해 대동법이 시행될 수 있었고, 이 대동법의 시행 덕에 등장한 공인(貢人)들이 조선시대 경제 체제의 변화와 신분질서의 붕괴에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들과 같은 경세가들에게는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발견되는 어떤 공통된 인간성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직관을 가지게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다양한 역사를 돌아보면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앞서 열거한 네 명과 유사하다고 평가할만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의 사례를 돌아보자. 레닌의 시대는 혁명가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을 뒤엎고 혁명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대였다. 이들은 언제나 &#039;지배계급을 일소하자&#039;고 주장했으나 그것을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갖고 있지 않았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레닌은 국면마다 새로운 틀의 고민을 제출하는 것으로 이러한 수많은 그저 그런 혁명가들과 구별되는 변별력을 확보했다. 기회주의와 경제주의에 빠진 혁명 서클의 시대에 레닌은 &#039;당&#039;이라는 정치 결사체의 틀을 제시하는 &amp;lt;무엇을 할 것인가&amp;gt;를 썼다. 혁명가들이 고수하던 마르크스주의가 왜곡되고 속류화 되는 경향이 나타나자 &amp;lt;유물론과 경험 비판론&amp;gt;을 써 이론적 반박을 시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국가의 구체적인 상을 그린 &amp;lt;국가와 혁명&amp;gt;을 집필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이이가 만언봉사를 작성하고 조익이 대동법에 대한 반론을 논파하는 상소를 올린 것에 비견할 만한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국내의 예로 치면 1980년대 초의 유명한 경제기획원 출신 경제관료, 김재익 전 청와대 수석도 조선시대 경세가들과 비슷한 특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경제로 요약되는 고도성장 시기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신념을 갖고 한국 경제에 &#039;안정·자율·개방&#039;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군인 출신으로 경제 정책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039;가정교사&#039;로 불리며 종래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다양한 개혁 정책을 시도하려고 노력했던 김재익 수석은 1983년 &#039;아웅산 테러&#039;로 목숨을 잃는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그가 당시 제기했던 문제의식들은 후대에도 지속돼 일부는 주요한 정책으로 받아들여져 다시 생명을 이어가게 됐다. 정치학을 공부하다 대안적인 경제 정책의 필요가 우선이라 생각해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후 경제기획원을 거쳐 청와대 경제수석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전력투구 한 그의 일대기는 이이, 이원익, 조익의 것을 한데 합친 것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현대의 예에서도 이러한 인물들은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같은 이들이 그렇다. 그는 재무부에 근무하던 시절부터 &#039;해결사&#039;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만큼 관료로서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뜻이다. 그의 이러한 실무적 능력은 자연스럽게 명망을 형성해 이명박 정부에서 금융위원장으로 활약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금융위원장은 &#039;금융계의 대통령&#039;으로도 불리는 요직이다. 그가 재무부 시절 취했던 입장 때문에 일각에서는 &quot;관치금융의 화신이 돌아왔다&quot;는 우려가 전해지기도 했으나 그는 &quot;관(官)은 치(治)를 위해 존재하는 것&quot;이라는 말을 던지며 이러한 우려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이후 김석동은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저축은행 개혁에 손을 대 최악의 사태를 막으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이러한 예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원익이 실무적 능력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잃지 않을만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대동법 시행의 기초를 마련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얼마 전 언론을 통해 사의를 표명한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도 이런 사례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70년대 부가가치세 도입의 실무 작업을 진행하고 재무부 3대 요직이라 불리는 이재국장, 국제금융국장, 세제실장을 전부 역임한 유일한 경제 관료이다. 그는 재정경제부 차관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로 직을 잃고 10년간 &#039;야인생활&#039;을 하게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는 이 시기에 &#039;외환위기를 초래한 무능한 관료&#039;로 찍혀 친구조차 만나지 못하는 외로운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신문에 칼럼을 쓰며 연명했는데, 이러한 고생을 바탕으로 2005년에는 593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인 &amp;lt;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amp;gt;(강만수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을 집필해내기도 했다. 이때를 회고하며 그는 &quot;그래도 내가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정권의 손을 잡지 않은 것이었다&quot;고 말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 덕분에 그는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컴백할 수 있었다. 이는 계축옥사 이후 은거하다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된 조익의 사례와 함께 생각할만한 부분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쯤에서 고개를 갸우뚱 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김재익 수석을 제외하면 별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선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에 빗댄 것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수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독재자 레닌과 저축은행 사태로 수많은 서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김석동, 고환율 정책과 부자감세로 서민들의 생활고를 가중시킨 강만수를 어떻게 조선시대에 민생을 챙기기 위해 동분서주한 위인들에 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이러한 부당한(?)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관료들과 학자, 정치가들이 있었다. 이들의 상당수가 위에 언급한 4인처럼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이이, 이원익, 조익, 김육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그들은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조선시대에 존재했을 수많은 벼슬아치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물의 양을 더 많게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국정을 돌보는 것보다 풍류를 즐기는 데에 더 많은 소질을 가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저 책을 보며 지식을 쌓는 것에만 몰두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속한 정파의 확장과 권력 쟁취를 위한 방법을 찾는데 혈안이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 모든 행위들은 그 자체로 어떤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 어떤 명분과 이유가 없다면 &#039;사사로운 것&#039;이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책에서 논하는 4인은 최소한 &#039;사사롭지 않은 것&#039;을 인생의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던 특성을 갖고 있다. 이들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공적인 어떤 것을 이루려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즉, 경세가가 말하는 &#039;안민(安民)&#039;과 &#039;민생(民生)&#039;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어떤 &#039;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039;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제1의 전제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오늘날 냉소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정반대로 성립된다. 정치적인 것들에 대해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039;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039;은 관심 밖의 일이다. 이제 오늘날에는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가 누구에게 유리한 일을 했으며, 누가 얼마나 부당한 방법을 통해 배를 불렸을까를 논하는 게 정치적 대화의 전부가 됐다. 자기와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상대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악마적인 존재인지를 논증하는 게 &#039;안민(安民)&#039;과 &#039;민생(民生)&#039;을 논하기 위한 제1의 전제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런 조건의 현대 사회에서는 대동법 시행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던 정치가인 김육이 탄생할 수가 없다. 김육의 정치적 역량이라는 것은 상대와 대립하더라도 그를 인정해주며, 이를 통해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명분을 얻고, 이 명분을 바탕으로 왕을 설득하고, 왕이 결단을 내림으로써 정책이 시행하게 만드는 것인데, 오늘날의 조건에서는 이미 악마화 된 상대를 인정하는 것도 어렵고, 그런 상대를 굳이 인정 해주더라도 명분이 얻어지지 않는다. 대동법의 시행은 김육의 정치적 수완 때문에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인데 현대 사회에서는 김육의 수완을 따라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뒤집힌 관점을 다시 한 번 뒤집어서 좀 더 섬세하게 다루어 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레닌, 김재익, 강만수, 김석동에게 &#039;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이 존재했다는 것&#039;, 이것을 1차로 전제하지 않으면 오늘날의 안민(安民)과 민생(民生)을 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택한 길들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따질 수 있는 기초는 이러한 전제가 성립된 뒤에야 마련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위에 언급된 사람들은 분명 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인정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레닌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장점을 버리고 일부러 죽을 수도 있는 힘든 혁명가의 길을 선택했으며, 김재익은 현실을 모르는 시카고 보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안정화 시책을 관철시키려 했다. 김석동은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고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는 공직생활에 몸을 실었고 강만수는 잠을 잘 시간도 없이 외환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다만 불행하게도, 그들이 그런 태도를 갖고 선택한 것들이 서민들의 삶을 힘들고 팍팍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을 따름이다. 즉, 그들은 경세가이기는 했으나 대동법을 만들지 못했거나 대동법 시행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던 셈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것에 대한 열정을 갖고 그들의 실패한 선택지를 면밀히 분석해서 이번에는 다른 선택지를 고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 자체가 정치이며 이렇게 할 때만이 우리의 정치가 다시 영향력을 갖고 살아 움직이며 역사의 발전을 추동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에서 이러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 덕분에 우리의 정치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이 글은 프레시안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329174019&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category><category>이이</category><category>조익</category><category>김육</category><category>이원익</category><category>레닌</category><category>강만수</category><category>김재익</category><category>김석동</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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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75542#comment</comments>			<pubDate>Mon, 01 Apr 2013 02:06:37 +0900</pubDate>
		</item><item>
			<title>왜 &#039;아키에이지&#039;가 화제일까?</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71046</link>
				<description>&lt;div&gt;게이머들 사이에서 엑스엘게임즈의 ‘아키에이지’가 화제다. 이 게임은 그간의 MMORPG와는 다른 특성을 강조해왔다. 다른 특성이란 기존의 게임과는 달리 특유의 ‘자유도’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캐릭터 만들고 괴물을 사냥해서 레벨을 올리고 다른 플레이어와 경쟁하는 단순한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사회의 구성에 가까운 시스템을 선보이겠다는 게 제작사의 결의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2/31587_67393_396.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감옥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는 이용자들 ⓒ엑스엘게임즈&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를테면, 게임 상에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감옥에 갇히는 시스템 같은 것이 그렇다. 감옥에 갇힌 플레이어들은 감옥에서 나름의 수형생활을 한다. 심지어 탈옥을 하기도 한다. 아키에이지의 이러한 특성을 웹툰 작가 이말년이 그린 ‘두덕리 온라인’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웹툰 두덕리 온라인은 실패를 거듭하던 한 게임개발업체가 현실과 최대한 유사한 온라인 게임을 만들었지만 현실과 너무 비슷해 오히려 망하게 된다는 줄거리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최근에는 게임 상의 축산 분야가 지나친 생산성 증대를 보여 이른바 ‘구제역 패치’가 단행되기도 했다. 가축들이 병에 걸렸다는 설정으로 생산성을 억지로 저하시킨 것이다. 제작사 측이 한 부분에 너무 많은 유저가 몰리면 게임의 전체 경제 구조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게임 상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고 다른 경제활동에 집중하겠다는 이용자가 있는가 하면 돈을 내고 게임을 하는 데 사전 공지도 없이 이런 만행을 저지르냐며 격분하는 이용자도 있는 것 같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자유도’란 무엇인가?&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자유도’의 구현은 오랫동안 주로 롤플레잉 게임 장르를 중심으로 논란거리가 돼왔다. 이는 컴퓨터·비디오 게임이 가진 두 가지 특성이 상충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게임들은 특정한 룰에 따라 경쟁을 하는 특성을 가지면서도 이용자에게 어떤 대리체험을 선사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일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쉽게 얘기하면 축구와 같은 스포츠를 컴퓨터 게임으로 만드는 사례에 대해 생각해보자. 축구의 룰을 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동일한 룰에 따라 상대방과 컴퓨터 게임을 통해 경쟁하고 우위를 점하는 것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게임이 가진 첫 번째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성은 이 축구 게임을 대리체험의 도구로 가정했을 때 내가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대상이 어디냐의 문제를 따지면 드러난다. 전체 경기 상황을 조망하고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개별 선수가 아니라 공을 가진 선수를 조종해야 한다는 점은 ‘나는 이 시스템에서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문제를 야기한다. 나는 감독인가? 내가 감독이라면 선수에게 대략적 지시는 할 수 있어도 그의 움직임을 직접 컨트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선수인가? 내가 선수라면 상대방이 공을 패스할 때까지 기다릴 순 있어도 공을 잡은 모든 선수들의 움직임을 컨트롤할 수는 없다. 즉, 축구 게임에서는 대리체험의 도구라는 측면 보다는 상대방과 동일한 룰로 즐길 수 있는 경쟁의 도구라는 점에 좀 더 방점이 찍히고 있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2/31587_67394_4557.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아예 축구감독을 대리체험시켜주는 풋볼 매니저의 게임화면. 전술을 수립하고 있다. ⓒIGN&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슈팅 게임이나 스포츠 게임 등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경쟁’의 측면이 더욱 부각된다. 축구 게임에서라면 누가 더 많은 점수를 내는가에 관심이 집중된다. ‘태클을 할 때 왜 선수가 내미는 발의 각도를 섬세하게 조종할 수 없는가?’ 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비행기 슈팅 게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저 비행기는 어떤 연료를 사용하기에 이렇게 무한정 비행을 할 수가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은 이런 게임에서는 부당한 일이다. 즉, 이러한 종류의 게임들은 ‘상상화’를 거친 결과물임을 전제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얘기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거대한 세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게임인 ‘롤플레잉’에서는 이런 것보다는 ‘대리 체험의 도구’로서의 성격이 좀 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필연적으로 ‘이 게임에서 재현할 수 있는 현실의 상황은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게임이 얼마나 현실의 질서, 그러니까 상징계를 잘 반영하고 있는 지를 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게이머들이 흔히 말하는 ‘자유도’라는 개념의 정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울티마의 유산&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렇다면 이런 ‘자유도’의 개념은 언제부터 게임 상의 논란거리로 등장하게 됐을까? 아마 롤플레잉 게임에서의 자유도가 이용자들에게 대중적인 수준에서 크게 어필하게 된 최초의 작품은 ‘울티마7(Ultima 7 : The Black Gate)’이었을 것이다. 이 게임이 기존의 게임과 크게 달랐던 것은 게임 상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대상(object)화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기존의 게임들은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 먼저 시나리오를 검토한다. 주인공이 숲 속에서 바위를 들어 강물에 내던지는 장면이 있다면 그 장면을 재현하기 위한 설계를 한다. 이 경우 숲 속의 온갖 바위와 나무와 지저귀는 새들과 아름다운 꽃들이 전부 ‘배경’ 그림 한 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주인공이 들어야 하는 바위 한 개만 object화 된다. 오래 된 애니메이션에서 곧 움직이게 되어있는 물체만 이상하게 작화가 다른 경우를 종종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를 떠올리면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2/31587_67395_4731.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울티마7의 플레이 화면. 화면에 갑옷, 투구, 가방, 당근, 양고기, 포도, 돌멩이 등 온갖 종류의 오브젝트가 보인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울티마7의 경우에는 산과 바다마저도 object로 구성돼있었다. 이러한 설계는 구성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일단 작업이 완료되면 각각의 object에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것으로 접시와 컵의 위치를 바꾸는 등의 소소한 행위들과 밀가루를 반죽으로 만들고 밀대로 민 후 모양을 만든 후 오븐에 넣고 구워서 빵을 만드는 식의 행위들이 가능하도록 하는 설계가 가능해진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울티마7의 이러한 특성은 MMORPG로 다시 개발돼 ‘울티마 온라인’의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채용된다. 울티마 온라인은 최대의 자유도를 보장하는 이러한 특성으로 한동안 세계적 인기를 구가했다. 울티마 온라인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었다. 닭을 잡아 닭고기와 깃털을 얻은 후 닭고기는 구워 먹고 깃털은 나중에 나무를 잘라 가공하여 화살을 만드는데 쓰는 식의 작업도 가능하다. 따라서 직업도 여러 가지를 가질 수 있다. 재단사, 광부, 나무꾼, 어부, 심지어 거지도 당당한 직업으로서 있을 정도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디바이스의 변화&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게임에 일정한 ‘진입장벽’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임의 모든 요소를 즐기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일정 정도 이상의 반복 플레이를 각오해야만 한다. 울티마 온라인에서 나무꾼 스킬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서 적어도 수백 번의 반복 마우스 클릭을 해야 한다. 도끼를 클릭하고 나무를 클릭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이 반복되면 도끼의 내구성이 하락해 못쓰게 되기도 하고 나무에서 더 이상 목재를 채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하며 채취한 목재가 너무 많아 그 무게 때문에 이동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가볍게 게임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작업을 한없이 하고 있어야 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2/31587_67396_5125.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amp;nbsp;&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있는 울티마온라인 이용자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때문에 울티마 온라인이 MMORPG의 이상적인 작품이라는 점을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모양으로 쉽게 온라인 게임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국내 온라인 게임 개발의 현실이었다. 비슷한 것을 시도한 사례는 있지만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기까지는 조금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자유도’를 강조한 온라인 게임이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디바이스에 따른 유저 층의 분리에 따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그동안 온라인 게임의 개발은 앞서 언급했듯이 라이트 유저층과 헤비 유저층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소형 게임기기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일정 부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됐다. 라이트 유저층이 즐길 수 있는 소위 ‘캐주얼 게임’들이 소형 게임기기와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즉, 라이트 유저층으로서는 더 이상 데스크탑 컴퓨터를 잡고 앉아서 게임을 즐길 이유가 없어졌다는 얘기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헤비 유저층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이 원하는 게임의 개발에는 방대한 규모의 하드웨어적, 소프트웨어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이들의 취향에 맞는 게임은 소형 게임기기와 스마트폰을 플랫폼으로 해서는 제대로 만들어 낼 수가 없다. 특히 앞서 설명한 ‘대리체험의 도구로서의 게임’을 충실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소형 디바이스들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lt;/div&gt;&lt;div&gt;&amp;nbsp;&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2/31587_67397_5456.jpg&quo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스마트폰 게임인 확산성 밀리언 아서는 캐릭터성과 경쟁적 게임 요소를 성공적으로 부각시켜 일부 헤비 유저들의 지지를 받는데 성공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따라서 데스크탑을 기반으로 한 MMORPG를 만드려는 계획을 세운다면 차라리 애초에 헤비 유저층의 취향을 타겟으로 하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아키에이지’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 역시 이러한 차원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마이크로소프트사가 새로운 운영체제인 윈도우8의 개발에도 이러한 디바이스의 변화가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다. 윈도우8의 핵심 컨셉은 소형 디바이스부터 데스크탑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OS를 사용하되 그 중심은 소형 디바이스에 두는 것이다. 이는 직관적인 사용자 편의성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라이트 유저층이 소형 디바이스에 집중되어 있음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헤비 유저들은 어차피 윈도우8을 어떻게 만들든 덩치가 큰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 적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이 글은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587&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아키에이지</category><category>자유도</category><category>울티마</category><category>윈도우8</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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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71046#comment</comments>			<pubDate>Tue, 05 Feb 2013 11:21:34 +0900</pubDate>
		</item><item>
			<title>‘안전한 사회’에 대한 갈구</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70404</link>
				<description>&lt;div&gt;작년 말부터 또래들 사이에서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이 인기다. 종편인 채널A의 간판 고발 프로그램인 ‘먹거리 X파일’은 그야말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영돈 PD의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와 “그럼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라는 말은 이미 유행어가 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 프로그램의 인기 요인에는 무엇보다도 지난해 유행한 tvN의 ‘SNL 코리아’에서의 패러디 코너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개그맨 신동엽이 이영돈 PD의 어눌한 말투와 몸짓을 따라하는 ‘이엉돈 PD의 먹거리 X파일’ 역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코너에서 신동엽은 누군가 음식을 먹으려고 하거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갑자기 나타나 “이 음식,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라고 말한 후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라며 음식을 빼앗아 먹고는 “그런데 이런 음식에는 많은 부작용이 있습니다”라며 남은 음식을 던져버리는 식의 코미디를 구사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maker/1010/20130113_73_1.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amp;lt;먹거리 X 파일&amp;gt;을 진행하는 이영돈 PD. | 경향신문&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패러디의 대상이 된 ‘이영돈 PD의 X파일’도 비슷한 포맷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특정 음식을 선정해서 그 음식이 어떻게 저질 형태로 유통되는지를 취재한다. 시청자들이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유통 실태를 고발하고, 이영돈 PD가 직접 이러한 저질 음식을 제작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이것을 직접 먹어보는 등의 방법을 통해 문제를 검증한다. 그리고 이런 나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음식을 판매하는 ‘착한 식당’을 찾아내 홍보를 해준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러한 프로그램의 포맷은 이미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는 대중들의 요식업계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테다. 가계 소득은 저하되고 식재료 가격은 오르는 상황에서 저렴한 가격에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저질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현실에서 먹거리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증폭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맛집 블로거’ 등이 인기를 끌게 되는 세태도 이러한 어려움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냉정하게 음식점의 편법 등을 과감하게 지적하는 블로거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중들의 음식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는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새 정부의 정책도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 당선인은 후보 시절 TV토론을 통해 ‘4대악’을 척결하겠다고 말했는데, 4대악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든 것은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 불량식품’이었다. 여기서 불량식품이란 초등학교 앞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달고나’ 장사 같은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한 사례와 같은 것들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런데 이렇게 보니 이 4대악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보인다. 그것은 대중의 ‘안전한 사회’에 대한 갈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영돈 PD의 X파일’도 큰 틀에서 보면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라는 저서를 통해 자본주의의 새로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인간이 문명화할수록 환경오염과 같은 사회적 위험요소가 증가하게 됐고, 이것이 다시 자본주의의 새로운 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라는 얘기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런 측면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 새해가 오자마자 동아일보는 ‘지난해 하반기 6개월 동안 지상파를 제외한 모든 TV채널 중에서 채널A가 프라임 시간대, 오후 시간대 시청률 1위를 했다’며 ‘4대 지상파 채널과 함께 빅5에 등극했다’고 평해 사실상의 자화자찬을 늘어놓은 것이다. 울리히 벡은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성찰적 근대화’를 통해 ‘새로운 근대’로 나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가정책의 최우선 과제가 사회적 안전장치를 확보하는 것에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 정부가 이 과제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오늘 점심식사는 ‘안전한 것’으로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이 글은 주간경향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mp;amp;artid=201301151334261&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이영돈</category><category>먹거리x파일</category><category>snl</category><category>위험사회</category><category>울리히벡</category><category>동아일보</category><category>채널a</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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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70404#comment</comments>			<pubDate>Wed, 16 Jan 2013 17:53:02 +0900</pubDate>
		</item><item>
			<title>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눈물겨운 노력</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70185</link>
				<description>&lt;div&gt;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4월 개봉 소문이 SNS를 타고 퍼져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만큼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인기가 여전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 사실 확인은 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이쯤에서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돌아보고 앞으로를 전망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5년 TV도쿄를 통해 방영된 거대 로봇 애니메이션이다. 그 때까지 존재했던 거대 로봇물들의 공식을 많이 배신(?)한 작품이기에 큰 충격을 줬고 많은 마니아들을 양산해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수퍼계 로봇(Super Robot)’ vs ‘리얼계 로봇(Real Robot)&#039;&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을 분류할 때 ‘수퍼계 로봇(Super Robot)’과 ‘리얼계 로봇(Real Robot)’의 구분을 많이 쓴다. 이는 ‘수퍼로봇대전’ 이라는 게임 시리즈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구분법인데 이 두 분류의 기준을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수퍼계의 경우 로봇 자체가 영웅시되며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서사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리얼계의 경우는 로봇 자체가 하나의 병기에 가깝고 로봇의 존재 자체와 구분되는 현대적 서사를 배경으로 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퍼계 로봇의 예로는 철인28호나 마징가Z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고 리얼계 로봇의 예로는 기동전사 건담이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994_65761_1748.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대표적 수퍼계 로봇 마징가Z ... 와 그의 여자친구&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런데 사실 이러한 구분은 ‘기동전사 건담’이 1979년 방영되면서 기존의 로봇물들과 무언가 다른 형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합리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영역들의 논쟁 구도와도 비슷한 것 같다. 철학의 영역이라면 계몽주의 이후 이성과 합리를 기반으로 한 철학자들이 활약하는 모더니즘의 시대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동전사 건담은 상대적으로 ‘비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전 로봇 애니메이션에 대한 비판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994_65762_1811.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마치 &#039;스타워즈&#039;를 연상시키는 포즈를 취한 RX-78-02 건담&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에반게리온의 창작자인 안노 히데아키 감독 또한 젊었던 시절에는 이런 조류에 열광했던 것 같다. 그가 젊은 시절 관여했던 작품인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를 제작할 때에는 메카닉이나 미사일 등의 무기의 디자인과 관련해 매우 세밀한 고증 작업을 벌였고 아예 일본자위대에 자기가 직접 체험입대를 했다는 뒷말이 남아있을 정도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에반게리온의 독특한 위치&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런데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경우 이러한 리얼계 로봇이라는 기준으로도 구분하기 힘든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세계의 종말과 관련한 온갖 종교적 상징을 마구 끌어온 세계관에 메카닉의 디자인과 의미에 있어서도 기존의 리얼계 로봇물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다시 철학의 영역에 비유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부를만한 것이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아마 이러한 상황은 안노 히데아키 개인의 흥망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극한의 리얼리즘적 요소를 도입하려 했던 ‘왕립우주군’이 크게 망하게 되자 미소녀, 메카닉, 열혈물 이라는 요소를 적당하게 버무린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큰 인기를 끌자 오히려 안노 히데아키는 본인의 예술관에 회의를 느끼게 됐던 것이다. 즉, 건버스터의 성공은 소위 ‘오타쿠’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작품성’이라고 부르곤 하는 어떤 ‘메시지’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에 맞는 ‘기호’에 열중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감독 스스로가 깨닫게 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라는 사람이 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책에도 잘 나타나 있는 현상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994_65764_2019.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미소녀, 메카닉이 등장하며 늘 근성을 강조해 &#039;근성물&#039;이냐는 비아냥을 들었던 &#039;톱을 노려라 건버스터&#039;&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한 번 비튼 작품이다. 안노 히데아키와 제작사인 가이낙스는 ‘오타쿠’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모든 요소를 애니메이션에 집어넣었지만 그러한 요소들의 자기부정을 곳곳에 첨가했다. 완구의 제작이 어려울 정도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메카닉의 디자인이나 아무리 봐도 좋게 봐주기 힘든 등장인물들의 병적인 정신상태 등이 그러한 것에 해당한다. 심지어 TV판의 마지막 화에서는 대놓고 오타쿠들에게 이제 현실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안노 히데아키의 비뚤어진 시도에도 오타쿠들은 열광하며 이러한 ‘비틈’은 그 자체로 오타쿠들의 소비 대상이 되고 말았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에반게리온 극장판이 만들어진 이유&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런 상황에 에반게리온의 극장판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사람들의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잠시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 ‘기동전사 Z건담’을 극장판으로 다시 제작한 경우를 예로 들어보아야 할 것 같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몰살의 토미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작중에서 많은 등장인물들을 죽여 버리기로 유명했다. 이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주인공인 소년의 성장기를 그려내기 위해 만든 어쩔 수 없는 장치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런 시도들이 ‘파탄적으로’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만 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994_65766_2142.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Z건담 극장판에서 8년 만에 다시 만난 아무로를 지켜보는 샤아&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기동전사 Z건담’의 극장판 제작은 이러한 과거에 대한 토미노 감독의 사죄의 제스추어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TV판에서 마지막에 정신붕괴를 일으켜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주인공 카미유 비단이 극장판에서는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 채로 해피엔딩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의 붕괴로 인해 쥬도 아시타라는 새로운 소년이 전장으로 내몰리게 되는 ‘기동전사 ZZ건담’으로의 연결고리를 제거한 것이기도 하며, 이것은 곧 건담 시리즈 전체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이 함께 파국적 대결을 벌이는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로 이어지는 역사 자체를 감독이 부정한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시도는 ‘전쟁과 소년에 대한 어른의 사과’로 굳이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994_65767_225.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샤아를 지켜보는 아무로. 이 둘은 그야말로 &#039;세기의 라이벌&#039;이라고 평가할 만 하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에반게리온 극장판 제작 시도도 이러한 흐름의 하나가 아닐까라는 예측이 대두됐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가 개봉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예측에 힘을 실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행태가 TV판에 비교해서 훨씬 밝아졌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가 개봉했을 때에도 사람들의 이러한 믿음은 어느 정도 유지가 됐다. 일부 사람들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의 제작이 시종일관 불안정함을 추구했던 TV판에서의 만행에 일종의 ‘힐링’ 역할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039;루프물&#039;로서의 에반게리온&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한편에서는 또 다른 ‘오타쿠적’ 관점에 제시됐는데 그것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가 일종의 ‘루프물’이 아니냐는 의혹이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루프물이란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이 반복적으로 다시 제시되며 그 안에서 문제의 해결방식을 찾도록 하는 작품의 형식을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을 들 수 있는데, 이 영화의 내용은 한 일기예보관이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에 갇혀 고통을 받다가 그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주성치가 서유기의 모티브를 따다 만든 ‘서유기 월광보합’에도 비슷한 개념의 장면이 나온다. 등장인물이 사망하자 손오공 역을 맡은 주성치가 바로 전 시간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등장인물을 살리기 위한 시도를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소위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에서도 이러한 기법은 매우 많이 활용됐다. 그래서 안노 히데아키의 극장판 제작을 일종의 ‘안이한 것’으로 폄훼하는 시각도 있었다. 루프물의 형식이 워낙 많은 인기를 얻고 있으니 여기에 편승해서 쉽게 극장판을 제작하려는 것 아니냐는 ‘오타쿠적’ 의혹이라고 할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994_65768_2240.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와 파는 기존 TV판의 큰 틀을 따라가면서 약간의 변화를 가미하는 것으로 보여졌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아직 국내에 개봉한 것은 아니지만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를 관람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이 작품에서는 본작과는 다른 엄청난 전개가 진행되며 ‘루프물’의 ‘루’도 꺼내기 힘들만큼 기존작과는 상이한 스타일로 귀결됐다는 평이 지배적인 것 같다. ‘신극장판 파’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준 예고편이 Q에서 거의 반영되지 않아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애초의 계획을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노선의 극장판을 제작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을 정도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오타쿠에 대한 안티적 오타쿠로서의 안노 히데아키&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런 맥락으로 보면 여전히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오타쿠’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의 의도를 추측해보면 여전히 동물화한 오타쿠들의 소비패턴에 충격을 주기 위한 어떤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994_65769_2257.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차회 예고. 통 무슨 뜻인지..&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오타쿠의 세계가 안노 히데아키 한 사람의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시도는 또 다시 오타쿠들의 특정한 취향으로 소비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되풀이 되는 시도가 만들어 내는 예술적 성과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의 다음 작품은 ‘신·에반게리온 극장판:||’ 라고 한다. 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이 아니고 ‘신·에반게리온’인지, ‘||’은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 ‘:’은 뒤의 ‘||’과 합쳐 도돌이표로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악보의 끝세로줄로 읽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오타쿠들을 향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1995년부터 시작된 안노 히데아키의 오타쿠들을 향한 외침이 이번에는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 기대가 된다. 여전히 Q가 국내개봉을 하는 것인지 아닌 지는 불투명하지만 말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이 글은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994&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에반게리온</category><category>안노 히데아키</category><category>건담</category><category>오타쿠</category><category>아즈마 히로키</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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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70185#comment</comments>			<pubDate>Sun, 13 Jan 2013 22:27:43 +0900</pubDate>
		</item><item>
			<title>낡은 &#039;고전 게임&#039;과 첨단 &#039;스마트폰&#039;의 짜릿한 조우</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70000</link>
				<description>&lt;div&gt;고전 게임을 논해보기로 한다. 학교에서의 전공은 심리학이었지만 인생에서의 전공은 컴퓨터 게임이다. 80년대, 286-XT 시절 고도리 1.0과 테트리스로 시작된 게임 인생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와 플레이스테이션3 때문에 소니가 망하네 마네 하는 오늘날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최첨단의 시대에 새삼스럽게 고전 게임을 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오늘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해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상은 돌고 돈다는 것이다. 과거에 데스크탑용 게임을 만드는 데 이용됐던 노하우가 오늘날에는 소형 디바이스용 게임을 제작하는 데 재활용된다. 이런 의미는 게임에서의 그래픽 기술 변천사를 돌아보면 보다 확연해진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초창기 컴퓨터 게임의 그래픽 수준은 처참한 것이었다. 오늘날 ‘로그류’ 또는 ‘로그라이크’라고 불리는 롤플레잉 게임의 당시 모습을 꺼내보면 충격적인 수준의 그래픽을 활용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때에는 전문 용어로 ASCII 코드, 흔한 말로는 그냥 글자와 숫자, 기호들로 그래픽 작업을 대신했다. 때문에 각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해둔 ‘색인’이 필요할 정도였다. 이 시대의 게이머들은 이러한 글자들의 나열에서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던전의 내부와 치명적인 위력의 불꽃을 내뿜는 포악한 용의 사멸을 상상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799_65178_5350.jpg&quo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통칭 로그류(Rogue like) 게임의 화면&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컴퓨터의 하드웨어적 성능이 향상되고 보다 다양한 그래픽 표현의 시도가 가능해지면서 ‘도트(dot)’라고 불리는 그래픽 표현 방식이 등장했다. 이 기술은 모니터의 화면이 사실 수많은 작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799_65179_5415.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고전 게임 그래픽을 확대하면 커다란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보통 현대의 모니터에서는 가로 세로 1인치의 넓이에 72개의 점이 들어간다. 그래서 웹(web)용 그림 파일의 해상도를 72dpi(dots per inch) 등의 단위로 표현하기도 한다. 보통 웹용 그림 파일을 그대로 출력했을 경우 출력물의 느낌이 흐릿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는 모니터라는 필터를 거쳐서 보는 것과 출력된 인쇄물을 보는 것의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출력용으로 작업하려면 해상도를 높여야 한다. 인간의 눈을 만족시킬 수 있는 출력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300dpi 정도의 해상도로 작업을 해야 한다. 가로 세로 1인치 넓이에 점이 300개가 들어가야 하는 것인데 모니터의 경우 점의 크기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작업물의 크기가 커진 상태로 작업을 해야 한다. 이게 그래픽 작업을 하는 컴퓨터에 고사양이 요구되는 이유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야기가 잠깐 샜지만, 어쨌든 이런 원리로 하드웨어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도트그래픽의 수준도 점점 상향평준화 됐다. 칼라 모니터가 등장하게 된 이후 처음에는 4가지 색의 점으로 그래픽을 표현하던 것이 16개, 256개, 65536개의 순으로 발전하게 됐다. 하지만 몇 가지 색으로 표현하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성과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799_65181_5450.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위의 그림은 &#039;동급생2&#039;로 16가지 색상의 도트들을 수동으로 찍어서 만든 그림이 삽입된 어드벤처 게임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도트를 열심히 찍어서 그래픽을 만드는 것이 게임 그래픽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시대가 왔다. 도트 그래픽은 근본적으로 2D다. 시점변환 등 다양한 동적 묘사가 필요한 게임 분야에서 이러한 방식의 그래픽 묘사는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3D 그래픽의 근본을 이루는 ‘폴리곤’은 그렇게 등장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799_65180_5433.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최초의 폴리곤 사용 어드벤처 게임이었던 &#039;어둠속에 나홀로(Alone in the dark)&#039;&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폴리곤은 쉽게 말하면 3D로 구성된 물체를 표현하기 위한 기본 단위다. 초기의 3D그래픽은 커다란 폴리곤 몇 개로 대상을 표현했지만 하드웨어가 고급화되고 관련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기본 뼈대를 섬세하게 입체화된 폴리곤으로 구성하고 그 위에 2D 텍스쳐를 입히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고급화된 기술이 적용된 게임의 경우 폴리곤이 무려 한 화면에 5만개가 등장하기도 하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렇게 3D 그래픽 기술이 일반화되면서 과거의 도트 애니메이션 등의 기술이 과거와 같은 위상을 갖지 못하게 됐다. 고성능의 데스크탑과 게임 전용 하드웨어를 갖춘 비디오 게임기가 게임의 주요한 플랫폼으로 자리잡으면서 2D 기반의 그래픽 기술들은 3D의 들러리와 같은 위상에 처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3D 그래픽을 기반으로 한 게임의 경우 과거보다 훨씬 많은 제작비용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컴퓨터 게임 제작의 핵심은 ‘얼마나 참신한 게임적 아이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인가?’가 아닌, ‘얼마나 화려한 화면과 특수효과를 보여줄 것인가?’로 변하게 됐다. 게임개발은 대기업의 몫이 됐고 중소게임개발사들은 이제 한계에 봉착한 것처럼 보였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금방 다른 돌파구가 마련됐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소형화된 기기들의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형 기기들은 데스크탑과 비교할 때 하드웨어적 한계에 더 많이 부딪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형 기기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가벼운 게임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 하드웨어적 한계 때문에 3D의 화려한 화면으로 구성된 게임을 소형 기기용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과거의 방식, 즉 2D 도트애니메이션의 부활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런 상황이 되자 정부에서도 게임 산업의 부흥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야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게임물의 심의 문제였다. 모든 게임은 게임물등급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가장 많이 팔리는 소형디바이스 중 하나인 아이폰을 개발한 애플 측은 이러한 절차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애플의 앱스토어에 게임물이 등록될 수 있느냐 마느냐는 기술적으로 오로지 애플사가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따라서 이 법령이 개정될 때까지 한국에는 아이폰용 게임을 내려 받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했는데, 이 때문에 아이폰이 출시되고 상당 기간 한국의 아이폰 이용자들은 아이폰을 이용한 게임을 하지 못하는 신세에 처하게 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동안 어려움을 겪던 중소 게임회사들은 소위 ‘게임법 개정’에 사활을 걸었다. 게임물등급심의위원회가 아닌 다른 주체에게 게임물의 등급 심의를 위임할 수 있다면 앱스토어를 이용해 상품을 공급하는 게 가능해진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도했던 이 논의에 여성가족부가 주장하는 청소년 보호 등을 골자로 하는 셧다운제 등이 끼어들어 논의가 엉망진창이 됐지만 결국 우여곡절 끝에 2011년 7월 소위 게임법 개정안이 의결됐고 이제 우리는 앱스토어에서 자연스럽게 게임을 다운 받아 실행할 수 있게 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www.mediaus.co.kr/news/photo/201301/30799_65177_5324.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quot;&gt;▲ 인기 스마트폰용 게임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스마트폰의 게임들이 화려한 그래픽 효과보다는 아이디어를 중심에 둔 아기자기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하드웨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에 서술한 이런 사실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은 돌고 돌아 다시 고전게임의 시대가 온 셈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이 글은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799&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게임</category><category>어둠속에나홀로</category><category>동급생2</category><category>도트그래픽</category><category>폴리곤</category><category>3D</category><category>드래곤플라이트</category><category>애니팡</category><category>스마트폰</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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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70000#comment</comments>			<pubDate>Sun, 06 Jan 2013 20:01:3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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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는 게 힘들어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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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gt;지난번에는 이 지면에 중년들이 다짜고짜 반말을 쓰는 세태에 대해 썼고, 그 전에는 운동권에서 만난 꼰대들의 얘기를 썼다. 글을 읽은 젊은 사람들이 긍정적 반응을 많이 전해 왔다. 이런 부조리를 나 같은 진보정당의 운동권들만이 겪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maker/989/20120813_989_66_1.jpg&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 &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0, 117, 200); &quot;&gt;내세울 것은 나이밖에 없는 사회에서 ‘꼰대’의 출연은 필연적인 지도 모른다. | 경향신문 자료&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다는 어떤 젊은이는 중년의 상사가 직접 작성해야 하는 문서임에도 젊은 사람이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이유를 들며 문서 작성을 떠넘기는 상황을 겪고 하소연하기도 했고,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어떤 젊은이는 간부를 선출하는 선거에 나갔다가 ‘아직 어려서 때가 덜 묻어 순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낙선해 마음고생을 했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또 사회단체에서 활동한다는 어느 젊은이는 같이 일하는 중년이 다짜고짜 “한 10년 잘 키우면 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대체 중년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 왜 다들 대접을 못 받아 환장한 사람처럼 구는 것일까?&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런 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중년이 됐다고 가정하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권 20년차라면, 20년을 운동에 바쳤는데 망하기만 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없고 나의 지난 20년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는 없는 처지이니 하던 일을 계속하거나 신념을 조금 꺾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진보신당에서 통합진보당으로 당적을 바꾼 어떤 중년은 이제는 운동이 아니라 정치를 해야 할 때라며 “야,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거나 해야겠냐?”라는 말을 남겼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운동권이 아닌 다른 데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많은 중년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기보다는 ‘이것밖에 이루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년들이 새로운 시대에 잘 적응하는 젊은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이란 오직 ‘나이’밖에 없는 세상이 돼버린 것이 세상에 만연한 꼰대질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런데 어디 중년들만 그런가? 사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부끄러움을 부르는 단어가 따로 있다. 이것은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인터넷 신조어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무언가를 비판했을 때, 비판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덧글에 붙는 ‘열폭’이라는 단어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열등감 폭발’의 줄임말로 ‘이런 비판은 당신이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않는가?’라는 용례로 주로 쓰인다. 이러한 표현은 이제 일반적인 것이 됐는데,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사실 다들 만성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면 ‘열등감’은 사실상 오늘날의 시대정신인 셈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전 사회적 열등감의 표출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만든 팬플레이션(panflation)이라는 말은 인플레이션이 사회의 다양한 부분에서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데, 직책의 인플레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 기업에 입사하자마자 대리가 되거나 젊은 나이에 임원급 직함을 달고 있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불황으로 기업의 규모가 줄어든 상태에서 슈퍼갑(Super甲)을 상대해야 하거나 영업활동을 수월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중년들의 꼰대질도 다 사는 게 힘들어서 그렇다는 얘기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내 직함은 ‘국장’인데, 작은 정당이니 국장인들 오죽하겠느냐마는 일부 사람들이 종종 방송사 보도국장 대하듯 하니 기분이 과히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기분에 비례해 1.13% 정당의 국장일 뿐이라는 사실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러한 생각을 빨리 떨치지 않으면 나도 곧 꼰대가 되고 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불안하다. 역시 이 세상을 다 뜯어고쳐야 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 이 글은 주간경향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lt;a href=&quot;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mp;amp;artid=201208131639011&amp;amp;code=124&quot;&gt;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mp;amp;artid=201208131639011&lt;/a&gt;&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꼰대</category><category>팬플레이션</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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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52107#comment</comments>			<pubDate>Fri, 17 Aug 2012 20:33: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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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겨레21/크로스] 이주의 트윗- ‘오빤 강남 스타일’ 글로벌 열풍</title>
			<link>http://weirdhat.net/xe/culture/52098</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12/0820/8000979424_20120820.JPG&quot; /&gt; &lt;/div&gt;&lt;div&gt;&lt;b&gt;&lt;br /&gt;&lt;/b&gt;&lt;/div&gt;&lt;div&gt;&lt;b&gt;한국은 한국이고 싸이는 싸이다&lt;/b&gt;&lt;/div&gt;&lt;div&gt;&lt;b&gt;뉴미디어 공략한 싸이의 성공… 올드미디어 촌스런‘드립’에 휘발돼&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싸이의 ‘겨땀’보다 더 많은 말이 쏟아진다. &amp;lt;강남 스타일&amp;gt;의 성공에 쏟아진 말 중 가장 앞장서는 건 뉴미디어와 ‘글로벌 싸이’에 대한 것이다. 대중음악 유통에서 유튜브가 ‘갑’임을 싸이가 재빠르게 간파했고 그 덕에 싸이가 글로벌 스타가 되었다는 이야기, 과 &amp;lt;허핑턴포스트&amp;gt; 기사, 그리고 프랑스 텔레비전까지 유튜브와 싸이를 언급한다는 이야기 등등. 여기까지는 싸이가 &amp;lt;강남 스타일&amp;gt;을 통해 ‘글로벌 오빠’가 되었다는 미담에 속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뉴미디어와 글로벌 무대를 정복했다는 미담은 갑자기 국가 성공담으로 바뀐다. 올드 미디어인 신문과 방송의 오버가 이를 주도한다. 싸이의 성공이 곧 한류의 성공에 정점을 찍었다는 말은 평범한 축에 속한다. 국격 상승에 도움된다는 설레발에 이르면, 올드 미디어들은 살림살이가 어려워 다 국영으로 바뀌었나 의문이 들 정도다. 그들의 입놀림은 화려하지만 진정으로 축하하는 것처럼 들리진 않는다. 오히려 국가 경계를 넘어서는 초국가적 현상을 단숨에 국가적 경사로 되돌려버리는 내부 단속용 멘트에 더 가깝다. 글로벌 오빠는 올드 미디어 덕분에 졸지에 격하를 겪어 내수용 ‘동네 오빠’가 돼버린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시작을 얼추 비슷하게 한 탓이었을까. 올림픽의 선수들과 비슷한 운명처럼 보인다. 귀국을 늦추라는 촌스러운 작전 지시를 접하는 선수나 ‘국격’ 운운에 파묻혀버린 싸이의 운명은 매한가지다. 그들의 성공이 내수용으로 급전직하되자 그들은 갑자기 수단으로 바뀐다. &amp;lt;강남 스타일&amp;gt;의 빠른 비트와 선수들의 환한 웃음은 증발의 도구가 되고 만다. 흥과 웃음이 비치는 비율만큼 컨택터스, 녹조 강물, 뇌물 공천은 그 모습을 줄여간다. 싸이와 선수들 본인은 억울하겠지만 그들은 졸지에 추한 것을 숨기는 알리바이가 되는 운명을 맞는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싸이의 뮤직비디오에는 눈여겨볼 점이 많기는 하다. 전문가들도 놀라는 음악영상을 구사하고 있다. 한여름의 폭염을 날려버릴 만큼 시원한 음향이기도 하다. 문화평론가들이 들여다볼 패러디도 여기저기 구겨져 있다. 하지만 그를 꼼꼼히 분석하며 호사를 부릴 여유는 없다. 싸이가 국내용 알리바이로 수단화되며 증발시켜버리는 것이 너무 많다. 그의 음악적·영상적 감각도 한국 내 강남식 개발, 치부, 불의를 훌러덩 증발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 강남 스타일의 존재 여부, 강북 스타일과의 차이를 질문하고 답하는 일도 사치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그 질문들은 싸이가 알리바이가 되었음을 숨기는 맥거핀일 뿐이다. 싸이는 글로벌하고 섹시하고 신났으나 그를 내부 단속용으로 활용한 올드 미디어 덕에 더러운 것을 껴안고 가는 ‘강남 휘발유’가 되고 말았다. 싸이는 그냥 싸이일 뿐인데도 말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원용진 서강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부&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lt;hr /&gt;&lt;/b&gt;&lt;/div&gt;&lt;div&gt;&lt;b&gt;&lt;br /&gt;&lt;/b&gt;&lt;/div&gt;&lt;div&gt;&lt;b&gt;저렴한 화면 생각 없는 쾌락&amp;nbsp;&lt;/b&gt;&lt;/div&gt;&lt;div&gt;&lt;b&gt;클럽 코드가 숨겨진 강남 스타일… ‘진정한 무엇’에서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lt;/b&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던 중, 깜짝 놀랐다. 미국의 유명 래퍼 티페인(T-Pain)이 싸이의 &amp;lt;강남 스타일&amp;gt; 가사를 트위터에 써놓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검색해보니, 외국인들이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매우 재미있어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 연이어 나온다. 가히 폭발적인 인기라고 할 만하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외국에서의 인기는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때문일 것이다. 트위터를 통해 &amp;lt;강남 스타일&amp;gt;을 미국에서 유행시키는 데 역할을 한 티페인은 ‘엽기’로 표현될 수 있는 스타일의 유머를 좋아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의 코미디 힙합 트리오 더론리아일랜드(The Lonely Island)의 &amp;lt;아임 온 어 보트&amp;gt;(I’m on a boat)의 녹음에 참여하고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한 전력을 보면 그의 취향이 명백해진다. 외국인들의 환호는 이런 취향에 대한 선호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한 서술은 아닐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렇다면 국내에서의 인기 비결은 뭘까? 이 점에 대해 생각하려면 이 노래 전체가 일종의 ‘맥거핀’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이 노래를 들을 때 정숙함과 팜므파탈적 매력이 공존하는 여성을 갈구하며 동시에 남성인 자신도 그런 매력을 갖추고 있다는 식의 가사에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곡의 구성 자체가 일종의 클럽뮤직에 특화된 형태이고, 가사 내용의 핵심도 눈치 볼 것 없이 그냥 만나서 즐겁게 놀자는 얘기인 것이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 역시 오직 ‘저렴해 보이는’ 화면으로만 구성돼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되풀이되는 ‘오빤 강남 스타일!’이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이것 역시 클럽에 대한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사람들은 주로 홍익대 앞, 이태원, 강남의 클럽에서 노는데 지역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홍대 앞 클럽들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해 20대 초·중반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반면, 강남의 클럽에서는 외제 차를 몰고 온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까지의 남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빠’가 ‘홍대 스타일’이 아니고 ‘강남 스타일’인 이유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즉, 이 노래는 ‘생각이 없는’ 노래다. 여기에 대한 대중의 환호는 이 직전까지 임재범을 재발견하게 해준 &amp;lt;나는 가수다&amp;gt;나 버스커버스커의 인기를 만들어낸 &amp;lt;슈퍼스타 K&amp;gt; 등을 통해 ‘진정한’ 가수를 찾는 것에 쏠리던 대중적 관심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조금 성급하게 말하자면, 대중은 ‘진정한 무엇’을 찾다가 그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것도 없는 것’에 열광하다 이것이 지겨워지면 다시 ‘진정한 무엇’을 찾는다. 프로그래밍 용어로 표현하면, ‘널’(Null)과 ‘0’ 사이에서의 방황이다. 이 방황을 통해 우리는 또다시 ‘보편’의 부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김민하 정치평론가&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되었습니다. :&amp;nbsp;&lt;a href=&quot;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2708.html&quot;&gt;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2708.html&lt;/a&gt;&lt;/div&gt;</description>
		<category>Culture</category>		<category>싸이</category><category>강남스타일</category><category>티페인</category>			<dc:creator>이상한모자</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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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eirdhat.net/xe/culture/52098#comment</comments>			<pubDate>Fri, 17 Aug 2012 14:46:2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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