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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노회찬, 조선일보, 그리고 한국사회

조회 수 4105 추천 수 0 2010.03.12 13:36:08

미디어스에 2회 연재되었습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56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57

긴 글이라도 블로그엔 그냥 붙여서 올릴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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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조선일보 창간행사에 참여한 사실을 두고
뜨거운 설전이 오고가고 있다. 비판의 논지는 명확하고, 방어의 논리는
취약하지만 전체적으론 팽팽하다. 노회찬 대표가 이에 관해 직접 해명하는 글을
올렸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논란은 단순히 어느 진보 정치인의
개인적 선택에 대한 호불호로 귀결되는 문제를 넘어서 '안티조선운동'이라고
하는 언론운동사의 중요한 길에 또 하나의 변곡점이자 새로운 활력으로
확장되는 것이 마땅 할 것이다. 이에 <미디어스>는 진보신당의 당원이자,
안티 조선운동의 혁혁(!)한 일원이었던 인터넷 논객 한윤형씨의 글을 2회에
걸쳐 싣는다. 많은 관심과 다양한 의견을 기대한다.


   
  ▲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오마이뉴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가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창간행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자 많은 진보신당 당원과 네티즌들이 그의 행보를 비판했다. 혹자는 참석행위 자체를 비판하였고, 다른 이들은 그가 조선일보 창간행사에서 건넨 덕담의 수위에 격분했다.


조선일보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노회찬의 행보는 그릇된 것인가? 진보정당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훼손할 만큼? 어떤 이들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이유의 근거로 그들은 “노회찬이 ‘안티조선 원칙’을 위반했다.”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런 논쟁은 2004년에도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정치인과 핵심 당직자들에 한해 조선일보 기고/인터뷰 거부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런데 막 국회의원 당선자가 된 노회찬이 조선일보의 초청을 수락하여 조선일보 기자들 앞에서 강의를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이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자 노회찬은 “노조에서 초청했기 때문에 간 것”이라 해명했다. 이 강의에서 노회찬은 조선일보의 보도행태를 비판하기에 앞서 스스로 조선일보의 30년 독자이며 (사실 한 명의 사회주의자가 ‘주류’의 시각을 알기 위해 그들의 신문을 보지 않았다면, 그건 게으른 일일 거다. 난 이 발화를 그렇게 이해한다.) 조선일보가 품질은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발화 역시 물의를 빚었다. ‘노회찬 덕담’의 기본적인 취지는 이번에도 비슷한 것 같다.


나는 ‘안티조선 원칙’으로 노회찬을 비판하는 데에는 회의적이다. 2004년 당시에도 민주노동당이 정한 규율은 기고/인터뷰 거부였지 강연이나 행사 참석은 아니었다. 원칙을 어겼다는 비판은 공표된 원칙에 한정시켜야 하며 감정적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2010년인 지금의 시점에서 2000년에서 2002년 사이의 시민사회의 활동으로 자유주의자와 좌파 사이에 성립했던 ‘안티조선 합의’가 유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오늘날엔 ‘조중동’을 구별하지 않는다. 촛불시위에서 촉발된 반조중동 운동, 그러니까 언소주나 진알시의 조중동 비판 논변들의 기원이 안티조선 운동으로 소급될 수 있다 하더라도, 안티조선 운동과 현재의 언론운동은 같지 않다. ‘안티조선 운동’과 ‘안티조중동 운동’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것은 안티조선 운동이 진행될 당시에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즉 오늘날의 언론운동은 안티조선 운동과 관련은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이 실패한 지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꽤나 중요한 부분이다. 간단하게 실천적으로 말하면, 조선일보를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와 분리시킬 수 있었을 때, 안티조선 운동의 논리는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리고 신문업계 점유율 20%가 조금 넘는 이 신문을 ‘배제’하는데 합의하는 것은,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를 활용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들은 신문업계 점유율 60%를 상회하는 메이저 신문들을 모두 거부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했다. 그러므로 조선일보와 중앙/동아를 구별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구별이 더 이상 힘든 정치적 국면에 처해 있다면, 문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60%를 배제하는 전술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한 새로운 물음이 제기되는 것은 아닐는지?


김대중 정부 시절의 ‘사상검증’인 최장집 사건에서 조선일보는 중앙, 동아와 뚜렷이 구별되었더랬다. 그것은 안티조선 운동을 위해 행운이었다. 하지만 참여정부 시절이나 이명박 정부 시절의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언론이라고 말하기는 무척 힘들다. 참여정부 시절의 ‘사상검증’인 송두율 사건에서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와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었는가? 오히려 송두율 사건에서 서글펐던 것은 소위 ‘우리편’이 흥해야 한다는 정치적 논리를 따라 송두율의 양심의 자유를 무시하고 그의 처신에 대한 훈수를 수시로 자행한 ‘진보언론’들의 모습이었다. 최장집이란 리트머스 시험지가 정교하게 골라낸 조선일보 vs 상식의 구도는, 그후의 역사에서 “도대체 한국 사회에 상식이란 게 있는가?”라는 개탄으로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일보만을 골라내어 모종의 행동을 취하자는 주장은, 더 이상 현실정합적이지 않다. 양보해서 생각하면 그런 주장을 한다 할지라도, 더 이상 왕년의 안티조선 운동의 논거로 그 주장을 변호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문제의 핵심은, 언론문제에 대한 원칙의 부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회찬의 행동은 비판받을 수 있다. 원칙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그건 노회찬이라는 ‘좋은’ 정치인이 조선일보라는 ‘나쁜’ 집단과 어울렸고, 그것이 노회찬을 물들게(?) 할 거라는 식의 초등학교 학우들의 인정투쟁적 접근에서만 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노회찬은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식견을 가진 정치인이다. 하지만 나는 2004년의 사건과 2010년의 사건에서 드러난 노회찬의 발화에서 언론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이 지나치게 순진하지 않은가 의심한다. 그리고 이건 노회찬이란 정치인의 개인역량에만 맡겨둘 문제가 아니다.


진보신당이라는 정치집단은, 한국 사회의 언론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고,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는가? 신문시장의 불공정거래에 대해 제도적으로 어떤 방책을 취할 것인가? 방송이나 인터넷언론의 윤리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가? 올바른 언론환경을 위한 언소주나 진알시 등 자발적 시민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고, 어떻게 연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나? 지극히 열악한 환경에서 분투하는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프레시안, 오마이뉴스와 같은 언론들과는 어떠한 상생전략을 가지고 있나? 그래도 진보신당 활동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나같은 당원도 이런 문제들에 대한 진보신당의 견해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진보신당이 아직 아무런 정책대안도, 심지어는 기본적인 원칙도 확립하지 못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이나 ‘개혁언론들의 민주당 편향성’이나 얘기해 온 것이 그간의 진보정당이었다. 말하자면 언론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식견은 없고, 언론이 우리 편을 안 들어준다는 징징거림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수준일진대, 네티즌들이 조선일보와 노회찬(혹은 진보신당)의 ‘유착’에 대해서 비난할 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뭔가 생각이 있어야 마타도어에 답변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래가지고서야 “조선일보 같은 나쁜 집단과 어울리다니 노회찬은 나쁜 사람이다!”라는 비난에 “그래도 노회찬은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답변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건 바람직한 소통의 방식도 아니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의 방식도 아니다.


사람들의 비판에 억울해 하기 이전에, 진보신당은 이런 총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진보신당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원칙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필요 이상의 비난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설령 다수의 비난이 있더라도 당원이나 지지자들이 정립된 논리로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없고 정치인 개인의 창의적 애드립에 모든 것을 맡겨 놓으니, 천하의 노회찬이라 하더라도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노회찬의 생각에 대하여


진보신당의 판단이 없었고 단지 개인의 의사였다면, 노회찬은 대체 왜 그 행사에 갔을까. 이건 당원의 입장에서 정말 궁금한 부분이다. ‘안티조선 합의’가 유효한지 유효 안 한지에 대한 고민은 나같은 사람이나 하는 거다. 정치인 노회찬은, 욕먹을 게 명백하고 얻을 것은 하나도 없는 행사에 나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나는 가령 사석에서 김연아가 못 생겼다고 주장할 권리는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짓을 해서 그 모임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것을 욕망할 리는 없다. 비유하자면 노회찬의 행동은 정말로 그런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논란 이후 올라온 “감사와 함께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의 해명서를 보면 각이 나온다.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저의 비서실장이 오해의 소지가 있고 특히 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조선일보 창간기념식 행사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을 때 저는 마은혁 판사 사건을 거론하며 그럼 오해의 소지가 있는 행사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조선일보의 논조가 옳은 것이냐며 되물었습니다. 생각이 달라도 의례적 차원에서 참석해달라는 조선일보의 초청취지와 마은혁 판사 사건 보도태도와의 모순도 거론했습니다. 그리고 마판사사건의 보도태도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라도 참석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이게 좀 구체적인 내용이라면, 원론적인 입장 표명도 있다.


“정당과 언론의 관계는 특수한 측면이 있는지라 서로 싸우고, 규탄하고, 비판하면서도 끊임없이 만나서 설득하고 토론하고 항의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래서 특정계기가 되면 언론사를 순회방문하고 기자들과도 끊임없이 간담회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정당의 대표나 역대 정권에서처럼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이 언론사의 창간기념일에 참석하는 것은 언론의 논조나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서 이뤄지는 의례적인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노회찬의 견해에 논리적으로 맞서지 못해 쩔쩔맸을 비서실장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이처럼 이 사건의 개요는, 정치적으로 볼 때는 도대체 가야할 이유가 없는 행사에 노회찬이 자신의 논리와 원칙을 밀어붙여 참석한 상황으로 정리될 수 있다.


노회찬의 견해는 바뀐 적이 없다. 아마 그는 과거 민주노동당이 수용했던 ‘안티조선 합의’에도 비판적이었던 것 같다. 2004년에 노회찬은 조선일보 기자들 앞에서 민주노동당과 조선일보의 관계에 대해 ‘부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평했었다. 민주노동당의 이론가였던 주대환 역시 “나는 지식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정치인이 성향이 다른 유권자와 악수하지 않을 수 없듯이, 언론을 가려서 만날 수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그런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노무현의 조선일보에 대한 강단있는 태도를 기억하지만,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전체가 조선일보를 보이코트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식인의 판단인가, 정치인의 판단인가

   
  ▲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오마이뉴스  

잠깐 노회찬의 견해를 위해 변명하자면, 나는 이 문제에 있어 지식인과 정치인이 꽤나 다르다고 생각한다. 지식인은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반면 정치인은 자신의 지향을 따르는 이들, 즉 사람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지식인에게 언론권력은 자신의 존재근거를 뒤틀어 버릴 수도 있는 어떤 막강한 것이다. 조선일보에 글을 쓸 때, 그는 마땅히 자신이 할 수 있는 말과 조선일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의 교집합 속에서 고민하게 된다.


문제는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 수구기득권 세력과 타협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차라리 조선일보 기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내부의 룰 속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종류의 ‘양심’도 사랑한다. 지식인의 사정이 더 나쁜 이유는 그가 조선일보를 위해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자신의 ‘말’이라 생각하고 독자들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오늘날 변희재가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기 때문인가? 더 핵심적인 것은, 그가 조선일보에 글을 오래 쓰게 되면서, 그만 글이 망가져 버렸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에서 제기한 ‘포탈권력론’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로 가져갈 당시에, 그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변희재는 조선일보에서 오래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논변을 유지(?)하면서 조선일보의 코드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오랜 노력의 결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오늘날 변희재의 그 괴악스러운 글들이다. 내 생각에, 조선일보와 유착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은 본질적으로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말을 통해 세상을 드러내는 ‘지식인’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왕년에 안티조선 운동을 했다는 ‘완장’은 지식인을 쉽게 비판하게 만드는가? 그러기는커녕 나는 단지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부정하는 듯 행동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종종 불편하다. 그런 행동들은 어쩌면 정치적으로는 유의미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의사소통 문화를 폭력적으로 바꾸고, 지식인들에게 정파의 성향에 따른 줄세우기를 강요하고, 그들을 좀더 소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되돌릴 방도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좌파지식인을 비판한 논변이 어떤 측면에서 유효했는지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딱 그 지점에서만 합당한 수위의 비판을 그 지식인에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된 논거는 지식인이라는 종자에 특수한 것이라, 정치인에게 잘 들어맞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는 노회찬이 조선일보와도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이건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나는 방금 지식인의 관점과 정치인의 관점이 다를 거라고 썼다. 여기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노회찬은 어쩌면 나는 정치인이므로, 지식인과는 다르게 이러저러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노라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에 대한 그러한 정교한 판단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지식인적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조선일보라도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 만일 정치적인 것이라면, 어째서 ‘정치인 노회찬’은 겨우 그 정치적 판단을 마치 대단한 원칙인 것 마냥 손해를 감수하면서 추진해야 하는가? 그게 노회찬 개인의 손해로 끝난다면 또 문제가 다르겠다. 지방선거 국면에, 더구나 민주노동당이나 국민참여당과 ‘진보’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을 해야 할 상황에서, ‘스타 정치인’ 노회찬의 행보는 지방선거를 위해 뛰는 수많은 진보신당의 주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노회찬이 정말로 조선일보가 주최한 행사참여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마은혁 판사 문제와 관련한 조선일보의 보도행태를 비판하고 싶었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그런 고민과 결정사항을 미리 진보신당 2만 당원과 3만 명이 넘는다는 그의 트위터 친구들에게 공개하는 것이었다. 퍼포먼스는 보도되어야 퍼포먼스이다. 조선일보에 그가 가면 어떻게 보도될 것인지는 뻔한데, 미리 그런 초보적인 ‘언론플레이’도 안 하고 갔다는 건 납득이 안 간다.


트위터는 왜 하시는가? 원칙으로만 본다면 정치인의 사생활이 아니라 정책을 보고 투표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 ‘진보’가 아닌가? 좌파적 비평의 관점에서라면 사생활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서로에 대한 도덕적 판결을 남발하는 이 시대의 조류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팝펀딩이란 것이 있다. 돈 빌리려는 사람이 자신의 사연을 말하면 다수 참여자가 스스로 판단해 소액대출해 주는 시스템이다. 이것은 투명한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다수의 평결을 용인하는 ‘사이버 민중주의’ 시대의 정서를 활용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제방식이다. 시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생각하는 진보주의자가 보기에, 이러한 시도들은 다소 불편할 수 있다.


그런데 트위터를 하는 욕망은 바로 이런 시대의 조류 안에 있다. 그러한 조류를 전적으로 환영하진 않을지라도, 우리는 각자의 사생활을 인터넷에서 투명하게 곁눈질하는 이 시대에 적응하고 유권자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해 새로운 매체에 합류한다. 비록 다수 대중의 도덕적 평결이 언제나 올바르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을 하나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정치’라고 부른다. 노회찬 대표의 트위터 활동은 분명 성공적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고민과 결정사항을 미리 ‘투명하게’ 공개하고 네티즌들의 여론을 살피는 것이 ‘트위터리안 노회찬’의 길은 아니었을까?  


조선일보가 보여주는 것은, ‘사회의 부재’


이 사건에서 노회찬의 행동에 대한 평가 이상으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물음이 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조선일보에 맞서는 우리들의 문제의 본질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조선일보는 노회찬을 왜 불렀는가?”라는 물음이다. 어떤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 가령 일부 민주노동당원들은, 진보신당이란 게 원래 국가보안법 및 수구세력의 논리와 유착하여 민주노동당을 비난하면서 생겨난 집단이니 노회찬과 조선일보가 쎄쎄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참여정부 지지자들은, 좌파라는 것들이 원래 극우파와 협잡하며 참여정부를 비난하고 대한민국을 말아먹은 게 지난 십년 간의 역사였으며 노회찬의 행동은 그 역사적 본질을 투명하게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노회찬과 조선일보의 코드가 실제로 통한다는 이런 마타도어를 걷어내고 생각해 보았을 때, 조선일보의 욕망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그것은 조선일보가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임을 열망한다는 것이며, 그 열망이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이란 정치적 공간에서의 ‘사회의 부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노회찬의 해명문에 따르면, 조선일보측은 노회찬 대표의 부친상에 문상을 왔고 여러 경로를 통해 끈덕지게 노회찬의 행사참여를 종용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조선일보 사주 가문은 좌파들에게도 존경받고 싶어 하는 거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실은 그들이 우파들에게도 존경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을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방식은 힘을 가진 이들에 대한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조선일보가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이고, 그것을 위해 말 뒤집기를 예사로 하는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은 어쩔 수 없다. 힘을 가진 이들에 대해, 우리는 그가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고, 지금 당장은 우리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존경’한다. 하지만 말을 다루는 이들에 대한 존경은 기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이들’에 의한 존경을 포함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는, 사실은 생각이 같은 이들에게도 존경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은 조선일보처럼 이권을 위해서 논리를 구성하는 경우에는, ‘생각이 같은’이란 말이 성립할 여지가 없다. 다만 있는 것은 같은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진 공범자들(!) 뿐이다.


조선일보가 노회찬에 대해 덕담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건, 이러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는 그 사회를 조직하는 룰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의해 구성된다. ‘합의’라 함은 생각이 다른 이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 합의 속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주는 이들은 서로에게 존중을 받을 것이다. 좌파를 학살하고 건국된 대한민국에선 물론 이런 전통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일보는 누구에게도 존중받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주의주장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극우 헤게모니’ 집단을 배제하고 건전한 보수와 진보가 소통을 통해 올바른 정치를 만들어나가자는 홍세화의 주장은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을 배제하고 우리끼리라도 그런 전통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나 한나라당을 혁명 같은 것을 통해 청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행동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한나라당은 국정운영을 위해서라면 소통을 해야 할 대상이다. 가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소통을 피하는 한나라당을 어떻게든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어떤 노력이었다. 대연정 제안은 한나라당을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한다. 한편 2002년 대선 당시 조선일보에 대한 노무현의 태도는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 행동을 모두 지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고민에 대해서도 이해를 해야 한다.

사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추방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합의가 필요하다. 안티조선 운동은 극우파를 배제한 좌우파의 합의를 꿈꾸었다. 하지만 어느 샌가 그 합의는 무너졌고, 참여정부는 혼자서 남을 배제하기 위해 스스로의 노선을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칭하는 객쩍은 농담을 해야 했다. “극우와 극좌는 통한다.”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을 일컬어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양쪽 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누구와도 합의하지 못했는데, (물론, 비유적인 말이다. 참여정부 시절엔 많은 합의가 있었다.) 그 ‘정상’의 룰이라는 것은 어떤 틀 위에 있단 말인가? 혼자서 ‘정상’의 룰을 만들기 위해 참여정부의 지지자들은 참여정부가 ‘진정한 보수’이면서 실은 ‘진정한 진보’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비유하자면 ‘사회’라는 아이를 낳기 위해 참여정부는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어야 했던 것이다. 안티조선 운동이 좌우파 연합을 통해 추진한 ‘상식’의 담론은 이렇게 참여정부 시절에 들어와 일종의 자폐적인 담론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참여정부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더라도, 결과는 그렇다.


우리는 조선일보를 사회의 바깥으로 추방하는 담론을 통해 사회를 구성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가능한 최소한의 사회의 룰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사실 두 개의 작업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같지 않은 주체를 통해, 서로의 역할을 알아보고 서로를 보완해 가면서 병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노회찬이, 조선일보와도 소통하는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진보신당 덩치로는 시민사회단체나 시민들과 함께 조선일보를 배제하는 담론에 머무는 쪽이 훨씬 깔끔한 역할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이한 역할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조선일보와 상종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는 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하루 이틀 안에 망할 것도 아니고, 우리가 내일 모레 한국 사회를 포기하고 이민을 갈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punky

2010.03.12 23:52:14
*.171.216.146

너무 글이 산만하네요. 왜 조선일보는 심상정한테 접근하지 않고 노회찬에게만 그렇게 접근했을까요? 전 그것도 흥미롭더군요. 노회찬 보다 심상정이 더 좌파근성이라서? 아님 우파쪽 인맥이 더 많아서? 암튼, 이번 건은 노회찬의 전략과 전술의 실패라고 봅니다.

유치한 악플러

2010.03.13 01:19:23
*.237.168.12

님은 쓸데없이 꼰대질이나 하지 말고 집에 가서 딸이나 한 번 잡는 게 현명한 전략적 선택일 듯 합니다.

눈팅

2010.03.13 10:42:32
*.185.8.189

그야 당연하죠. 노회찬이 현재 당대표니까요. 만약 심상정이 당대표였다면 심상정을 초청했겠죠. 조선일보에게 중요한 것은 진보정당대표라는 타이틀이지, 특정 개인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도, 이번 사건에서 노회찬 개인을 비판(비난)하는 것은 뭔가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아사다연아

2010.03.13 15:55:54
*.209.65.148

근데 왜 강기갑 대표는 초대 안했나요..?? 아님 초대했는데 강대표가 안간건가요..국참당 이재정 대표는 갔나요...??

다리미

2010.03.14 21:33:00
*.54.154.134

강기갑 대표와 이재정 대표도 당연히 초대했습니다. 물론 두 분 다 거절하셨습니다. 노회찬 대표는 자신이 가야만 하는 이유로 마은혁 판사 건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내 안의 조선일보를 돌아보라'는 일갈을 남기셨습니다. 씨발...

하뉴녕

2010.03.15 13:28:59
*.237.168.12

'내 안의 조선일보'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 조선일보의 방식을 답습한 '내 안의 조선일보'라기 보다는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생겨난 '사이버 민중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해선 최근에 글을 몇 편 썼습니다.) 하지만 그런 단순화된 규탄의 도식이 조선일보가 사람을 비판하는 방법과 비슷하다는 지적은, 사실 아닐까요?

아사다연아

2010.03.15 10:37:08
*.254.247.22

마은혁 판사껀은 참 웃긴 변명인데, 꼭 가야하는 자리에 오해를 무릅쓰고 방문한 마판사와, 가서는 안되는(?) 자리에 오해를 자초하며 간것을 동일시해서 변명이랍시고 했으니..노회찬이 넘 급당황한 나머지 어설피 둘러댄게.ㅋ

하뉴녕

2010.03.15 13:33:51
*.237.168.12

뭐가 웃긴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들연구소 후원의 밤이라는게, 한 판사에게 '꼭 가야하는 자리'라는 건 무슨 뜻인가요? ('가도 되는 자리'였다고 생각하고 그런 면에서 보수언론의 보도에 불만이 있습니다만.)

한 당파의 수장으로 그것에 적대적인 당파와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는 지지자들의 금제가 걸려 있는 노회찬과, 보편을 지향하는 국가권력의 권속으로 특정당파와 어울리면 안 된다는 국가의 요구를 받고 있는 마판사, 상황은 비슷하지 않은가요? 문제는 행사한번 참석하는 것이 '어울린다'라는 말에 합당한 행위인가 하는 물음이겠구요.

그냥 노회찬은 '좋은 사람'이니까 (보편-특수나 공사구분 논쟁 따위는 제끼고) 거기에 참석한 마판사는 '좋은' 선택을 한 거고, 조선일보는 '나쁜 언론'이니까 거기에 참석한 것은 (극우 헤게모니 극복방법이나 배제 전략의 유효성 따위의 논점은 제끼고) '나쁜' 선택을 한 거라는 말 밖에 더 되나요? 의사소통의 수준이 이 정도니까 우리가 조선일보가 1등신문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게지요...

아사다연아

2010.03.15 14:33:23
*.254.247.22

우선 조선일보가 1등신문인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한 듯 하여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원래 웃음코드란게 매우 개별적인 면이 있으니 님과 제가 꼭 동일 개그에 웃을 필욘없구요... 제가 웃게된 것은 노회찬이 마판사의 사건과 자신의 껀을 유사사건 으로 분류했다는 데 있겠죠. 우선 마판사가 노회찬 연구소 후원의밤에 가게 된 것이 한 달 전 쯤 연이어 치루게 된 마판사 부친상과 부인상에 노대표가 문상을 간 것 때문이죠. 둘의 관계가 20년 쯤 됐음에도 판사이후 에는 보지 못하다가 오랜만의 만남이었겠죠. 그리고 한달 뒤 노대표 후원의 밤이 있었고요. 이렇게 볼 때 물론 꼭가야 하는 자리는 아닐지라도 마판사는 답례형식의 선의를 가진 행동이었단 게 제 판단입죠. 그런데 노대표의 변명을 보면 두개의 사건은 단지 오해받을 수 있는 표면상의 유사점 이란 이유를 끌어들여 동일사건 으로 분류해 버리더란 말이죠. 더구나 오해받을 자리를 거부하면 조선일보 논조가 맞는 거 아니냐고 주장했다네요. 그러니까 노대표 말대로면 조선일보 논조를 깨기위해 오해를 무릅쓰고 간거고 그로 인해 마판사의 행위도 옳았음을 온 몸으로 증명하겠다 정도 되겠네요. 이렇게 놓고 볼 때 님과 제 웃음코드가 갈라지는 지점이 나타납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웃음코드는 좀 개별적 이므로 님과 제가 이쯤에서 각자의 웃음코드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럼 전 이만 이쪽으로...

하뉴녕

2010.03.15 15:32:49
*.49.65.16

흠 처음과 말씀이 다르시네요. '꼭 가야 하는 자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면 저도 위와 같이 대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사태설명을 해봤자 "어쨌든 판사로서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라는 말만 뇌까리면 되는 것이 마판사를 비판하는 쪽이었잖아요? 의사소통 수준 운운은 비슷한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마은혁 판사 건과 관련한 노대표의 해명발언이 진실인지 아니면 사후정당화인지 제가 알 도리는 없습니다. 저는 알 도리가 없는 일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그리고 하나의 행동에 묻어있는 개인의 심리가 그리 깔끔하게 판단된다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그래서 저는 마은혁 판사 건과 관련해 조선일보 90주년 행사 참석 및 덕담을 '퍼포먼스'처럼 강변하는 노회찬 대표의 입장에 대해, 만일 퍼포먼스가 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언론플레이를 해야 했던 게 아니었느냐고 지적했던 겁니다. 그 이상의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구요.


사실 노회찬의 행동을 구성한 세계관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논점은 '정치인이 특정 언론사와 상종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라는 거겠죠. 2004년의 발언과 2010년의 발언을 비교하며 제가 짚어본 것도 그 부분이겠구요. 마판사 문제는 어떤 부분에선 지엽이고 이쪽이 논의해야 할 지점인데 그 전에 웃고 계시니 제가 공감하지 못했던 거지요. 논의도 해보기 전에 "너희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웃는 심리 뒤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요?


저는 '여론재판'에 대응하는 개인들의 변명이 얼마나 적절한지 부적절한지를 꼬치꼬치 따져서 웃음을 터트릴만큼 가학적인 취향이 아니라서요. 웃으시는 님을 웃으면서 보내드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만 총총.

고양이

2010.03.19 07:24:09
*.140.136.145

전 딴것보다 님의 닉네임이 쌍두괴물이라는 점에서 웃게 되네요 ^^(정치적인 악의는 전혀 없습니다. 웃음코드에요 웃음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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