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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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영의 노래와 콘서트를 기획한 이들에게 박수를 쳐줘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한다. 이택광의 지적처럼, 유권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한방'으로 이루어진 허경영의 공약들은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파시즘적인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인터뷰는 "허경영으로 표상되는그 파시즘적 열망을 얼마든지 희화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허경영 후보는 한국의 부르주아계급에게 너무도 즐거운 '안전한' 광대"라고 이택광은 진단한다. (무례한 복음, p132) 달리 말하자면 허경영을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한 우리는 한국에 적어도 파시즘이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진단은 이제 과거형이 될 지도 모른다. 어떤 문화컨텐츠 생산자들이 그런 허경영을 데려다가 안전하지 않은 진짜 광대로 만들어 버렸다. 콜 미에서 허경영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물론 그건 우리가 허경영에게 언제나 듣던 소리이긴 하지만, 음악으로 울려퍼질 때의 그의 공약은 이제 실현되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허경영은 정말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음악을 통해 전해지는 허경영의 즐거움은 그에 대비되는 전혀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정치인을 규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인식은 씁쓸하다.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2003년의 문화계에선 권영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2002년과 2004년,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승리 사이에 덤으로 잠깐 열렸던 좌파 정치의 기회가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거다.
더구나 콘서트 포스터를 보게 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수익금을 용산 참사 유가족에게 기부한다는 선언은 한국사회의 정치가 손을 내밀지 못하는 곳에 허경영은 손을 내밀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좌파정치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부르주아 대의정치 자체의 무능이 폭로된 꼴이다. 이것은 아마도 의도된 조롱일 것이다. 이쯤되면 누가 누구를 보며 웃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벌거벗은 것은 허경영일까, 아니면 우리 모두일까?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허경영일까, 아니면 우리 모두일까? 씁쓸함을 느끼면서 공연기획자들에게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