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또 못 알아먹고 조전장관님 등등 지멋대로 얘기하는데, 다들 이준석의 지론에는 관심이 없고 쟤는 왜 어그로를 자꾸 끌까 이 생각만 하니까 이 염병 하게 된다.
고담시 경찰이 무능하고 부패해서 악당을 못 잡고 오히려 악당들에게 호구를 잡히는데, 뜻있는 짐 고든 등이 나서서 허공에다가 불을 켜갖고 배트맨을 불러서 간신히 악당들을 때려잡고 또 부패한 경찰들 솎아내고 해서 고담시 치안을 바로잡는다 이런 얘기 아니냐. 그니까 이준석은 윤석열이 와서 무능 부패의 국힘을 개선해갖고 정권교체를 해야 되는데, 오히려 윤석열이 무능부패 경찰의 우두머리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거다. 윤석열이 사형집행인이 됐다 이게 아니고…
배트맨 마니아로서 한 마디 덧붙이면.
첫째, 배트맨은 윤석열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아니고 오히려 법치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재적 권력을 활용해 치안을 바로잡는다.
둘째, 조커는 한계선을 넘는 배트맨이 등장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한 빌런이다.
윤석열이 비정상을 바로잡는 정상화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정상을 자처하는 배트맨이라면 그걸 뛰어넘는 더 엄청난 비정상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거고… 이재명이 조커라면 윤석열 이전에 이미 우리는 배트맨의 등장을 용인한 것이 되는 거고…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안 맞는 비유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안 맞는 비유 자체가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 그 자체를 드러낸다.
여기서 교양 시간… 김민하 평론가의 영화 조커에 대한 감상평을 참조하시오.
https://www.newsmin.co.kr/news/42677/
그냥 또 하면 안 보니까 핵심만 인용…
이런 점에서 영화 ‘조커’는 대중투쟁을 결코 호의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거리로 뛰쳐나온 광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에 항의하고 있으며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 그렇다. 주인공의 살인이 기득권에 대한 복수로 받아들여지는 맥락도 알 수 없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웨인 일가 앞을 지나는 시위대의 피켓에는 ‘RESIST(저항하다)’라는 문구가 거꾸로 적혀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영화 제목과 주인공이 ‘조커’이므로 배트맨이 나설 수밖에 없다. 시위대에 총격을 당해 쓰러진 웨인 부부의 사이에 어린 브루스 웨인의 실루엣이 비치는 장면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미래의 배트맨이 어떤 의미의 활동을 하게 될지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트맨 서사에서 ‘조커’라는 악당은 대개 배트맨의 활동으로 만들어 진다. 뭔가 좋은 의지를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다 오히려 악을 키우게 된다는 클리셰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영화에 등장하는 조커의 “You complete me(니가 날 완성시켜)”라는 대사는 이 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팀 버튼의 배트맨 영화에선 조커가 되기 전의 잭 네이피어가 웨인 부부를 살해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가 조커가 됐다는 사실을 배트맨이 알게 되는 것은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간 시점이다. 즉, 여기서도 배트맨의 자경단 활동은 범죄자로부터 부모가 살해당했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지 조커의 현실적 위협이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영화 ‘조커’에서는 명확하게 조커라는 사회적 문제가 배트맨 활동의 원인이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배트맨은 무엇을 해야 할까? 팀 버튼 영화에서 배트맨은 악질 범죄자를 추적하는 탐정에 불과하다. ‘배트맨 리턴즈’에서 사건의 진정한 원인인 자본가에게 복수를 하는 주체가 체제에 무관심한 배트맨이 아닌, 체제의 직접적 피해자인 캣우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에서 배트맨은 초법적 수단을 동원해 도시를 통치하는 권력자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 ‘조커’의 광대들은 이제 사회적 문제이다. 때문에 ‘조커’의 배트맨은 후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서사는 포퓰리즘에 대한 대안으로 엘리트주의의 통치를 요구하고, 다시 엘리트주의의 부패와 사익추구를 해결하기 위해 포퓰리즘을 호출하는 현실 정치의 기만성을 확인하게 한다. 배트맨이 조커를 만들고, 다시 조커가 배트맨을 만드는 일의 연속이 되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대안적 정치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 ‘조커’가 바라보는 곳은 이 방향이 아니다. ‘조커’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배트맨이라는 초법적 권력의 불가피성 같다. ‘Zorro, The Gay Blade’라는 장난 같은 얘기는 그만하고 엘리트 권력의 민낯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탈출구 없는 미국 정치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이단아적 권력자의 맞수로 민주당이 고려하는 인물이 조 바이든에서 엘리자베스 워런으로 요동치는 현상이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조커’가 국내에서도 흥행을 거두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게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