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과 이준석
김웅은 컷오프 된다고 봤다. 당내에서 이준석 김웅은 한세트로 봤다. 김은혜는 결이 또 다르다. 밖에서는 셋을 묶지만 안에서는 아니다.
여튼 변화를 향한 열망 어쩌구 하는 남들 다 하는 얘긴 굳이 안 한다. 예비경선 숫자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이준석 대표는 탄생할 것이다. 언론은 나경원 주호영 등의 단일화를 말하는데 그냥은 쉽지 않다. 그 판을 만들 압력을 동원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어려울 것이다.
후보 간 단일화가 안 돼도 예비경선의 숫자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변화를 향한 어쩌구 그거는 상수니까 넘어가고… 구심이 사라진 계파지만 과거의 네트워크나 각자의 영향력은 남아있다. 나경원 주호영 이런 사람들은 보스가 아니다. 후보단일화가 안돼도 각 소그룹별 지지 흐름은 이준석 견제를 위한 전략적 판단 등을 근거로 변화할 수 있다. 그래서 박빙 싸움이 아닐까 한다.
물어야 할 건 이준석이 보수의 변화 맞냐는 거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태도인데, 태도는 기성세대와 다른 면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이념을 봐야 한다. 한국 보수정치는 국가주의-안보시장주의 보수와 시장원리주의 보수의 결합인데 지금까지 이준석의 주장을 종합하면 후자이다. 할당제 없애고 컴퓨터능력활용 등 공천 자격시험보고… 엑기스를 뽑아서 보면 무한경쟁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세계관이다. 이건 지금까지 없었던 보수가 아니다.
유승민부터 김종인까지, 그동안 보수의 변화를 추동하리라 여겼던 사람들은 대개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뭐 이런 축에 들어간다. 유승민은 할당제 폐지 반대다. 김종인이 언급한 데이비드 캐머런은 보수를 중도화 했는데, 그 수단 중 하나는 정치 활동 내내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정치 참여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하는 거였다.
놀랍게도 김웅이 이 동네에선 그나마 이쪽에 가깝다. 만약에 이준석 김웅이 둘 다 본선 진출해서 단일화 해야 되는 국면이 왔으면 매끄럽게 안 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의견을 서로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유승민계니 뭐니 하는데, 그런 흐름이 이 둘을 지지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통제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특히 이준석에 대해선 불안할 것이다. 그래서 단일화 국면은 오히려 잡음이 나오는 그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차라리 될 사람 몰아주는 걸로 끝내자고 봤을 수 있다. 컷오프란 형식을 통해 둘이 강제로 조용한 단일화?된 배경 중 하나가 이거라고 본다.
여튼 이준석 대표의 탄생은 보수정치의 역사로 보면 또 하나의 과거 회귀일 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걸 변화라고 하는가? 문제의 본질이 거기에 있다. ‘변화’란 개념은 현재 상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현재 상태는 ‘내가 몰락하는 세상’이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나’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기대가 충족된다면 ‘나’는 오늘은 따뜻한 보수를 내일은 할당제 폐지를 주장하고 용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는>>> 촛불정신과 이준석에 대한 기대가 뫼비우스띠의 앞뒷면으로 연결돼있는 거다. 그래서 이 정치에선 앞과 뒤가 교차하는 뫼비우스적 운동의 경로를 따라가는 일을 ‘변화’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