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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정치 사회 현안

하이퍼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

2025년 10월 25일 by 이상한 모자

외국, 그러니까 주로 서구에서 민주주의니 능력주의니 하는 사람들 얘기를 잘 들어보면 이런 구도의 얘기를 많이 한다. 능력주의 세계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체제로부터 소외된 것에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하여 자기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이단아적 지도자를 찾게 됐고 그게 트럼프니 하는 극우포퓰리스트 집권으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너무 거칠게 요약한 것일 수도 있는데, 뭐 하여간 이런 구도다. 요즘 한겨레신문에 나온 몇몇 분들도 이런 구도의 얘기를 했다.

근데 이게 미국 등 서구 모델에는 맞는 설명일 수 있지만 한국에는 꼭 들어 맞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옛날부터 이런 저런 형태로 했는데, 최근 유튜브에서는 이 얘기를 ‘하이퍼 능력주의’라는, 내 나름의 유머를 섞은 명칭으로 몇 차례 설명하기도 하였다. 하이퍼화… 를 염두에 두고…

그게 뭐냐면, 이런 거다. 한국 능력주의의 낙오자는 서구와 같은 형태로 모욕감을 느끼거나 분노하지 않는다(느끼더라도 다른 방식이다… 인데 제가 서구 전문가들의 입장을  오독한 것일 수 있으니 이해바란다). 오히려 한국 능력주의에서 낙오자는 자신이 낙오된 상황 자체를 더욱 강화되었으면서도 왜곡된, (즉 하이퍼화 된…!) 능력주의적 세계관으로 포섭한다. 그것은 뭐냐, 낙오와 배제를 능력주의 질서 자체의 부당함이 아니라 능력주의 질서 안에서의 부당함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가령 그것은… 나보다 위에 있는 녀석은 나보다 진정으로 실력이 좋아서 내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 부당한 수단을 썼든지 아니면 이 사회의 기준이 잘못됐든지 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진정한 능력주의적 기준을 공정하게 적용한다면 나는 50등이 아니고 최소한 15등은 하는 것이 맞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내 위에 있는 녀석이 부당하게 그 위치에 있다는 증거를 끊임없이 찾아내야 한다. 나보다 밑에 있는 녀석은? 그럴만해서 밑에 있는 것이다. 이 밑에 있는 녀석이 부당한 수단(가령 아빠찬스)을 쓰거나 잘못된 기준(가령 할당제)을 갖고 와서 우기는 걸로 내 등수를 위협한다면?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 위에 있는 이가 트집 잡을 게 하나도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정이다. 인정! 이 서사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견결한 능력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정할 것은 또 인정한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신실한 능력주의자가 맞느냐? 그건 아니다. 이들은 종종 어차피 뭔가 부당하다고 주장해봐야 소용없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냥 인정을 한다. 가령 이재용. 상대가 이재용인데 아빠찬스라는 둥 할 거냐? 그게 무슨 실익이 있냐? 이재용이 아빠찬스를 써서 회장이 됐으므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무 실익이 없다. 따라서 이재용은 인정한다.

이러한 양상은 자신이 ‘부당한 기득권’의 위치를 차지할 기회가 생겼을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령 나보다 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그가 능력주의 질서 안에서 부당하게 경쟁의 우위를 점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내가 부당한 수단을 써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만약 신실한 능력주의자라면 이런 기회는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한 기회를 움켜 쥔다. 아빠찬스를 쓰면 15등이 아니라 5등이 될 수 있다? 무조건 해야지 임마! 다른 애들도 다 하는데! 꼬우면 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그리하여, 내가 볼 적에 한국에 만연한 이러한 하이퍼-능력주의는 위에 대하여 ‘부당한 수단 혹은 잘못된 사회적 기준에 의하여 지위를 획득한 위선적 엘리트’라는 반대해야 할 대상을 쉽게 상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과, 아래에 대하여 ‘너는 능력이 없으므로 그에 맞는 대접을 받아야 하고 그 이상을 바라면 안 된다’고 한다는 점에서 혐오 즉 극우적 세계관과 쉽게 결합할 수 있다. 이걸 해내는 정치를 한 마디로 압축한 슬로건이 ‘공정과 상식’이며, 윤석열이 당선된 대선 전후의 보수는 그러한 방식으로 유권자를 조직-동원하는 정치(내가 볼 때는 한국형 극우포퓰리즘)를 구사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정치로 조직된 유권자의 목표는 당연히 극우 이념의 관철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위의 상승 및 탈락 방지이다. 이 지위 상승 욕구와 상실 불안을 극우와 연결시키는 수단, 매커니즘이 극우포퓰리즘이다. 이준석이 만든(그가 그렇게 주장하므로) 윤석열의 승리는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경쟁, 극우 포퓰리즘, 극우주의, 능력주의

민주당에 화가 나면 뭐든지 해도 되나

2025년 10월 22일 by 이상한 모자

이런 글에 일일이 화를 내는 것도 이제 지친다.

https://www.chosun.com/opinion/chosun_column/2025/10/21/IMU5ZRBWFVEADEVXTQTIRPSIQ4/

그런데 쓴 사람이 그래놔서 한 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거 쓴 분은 남이 자신을 비판하면 자기가 맞는 얘기를 해서 비난을 받는다고 보통은 생각을 하니 생각을 고쳐 먹으리라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슷한 스탠스인 다른 사람들이 정신을 좀 차렸으면 하는 생각에 기록을 남긴다.

얼마 전 다른 운동권 분들과의 티타임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 이대남 이런 얘기하면 극우 낙인찍기 하지 말라는 얘기만 끈질기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난다… 거기서 내가 그랬다. 그게 결국 극우담론이 민주당에 정파적 이익을 안긴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아니냐… 즉, 이런 사람들은 세상만사 판단기준이 민주당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라는 점에서 그들이 그렇게도 미워하는 민주당 강성 지지층과 별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제가 쓴 저쪽이 싫은 책을 읽어보면 이해하시겠지만, 상대가 싫어서 선택을 하거나 행동을 했다고 하는 거는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일반 문법이다. 운동권들도 잘 생각해봐라. 뭔가에 반대하는 자신의 포지션이 먼저 있고 그걸 정당화 하기 위해 이념이든 이론이든 동원하는 게 먼저였지, 태어날 때부터 레선생님 이름 마빡에 새기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윤석열이든 한동훈이든 장동혁이든 이재명이나 민주당을 막기 위해 뭔가를 하거나 했다고 말하는 거는 다 마찬가지란 거다. 그렇게 반대하는 포지션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즉 어디까지 허용을 할 거냐가 문제인 거지…

현대 정치에서 극우정치의 문제는 이제 거의 극우-포퓰리즘의 문제로서 다뤄지고 있다. 극우정치는 이제 과거처럼 극우 이데올로그를 가두리 양식장에 가둬 놓고 상대를 안 해주는 것으로만 상대할 수 없다. 극우정치는 이미 집권을 했거나, 집권을 노리고 있다. 전세계가 같은 양상이다. 극우정치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현대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의 파훼법(내 표현법으로는 ‘해킹’이다)을 발견 하였기 때문이다. 그 공략법은 포퓰리즘과 결합하는 것이며, 그게 극우-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의 정의에 대해서는 이전 메모에서 다뤘으니 모르겠으면 찾아 보시고, 그러한 정의가 현실 정치에서 어떤 문법의 구현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바로 ‘반대의 정치’로 나타난다. 포퓰리즘을 압축하면 ‘엘리트를 반대한다’인데, 여기서 ‘엘리트’는 지금이 대안적 사실의 세계인 바 지 마음대로 구성하면 되는 것이므로 결국 ‘반대한다’가 남는 것이다. 여기서 반대의 대상인 ‘엘리트’가 어떻게 대안적으로(?) 구성되느냐는 ‘반대해야 할 개념의 사슬’에 대한 메모를 찾아봐라.

이게 그냥 포퓰리즘이 아니라 극우-포퓰리즘인 이유는 그 포퓰리즘적 접근의 결과가 극우정치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즉, 앞서 개념으로 하면 반대의 결과로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가 그 정치의 성격을 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구의 기준으로 하자면, 엘리트가 싫다고 인종차별 담론에 기대서야 되겠는가?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싫다고 내란을 정당화해서 되겠나? 민주당이 싫다며 윤석열 구속에 항의한다며 서부지법을 때려 부수면 되겠나? 도대체 이걸 말로 해야되나?

일관된 이념을 갖추지 않으면 극우도 극좌가 아니라는 주장은 현재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그렇게 따지면 프랑스에서 마린 르 펜의 당이 지지를 얻는 것은 극우적 현상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도 극우정치의 결과물이 아니다. 마린 르 펜이든 트럼프든 극우지도자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과거엔 진보도 지지하고 리버럴도 지지하고 했던 이들이다. 이런 기준이면 지구상에 유의미한 극우정치는 없다. 다들 기득권이 싫어서 일시적으로 탈선한 결과를 일으켰을 뿐이다. 즉, 아무도 아프지 않은데 지구 정치는 병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보통 돌팔이라고 한다.

극우정치를 지지하는 한 개인을 분자 단위로 쪼개서 분석할 수 있다면, 극우 극좌 진보 보수가 섞여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념 농도를 측정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극우정치의 문제는 유권자를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하고 동원하며 이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내가 일전에도 이 나라에 진정한 극우 유권자가 몇 퍼센트인지를 따지고 이런 거는 크게 의미 없다고 쓴 거다.

오히려 ‘기득권을 반대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여기까지는 해도 돼’라는 건 오늘날 극우-포퓰리즘이 가장 선호하는 자기 변명의 논리다. 극우정치에 동력을 제공하는 극우정치의 지지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항변이 ‘내가 왜 극우냐’는 거다. ‘나는 여성혐오를 하는 게 아니다! 단지 위선적인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것 뿐이다!’ 앞서 글은 정확히 그런 기준에 들어 맞는다는 점에서 극우-포퓰리즘에 일조하는 논리를 보여준다. 이러면 글 쓴 사람은 ‘허~ 이제는 평생을~ 노동운동에 바친~ 나까지 극우주의자라네요~’라고 하겠지만, 다시 강조하는데 개인이 극우주의자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극우정치가 너님들이라는 정치적 자원을 ‘반대하는 것에 불과’라는 명분으로 어떻게 동원하고 있는지를 보란 말이다.

오히려 이 글은 본인 행보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것이 아닌가? 내가 한 일은 민주당의 행태에 화가 나서 한 일일 뿐이다!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했었다. 전략적으로 민주당하고 협력하는 건 된다면서 왜 국민의힘하고 협력하는 건 안되냐! 뭐 그 시점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나 윤석열이 내란으로 간 다음에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되었다. 그런 명분으로 윤석열 정권과 뭘 한 사람들은 최소한 사과든 입장표명이든 뭔가 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일보에다가 이딴 똥글이나 쓰는 게 아니고…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 포퓰리즘

극우-포퓰리즘 이라니깐

2025년 10월 5일 by 이상한 모자

글을 죽 읽으면서 답답한 얘기를 많이 본다. 극우와 극우가 아닌 것을 구분한 후 ‘진정한 극우’를 격리해 안도감을 가지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극우-포퓰리즘은 그런 게 아니라 극우가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방법론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것에 가깝다. 분류가 아니라 매커니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백신과 치료제가 있을 때에는 어떤 바이러스든 다들 안심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바이러스는 격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등장하고 오미크론 등의 변이를 거쳤을 때, 만일 바이러스들에게 자의식이 있었다면 모두 무릎을 쳤을 것이다. 인간의 경계심을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하면서 전파력은 극대화 할 수 있는, 그러면서 끝없는 변이를 통해 백신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극우가 포퓰리즘과의 결합을 통해 당당하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보수정치는 굳이 체면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터득했다. 정상적인(?) 보수정치와 극우-포퓰리즘 간의 경계는 이제 희미해졌다. 한동훈과 장동혁을 비교해보라. ‘극우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전략은 적나라한 혐오적 내용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실제 상층 정치의 동학이라는 측면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직시하고 분석하고 전면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모든 것은 유행이므로, 극우-포퓰리즘의 시대도 이렇게 버티다 보면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장은 무엇인가? 극우-포퓰리즘의 동력은 곧 포퓰리즘의 구도, ‘엘리트 대 다수 대중’이라는 구도에서 ‘다수 대중’의 지위를 극우정치가 자칭하면서 생겨났다. 많은 사람들이 극우-포퓰리즘 비판을 하면 ‘그래서 대안은 엘리트주의라는 거지?’라는 표정을 짓는다. 맨날 그러니까 내가 사람들이 남의 말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글에다가 이렇게 쓴 거 아닌가?

물론 이재명 정권이 여론조사상 높은 지지를 얻으며 주류로서 통치 논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찾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검찰개혁에 대한 대통령실과 여당 사이의 긴장은 이 점을 드러낸다. 문제는 이 구도가 ‘엘리트주의 대 포퓰리즘’의 대결을 답습한다는 데 있다. 이 구도에서 통치를 책임지는 세력은 결국 ‘부패한 기득권’의 혐의를 뒤집어씀으로써 장기적으로 극우 포퓰리즘의 먹잇감이 돼왔기 때문이다.

사실 포퓰리즘이 상정하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관철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됐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게 바람직한 결말로 가는 유일한 경우는 앞서 상정한 노골적 권위주의에 기대는 외설적 ‘국가 주권’의 실현이 아니라 지금과 완전히 다른 대안 체제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 즉 ‘시민/인민 주권’(장석준) 구현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선택지를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시민/인민 주권’의 자리를 메꾸는 것은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논란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코스피 5000 시대를 갈구하는 조직된 소비자-투자자 정신이다. 진정한 위기는 여기에 잠복해 있는 게 아닐까?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7991.html

여기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정치 개혁이 민주적 주체의 형성 또는 변화와 결코 무관치 않다는 사실이다. 즉, 오늘날 정치를 바꾸고 싶다면 참여와 책임에 기반하는 민주주의를 더 심화하고 실질화해야 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우리 정치의 갈등선은 ‘통치-엘리트 대 무책임한 포퓰리즘 대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삼각구도 사이에 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은 통치-엘리트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의 대립 구도만 눈에 보인다. 오히려 그 사실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8069.html

위의 글은 9월 11일에, 아래의 글은 9월 25일에 인터넷 상에 나간 것으로 되어 있다. 앞의 글에 나오는 ‘장석준’ 대목은 아래 글의 대목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신인민전선과 국민결집 모두 그 근거를 ‘주권’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다만 ‘주권’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국민결집은 미국 트럼프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가’ 주권을 외치며, ‘순수한 프랑스인’의 의지를 온전히 대변하는 강한 국가가 개입하기만 하면 기성 정치세력들이 만들어놓은 난장판이 해결될 것이라 장담한다. 반면 급진좌파 장뤼크 멜랑숑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인민전선은 ‘시민/인민’ 주권을 주창하며, 민주주의에 충실한 정부가 부자 증세 등을 과감히 추진한다면 긴축과는 다른 방향에서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여기에서 ‘주권’이란 결국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구축된 낡고 단단한 ‘경제’의 세계에 대한 극적인 개입을 뜻한다. 극우파는 트럼프 정부가 이미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 개입을 실현하려 하고, 좌파는 신인민전선을 지지하는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등이 ‘민주적 사회주의’라 칭한 또 다른 방향에서 개입이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당장 총선이 다시 실시될 경우, 세 흐름 중 어느 쪽이 앞서 나갈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프랑스 정치의 주된 대립 선이 이미 마크롱 블록과 나머지 사이에서 신인민전선과 국민결집 사이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앞으로 직면할 선택지이기도 하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16817.html

장선생님은 최근에도 비슷한 얘기를 썼다.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에라도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다. 뉴욕 시장 선거든 칠레 총선이든 모두, 이제껏 주류 리버럴이 이끌어 오던 반극우 연합의 성격이 달라질 조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리버럴 대신 탈신자유주의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좌파가 반극우 정치의 새로운 구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21819.html

그런데 이런 얘기하면 자칭 좌파라는 사람들도 이게 특정한 구도를 말하는 거라는 점은 보지 않고 ‘그냥 또 정신승리 한다’는 수준으로 자조하고 마는 게 요즘 분위기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다. 사실은 다들 어쩔줄 몰라 하면서, 누가 누구한테 무슨 욕을 하나만 열심히 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지. NL욕 하나 안 하나 뭐 그런 거…

뭐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무슨 얘기 하고 사는지 모른다. 나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그래도 여기다가 징징거렸더니 오늘 안부를 전해온 분 혹은 분들이 있었는데 대단히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정치, 극우포퓰리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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