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입장에선 좀 달랐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민주적 사회주의를 처음 떠들고 다닐 때에는 솔직히 그게 무슨 얘긴지 잘 몰랐다.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 나아가자 라고 한 데서 보듯 그건 어떤 대안을 퉁쳐서 말하는 구호에 불과했다. 야채 싫어, 고기 싫어 하기에 그럼 뭐가 좋아 하니 맛있는거 라고 답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는 누군가의 비아냥은 사실 정확했다.

그때 민주적 사회주의 떠들고 다녀야 했던 이유는 오히려 요즘 같은 때에 더 절실히 다가오는 것 같다. 오로지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훈련된 정치-엘리트들에게 부여해야 한다? 나머지는 선거제도니 뭐니 룰의 문제로 퉁치자? 그게 정당정치이다? 조지나 뱅뱅이다.

어떤 분은 이런 생각은 대중에 대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예수쟁이한테 너는 예수에 대한 너무 큰 환상이 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하다고 보십니까?

자기만 아는 사람들은 분명 문제다. 그러니 그들을 대의로서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뭐가 됐든 정치의 끝에는 반드시 이게 있다. 싸우고 물어 뜯고 지랄 염병을 해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나만 중요한 삶’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중요한 삶’을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게 좌파의 정치이다.

이 좌파의 정치는 미래를 소수의 엘리트(그게 좌파든 우파든)들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주적’이고, 단지 다수의 의사를 따르자는 게 아니라 가고자 하는 방향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인 것이다.

양경규로 심상정에 맞선다기에 그런 웃긴 얘기는 오랜만에 들어본다고 했다. 이런 인상을 갖게 된 나름의 맥락과 역사 같은 게 있다. ‘그 분들’의 상당수를 아직도 못 믿는다. 더 이상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다.

6, 7년 쯤 전에 ‘그 분들’을 우연히 만난 일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젊고 또 무례했다. 공공에서 당 사업에 그래도 가장 이해가 높다던 이는 “아 이상한 모자” 해놓고 “그런데 누구시죠?”라고 했다. 어디 편집장 하시는 분은 자꾸 격해져서 언쟁을 하려고 들었다. 모 당 공동대표까지 하신 분은 마치 운동권 막내 같았다. 그래도 ‘양 위원장’이 그나마 “자 젊은 친구들 한 잔 합시다”라며 자리를 정리했다.

이 양반은 그때보다도 더 초라해졌는데, 여튼 또 뭘 한다고 나와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말하는 걸 보고 좀 짠한 생각도 들었다.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옛날 생각도 나고…

에고이스트이자 나르시스트라는 평을 누군가 한 김 선생님 글의 일부를 인용하며 마무리 한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해방의 새 세상을 가능케 하는 이념과 체제가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과 결과 모두가 ‘민주적’이어야 함을 규정한다.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는 어떤 거부감을 피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다.

그리스 출신의 정치학자 플란차스는 이제까지 사회주의 운동에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국가주의적인 자코뱅적 전통과 자주관리적인 직접 기층민주주의라는 관념의 대립으로 존재해왔다고 평가한다. 소비에트조차도 국가권력의 파괴와 대체를 내세우며 국가주의 문제를 회피하는 편리하고 모호한 관념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길, 또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단지 국가주의적 전통과 자주관리적 전통들을 단지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사멸이라는 전체적 전망, 결국 국가의 변혁 및 직접 기층민주주의의 전개라는 두 가지의 접합을 포함하는 전망 속에서 자신을 위치 짓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민주적 사회주의의 핵심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및 자유(이것은 이미 역사적 대중투쟁의 성과물이다)의 확대 심화와 직접 기층민주주의의 확장 및 자주관리적 거점의 분산과 확대를 접합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근저적으로 변혁하는 것에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21세기의 사회주의가 가능한 유일한 내용과 방식이다.

글 전체를 보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로.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알레르기를 넘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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