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의 윤석열 대 이재명 같은 것
목요일 밤에 존경하는 김수민 평론가님과 심야방송에 출연을 하는데, 돌아올 떄에는 항상 김수민 평론가님의 매니저님이 모는 고급차를 얻어 타곤 한다.
오늘은 선거 얘기를 하며 또 신세한탄을 하였는데, 어쩌다 보니 박정희와 윤보선이 붙었던 1963년 대선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 때의 구도도 지금 못지 않게 황당했다는 취지…
이 얘기는 최근 출간을 준비 중인 책에도 일부 적어 놓았는데, 그 대목을 잠시 옮기면 이런 얘기다.
5.16 군사 쿠데타의 발발은 경제부흥을 모색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 정권에 참여해 직접 역할을 맡았던 장준하 등의 시도를 무위로 되돌렸다. 그럼에도 <사상계> 그룹은 애초 5.16 자체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나 “4.19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 군사혁명의 적극적 의미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5.16과 군사정부가 4.19혁명 이후의 혼란을 다잡고 국민을 근대적 주체를 거듭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군사정부의 민정이양 약속 이행이 의심스럽고 <사상계>를 탄압했다는 점에서 곧 실망했고, 박정희가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직접 출마하면서 ‘사상논쟁’이 시작되자 유보적 태도로 돌아섰다.
이 당시의 박정희는 4.19 직후 혼란 극복을 주장하며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걸었다. 이 구도로 보면 서구에서 이식된 민주주의의 무비판적 수용은 ‘비민족적’인 것이다. 4.19 직후의 혼란은 이 결과였다. 반면 경쟁자였던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 의혹을 제기하면서 오히려 ‘민족적 민주주의’를 비민주주의, 즉 ‘공산주의’로 규정했다. 이런 논쟁 구도 속에선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4.19 직후 혼란을 극복 대상으로 보던 <사상계> 그룹은 누구를 지지할지에 대하여 의견 일치를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때까지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이게 지금 꼭 뭐 같지 않냐? 다시 보고 나니까 힘이 빠져서… 그냥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