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37136.html
20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꺠손이니 진보누리니 하는 웹사이트에서 이 생활을 시작했다. 안티조선 운동으로 유입된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홍 선생님을 모르고 살 수 없었다. 다들 톨레랑스니 뭐니 하면서, 홍 선생님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나도 글 몇 줄 읽고 멋모르고 존경했다. 그때 뜨거웠던 주제가 언론인의 정치적 의사 표명과 관련한 거였다. 홍 선생님이 한겨레 기획위원 자격으로 100분 토론에 나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에 대해, 한겨레가 직무정지로 대응한 거였다. 그때 다들 나서서 1인 시위를 하고 그걸 지지한다고 쓰기도 하고 그랬는데, 아래는 그 때의 일을 쓴 기사이다.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일 것이다.
http://www.peoplepower21.org/Magazine/714383
그 시절에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몇 번 뵈었던 거 같다. 빵에서 나온지 얼마 안 된 박용진이 그런 자리에 함께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 때만 해도 홍 선생님은 나에게 셀렙 같은 거였다. 좀 다른 관계가 된 건 통합진보당 창당 이후 남겨진 진보신당에 대표로 오셨을 때다. 나는 당직자였다. 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총선을 치러야 했다. 홍 선생님을 비례대표 후보로 내보내야 하는데, 극구 거부하셨다. 청소노동자이자 비례 1번이었던 김순자 선생님과 묶어서, 배제된 노동과 사상이 함께 국회에 진출하는 모양새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로 편지를 써 겨우 설득했다. 아침에 출근한 홍 선생님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좋은 후배를 뒀다’는 말에는 그러하다는 취지로 답하셨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홍 선생님을 당에서 만드는 팟캐스트에 출연시키고는 ‘실비’ 농담 같은 것을 하면서 무리하게 부려먹었지만, 결과는 정당득표 1.13%로 아쉽게 되었다.
당은 법에 따라 해산됐고, 최소한의 인건비 보전을 위해 당직자들 상당수가 그만두는 안까지 거론됐지만, 홍 선생님이 그러한 안을 거부했다. 더디더라도 함께 가야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세상의 모습을 지금부터 만들어 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홍 선생님은 선거 전부터 하방을 말했다. 그만두고 떠난다는 게 아닌, 좀 더 철학적인 얘기였다. 당사를 여의도에서 젊은이들이 많은 홍대입구로 옮겼다. 젊은이들로의 하방이랄까. 물론 우리는 의도한 바를 다 이루진 못했다. 대선 과정은 혼란스러웠다. 어머니의 병으로 직업을 조금 더 돈을 벌 수 있는 매체전문비평지 기자로 바꾸면서, 직업인으로서는 당을 떠났다. 그 시기에 홍 선생님을 조금 원망했던 것도 같다. 어찌되었건 어려운 시기에 대표를 하면서 여러 결정을 할 수밖에 없으셨던 거고, 아랫사람으로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면서도 서운함이 없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그리고 시간이 지나 냉소사회를 썼을 때, 출판사에서 추천사 같은 걸 써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홍 선생님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원망했던 것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으로 연락을 드렸다. 홍 선생님답게 원고를 다 보고 말씀을 주겠다고 했다.
당에 있을 때 홍 선생님 앞으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엄청나게 두꺼운 책이 배달된 일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것이었는데, 자비출판을 한 걸로 추정됐다. 가끔 그런 사람들 있다. 자기가 평생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했노라, 두꺼운 노트 10권 들고 와서 내가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대가인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노라 하는 사람들. 그런거 아닌가 싶었고 홍 선생님에게는 필요가 없는 책으로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드리면서 얘기했다. 이 책은 저를 주십시오. 어차피 버려질 것 같은데. 홍 선생님은 좀 망설이며 답했다. 나도 책을 주고 싶지만, 이 책은 어쨌든 나에게 온 것이니 함부로 남에게 줄 수가 없네. 홍 선생님은 실제로 그 책을 소중히 집에 가져갔다.
그런 홍 선생님이 원고를 읽지도 않고 추천사를 쓸리는 없는 것이다. 며칠 후 홍 선생님에게 답이 왔다. “좋은 글 썼네” … 실제로 그렇게 생각을 해서 말씀하신 건지, 아니면 인사치레였는지…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추천사는 이렇게 적어 주셨다. “저자가 냉소주의를 붙들고 파헤친 게 사회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실천 과정에서 열등감, 냉소주의, 소비주의에 대해 극복이 아니라 화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섬세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박근혜-새누리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볼 시점에 수많은 시민이 이 책과 만나기 바란다.” 실제 이 보잘 것 없는 원고를 읽지 않았다면 쓸 수 없는 말이었기에, 나로서는 큰 영광이었다. 원망이랄까 그런 마음도 깨끗하게 없어졌지만, 다음에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겠다 말만 하고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다음에 직접 찾아뵙겠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오다 가다 몇 차례 스쳐 지나간 게 전부다. 실제로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다. 부고를 접하고, 당에서의 관계가 끝난 이후에 홍 선생님이 왜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을까를 생각했다. 그건 어떤 고결함 때문이 아닌가. 홍 선생님이 여러 영역에서 한 결정이나 주장에 한 점의 오류도 없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건 고결한 분이라는 거다. 그런 고결함 앞에서 세상사든지 뭐든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부끄럽게 되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잊혀지지 않는 두 장의 사진이 있다. 둘 다 야간에 찍힌 사진이다. 하나는 홍 선생님이 누군가를 끌어 안고 우는 모습, 또 하나는 분향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뒷모습. 특히, 무릎 꿇은 뒷모습은 떠올릴 때마다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저기에 저렇게 있어야 하는데… 이제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었지만… 앞으로 몇 십 년을 더 살아도 그런 모습으로 남는 것은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고결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그런 노력을 하기 위해서, 홍 선생님의 뒷모습을 앞으로도 떠올릴 거 같다.